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id Dream(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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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힘들어 죽겠네.”
“누나 좀 만 더 힘내요.”
기웅은 힘들어하는 윤정을 이끌며 산 정상을 향했다. 평소 운동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닌 윤정은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그나마 겨울바람이 더운 열기를 금방 식혀주었던 덕에 땀을 많이 흘리진 않았다. 하지만 허벅지 근육이 마치 갓 튀긴 오징어 다리마냥 탱탱하게 당겨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석고야!”
정상에 다다를 때쯤 들린 명수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걸음을 멈췄다.
“찾았나보다.”
“예, 빨리 가봐야겠어요.”
윤정도 빠르게 올라가려고 다리를 들어 올렸지만, 쉽지 않았다.
“안되겠다. 너 먼저 올라가라. 난 천천히 올라가야 되겠어.”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늑장부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웅이라도 먼저 보내서 대처를 해야 된다는 생각에 윤정이 말을 꺼냈다. 기웅 역시 그 판단에 동의하며 서둘러 정상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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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야! 왜 그래?”
지원이 쓰러지는 동인을 부축하려 뛰어들었다. 동인에게 손을 내미는데, 흠칫, 놀란 지원은 손을 재빨리 거뒀다.
“아니, 왜 이렇게 차가워?”
동인의 몸이 마치 얼음 같았다. 비유적으로 차가운 몸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얼음 같이 차가워서 손을 댔다간들러붙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명수도 달려와서 손을 대보지만 같은 반응을 보였다. 손이 얼어붙을 것 같아서 손대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지원이 살펴보니, 입술은 완전히 보라색으로 변했고, 얼굴은 마치 시체를 본다면 이러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창백했다. 두꺼운 겨울용 점퍼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몸이 차가워 질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지원이 문득 생각나 돌아보니, 루치드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우두커니 선 채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무심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자신이 올라오기 전에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 길이 없으니 뭐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아이의 뺨이 벌겋게 부어오른 모습을 보면 싸우거나 맞은 모습처럼 보이기는 했다.
“넌 괜찮아?”
혹시 산 위에서 겨울바람을 오래 쐤던 바람에 이런 일이 생긴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물었지만, 루치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살짝 저을 뿐이었다. 지원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일단 지금 급한 것은 쓰러진 아이였다.
‘어떻게 하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터라, 지원은 대책 없이 손만 쥐었다 폈다 반복할 뿐이었다.
“무슨 일이야?”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산 정상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했다.
기웅은 빠르게 주변 상황을 살폈다. 머리와 옷가지가 조금 흐트러진 모습의 루치드는 얼굴을 가격 당했는지 뺨이 부어오른 모습이었다. 명수와 지원이라는 낯선 얼굴의 자원봉사자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 사이에 동인이 쓰러져 있었다.
“동인아!”
빠르게 다가가 살피니, 심각한 상황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기웅은 동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마찬가지로 황급히 손을 뺐다.
“이상해요. 애가 너무 차가워서 손을 대기가 힘들어요.”
지원이 이야기하는 바는 방금 기웅이 느낀 것과 같았다. 하지만 지원과 달리, 기웅은 적어도 이 아이가 보이는 증상이 무엇인지는 알아챘다.
“저체온증이에요. 얼른 몸을 덥히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요.”
왜 몸이 이렇게 차가운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산을 오르느라 흘린 땀이 갑자기 식으면서 몸의 체온을 뺏는 바람에 저체온증이 왔다고 할 수 있겠지만, 손도 대기 어려울 정도로 차갑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기웅은 우선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서 동인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서 동인의 몸을 둘렀다. 지원이 그걸 보더니, 자기도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주었다. 산 정상의 추위는 여전했고 지원 역시 산을 오르며 땀을 흘렸을 테니 저 상태라면 몸에 무리가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웅은 굳이 지원의 옷을 거절하지 않았다. 우선은 위급한 상태인 동인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명수도 옷을 벗으려 했다.
“넌 안 돼. 형이나 누나는 괜찮지만, 넌 위험해. 그러니까 입고 있어.”
“괜찮아, 형. 나 괜찮은데.”
명수의 마음이 대견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활짝 웃어주지는 못하는 기웅이었다. 단지 쓴 웃음을 지으며 명수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이 정도만 되도 동인이는 괜찮을 거야. 너까지 안 그래도 돼.”
사실은 괜찮지 않았고,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굳이 명수에게 걱정을 끼칠 필요는 없었다. 기웅은 다시 시선을 돌려 동인을 바라봤다. 몸의 잔떨림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기웅은 이를 악물었다. 우선 응급조치라도 취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동인의 몸을 패딩으로 감싸고 그 위를 주물렀다. 지원도 따라하려 했는데 여간 손이 시린 것이 아니었다. 기웅을 보니, 그 역시도 손이 금세 새빨갛게 변한 것이 자신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기웅은 멈추지 않았다. 억지로 추위를 참으면서 동인을 살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지원 역시 각오를 다지는데, 다시 누군가가 등장했다.
“어? 무슨 일이야?”
윤정이 헐떡대는 숨을 미처 고르지도 못하고 기웅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기웅에게 가려 있던 동인을 발견했다.
“아니? 이게 뭐야? 무슨 일이야? 얘 왜 이래?”
“저체온증이예요.”
기웅은 설명할 힘도 없었고 여유도 없었다. 기웅을 대신해 지원이 자신이 온 다음부터 목격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윤정 역시 일단 옷을 벗어서 동인의 다리를 감쌌다. 그리고 있는 힘껏 주무르기 시작했다. 허둥대던 지원도 윤정을 따라 동인의 팔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세 남녀가 동인에게 붙어 응급조치를 취하자 낄 데가 없어진 명수는 그저 뒤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루치드는 그때까지도 말없이 그 장면을 관찰했다. 뭔가 또 이상한 마음이 불쑥 솟아올랐다.
‘분명 저 녀석은 죽어 마땅한 놈이다. 그런데 왜들 저 아일 살리려고 하지?’
어쩌면 저 아이가 부린 행패와 악의 가득한 눈빛을 보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좀 더 진전시키니, 다른 의문이 생겼다. 과연 저 아이의 악행을 보았다면, 저 세 사람은 지금 보이는 모습처럼 살리려는 생각을 안 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답이 나왔다. 기웅의 생각이야 이미 들어서 알고 있지만, 윤정이나 저 자원봉사자도 죽는 사람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 같았다. 더 나아가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저 사람들은 우선 살리고자 노력 할 것 같았다. 그것을 당연하다고 믿을 테니까. 그런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니까.
자신이 죽이려고 한 사람을 저 세 사람, 아니 명수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구하려고 하는 모습은 루치드의 단단한 사고에 금이 가게 만들었다.
“저대로 두면 안돼요? 나쁜 사람이에요.”
라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자신이 그 말을 던지는 모습을 상상하던 순간, 뭔가 기시감이 느껴졌다.
“얘한테서 정액 냄새가 자주 나거든요.”
동인이 법원에서 소미에게 던진 말은 당시 소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까?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후 성교육을 받고 또 개인적인 호기심에 책을 찾아 읽으면서 대충 의미를 파악할 수는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의미만 파악했을 뿐인 그 말이 지금은 감정으로 다가왔다. 불쾌감.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고 모욕적인 발언으로 자존심을 뭉갰다. 동인은.
그런데, 자신이 물어보려고 상상했던 말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동인의 그것과 유사했다. 다른 점이라면, 동인은 ‘수치심’을 자극하여 인격적인 살인을 시도한 셈이고, 자신은 한 사람을 ‘죽이자고’, ‘죽도록 내버려두자고’ 말함으로서 실질적인 살인을 제안하게 되는 것이다. 루치드는 조금 전까지 죽을만한 사람은 죽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틀렸다고 눈앞의 세 사람이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저들은 사람을 죽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동인이 형, 어떡해?”
명수가 세 사람의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루치드는 다른 사람들을 신뢰하는 일이 드물었다. 자신의 부모의 정체마저 의심―자신의 이름을 누가 지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다만, 굳이 예외를 둔다면 그것은 바로 명수일 것이다. 한결같은 순수함과 웃음으로 루치드가 굳게 세운 벽을 쉽게 허물어뜨리는 친구. 그 친구가 지금 눈앞에서 걱정과 슬픔이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루치드는 자신의 유일한 ‘친구’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기 싫었다.
루치드는 몸을 돌렸다. 혼란스러운 가치관의 충돌 때문이기도 했고, 친구의 슬픔을 직시하고 있기 힘들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우거진 잡목 우듬지 위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아까 보았던 하늘과 똑같은 하늘이었다. 여전히 구름 한 점 없고, 여전히 푸른데, 어쩐지 마음이 콕콕 쑤시는 기분이었다. 루치드는 자신의 감정을 거슬러 올라가보았다. 이건 어떤 감정일까?
미안하고, 안타깝고, 벌 받는 느낌. 엄마한테 혼이 나서 집 밖에 나가 벽을 보고 서 있을 때 느끼는 감정.
루치드는 자신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을 뻔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은, 단지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손쉽게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 자신을 죽이겠다는 협박이 과연 상대를 죽일 정도의 이유가 되는 것인가, 는 계속 고민을 해봐야겠지만, 자신이 총이나 칼 따위의 무기 앞에 무기력하게 놓여있었던 것도 아니고, 당장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마법’으로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을 죽이려고 했었다.
루치드는 자신의 머리 어딘가가 고장이 난 것이 아닐까, 라는 번민에 빠졌다.
물론 아직까지는 어느 쪽이 옳은지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옳다고만 생각했던 것이 사실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게 되었다. 저쪽 세상의 진리는 이곳에서도 진리, 라는 보편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한 구석에서 싹을 틔었다.
루치드는 마법을 해제했다.
“어, 이제 안 차가운 데요?”
지원이 놀라 소리쳤다. 저만 그런가싶어, 돌아보니 윤정이나 기웅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계속 주물렀더니 몸의 체온이 돌아오는 건가봐.”
윤정의 의견도 그럴듯했지만, 기웅으로서는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동인을 주무르는 건지 얼음덩어리를 주무르는 건지 알 수 없었던 상황에서 돌연 냉랭한 기운이 사라지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문제는 뒤로 제쳐두고라도, 우선은 동인을 살릴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빨갛게 부어오른 손에 더욱 힘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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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교사가 현관 앞에서 자원 봉사자들과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뒤에서 등을 톡톡 두드렸다. 돌아보니 윤정이었다.
“어, 왜?”
“선생님, 잠시만요.”
보육교사는 양해를 구하고 윤정을 따라나섰다. 식당 근처로 가는가 싶더니 건물 옆 후미진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기웅이 동인을 눕혀놓고 지원과 함께 마사지를 하고 있었다. 산에 있을 때보다는 얼굴이나 입술의 빛깔이 돌아온 편이지만, 보육교사의 눈에는 시체나 다름없어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
“저체온증입니다. 선생님.”
환장할 노릇이다. 보육교사는 얼른 핸드폰을 꺼냈다. 기웅의 말이라면 어느 정도 믿을 만 한데다, 저체온증이라면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전화를 걸면 서도 동인의 안색을 살폈다. 정신을 잃은 지 한참이 됐다는 기웅의 설명에 눈앞이 깜깜했다.
“어, 선생님? 저 계은선 인데요. 지금 식당 옆에 저체온증 아이가 있어요. 정신을 잃은 지 시간이 좀 된 거 같아서 빨리 구급차를 불러야 할 것 같은데요.”
기웅은 마사지를 하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바로 119를 부를 줄 알았더니, 누군가에게 상황을 보고하는 보육교사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꼈다. 동인을 업고 산을 급하게 내려오느라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 계속 주무르는 것도 힘에 부쳤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옅은 보랏빛 입술이 마치 동인의 생명선처럼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