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7화 (57/956)

성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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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중천도 지나 서쪽으로 향해 갈 때, 원장실에는 피곤한 얼굴의 두 사람이 앉아 사담을 나눴다.

“과장님, 그 원생은 잘 갔습니까?”

“예. 그 쪽에서 조용히 입원시키기로 했답니다.”

“나 원 참.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보육원장은 물고 있던 담배 끝을 짓뭉개며 연기를 토해냈다.

본래 가기로 한 곳에서 아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 이원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원장은 행정과장과 함께 일을 무마하기 위해 조용히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병원을 섭외해서 진료 후 입원수속을 밟을 수 있게 했다. 상대 보육원에서도 조용히 처리되도록 입을 맞춘 덕택에 동인의 병원 입원은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다.

“저기, 그리고 그 아이 말입니다.”

“누구요?”

“최근 입양 이야기가 오갔던 친구요.”

“아, 어떻게 됐어요?”

사실 루치드의 입양 이야기가 오간 것은 여간 놀라운 게 아니었다. 영아도 아니고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를 입양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기 때문이다. 별로 시청률도 잘 나오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 방송을 보고 입양을 고민하고 문의까지 주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부모를 희망하는 지원자 가족이 왔던 날, 보육원 내부에 난리가 났다는 점이다. 동인이 응급실에 갔다는 사실이 내부의 자원봉사자를 비롯, 누구의 입을 통해서든 외부로 유출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급하게 외부 사람들을 밖으로 보내게 되었고, 그 와중에 입양지원자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이 루치드를 만나긴 했다.

상담실에 기다리기를 한참―거의 한 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오죽하면 마주 앉아서 말동무를 해주던 보육교사가 녹초가 돼서 상담실을 나왔을까―이 되었을 때, 루치드가 생활지도원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어디 갔었냐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억지 미소를 짓던 보육교사의 얼굴을 봤다면 원장도 그녀를 그토록 다그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양부모를 희망했던 중년 여인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생각보다 아이의 생김새가 마음에 꼭 들었다.

“tv로 볼 때보다 실물이 더 낫구나?”

옆에 앉은 남성의 얼굴에서도 기다림에 지쳐있던 피곤이 사라지는 모양새라 보육교사는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며 루치드에게 자리를 내줬다.

두 중년남녀는 루치드에게 자기 소개를 간략히 건넨 후,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공부를 좋아하는지, 운동을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싫어하는 음식이 뭔지, 음악을 좋아하는지, 만화를 좋아하는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청소를 잘하는지, 예의는 바른지, 말을 잘 안하는지, 원래 무뚝뚝한 건지. 기분이 나쁜지, 왜 기분이 나쁜지, 자신들이 무서운지.

보다 못한 보육교사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오늘 애가 좀 피곤한 거 같네요. 평소에는 안 이런데.”

낯빛도 어둡고, 대답도 안하고, 눈도 안 마주치는데 어떤 사람이 호감을 가질까. 기대감이 떨어져선지 남자는 몸을 등받이에 길게 기대고 아이를 관찰하는 태도로 변했으며, 중년 여성의 입 꼬리도 점점 내려가더니 종국에는 함께 입을 다물었다.

말없이 대치하는 형세가 만들어지자, 초조해진 보육교사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정상회담(?)을 종결시켰다.

“일단, 오늘은 좀··· 보육원 안에 워낙 많은 사람이 들어온 탓인지 좀 어수선하네요. 아이도 조금 스트레스를 받았나 봐요. 평소에는 전혀 이런 애가 아닌데 말이죠. 저기, 일단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고 다음에 다시 방문해 주시는 게··· 어떨까요?”

“그러죠.”

두 사람은 그렇게 돌아갔다. 보육교사가 등 뒤에 선 루치드를 노려봤다. 루치드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산에서 돌아온 지 10분도 되지 않았는데, 씻자마자 지도원 손에 이끌려 이곳에 왔더니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럽기만 한 머릿속이 완전히 뒤죽박죽 꿀꿀이죽이 된 기분이었다.

이 일로 해당 보육교사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원장에게 온갖 험한 말로 꾸중(?)을 들었다. 보육교사는 루치드에게 이를 갈았다. 하지만 별 수 있나. 이제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인데.

“입양 의사를 포기했습니다.”

행정과장의 보고에 원장은 넓은 이마를 한 차례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 건은 일단 알겠습니다. 지나간 것은 어쩔 수 없죠. 그 날은 우리로서도 손 쓸 도리가 없었으니까요.”

불미스러운 사태가 발생하지만 않았다면, 일찍 사람을 동원해서 준비를 시켰을 것이다. 차라리 그 두 사람을 일찍 내보낸 게 더 잘된 일일 수도 있다고 자위하며 그 일은 덮기로 했다.

“이번에 졸업하는 아이들은 몇 명입니까?”

“5명입니다.”

행정과장이 졸업 명부에 찍힌 이름을 불러주려고 하자, 원장이 손짓을 했다. 어차피 들어봐야 제대로 얼굴을 떠올릴 수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관심이라면 5명 분의 디딤돌 통장이 발급되어 나간다는 사실이었다.

“디딤돌 통장은 다 정리됐습니까?”

“예, 며칠 전에 정리가 끝났습니다.”

“다행이군요. ···사실 우리끼리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이번 년도 투자 성적이 좋았다면서요?”

디딤돌 통장에 들어가야 할 돈들을 빼돌려 해외투자에 돌렸다. 그리고 그 투자수익을 재단 비자금으로 유용하고 있었다.

사실 디딤돌 통장은 보육원 아이들이 보육원을 졸업한 뒤, 사회에 나갈 때 진출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주는 일종의 지원금으로서 그간 사회복지가들의 모금과, 국가의 지원금 등이 합쳐진 돈이다. 그런데 비록 푼돈이라도 아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돈의 규모도 커지게 마련이다. 재단은 바로 그 돈들을 해외나 혹은 수익성 좋은 투자처에 투자하여 수익을 거두고 그 수익을 재단 비자금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회계 상 보고되지 않는 투자이며 수익이기에 장부에 남을 리 없고, 또 이후의 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이중장부는 필수였다. 틈틈이 정리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연말에는 꼼꼼하게 따져 구멍이 생기지 않도록 보육원 행정실과 재단 회계 팀이 협력하여 장부를 조작했다.

올해는 남미 쪽에 투자했다고 하는데,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전략이 잘 맞아 떨어졌는지 꽤 큰 수익을 거뒀다는 후문이었다. 당연히 보육원장과 행정과장에게도 보너스가 지급될 예정이었다.

“예, 그래서 윗분들도 꽤 만족하셨다더군요.”

“그럼, 더 많은 애들이 들어올 수 있게 힘을 써야지, 이게 뭡니까? 5명이나 빠져나가는데 들어오는 애들은 없고.”

“지금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아마 3명 정도는 더 들어올 것 같습니다. 모두 7세 미만인 것 같습니다.”

그건 다행이네, 라고 중얼거리며 원장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행정과장 역시 커피를 들었다. 사무국장이 빠졌지만, 기름칠 할 선원이 빠졌다고 배가 나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오월동주의 조각배는 여전히 구정물을 헤치며 나아갔다.

두 사람은 내년에도 무사히 구정물을 거스르고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향긋한 커피를 한 모금씩 마셨다.

****

한 사람을 정신병원으로 보낼 만큼 추웠던 그 해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왔다. 2학년 1반에 배정된 루치드와 2반에 배정된 명수는 여전히 절친으로 지냈다. 뿐만 아니라 1학년 때는 서먹했던 아이들이 2학년이 되어서는 루치드와 가까워지려고 했다. 루치드가 예전처럼 벽을 세우지 않은 탓이 있을 테고, 방송까지 나온 아이의 영특함을 눈여겨본 부모들의 등쌀도 있을 테다. 전국 시청률은 엉망이었지만 인평 초등학교 학부모들의 시청률은 90%는 되지 않았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2학년 담임을 맡은 교사는 바짝 긴장한 채 수업을 시작했다. 학교 명물, 수학 천재, 뜬금포 질문의 선두주자. 수업파괴자, 학생선동자, 개구리 뒷다리보다 질긴 시선에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마냥 오들오들 떨어대는 교무실 선생님들은 선의의 피해자. 그녀는 그 피해자 중의 하나였다.

“자 수업 시작할게요. 여러분 앉으세요.”

교사는 자신의 떨림을 아이들이 눈치 챌까 두려웠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루치드는 수업 때 질문을 하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엉뚱한 질문으로 방해를 하는 일도 없었다. 학생들은 더 이상 당황해서 얼굴 붉히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여전히 소년의 시선은 날카롭지만, 끈질기게 달라붙는 일은 적어졌다. 무엇보다 쉬는 시간 수학이나 물리학 문제를 들고 찾아오는 일이 사라졌다.

대신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들이 많이 목격이 되었다. 1학년 담임의 전언에 따르면, 사교성이 많이 떨어지는 성격이라고 했는데, 지켜보니 그렇게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아니, 좋아 보였다.

가끔 루치드가 아이들과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갈 때도 있었다. 물론 실상을 알았다면 다른 반응이 나왔겠지만.

“석고야, 너 무슨 만화 좋아해?”

“나 만화 안 좋아해.”

“그럼?”

“책 좋아해.”

“어떤 책?”

“요즘 읽고 있는 책은 <데미안>이란 제목의 책인데 진정한 자아의 삶에 대해 성찰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책이야.”

“···그림책이야?”

“아니, 소설이야.”

“···너 이상해.”

“응, 나도 알아. 그래도 우리 친하게 지내자. 알겠지?”

이 시점에서 루치드가 미소를 지으면, 여자애들은 따라 웃었다. 남자애라면 썩소를 짓겠지만. 하지만 남자애들도 루치드를 싫어하지 않았다. 운동 잘하는 애는 따돌림 당하는 일이 드물었다. 특히 루치드와 편을 먹으면 지는 일이 거의 없어 서로 편먹으려고 다툴 정도였다.

루치드는 현명하게도, 팀을 번갈아가며 함께 하였고, 스포츠정신을 드높이는데 일조했다. 상대를 존중하고 같은 팀과 협력하며 정정당당한 플레이로 승리를 추구 하는 것. 루치드가 생각하는 스포츠 정신은 그의 생활신조와 닮은 부분이 많았다. 단 하나, 승리를 추구한다는 목적의식과 비교해서 루치드는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목표, 그의 꿈을.

그런데 루치드가 1학년 때의 생활과는 다르게 밝아지고 사교성도 좋아졌다는 평을 받는 반면, 본인 스스로는 괴로운 2학년 1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2학년이 된 뒤, ‘나2’라는 교과서의 내용을 공부할 때 처음 나오는 내용이 ‘몸 소중히 다루기’, ‘몸 살펴보기’ 와 같은 내용이었다. 당연히 성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되었고, 선생님은 열과 성을 다해 아이들이 그릇된 사고나 가치관을 갖지 않도록 교육했다. 하지만 루치드에게는 일련의 아픈 기억들―종국에는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기억을 상기시키는 주제였기에 수업을 듣기가 괴로웠다. 학기 중간에는 가족이나 친척을 소개하는 수업이 있었고 학기 말에는 우리 마을 둘러보기나 자랑하기 같은 수업이 진행되었다. 어느 것 하나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주제들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더 밝게 생활하려고 노력했던 면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담임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편안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셈이었다.

루치드의 머릿속에서야 온갖 감정의 회오리와 슬픈 기억의 폭풍이 휘몰아쳤지만, 겉으로는 평탄한 2학년을 보내고 있었다.

****

“석고야 덥다.”

명수가 침대 위로 올라가 벽에 붙은 선풍기 앞에 서서 손을 벌리고 서 있었다. 언젠가 한 번 이 모습을 본 적이 있음을 떠올리고 미소 짓던 루치드는 슬쩍 마법을 사용했다.

“으~ 시, 원, 하다!”

티나게 사용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적당한 정도라면 얼마든지 명수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마법이 익숙해진 루치드였다. 당연히 선풍기 덕분에 시원해졌다고 생각하는 명수는 제자리에서 빙빙 돌며 선풍기 바람을 쐤다.

여름방학이 시작한지 이제 한 달이 지났는데,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었다. 루치드의 도움 덕택에 열대야 없이 꿀잠 자는 명수를 제외하고 대부분 아이들이 밤잠을 설치던 여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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