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3화 (53/956)

Lucid Dream(4)

-------------- 53/952 --------------

루치드는 한 뼘도 안 될 거리에 있는 동인에게서 지독한 악취가 난다고 생각했다. 더러웠다. 그의 행동, 말, 사고방식 모두가 추잡하고 추악했다. 마치 스크로파처럼.

지독한 악의를 가지고 달려들던 그 몬스터를 떠올리게 만든 동인. 피에 물든 송곳니를 드러낸 채 넘칠 듯 광기를 눈에 담아 노려보던 그 놈을 닮았다. 일전에 기웅이 일깨워 준 ‘대화의 해결책’이 생각났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웅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몬스터와 대화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람과 대화를 할 순 있지만, 또 어떤 사람은 짐승과도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몬스터와는 대화를 할 수 없다. 오로지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만 있을 뿐이다.

죽이지 못하면 죽는다.

그것은 그곳 세상에서 진리였고, 이곳에서도 진리다.

나는 죽을 수 없다.

고로 난, 죽이겠다.

동인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루치드의 눈에서 기광(氣狂)이 언뜻 흘렀다.

****

“야, 박기웅!”

기웅이 행정실을 나와 방으로 돌아가려는 찰나였다. 뒤를 돌아보니 한 살 위 누나인 윤정이었다.

“어, 누나. 왜요?”

머리가 헝클어진 것을 모르는지, 아니면 신경을 쓸 틈도 없었는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을 급하게 뛰어내려온 윤정은 숨을 헐떡이며 기웅에게 다가왔다.

기웅은 뭔가 말을 하려고 애쓰는 윤정을 우선 말렸다.

“누나 잠시 숨 좀 고르고 이야기해요.”

괜찮다며 손을 내젓는 데, 말은 못한다. 그러기를 잠시, 윤정이 허리를 펴고 기웅을 바라봤다.

“기웅아, 너··· 아니다. 잠깐 나 따라와라.”

윤정은 말을 하려다, 행정실 앞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기웅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기웅도 크게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윤정의 뒤를 따랐다. 보육원 현관을 나온 윤정이 주위를 살핀 뒤 기웅에게 조용히 이야기를 했다.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누가 산에 올라갔나봐.”

순간 기웅의 낯빛이 변했다. 기웅 역시 방금 들은 이야기의 심각성을 모르지 않았다. 산에 오르는 일이야 별 일 아닐 수 있었다. 보통 때라면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자원봉사자들도 많이 찾아온 탓에 보육원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런 때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한다면, 단순히 보육원 이미지가 나빠지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기웅은 짐작했다. 아마 윤정도 그런 생각에서 자신을 찾았으리라.

“누군지는 모른다고요?”

“응. 자원봉사자 한 명이 식당 뒤 펜스를 넘어서 산으로 가는 걸 봤대.”

“이런.”

“일단 목격한 사람은 여중생이야. 그러니깐 말만 잘 해서 구슬리면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아무튼 선생님들이 알기 전에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할 것 같은데. 나 혼자서는 무리일 것 같아서 널 찾아다녔는데, 도대체 거긴 왜 갔던 거야?”

보육원 내를 돌아다니느라 힘이 무척 들었던 윤정이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보일까봐 억지로 급한 티도 안 내려고 신경 쓰느라 은근히 스트레스도 받았다.

“행정실에서 일 좀 도와달라고 해서···.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우선 펜스로 한 번 가 봐요. 현장에서 뭐라도 확인을 해야 알 수 있죠.”

둘은 다시 빠른 걸음으로 현관을 떠나, 보육원 뒤편 펜스로 향했다. 그 와중에 윤정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아, 그런데 혹시 오늘 석고 못 봤어?”

“석고? 아, 걔요. 못 봤는데요.”

“아까 명수가 석고 찾는다고 돌아다니던데.”

“보육원 안에 있겠죠.”

“내가 지금 보육원 안을 샅샅이 살피고 나온 길이거든? 도서관에도 없고.”

“명수가 찾았겠죠.”

“아니, 명수는······.”

보육원 본관 옆을 빙 돌아 뒤편으로 향한 두 사람이 식당이 보이는 지점에 왔을 때, 윤정은 걸음을 멈췄다. 앞서 나아가던 기웅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저기 서 있으라고 했는데······.”

윤정이 가리킨 방향은 식당 앞이었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기웅이 식당 앞과 윤정을 번갈아 바라보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설마, 걔가 산에 갔다는 거예요?”

“모르겠어. 근데 자기 친구 찾겠다고 산에 올라간 거면······.”

“이런···.”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하얗게 질렸다.

****

윤정이 기웅을 찾았을 무렵, 명수는 지원의 눈치를 살폈다. 이미 말했듯이 명수는 바보가 아니었고, 지금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옆에 서 있는 낯선 누나가 제지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지원이 고개를 들어 보육원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을 때, 명수는 슬그머니 몸을 돌려 펜스 쪽으로 향했다.

“어디 가니?”

하지만 이내 들키고 말았다. 바로 옆에 서 있던 아이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인다고 해도 들키지 않을 리 만무했다. 명수는 쭈뼛대며 손가락으로 펜스를 가리켰다. 지원은 잠깐 고민하는 척 하더니 명수에게 말했다.

“그럼 일단 저 앞까지만 가서 보자. 혹시 누가 올라간 건지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셜록 홈즈에게 빙의라도 된 냥, 지원이 왓슨, 아니 명수를 데리고 펜스로 다가갔다. 펜스라고 하지만 그리 높지도 않아서,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쉽게 건너 뛸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한 펜스였다. 발자국이라도 찾아볼 생각으로 바닥을 훑어보았지만, 딱히 특정할 만한 발자국이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홈즈 흉내를 낸다고 해서 홈즈가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넘어가면 안 되겠지?”

딱히 누군가에게 허락을 구하는 질문은 아니었지만, 듣고 대답해 줄 사람이 옆에 있었다.

“안 돼요. 혼나요.”

그 말속에서 단호한 의지보다는 주저함이 느껴졌다. 저 아이 역시도 산에 오를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지원은 산에 오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결코 개인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님을 증언해줄 증인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바로 옆에 서 있는 명수 같은 증인.

지원이 허리를 숙여 명수에게 물었다.

“친구 찾아야 하지 않니?”

친한 친구를 찾아야 한다는 합목적성에 근거한 목표 설정은 명수의 심리적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어림짐작했다. 하지만 명수에게는 그 목적 외에도 지원이 모르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래도 산에 가면 안돼요.”

아쉽게도 함께 오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앞서 물었던 것은 단지 거대한 계획을 위한 밑그림이었을 뿐이었다.

“그럼 누나가 혼자 올라가서 니 친구 찾아볼 테니까 여기서 기다릴래? 빨리 올라갔다가 금방 내려올게. 그건 괜찮지?”

어차피 꼬마를 데리고 올라간다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혼자 올라가는 것이 운신하기에도 편하고, 이후에 자신의 행동을 증언할 증인으로서 안전하게 포섭해두는 편이 좋을 거라고 지원은 생각했던 것이다. 명수는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석고 찾을 수 있어요?”

“아마 찾을 수 있을 거야. 대신 니가 여기서 얌전하게 기다려야 돼.”

“네.”

지원은 명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는 펜스를 넘었다. 그리고 이내 잡목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산을 올랐다. 명수는 펜스 뒤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근데 저 누나 다치면 어쩌지?’

형근이형도 힘들어하던데, 저 누나도 힘들지 모른다. 그런데 혼자 올라가다가 다치면 도와줄 사람이 없다. 그런데 자신은 산에 올라가면 안 된다. 선생님이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안 본다.’

안보면 모른다. 모르게 올라갔다가 누나 따라 빨리 내려오면 모를 거다. 그러면 누나도 다치지 않고, 석고도 찾을 수 있다!

만족스러운 결론이 내려지자 명수는 서둘러 펜스를 넘었다. 빨리 움직여야 앞서 간 누나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명수가 펜스를 넘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웅과 윤정이 펜스로 뛰어왔다. 혹시나 싶어 식당 안을 들여다봤지만 역시나 안에는 아주머니들이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역시 산에 올라간 걸까?”

기웅이 펜스를 살피다가 대답했다.

“예, 올라간 거 같네요. 얼마 되지 않았나 봐요.”

기웅이 가리킨 방향에는 작은 발이 끌리며 난 자국이 흙바닥에 꽤 선명히 남아 있었다. 명수가 서두르다가 남긴 자국이었다.

“명수 발자국 같죠?”

“그런 거 같네. 어쩌지?”

“빨리 서둘러야죠.”

기웅은 몸을 띄어 펜스를 훌쩍 넘었다. 돌아보니 윤정이 손을 뻗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기웅의 도움으로 윤정도 펜스를 넘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뒤를 살핀 뒤 산 속으로 들어갔다.

****

루치드의 눈에서 흐른 빛을 감지한 동인이 흠칫 놀라며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았다.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선 동인을 향해 루치드는 한 걸음 다가갔다.

“뭐, 뭐야?”

이상한 기분이 드는 동인이었다. 마치 눈앞의 꼬마가, 한주먹거리도 안 될 꼬마가 뭔가 큰일을 벌일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큰일에 자신이 휘말려 피를 볼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산꼭대기에 서 있던 두 사람. 어디로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이, 이 새끼가 미, 미쳤나?”

윽박이라도 질러서 루치드의 걸음을 멈춰보려 했다. 큰 기대는 없었지만.

그런데 멈췄다. 대신 루치드는 한 마디를 던졌다.

“너, 죽어라.”

나지막한 한마디는 자신이 아이에게 내뱉었던 말과 무게감이 전혀 달랐다. 정말, 죽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 오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금 전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 감정들이 모두 사라졌다. 머릿속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야, 너희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동인은 정신이 나가버린 채 죽음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어떻게 죽게 됐을지는 몰라도 어쩐지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다.

죽음을 맞이하는 대신, 동인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을 수 없었다. 앉은 채로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너희 여기서 뭐하니?”

루치드가 돌아보니 아까 운동장에서 실없이 굴던 자원봉사자 누나였다. 루치드는 옅은 한 숨을 내쉬었다.

‘간단히 끝날 일이었는데.“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루치드는 다시 시선을 되돌려, 주저앉아서 자신을 쳐다보는 동인과 마주했다.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번과 다르다. 분명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앞으로도 이유 없는 폭력과 협잡에 시달려야 할 필요가 없도록 해야 했다. 이런 일에 시간 낭비하는 것도 아까웠다. 그래서 루치드는 결정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올라온 지원은 우선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여 일단 소리부터 냈다. 중학생 애가 자리에 주저앉는 것을 본 뒤에야, 여유를 가지고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중학생과 마주 하던―아마도 자신이 운동장에서 말을 걸었던 아이는 등을 보이고 있어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상황을 살피니 큰일은 없었던 것 같았다.

“에구, 난 또 여기까지 올라와서 ‘구타’라도 하는 줄 알았네.”

어쨌든 자신이 여기까지 올라온 핑계거리는 만들어진 것 같았다. 명수라는 아이의 친구를 찾기 위해 산에 올랐고, 혹시 폭력 사태가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에 이곳까지 왔음을 주위에 두루두루 알린 셈이었다. 나중에 따로 말을 맞출 필요는 없겠지, 라는 계산도 있었다.

“석고야!”

루치드가 목소리에 반응해 몸을 돌렸다. 명수가 땀을 흘리며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루치드 역시 마주 웃으며 명수에게 말을 건넸다.

“왜 여기까지 왔어?”

“너 찾으려고 왔지. 나 너 찾는다고 보육원 안에 다 찾았어. 이 누나가 올라가자고 해서 따라온 거야.”

지원이 화들짝 놀랐다.

“야, 내가 언제 올라오자고 했어? 내가 너 밑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하지만 명수나 루치드나 그 말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석고야, 내려가자. 선생님한테 들키면 안 되잖아?”

그러면서 주위를 보다 동인을 보게 되었다.

“어? 저 형, 중학생 형이네?”

보육원의 동생들과 잘 어울리지 않다보니 명수는 동인의 이름을 몰랐다.

“그런데, 왜 저렇게 떨어? 추운가?”

그 말에 지원이 돌아보니 과연 눈에 띄게 몸을 떨고 있는 동인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도 새파랗게 질린 모습이고, 입술도 보랏빛으로 변한 것처럼 보였다.

“얘, 괜찮아?”

동인은 덜덜 떨면서 말했다.

“추, 추워요. 사, 살려, 주세요.”

그리고 모로 쓰러지는 동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