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id Dream(2)
-------------- 51/952 --------------
명수는 갑자기 사라진 루치드를 찾아 보육원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 혼자 방에 돌아간 걸까, 궁금해 하며 찾아봤지만,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방을 나오니 마침 보육교사가 남녀 두 사람과 함께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선생님, 석고 못 봤어요?”
대뜸 달려와서는 인사도 없이 용건부터 던지는 명수 모습에 보육교사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래봐야 신호를 캐치해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할 명수가 아니었기에 의미는 없었다.
“아니, 못 봤는데? 같이 운동장에서 놀았던 거 아니니?”
명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아까는 같이 있었는데요, 지금은 없어요.”
“그래서 찾는 중이니?”
“네.”
뒤에서 지켜보던 사람들 중 여자 분이 다가왔다. 보라색 투피스 상의에 은색 브로치로 패션의 포인트를 가미한 세련된 스타일의 중년 여성이었다. 정갈하게 빗어 세팅한 헤어스타일이 기품 있는 여자로 보이게끔 했다.
“어머, 귀여워라. 석고가 누구야?”
무릎을 살짝 굽히고 허리를 약간 접고 나서야 명수와 눈높이가 맞춰졌다.
“제 친구요.”
보육교사가 덧붙였다.
“석고는 별명인데, 이 아이랑 같은 방 쓰는 친구예요. 아마 같이 놀던 친구가 사라져서 찾는 건가 보네요. 그렇지?”
“네, 석고가 골키퍼였는데요. 형근이 형이 골 넣었어요. 근데 석고가 없어서 못 막았어요.”
중년 여성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찾아서 골키퍼 시키려고?”
“네.”
“골키퍼 하기 싫어서 도망친 거 아냐?”
명수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어 강한 부정을 드러냈다.
“아니에요. 석고는 골키퍼 좋아해요.”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 명수는 다시 루치드의 행방을 찾아 나서려 뒤돌아섰다.
“명수야. 선생님한테 인사하고 가야지.”
멈칫, 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 꾸벅 허리를 접어 인사를 하고는 다시 뛰어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중년 여성이 보육 교사에게 물었다.
“애가 귀엽네요. 몇 살이에요?”
“8살이에요.”
보육교사는 보육원 공식 말썽꾸러기랍니다, 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이내 시선을 마주하고 잠시 끊어졌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실 저 아이가 찾던 석고라는 아이가 두 분이 찾으시던 아이예요. 저도 운동장에서 보이지 않아 이리로 올라온 건데, 방에는 없나보네요.”
“그럼······.”
중년여성은 기껏 3층까지 올라왔는데 찾던 아이가 없다고 하니, 조금 들뜬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루치드의 부재에 난감한 빛을 보이던 상담교사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중년 여성에게 방안을 제시했다.
“일단 다시 상담실로 돌아가셔서 기다리시지요. 제가 다른 선생님께 아이를 찾도록 지시를 내려놓겠습니다. 아마 보육원 안에 있을 테니 금방 찾아서 올 겁니다.”
“예, 그러죠. 당신, 가요.”
중년 여성이 몸을 돌리자, 뒤에 말없이 서있던 남성 역시 묵묵히 그 뒤를 따라갔다.
다시 세 사람은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중년여성이 문득 생각난 듯이 질문을 했다.
“그 아이도 방금 본 아이랑 비슷한 성격인가요?”
“아뇨.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명수는 저희 원에서 가장 장난기 넘치는 아이입니다. 순수하고 밝은 아이죠. 반대로 그 아이는 매사 신중하고 진지하죠. 그렇다고 어둡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단지 나이보다 훨씬 똑똑하고 겸손하다보니, 꽤 점잖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아이라고 설명 드린 겁니다. 발랄한 느낌은 아니지만 재기 넘치는 모습도 자주 보이고요. 아마 방송으로 보신 것보다 훨씬 밝은 모습일 겁니다. 아, 특별히 낯을 가리지는 않더군요.”
비교도 안 되게 좋은 아이입니다, 라는 설명을 최대한 자세히,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포장에 전력을 다하는 보육교사였다. 다행히 루치드는 그 어떤 포장이라도 잘 어울리게 만드는 다이아몬드 반지 같은 아이였다. 깎을수록 빛은 영롱해지고 아름다워지는 속 알맹이를 지닌 아이였다.
“낯을 가리지 않는다니 다행이네요. 빨리 친해질수록 좋은 거잖아요. 그쵸, 여보?”
중년여성이 남성을 돌아보며 눈웃음과 함께 동의를 구했다.
“그래요.”
남자의 굵은 목소리에도 살짝 기대감이 깃든 느낌이었다.
****
제일 아래층까지 뛰어 내려간 명수는 보육원 뒤로 돌아갔다. 아직 밥시간은 아니지만 어쩌면 식당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끔씩 윤정이 루치드에게 먹을 것을 주겠다며 식당에 데리고 들어가곤 했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지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주방을 울렸다. 윤정과 주방 아주머니들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살폈다.
“무슨 일이예요?”
“아, 다름이 아니고요. 저 오늘 자원 봉사하러 온 학생인데요. 혹시 도울 일이 없나 해서요. 설거지라도 하겠습니다!”
나름 꿀꿀한 기분을 떨쳐내 보고자 씩씩한 목소리로 청원(請願)을 했다. 아주머니들은 시선만 돌려 윤정의 눈치를 봤다. 아주머니들도 비슷한 나이 때 애들이 한 자리에 있지 않도록 하는 불문율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어서와. 안 그래도 아주머니들이 곧 점심을 준비해야 돼서 일손이 필요했는데 잘 됐네. 그렇죠?”
“아, 으음. 그렇지. 그래요. 어서 와요.”
아주머니들은 묵시적인 허락을 득한 뒤에야 지원을 반겼다. 지원이 주방 안으로 들어오자 윤정이 밝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몇 살이야? 아, 어려 보여서 말을 먼저 놨네?”
“아, 저 중3인데요.”
“아, 그래? 난 고2. 내가 언니네? 그럼 계속 말 놓는다?”
“아, 예. 그러세요. 저도 그게 편해요.”
“마침 잘 왔네. 일단 설거지는 조금 있다 하고, 우선 저기서 조금만 기다려. 거의 다 됐으니까.”
억지로 등떠밀리듯 밀려난 지원은 아주머니들 곁에서 뻘줌하게 섰다. 주춤대며 다시 아주머니들에게 고개 숙이는 지원을 호탕한 웃음으로 반겨주는 아주머니들이었다.
“저기 윤정이가 요리를 잘하거든. 일단 조금 있다가 윤정이가 해준 요리 먹고 나서 일하면 돼.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그나저나, 윤정아. 아직 멀었니?”
“아, 다 됐어요.”
뜨거운 불길이 감싸고 있는 웍 안에서 하얀 스프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윤정이 요령 좋게 국자로 떠서 그릇에 담아내니, 달콤짭짤한 게살의 향이 후각을 마비시킬 듯 올라왔다.
“우와, 이게 뭐예요?”
“게살 스프! 맛있겠지?”
“예!”
그 때 식당 문이 벌컥 열렸다. 오늘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많다며 생각을 하던 윤정은 불청객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이내 함박웃음을 지었다.
“누나, 누나. 석고 못 봤어요? 어? 그거 뭐예요?”
대답을 할 틈도 없이 쪼르르 달려와 윤정 옆에 다가온 명수였다.
“누나, 저도요. 저도 먹고 싶어요.”
역시 명수답다는 생각에 윤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주려고 했, 어, 요.”
한 그릇 푸짐하게 떠서 수저와 함께 건넸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명수가 숟가락을 받아들고 후후 불어대며 맛을 봤다.
“맛있니?”
고개만 끄덕일 뿐, 입은 끊임없이 들락날락거리는 숟가락 때문에 바빴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윤정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어때?”
“정말 맛있어요!”
지원의 격한 반응에 윤정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우리 윤정이는 역시 대단해. 어떻게 독학으로 이렇게까지 할 수 있대? 이거 그거 아냐? 절대미각인가?”
“아이고,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눈대중으로 만든 건데 또 오바들 하신다.”
겸양 떠는 윤정이 보기 좋아 또 한 번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시는 주방 아주머니들이었다. 윤정은 자신의 것도 한 그릇 떠서 맛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만들었지만, 충분히 맛이 있었다. 역시 요리는 대단해, 라며 속으로 감탄하는 중인데.
“저 한 그릇 더요.”
라며 그릇을 불쑥 내미는 명수 때문에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다시 건네받은 그릇을 비우던 명수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윤정에게 물었다.
“누나, 석고 못 봤어요?”
윤정은 뜬금없는 질문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니, 못 봤는데? 왜?”
“같이 축구하다가 어디 갔어요.”
“어디 갔는데?”
“몰라요.”
“그래서 찾는 중이었어?”
“예.”
그럼 이 녀석, 지 친구 찾으러 들어왔다가 먹을 거에 눈이 돌아가서 이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구나, 라며 명수의 머리를 억세게 헝클어뜨렸다.
“흠. 못 봤는데? 봤으면 누나가 여기 붙잡아두고 있었겠지.”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나오는 석고라는 이름이 독특해서 지원이 끼어들었다.
“석고가 누군데요?”
“아, 얘 친구.”
윤정이 루치드의 이름을 알려줬다.
“혹시, 골대 앞에 있던 아이?”
저도 모르게 낯빛이 변한 지원이었지만 스스로는 알아채지 못했다.
“예. 맞아요! 봤어요?”
혹시나 이 낯선 누나가 본 건가 싶어서 두 눈이 동그랗게 변한 명수. 하지만 지원은 아까의 감정이 다시 밀려오는 듯해서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아까··· 골대 앞에 있는 거 봤지.”
명수는 아쉽다는 제스처로 발을 툭 굴렀다.
“근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식당에 들어오기 전의 모습이 떠오른 지원이 물었다.
“여기 아이들은 종종 저기 뒤에 있는 산에 가나요?”
윤정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름의 그 사고는 원내에서 꽤 큰 사고였다. 보육교사들이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던지라 외인(外人)에게 자세한 사정을 말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안 올라가. 올라가지 못하게 막았어. 펜스도 세웠는데?”
“어? 아까 중학생처럼 보이던 애가 올라가던데?”
“응?”
윤정이 화들짝 놀라며 지원을 바라봤다. 그러다 급히 지원을 손을 붙잡고 식당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미 들었겠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아주머니들이 모르는 게 좋을 내용이리라 짐작해서였다. 그 누가 됐든 산에 오르는 것은 금지가 된 상태였으니까.
“혹시 얼굴 봤어?”
“아뇨. 얼굴은 못 봤고요. 그냥··· 머리가 짧고 키도 저보다 작았던 거 같아요. 그래서 중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지원은 윤정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해서 혹시 자신이 ‘또’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하지만 그런 지원의 심리를 파악하고 있을 여유가 없던 윤정은 그저 누군가가 ‘산’에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뒷일이 걱정되어 가슴이 조마조마한 상태였다.
“석고도 산에 갔어요?”
뒤따라 나온 명수가 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냐, 석고는 아니래.”
골대 앞에서 얼굴을 봤다고 한 말에 비춰보면, 짧은 머리의 남학생이 그 아이일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명수에게 대답했다. 하지만 명수에게 던진 대답처럼 간단하게 끝날 문제는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 산에 오른 것이 확실하다면, 이 것은 ‘사태’라고 불러야 마땅한 일이 된다. 그리고 이 사태는 자신이 혼자 해결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보통 이런 곤란한 일이 벌어졌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를 윤정은 한 명 알고 있었다.
윤정은 명수에게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보육원으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원은 자신도 따라가야 하나, 아니면 여기서 명수라는 아이를 지키고 있어야 하나, 아니면 설거지를 하러 주방엘 다시 가야 하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