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id Dream(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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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람을 쐬며 정상의 운치를 즐기던 루치드는 눈을 떴다. 빛이 몰려들어와 쉬이 시야가 돌아오지 않았다. 몇 번 눈을 껌벅거리며 기다리니 점점 황토색 바닥과 푸른색 잡목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호흡을 뱉었다. 루치드는 천천히 뒤로 돌았다. 때를 맞춰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동인이 정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
올라오는 동안, 자신의 숨소리도 컸지만 뒤에서 자박거리며 따라오는 소리도 그 못지않게 컸기에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처음에는 누굴까 궁금해 했지만, 어차피 자신을 불러 세우지 않는 이상 멈출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상까지 오른 뒤 천천히 올라오길 기다렸다가 얼굴을 확인하게 되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상에 올라온 동인은 몇 걸음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루치드와 눈이 마주쳤다. 가쁜 숨이 진정되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했다. 무릎에 손을 대고 잠시 숨을 돌려보면서도 눈을 루치드에게서 떼지 않았다. 이쯤 되면 루치드도 동인의 저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수 없었다.
동인은 말없이 지켜만 보는 루치드의 무심한 표정에 이가 갈렸다. 마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한 눈빛에 자존심이 상하기까지 했다. 감히 니가 날 무시해?
“이 새끼······.”
동인은 침을 퉤, 뱉어내곤 루치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초등학생보다 머리 하나 이상 차이나는 키를 가진 중학생을 올려다보는 루치드에게, 동인이 입을 열었다.
“눈, 깔아라.”
그 말을 순순히 들을 이유가 없던 루치드는 그저 빤히 동인을 쳐다 볼 뿐이었다.
-짝
동인이 거세게 휘두른 손에 루치드는 뺨을 맞고 비틀거렸다.
****
윤정은 4층에 올라갔다가 생활 지도원 한 분과 마주쳤다.
“어, 선생님. 혹시 기웅이 못 보셨어요?”
“못 봤는데. 자기 방에 있는 거 아니야?
“아뇨, 방금 나오는 길인데 없어요.”
“글쎄. 아, 혹시 석고 못 봤니? 운동장에도 안 보이던데.”
석고를 찾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선생님들보다 빨리 아이를 찾아야 안심이 될 모양이었다. 그러나 찾는 기웅이나 루치드는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시간, 기웅은 행정실 직원과 함께 서류 정리 작업을 돕고 있었다. 대충 보니 ‘디딤돌 통장’과 관련된 서류들인 듯 했다.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 별로 매월 적립되는 디딤돌 통장의 세부 내역이 기입되어 있었다.
“너무 호기심 갖지 말고, 페이지 맞춰서 정리하도록 해.”
직원이 넌지시 한마디 던졌다. 기웅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페이지에 맞춰 정리했다. 고등학생 15명, 중학생 12명, 초등학생 6명, 영유아 8명, 해서 총 41명분의 통장내역이 각 인당 페이지로 구성되어 41장의 별첨 자료로 어떤 보고서의 뒤에 붙으리라, 예상만 해볼 뿐이었다.
“공부는 어떠니? 잘 돼가?”
직원이 화제를 돌려보려고 말을 던졌다.
“예, 괜찮은 편이네요.”
“의대 갈 거라며?”
“예.”
“디딤돌로도 부족할 텐데.”
돌고 돌아 돈 이야기가 돼버리고 말았다. 실수했다는 심정으로 직원이 당황해할 때,
“장학금 받아야죠.”
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사실 기웅 스스로도 무모한 도전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그도 세상물정 전혀 모르는 바보는 아닌지라, 돈 없이 의대를 진학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리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입학만 문제가 아니라, 의대를 다니는 동안에도 타 과에 비해 많은 돈을 빚져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기웅은 의대를 포기할 수 없었다. 돈과 권력, 명예와 같은 사회적 가치를 떠나,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미래였기 때문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 양친이 살아계셨을 때부터 가진 꿈이었다.
“잡담하지 말고, 일이나 빨리 끝내. 빨리 끝내야 기웅이도 쉴 거 아냐.”
행정과장의 지적에 직원은 입을 다물었다.
‘자기 방에서 잘 쉬는 애를 불러다 일 시킨 사람이 누군데 나보고 그래?’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직원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했다.
“기웅이 너도 빨리 해. 거기 내용은 비밀은 아니지만 니가 본다고 알 내용도 아니니까.”
“예.”
기웅은 싱긋 미소를 지어 순종적인 태도를 보인 뒤, 작업을 서둘렀다. 이유야 어쨌든, 이제 행정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빠른 시간 안에.
****
지원은 우선 명수를 붙잡고 물었다.
“저기, 아까 니 친구라는 애 말이야.”
“석고요. 제 친구요.”
“그래, 걔. 혹시 산에 자주 올라가니?”
아무래도 아까 윤정이 보인 반응이 심상치 않게 여겨졌다. 뭔가 비밀이 있는 듯하고, 서두르는 모양새가 어쩐지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여자의 육감은 정확하다는 신조를 가진 지원은 자신의 예감을 강력한 예지로 받아들였다.
“예. 아니요.”
“무슨 말이니? 올라간다는 말이야, 안 올라간다는 말이야?”
“옛날에는 학교 가기 전에 올라갔었는데요. 지금은 안 올라가요.”
“왜?”
“······.”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명수는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누나한테 말해줄 수 없는 일이야?”
살살 얼러도 명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지원이 생각하기에 뭔가 자신이 알면 안 되는 일이 있었던 것이라고 짐작을 했다.
“아이들이 산에 올라가면 되니, 안되니?”
“안돼요.”
“왜?”
“선생님이 올라가지 말랬어요.”
보육교사가 올라가지 말라고 단단히 엄포를 놓은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지원은 산에 올라가는 아이를 똑똑히 보았다. 말인즉슨 보육원 내에서 몰래 산에 오르는 아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 이 꼬마가 찾는 아이도 어쩌면 산에 올라갔을 수도 있다는 뜻.
물론, 산이 아니라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보육원에서 시내까지는 걸어서도 한참을 가야 하는 거리인데, 초등학생이 걸어가기엔 그리 짧지만 않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다.
“여기서 걸어서 시내에 가본 적 있니?”
“아니요. 없어요.”
“한 번도?”
“음··· 없어요.”
지원은 명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묻는 말에 잘도 대답해주니 기특했다. 어쨌든 요지는 이 아이의 친구가 정문을 통해 외출을 할 가능성보다 산에 올라갔을 가능성이 크고, 보육원 내에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자신의 예감은 ‘산’에 갔을 거라고 얘기한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문제는 과연 그 아이를 찾기 위해 자신이 직접 산에 올라가봐야 하나, 라는 사실이었다. 흥미진진, 스릴 넘치는 모험이 될 확률이 클까,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채 허탕을 칠 확률이 클까?
지원이 고민에 빠진 사이, 명수는 산을 올려다봤다. 저 산에 다시 오르는 일은 두려웠다. 비단 선생님의 말씀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난 여름의 일이 있고나서 명수는 사람이 다칠 수 있다는 사실과, 자신이 그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때문에 쉽게 산에 오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루치드가 산에 올라가는 모습을 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명수 역시 바보는 아니다. 가끔 루치드가 새벽에 보육원을 나와 산에 올라갔다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루치드는 명수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명수는 잠귀가 밝았다. 그리고 새벽 공기와 산의 이슬을 몸에 묻히고 돌아온 루치드에게서 숲의 향기를 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루치드의 신발에 묻은 진흙과 나뭇잎에서 확신을 한 것이지만 아무튼, 진실을 알고 있던 명수였다.
그리고 명수는 앞에 선 낯선 누나의 질문들에서 루치드가 산으로 갔다, 고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 을 알아챌 정도의 지능(!)은 보유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명수 역시 고민에 빠졌다. 지금이라도 혼자 산에 올라가야 할까? 아니면 보육원으로 달려간 윤정이 누나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결국 두 사람은 식당 앞에서 옴짝달싹도 못하고 제자리에서 고민만 거듭하며 시간을 보냈다.
****
“이 새끼가 어디서 형을 야리고 있어!”
다시 반복되는 패턴이다. 누명을 씌우고 욕을 하고 때리고. 하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덮어 씌어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고, 욕을 해서 기를 죽이려고 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주먹을 휘두른다. 다시 뺨을 맞고 오른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러나 루치드는 계속 동인을 쳐다보았다.
예전에서 처음 맞았다는 사실에 당황하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해서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던 것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이제는 동인의 저 행동에서 무언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욕을 하고 때리는 이유.
동인은 루치드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싫어했다. 아니,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때문에 저런 격렬한 반응이 나오는 것이리라.
“왜 때려요.”
처음으로 루치드가 입을 열었다.
“아니, 왜 절 무서워해요?”
그래. 때리는 이유는 안다. 자신을 무서워하니깐. 그럼 왜 무서워하는 거지?
“뭐?”
동인은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멍하니 아이를 쳐다만 봤다. 내가 저 아이를 무서워한다고?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이런··· 개새끼가···.”
아이를 때리기 위해 쥐었던 주먹이 덜덜 떨려왔다. 저 아이의 무심한 눈빛과 태도는 분명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반면, 자신은 어떤 반응이라도 보이게끔 아이를 다그치고 있었다. 욕을 하고, 때리면서 자신을 두려워하길 바라고 있었다. 왜?
“제가 형을 협박한 적도 없고, 약점을 잡은 적도 없고, 때린 적도 없는데 왜 절 무서워하는 거죠?”
저 아이가 무서운 이유. 자신을 협박한 적도 없었다. 약점을 잡은 적···이 있다!
그제야 동인은 자신이 루치드를 무서워하는 이유를 알았다. 루치드는 자신의 가장 나약한 면, 가장 추악한 얼굴을 아는 아이였다. 그것은 자신이 언제나 감추려고 했던 자신의 본성이었고 법원에서 그것이 드러났다.
동인은 과거로 돌아갔다. 그 때, 동인은 법원에서 소미를 힐끗 보며, 입을 열었었다.
“얘한테서 정액 냄새가 자주 나거든요.”
동인은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이 년은 걸레야’ 라고 선언한 셈이었다. 이보다 심한 모욕이 어디 있을까?
저 아이의 눈빛은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자신의 본성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눈빛이었다. 지금은 입을 다물고 있지만, 언제 저 입이 열려 동인을 구렁에 빠뜨릴지 모를 일이었다.
“니가 소미를 겁박한 거야. 니가 소미를 울게 만든 거야. 니가 소미의 마음에 상처를 준거야. 니가 소미의 아빠보다 더 나쁜 거야. 니가 나쁜 놈인 거야. 최악의 인간이야.”
동인은 아이의 입이 열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동인은 아이를 무서워했다.
“이런 제길······.”
여전히 루치드는 동인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맘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내가 저 따위 녀석을······.’
동인은 달려들어 루치드의 멱살을 붙잡았다. 루치드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그의 작은 손이 반사적으로 동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동인은 루치드를 붙잡은 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일정도로 씩씩거리던 동인의 거친 숨결이 루치드의 앞머리를 밀어냈다.
“···죽여 버리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