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9화 (49/956)

충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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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 ‘시립도서관’의 광고를 찍을 때, 보육원장은 루치드의 소원을 물었다. 보육원생의 사적 활동에는 보육책임자의 허락을 득하게 되어 있으나, 차후 예상치 못한 법적인 문제로 야기될 시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보육원생의 자발적 의사에 따른 결정으로 진행되어야 뒤탈이 없다. 그래서 원장은 루치드에게 모델료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루길 원했고, 루치드는 책을 원한다고 대답했다.

때문에 원장은 행정과장과 함께 몇 권의 책을 사야하나 고민을 했는데, 마침 시립도서관에서 솔깃한 제안을 해 왔다. 가을 기획전과 겨울 특집과 맞물려서 기획된 행사의 일환으로 지역사회 복지사업을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함께 하자’는 표현이었지만, 실제로는 보육원 내에 ‘작은 도서관’이라는 이름의 시설을 설치하자는 행사였다. 인평시와 인평시립도서관이 협조하여, 아네스 보육원 내에 ‘작은 도서관’을 설치한 후 이를 연말 지역사회 복지행사의 일환으로서 홍보하자는 게 주 내용이었다. 보육원은 당연히 오케이를 외쳤고, 1층의 행정실 옆 사무실 한 칸을 비우는 작업을 해왔다.

그리고 마침내 겨울방학이 시작될 즈음에 맞춰 보육원 내에 ‘도서관’이라고 불릴 시설이 갖춰지게 된 것이다. 대략 3천권 정도의 도서가 비치되며, 유아부터 고등학생까지 모두 읽을 수 있을만한 다양한 책들이 구비되었다.

루치드 개인으로서는, 책 몇 권 선물 받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을 얻게 된 셈이었다.

이틀 전부터 출입이 허용되면서 루치드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는 거의 자기 전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봤다. 하지만 도서관의 성격상, 학문적인 서적보다는 인문, 문학 관련 서적과 기초학문분야의 책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물리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어 하는 루치드는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공부해도 되는 문제이니, 저녁시간에는 다른 공부도 할 겸해서 다른 분야의 책을 읽기로 마음먹었다.

그랬더니 너무도 즐거운 독서시간이 매일매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작은 도서관’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진 루치드를 복도에서 바라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행정과장은 곁에 서 있는 보육교사에게 말을 걸었다.

“저 아이가 혹시 부모나 이전에 있었던 보육원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나요?”

“예. 과거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흠. 이거 나중에 문제가 될지도 모르는데.”

1년 전, 루치드의 초등학교 입학을 돕기 위해 출생신고서 및 기타 서류 작업을 했었던 행정과장은, 현재 서류상으로는 루치드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후 루치드가 개인 활동으로 광고를 찍거나 방송에 나왔었지만, 루치드를 찾는다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를테면 저 범상치 않은 아이의 친부모라는 사람이 뒤늦게 등장하게 되는 경우, 법적으로 조금 꼬일 수도 있는 일이 지금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양이 되더라도 친권자가 나타나면 법적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정과장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일단, 다음 주말에 저 아이를 보러 온다고 하니까 선생님이 말씀 잘 전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등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루치드는, 그저 맑은 미소를 띤 채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의 에피소드를 읽고 있었다.

****

방학을 맞이하고 난 뒤, 첫 주말. 보육원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원래 이 시기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시기이기도 했다. 자원봉사를 다니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이 많기도 하거니와, 연말을 맞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자라난 이타심(利他心)이 보육원을 찾게 만들었다.

이렇게 찾아오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을 상상하며 오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 보육원에 오게 되면 그 사람들은 다양한 작업들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복도를 청소한다거나, 현관을 청소한다거나, 창문을 닦는다거나, 잡초를 뽑는다거나, 커튼이나 이불을 빨거나, 부러진 의자 등을 수리한다거나. 다시 말해 청소가 제 1작업이요, 수리가 제 2작업이 된다.

그리고 그 시간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마음껏 모래먼지를 들이마실 수 있게 된다. 보육원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모래먼지 마시는 시간이라는 것을 아는 자원봉사자들은 몇 없었다.

아이들이 항상 외로움과 싸우고, 사랑에 고플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살고 있었고, 가끔은 원외에서 학교친구들을 만나기도 하며 지냈다. 자주 찾아오는 자봉과 친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뜨내기처럼 찾아오는 사람들은 되레 낯설어하며, 차라리 다른 놀 거리를 찾아 떠났다.

아직 운동장 모래먼지에 익숙하지 않은 영유아의 경우에도 자기들끼리 놀이방에서 노는 게 좋지, 낯선 언니 오빠들과 노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하물며 초등학생 이상의 아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멀리 차!”

“알았어.”

골키퍼를 서고 있던 루치드가 공을 공중에 살짝 놓았다가 오른발로 걷어 올렸다. 차는 힘에 비해 멀리 날아가는 공을 보며,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가끔씩이라도 연습을 했더니 이제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처음에 차는 순간에는 마법을 걸지 않았다. 적당한 힘이 전달될 수 있도록 공을 찼다.

그리고 공이 발끝을 떠날 때, 마법을 사용했다. 공은 전달된 힘을 거의 잃지 않고, 공기의 저항도 덜 받으면서 나아갔다.

날아가던 공에 마법의 효과가 사라졌다. 미리 적당한 시간제한을 걸어놓은 마법이었기에 대략 1~2초 정도가 지나면 마법이 사라지고, 대신 공기의 저항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면 잘 나가던 공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공은 거의 반대편 골문 즈음에 떨어졌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신기해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도 익숙해져서, 루치드가 공을 찰 때면, 거의 대부분 아이들이 미리 달리고 있거나, 반대편 골문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다.

그렇게 반대편 골대 앞에서 투닥이고 있을 때, 루치드는 상념에 빠져 잠시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다.

“춥지 않니?”

누군가 골대 뒤에서 루치드에게 말을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어쩐지 한 번 본적이 있던 얼굴 같았다.

“예. 괜찮아요.”

반대편 골대에서 골문을 지키는 골키퍼는 두터운 점퍼를 입고 있었다. 아무래도 골키퍼가 다른 아이들처럼 계속 뛰어다니는 포지션이 아니다보니, 차가운 겨울바람을 가만히 서서 견뎌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치드는 다른 아이들처럼 가벼운 티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다. 마법을 계속 사용하여―지속시간이 길지 않아 반복적으로 사용을 해야 했다―추위에 버틸 수 있다는 점이 한 이유였고, 점퍼를 걸치면 몸이 무거워지는 같아서 입지 않는 것이 또 한 이유였다.

“혹시 우리 본 적 있었나? 니 얼굴, 꽤 낯익다?”

인평시립도서관 홍보물에서 봤을 수도 있고, 공중파에 출연한 장면을 봤을 수도 있다.

“예전에 여기 봉사활동 오셨을 때 봤을 수도 있겠네요.”

“어, 그런가?”

소녀는 잠시 생각을 돌이켜보려는 듯, 머리를 들어 올리고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청명하게 맑은 겨울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시원하게 열려 있었다.

“아, 맞다. 너 생각났어. 작년에 봤던 거 같은데? 니 얼굴 생각난다야.”

소녀, 지원은 용케도 루치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 내가 너한테 이름을 물었는데 이름을 안 가르쳐줬었지? 맞아. 어쩜 얼굴이 하나도 안변하니? 지금도 잘생겼다 너?”

지원의 호들갑에 괜히 민망해져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지금도 안 가르쳐 줄거야? 아, 내 이름 아니? 내 이름은 지원이야. 양지원. 연예인이랑 이름이 똑같다고 하던데.”

루치드는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지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그 이름? 너무, 너무 잘 어울린다.”

진심처럼 들리지 않았지만, 루치드는 개의치 않았다. 대신 나중에 원장선생님과 독대할 기회가 생긴다면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지은 이유가 뭔지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아, 그런데 축구 하는 거 좋아하니? 보기에 별로 안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서 말이야.”

“좋아는 해요. 그런데 지금은 그냥 어쩔 수 없이 나와 있는 거예요.”

“왜?”

“도서관이 지금 청소중이라서요.”

설비가 갖춰진 지 한 달도 안 된 도서관을 자원봉사자 4명이서 들쑤시고 있었다. 책을 읽는 공간이 깨끗해야 되지 않겠냐는 원장님의 지나가는 말을 귀담아 들은 자봉책임자 분이 4명을 배정해준 덕택이었다.

“책 읽는 거 좋아하나봐? 어떤 책 좋아해?”

“막아!”

지원과 대화중이었지만 시선은 여전히 운동장 쪽에 두고 있던 루치드는 철용의 외침이 없더라도 공을 막기 위해 몸을 움츠린 상태였다. 형근이 막 공을 차기 위해 자세를 취한 상태였다.

-퉁

제대로 발끝에 공이 걸렸는지, 공은 세차게 날아들었다. 다만 루치드 정면 아래쪽이었기에 막기가 어렵진 않았다. 더군다나 루치드에겐 보이지 않는 필살기(!)가 있었다.

빠르게 날아들던 공이 2걸음 앞쪽에서부터 급격히 속도가 줄기 시작해서 루치드의 손에 잡힐 때 쯤, 루치드는 그리 힘들이지 않고 공을 낚아챌 수 있었다.

고개를 드니 반대편 골대 근처에서 미친 듯이 손을 흔들어대는 명수의 간절한 눈빛이 보였다.

“너 축구 잘한다?”

명수에게 날아가는 공을 함께 지켜보던 지원이 말했다. 루치드는 내용 없는 대화에 조금씩 지루함을 느꼈다. 아니 일방적으로 답을 해야만 하는 이런 건, ‘대화’가 아니었다.

“저기, 할 일 많지 않으세요?”

“왜?”

“보통 여기 오시는 분들은 하시는 일들이 많아서, 한자리에서 오랫동안 저희랑 이야기 나누시는 분들이 안계시거든요.”

“난 너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루치드가 뒤를 돌아봤다.

“나, 아니 우리와 이야기를 하는 게 어째서 ‘일’ 인거죠?”

“응?”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지원이 당황했다. 노려보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건만 표정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루치드의 눈빛이 왠지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지간한 영화배우 뺨치게 잘생긴 외모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돌연 홀르비오의 조각상 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진실을 요구하고 있었다.

지원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치드가 몸을 돌렸다. 지원은 더 이상 아이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주춤거리다 이내 보육원 안으로 돌아갔다.

루치드는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이제껏 자신은 저 아이들에게서 동질감 같은 건 느끼지 못한 채 생활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수도 좋은 친구라고만 생각했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 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이유는 하나였다. 자신은 부모가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안계시지만, 어머니는 멀쩡히 살아계셨다. 단지 어머니가 자취를 감춰서 지금 자기 곁에 없을 뿐. 동생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자신은 가족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사라진 가족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결국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다가는 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부모를 잃은 아이로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온 몸에 오한이 들었다. 여전히 마법이 작용하고 있건만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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