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id Drea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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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용아, 비켜!”
“형, 조심해!”
형근이 가레스 베일처럼 재빠르게 달려 흐르는 공을 인터셉트했다. 램파드처럼 넓은 시야를 가진 형근은 같은 편에게 패스를 주고 앞으로 뛰어나간 뒤, 이내 공을 다시 돌려받았다. 형근을 막기 위해 다른 아이들이 달려들었지만, 메시같은 발재간으로 요리조리 발을 놀려 공을 지켰다. 이윽고 호나우도처럼 달려 상대 골문 앞에 다가간 형근이 공을 차기 전에 확인 차 앞을 바라보는데,
“어?”
골키퍼가 보이지 않았다.
“막아!”
“안돼!”
-툭
가볍게 찬 공은 떼굴떼굴 굴러 골문 안으로 가볍게 들어갔다.
“석고 어디 갔어?”
명수가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어디서도 루치드가 보이지 않았다.
그 시간 루치드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오랜만에 뒷산으로 올라갔다. 한동안 산에 오르질 않았었던 루치드가 다시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단순히 산에 오르고 싶다는 충동을 느껴 오른 것이 반, 혹시 지난번과 비슷한 위치에서 전이(轉移)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오른 것이 반이었다.
이곳에는 저 세계의 숲과 달리 대부분 소나무나 참나무였다. 사시사철 푸르기에 추운 겨울바람만 아니었으면 겨울인줄도 모를 정도로 푸른빛이 맴도는 숲이었다. 그렇다고 낙엽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산을 오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신발에 마찰계수를 높이는 마법을 걸어놓고 오르니 잘 닦인 아스팔트 길 위를 걷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터벅터벅 걸어 올라가니 어느새 정상이었다. 루치드는 거친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때는 이 정도 산을 오르는데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도 없었건만, 책상 붙박이로 1년 이상을 보냈더니 시간도 많이 걸리고 체력도 많이 부족함을 느꼈다.
보육원 운동장에서 바라본 하늘이나, 뒷산 정상에서 올려다 본 하늘이나 푸르기는 매한가지겠지만, 들이마신 공기의 맛은 달랐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실려 청량하고 서늘한 공기가 폐 속 깊숙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루치드는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마법도 해제했다. 무딘 칼날 같은 바람이 뒷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엄마.”
오랜만에, 나직한 목소리로 불러봤다. 어쩐지 목에 턱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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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동장에서 중학생 몇몇과 초등학생 애들 몇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공을 차고 있었다.
“제기랄.”
요즘은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기분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언짢아지면 욕을 했고, 혼자 있을 때도 특별한 이유 없이, 특정한 대상 없이 욕이 나오곤 했다. 지금은 저 운동장에서 병아리 떼처럼 몰려다니며 공을 쫓는 아이들을 보니 절로 욕이 나왔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중학생쯤 되니 저 공놀이가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저 장난 같은 놀이에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초등학생들은 마냥 공을 쫓아 뛰어다니며 아무데나 뻥뻥 차대지만, 같이 어울려주는 중학생들은 가만히 살펴보면 초등학생들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말하자면, 애들이 찬 공을 적당히 쫓아가, 적당히 받아주는 식으로 어린 동생들을 ‘돌봐주고’ 있었다. 자신이 어렸을 때는 지금의 ‘고등학생’들이 그런 식으로 자기들과 놀아주었고, 현재는 자기 나이 또래 애들이 지금의 ‘초등학생’들과 놀아주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면 자기보다 어린 동생들이 마음껏 뛸 수 있게 운동장을 쓰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시간에 그들은 보육원을 나간 뒤의 자기 진로를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공부를 했다. 이것이 이 보육원의 규칙이었다. 정말 친형제보다 다정다감한 우애를 자랑하는, 아네스 보육원의 아름다운 전통이랄까?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끼리 돕는다.’
그 점을 깨닫자, 동인은 공놀이에 흥미를 잃었다. 저 사이에 끼어서 동정심과 연민의 몸부림에 장단을 맞춰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났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 취급받기도 싫었고, 취급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동인은 축구를 싫어하게 되었다.
원내를 돌아다니는 자원봉사자들과도 마주치기가 싫어 방에 틀어박혀 있던 동인은 짜증만 부르는 놀이 문화에 질려 시선을 돌리려던 그 때, 골키퍼를 보던 아이가 몸을 돌려 운동장을 조용히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입술을 짓이기며 그 아이의 뒷모습을 끝까지 쫓았다. 가슴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느꼈다. 눈물이 맺힐 만큼 격렬하고 뜨거운 감정.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당장 쇳소리로 소리를 지르지 않고서는 못 이길 것 같은 감정. 금세라도 눈이 충혈 될 만큼 부릅떠진 눈에서 뜨거운 열이 새어나올 정도의 감정. 미움, 증오, 원망, 혐오···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의 이름들을 다 갖다 대어도 모자랄 감정이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왜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지금까지 바른 생활, 밝은 미소, 좋은 사람으로 각인되어 왔던 자신의 삶을 한 순간에 나락으로 빠뜨린 게 저 아이였다. 용서할 수가 없었다.
동인은 무슨 생각에선지 몸을 돌려 방을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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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은 모처럼 이른 아침부터 원내 식당을 찾아갔다. 보육원 아이들에게 줄 아침식사까지 도와준 윤정은 곧 아주머니들께 양해를 구하고 요리 연습을 시작했다. 최근 TV에서 요리 방송이 유행이라, 눈과 귀가 즐거웠던 윤정이었다. TV 속 요리사들의 현란한 스킬들을 익히자고, 마음먹고 벼르다가 마침내 오늘 주방에서 웍을 잡고 휘두르는 중이었다. 가녀린 팔로 웍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이 쉬울 리 없지만, 인내와 끈기, 집념과 열정으로 손목을 부여잡고 웍질을 했다.
기름을 두른 웍을 빙빙 돌리며 기름이 고르게 퍼지게 한 뒤, 미리 썰어놓은 대파를 집어넣었다. 간장을 겉에 두르듯 살짝 뿌려 향을 배가시켰다. 웍을 앞뒤로 흔들며 대파를 볶으니 향긋한 파기름 향이 주방에 가득 찼다.
“아이고, 우리 윤정이가 이제 중식도 하나보네?”
“뭐 만들려고 그렇게 요란스럽대?”
윤정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볶음밥이요.”
그 와중에도 윤정은 웍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후 다진 돼지고기와 각종 야채들을 넣어 볶다가, 불을 줄이고 밥을 넣었다. 아주머니들과 함께 먹으려면 꽤 양이 돼야 할 테니, 넉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들어간 양만큼 손목에 많은 무리가 갔다. 오직 요리에 대한 집념으로 얇은 손목에 힘을 주어 웍질을 해나갔다. 쉼 없이 달그닥거리던 웍이 마침내 멈췄고, 윤정은 불을 껐다. 넓은 접시 3개를 옆에 놓고 볶은 밥을 정갈하게 담았다.
“자, 시식해 보세요!”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그 땀의 양만큼 뿌듯한 만족감이 가슴 속을 채웠다.
“다 한 거니?”
“아뇨, 이번엔 게살 스프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다음 요리를 준비하기 시작한 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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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웅은 자신의 방문을 꽉 닫아 걸고 책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문 바깥에는 ‘공부 중, 출입금지’라고 쓴 A4지를 붙여놓았다. 사실 대부분의 보육원에서 원내에 고등학생들이 살고 있을 때는 고등학생 자원봉사자를 받지 않았다. 비슷한 나이의 고등학생들이 자원봉사자로 찾아오게 되면 느낄 수 있는 박탈감이나 위화감 조성을 사전에 막아보고자 하는 이유에서였다. 만약 자원봉사자로 들어오게 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서로 마주치지 않게끔 원외로 외출을 보내기도 했다. 이번 자원봉사 역시 주말을 맞아 고등학생 자원봉사자들이 많이 찾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원내의 고등학생들은 대부분 보육교사의 허락 하에 외출을 나갔다. 단, 기웅만 빼고.
딱히 나가봐야 할 일이 없다는 것도 있고, 굳이 얼굴만 마주치지 않는다면 마음 상할 일도 없지 않겠냐는 낙천적인 성격도 한 몫을 했다.
-똑똑
“기웅아, 잠깐 시간 되니?”
보육교사의 부름에 기웅은 문을 열고 나갔다.
“무슨 일이신데요?”
“행정실에서 도움을 요청해서 말이야. 일이 좀 많나봐.”
평소에도 행정실에 일이 많이 밀리면 가끔 기웅이 가서 일을 도와주곤 했다. 보육원에 남아있는 고등학생들 중에서 제일 똑똑하기로 소문이 나기도 했고, 실제로 일을 도울 땐 똑소리 나게 일처리를 잘해서 자주 차출되어 나갔던 기웅이었다. 더 큰 이유라면, 불평불만이 없다는 것. 때문에 행정과장이 졸업하고 일 없으면 여기로 취직해라는 말을 건넬 정도였다. 의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기웅에게 막말을 한 셈이지만, 기웅은 그저 풋풋한 미소로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관대함을 보이기도 했었다.
“예,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면 되나요?”
“그래, 고마워. 나도 매번 미안하다.”
보육교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기웅의 팔을 툭툭 두드려 위로했다. 돈 한 푼 안 되는 일이지만 보육원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사용하는 기웅의 모습이 대견하고 안타까운 보육교사였다. 기웅이야말로 자원봉사자의 전형(典型)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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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은 운동장에서 도망치듯이 빠져나와 실내로 들어왔다. 얼굴이 화끈거려 누구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어 결국 보육원 안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지원아, 뭐하니?”
함께 온 언니가 현관으로 들어오는 지원을 보았다.
“아, 언니. 아··· 저기 뭐 도울 일 없나 둘러보고 있었어요.”
“너 얼굴이 빨간 데?”
지원이 얼른 두 볼을 감싸 쥐었다.
“얼마나 밖에 있었으면, 얼굴이 그러니? 그만 좀 돌아다니고 저기 식당에나 가봐. 곧 식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설거지거리라도 있는지 보고 도와줘.”
바깥에서 놀다가 온 것이라고 판단한 언니에게 오해라며 투덜대는 짓은 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마땅히 대꾸할 말도 찾지 못했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는 보육원 뒤편의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머리에서는 그 아이와의 대화가 계속 되풀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왜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전에도 자원봉사를 나오긴 했었다. 다만 그 때는 자봉 단장님이 맡긴 일이 많아서 보육원 아이들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떻게든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주리라 다짐하고 자원봉사에 참가했다. 오늘도 역시 맡겨진 일은 많았지만 요령껏 피해서 운동장으로 나갔던 것인데, 의외의 공격을 받았다.
분명 자신의 상식에서 아이들과 손잡고 놀아주거나,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사랑과 정(情)을 나누는 게 자원봉사라고 생각했었다. 마치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이 그러하듯이. 다만 먼지구덩이 속에서 공을 차는 건 꺼려지는 마음이 들어, 대신 멀찍이 서 있던 아이에게 말을 걸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지원은 아이에게 심각한 타격을 받고 내상을 입어버렸다.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째서 일, 인거죠?’
분명 자신이 뭔가를 잘못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아이의 눈빛에 당황했던 이유는 자신이 떳떳하지 못해서였다. 아이의 말을 듣는 순간, 그 마음을 알 수 있었기에 그 곳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난 것이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랑과 정을 나누는 대신, 아이에게 몹쓸 상처를 준 것 같아 자책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당장 돌아가기엔 너무 빈궁한 핑계밖에 없어, 일단은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설거지라도 하면서 마음을 조금 정리하고 난 뒤 찾아가 용서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건물 뒤로 돌아가던 지원은 우연히 어떤 소년이 보육원 뒤 펜스를 넘어 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다. 짧은 머리와 지원보다 작은 키를 가진, 중학생으로 추측되는 소년이었다. 그는 펜스를 넘은 뒤, 차분한 걸음걸이로 산 위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잡목들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아무래도 보육원 아이들은 바로 뒤가 산이다 보니 저렇게 놀이삼아 산을 오르나보다, 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 지원은 이내 식당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