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5화 (55/956)

Lucid Dream(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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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를 마친 보육교사는 지시를 받은 후에야 119에 전화를 걸어 요청을 했다. 차가 오길 기다리는 사이 보육교사까지 합세하여 동인의 팔다리를 주물렀다.

“언제부터 이랬니?”

“저희가 발견했을 때부터요.”

윤정이 대답을 했다.

“다른 사람은 없었고?”

윤정이 흘끔 기웅의 눈치를 봤다.

“예, 저희 밖에 없었습니다.”

보육교사가 보니, 기웅과 윤정의 옷이 많이 지저분해보였다. 땀도 많이 흘리고 바지는 흙먼지에 더러웠다. 하지만 다른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당장 자신만 해도 불과 1,2분이 흐른 것 같은데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으니 자연 옷이 더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더 힘내자꾸나. 금방 응급차가 올 거야.”

대답은 없었지만, 교사가 보기에 기웅이나 윤정은 대답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은 듯 보여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실제로도 두 사람은 지난 1시간여가 거의 하루같이 느껴져 당장이라도 드러눕고 싶을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

그 시간, 루치드와 명수는 방으로 돌아왔다.

“괜찮을까?”

명수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루치드에게 물었다.

“응. 괜찮을 거야.”

기운 빠진 루치드의 목소리에 명수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기웅은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두 사람을 붙잡고 말했다. 기웅의 안색이 검다 싶을 정도로 근심서린 얼굴이었다.

“너희들이 있으면 일이 복잡해질 수 있으니까, 우선 방으로 돌아가. 나머지 일은 형이 처리할 테니까, 방으로 가서 씻도록 해. 넌 얼굴에 얼음찜질이라도 하고. 혹시 많이 다친 건 아니지?”

루치드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아무리 맞았다고 해봐야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누워있는 동인보다야 처지가 나은 편이니까. 사실 루치드는 많이 지친 상태였다.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동인을 업고 내려오는 기웅이 넘어지지 않도록 계속 마법을 사용했다. 기웅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아직 그 정도의 마법 구현 실력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동인에게도 체온이 올라가게끔 아까와 정 반대의 마법을 사용하며 산을 내려왔다.

“명수야, 씻으러 가자.”

머릿속이 복잡했다. 우선은 씻고 생각해 볼 일이다. 이왕이면 이 불쾌한 감정의 찌꺼기들도 함께 씻겨 내려갔으면 좋겠다.

한 편, 함께 자리를 피한 지원은 함께 자원봉사를 온 언니를 찾아갔다.

“어디 갔다 온 거야?”

“응, 아··· 저 식당.”

“아, 설거지하러 갔다 온 거야? 그럼 간 김에 점심까지 챙겨 먹지 그랬어?”

언니는 지원이 우물쭈물하면서 대답하는 모양새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벌겋게 부어오른 손을 보니 고생을 했다 싶어 더 묻지 않았다. 고무장갑이라도 끼지 그랬냐, 며 핀잔을 주자 지원은 떫은 웃음만 지어 보였다. 마침 자봉 책임자분께서 오셔서 두 사람에게 점심 먹으러 가자며 손짓을 하니 더 이상의 대화는 진행되지 않았고, 그렇게 곤란했던 상황이 모면됐다.

식당으로 향하는 도중에 혹시 얼굴을 보게 될까 두근거렸는데, 이미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웅이 지원을 보내기 전에 한 말이 떠올랐다.

“이 일은 비밀로 해야 되요. 그래야 이 아이들이 처벌받지 않을 테니까요. 그 쪽도 일단 허락 없이 산에 올라간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니 누구한테라도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알겠죠?”

지원은 기웅의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산 정상에서는 워낙 급박한 상황이었던지라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그가 한 재빠른 조치와 믿음직한 행동들이 떠오르며 자꾸 그의 얼굴을 되새기고 있었다. 울림 좋은 목소리와 신뢰감을 주는 눈빛, 오똑한 콧날과 다부진 입매가 자꾸 다가와 그녀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얘, 뭐하니? 정신 차려?”

“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숟가락만 들고 배식대에 들어서고 있었다. 언니가 그녀의 등을 치지 않았다면 식판 대신 숟가락을 들이 밀 기세였다. 부랴부랴 식판을 가져와 민망한 표정을 감쳤다.

아무래도 자원봉사자들은 보육원 아이들이 거의 다 먹은 뒤에야 들어올 수 있었던 모양인지, 보육원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단 두 사람만 빼고.

“누나!”

마침 눈이 마주치자, 명수가 아는 척을 했다. 그러나 루치드는 흘깃 쳐다본 뒤로는 흥미가 없다는 듯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식사를 계속했다. 지원은 한 손을 들어 명수에게 인사를 하고는 언니와 가까운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쟤가 널 어떻게 알아?”

“아, 아까 같이 좀 있었어요. ···잠깐동안요.”

“너 일 안하고 쟤랑 놀다 온 거지? 그래서 아까 무슨 죄지은 사람처럼 얼굴 붉히고 있었던 거지?”

마치 자신의 추리가 들어맞았다는 듯 의기양양한 언니의 모습에 1시간 전 홈즈에 빙의됐었던 소녀탐정 양지원은 쓰게 웃으며 아니라고만 말했다.

“잠깐 놀았다고 어떻게 친해져? 분명히 계속 놀았던 거야.”

대꾸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밥을 먹었다. 저 아이들을 보니 동인의 걱정도 들었다.

‘그 아이는 괜찮을까?’

지원의 걱정을 사고 있던 동인은 병원 응급실에 누워 있었다. 두꺼운 담요 2장을 덮어쓴 동인은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온도를 재던 의사가 걱정 어린 얼굴로 서 있던 보육교사에게 말을 건넸다.

“체온은 돌아온 것 같습니다만, 꽤 저체온 상태에서 시간이 조금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급한 처치는 다 됐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금방 깨어날 수 있는 거죠?”

“글쎄요, 지금 맞고 있는 링겔이 다 떨어지기 전에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만. 다만 조금 이상한 점은 있네요.”

“예? 뭔데요? 큰 문제라도 있나요?”

“아, 지금으로서는 원인을 알 수 없으니 뭐라고 답은 못 드리겠습니다만, 이 아이 몸을 살펴보니 왼손과 양 발 끝에 약한 동상의 증상이 보이더군요.”

“동상이요?”

“지금 바깥 날씨를 고려하면 동상에 걸린다는 게 조금 이해가 안 가는데, 혹시 짐작가시는 부분이 있나요? 이 학생이 혹시 스키장이나 뭐 그런 비슷한 곳에 간 건 아닌가요?”

12월이지만 이 근처에 눈이 내린 곳은 없었다. 하물며 보육원에 거주하는 아이가 혼자 스키장을 갔을 리도 만무한 일. 보육교사는 뒤에 서있던 기웅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기웅은 유구무언이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글쎄요. 근데 그거 심한 건 아니죠?”

“예, 말씀드렸다시피 약한 동상 정도입니다. 자연치유가 가능하리라 봅니다.”

“예.”

“땀을 많이 흘린 상태에서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으면 동상에 걸릴 수도 있으니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아닙니다만, 저체온증이나 동상이 이렇게 걸리는 경우가 이 주변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니까요.”

물론 의사가 말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더 있긴 했다. 아이의 몸에서 구타나 그와 비슷한 학대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그 가능성을 배제한 것이지만. 대신 조금 둘러서 말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심한 운동이나 뜀박질을 한 뒤에 오래도록 야외의 공기에 노출된 상태라면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 아이들이 야외에서 오래 ‘놀지’ 못하도록 방비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의사의 배려는 보육교사에게 잘 통했다. 보육교사는 의사가 의심한 부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 부분을 에둘러 표현했음을 알아 들었다. 화를 내지는 않았다.

“저희 원의 아이들이 워낙 축구를 좋아해서 지금도 운동장에서 놀고는 있습니다만, 저희가 ‘적당히’ 시간을 정해서 통제하고 있어요. 게다가 워낙 청결을 중시하는지라 다들 잘 씻고 다니기도 하고요. 그렇지?”

기웅 역시 그 부분에 있어서는 수긍하는지라, 간단히 대답했다.

“예. 그런데요, 동인이가 땀을 많이 흘렸나요?”

뜻밖의 질문이 들어왔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서 그냥 따라온 건줄 알았는데. 그래도 일단 보호자 측의 질문에는 친절히 대답하는 게 의사의 의무다.

“어? 어.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지. 저 아이 옷가지를 수거한 간호사 얘기로는 흙은 많이 묻어있는데, 땀이 차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하니까. 게다가 발만 걸렸다면 의심해볼만 한데, 손에 동상이 걸리는 건 조금 이해가 잘 가지 않기도 하고 말이야.”

자세히 말하자면, 동상이 걸릴 정도의 원인이 될 만큼 땀이 차지는 않았다고 해야 옳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왼손 세 손가락의 피부에 약한 손상이 관찰된다는 것은 땀과는 다른 병원(病原)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었으니까.

동상은 피부가 영하 2~10℃ 정도의 심한 추위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원인이다. 혈액순환이 되지 않은 부위의 피부 조직이 손상되는 증상을 보이는데 동인의 경우에는 그 조건에 맞지 않았다.

“선생님, 그런데 사람 몸이 추위에 노출되면 얼음처럼 차가워 질 수도 있나요?”

의사는 이상한 질문을 많이 하는 친구구나, 라고 생각하며 답을 해줬다.

“사람 몸이 얼음장처럼 차갑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의 체온이 있기 때문에 얼음처럼 차가워지지는 않지.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몸이 차갑게 식는 경우는 없어. 하지만 우리 몸은 우리 몸보다 차가운 물건을 만질 때 얼음처럼 차갑다고 착각을 할 때도 있어. 때문에 만약 이 아이를 말하는 거라면, 니가 얼음처럼 차가웠다고 착각할 여지는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말이지.”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옆에서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보육교사 때문에라도 더 이상 물음을 던질 수 없었다.

“우선 이 아이는 오늘 하루정도는 병원에서 관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의식을 잃을 정도였으니 아무리 지금 체온이 올라갔다고 해도 하루 정도는 입원 처리를 하시고 그 다음에 다음 치료 방향을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보육교사는 의사의 처치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조금 전에는 기웅이 동인을 업고―보육교사는 기웅이 동인을 업고 산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기웅에게 요청을 했던 것이고, 기웅은 비밀로 해야 할 문제였기에 군소리 없이 동인을 업었다―보육원 정문으로 조용히 빠져나와 밖에서 응급차에 실어 이 곳까지 왔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오후 1시. 아직 보육원에는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있을 테고, 이 상태로 동인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차라리 이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위에서도 그걸 원할 것이다.

“기웅아, 너는 혼자 돌아갈 수 있겠지? 여긴 선생님이 지켜야 할 것 같은데.”

“예. 혼자 갈 수 있어요. 걱정 마세요.”

교사는 지갑을 열어 택시비를 쥐어주었다.

“괜히 보육원에서 이상한 소리 안 나오게 해줘. 물론 기웅이 너는 워낙 듬직해서 선생님이 믿을 만 하니까 이런 소리도 하는 거 알지?”

“예, 알겠습니다. 선생님.”

기웅은 보육교사에게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왔다. 택시를 기다리던 기웅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분명 착각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차가운 물에 손을 집어넣은 것 같은 거였어. 그 정도라면 분명 최대로 잡아도 영상 2~3도 정도일거야. 그런 차가움에 노출된 거라면 손에 동상이 걸리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지. 하지만 문제는 사람이 그렇게 차가워질 수 없다는 것이고. 사람의 피부가 그 정도로 차가워진다면, 실제로 내부는 더 차가웠을 수도 있다는 건데, 그러면 사람이 살 수 있나? 피부조직이 모두 얼어붙었을 텐데?’

생각을 거듭할수록 뭔가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문득 그런 말이 떠올랐다. 현상은 있는데 실체는 없다. 기웅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무슨 범인잡기 놀이도 아니고, 형사놀이 할 땐가.’

지원이 들었다면, 쑥스러워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을 테지만 기웅이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일단 돌아가서 생각하자.’

“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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