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8화 (48/956)

충돌(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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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방학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곧 방학이 된다는 것과 학년이 끝나간다는 사실이 교내 분위기를 살짝 들뜨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즐거운(?) 방학이 온다는 사실에 들뜨고, 교사들은 지독한 페이퍼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얼굴이 들떴다. 부지런한 분들이라면 이전년도 학교생활 기록부를 수정하거나, 애들 교과 평가와 교과학습발달상황을 등록하는 일 정도는 이미 끝냈을 테지만, 대부분은 바쁜 일정 속에서 연말까지 미루고 미루다 연말 업무와 함께 몰아서 해야 될 지경이 되었다. 학기 전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학교생활기록부 작성과 마감이라는 어마무시한 서류작업은 각 반의 학생 수만큼이나 버겁고, 진급이나 졸업하는 학년들은 각기 또 다른 서류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력이 되시는 분들은 예전보다 줄어든 학생들 덕분에 요령 좋게 일처리를 하면서 방학을 준비했고, 경력이 얼마 되지 않는 선생님들은 오로지 노가다 하는 잡부의 심정으로 밤잠을 줄여가며 서류작업과 수업준비를 병행하며 학기말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1학년 3반 담임 김희연 교사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최근 눈 밑에 다크 서클이 짙게 내려앉았다. 그 와중에도 어제 저녁, 할 일이 태산이라고 투덜대며 밀린 빨래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도 나 몰라라 하시던 분이 열 일 제치고 거실에 앉아 TV를 시청했다. 왜냐하면 자기 반의 골칫덩이, 아니 전 학교의 명물로 거듭난 루치드의 공중파 출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제보로 시작된 방송이었기에 책임감의 차원에서 시청을 한 것이 한 이유였다면, 또 다른 이유로는 피곤에 찌든 몸과 마음을 잠시 풀어 줄 자기 위로의 시간, 이라는 핑계로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던 것이 또 한 몫을 차지했다.

시청을 앞두고 희연은 어쩐지 자신이 흑막(?)의 주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자신의 제자가 TV에 나와 영재로 소개된다는 사실에 조금 우쭐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내일부터 다른 사람들, 동료 교사나 학부모들이 자신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영재를 교육하는 방법이나, 영재들이 공부하는 방식이나, 그런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얻는 보람과 같은 것을 물어올지도 몰랐다.

50분짜리 방송에서 루치드는 방송 초반 MC들의 소개 이후 등장하여 약 20분간 VCR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어쩐지 희연은 그 아이가 자신이 아는 아이가 아닌 것 같은 생소한 기분을 느꼈다.

“저런 애가 아닌데. 저 정도가 아닌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목 뒤를 긁적이는 희연. 자신이 보아온 아이는 방송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재기 넘치고, 영리하며, 예상을 뛰어넘는 질문을 자주 던지는 ‘천재성’을 보였었다.

그런데 방송에서는 달랐다. 말하자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똑똑한 옆집 아이정도로 불릴 평범한(?) 아이처럼 보였다. 초등학교 1학년이 물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소개 멘트 이후 진행된 간단한 테스트에서 일차방정식을 어렵지 않게 풀어내며 대단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데는 성공했다. 그런데 그 이후 아이큐테스트에서는 생각보다 높지 않은―영재라고 불리는 아이들이 가진 아이큐에 비해 낮은 수준의 테스트 결과를 보여 의아한 생각을 품게 하였다. 과학고 물리학 선생님을 만나서는 이런 저런 수업을 받는 태도만 보여주더니 빗면마찰력 실험을 보여 아이가 감탄하는 모습 외에는 별 다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루치드는 정확한 수치가 조율되며 진행되는 실험에 감탄을 한 것이지만, 그걸 모르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겨우 저걸로? 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영상 말미에 물리선생님은 조금은 어정쩡한 태도로 마지막 인터뷰에 응했다.

“초등학생이 주변의 신기한 현상과 과학적 지식에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당연하지 않아! 우리 반 애들 중에 호기심 가진 애는 그 녀석 밖에 없다고요!

“하지만 그것을 호기심에 그치지 않고 전문적인 분야까지 공부를 해서 알려고 하는 욕심은 쉽게 보기 힘든 것입니다. 특히 초등학생이라면 놀라운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초등학생이 아니라고!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한지 1년 밖에 안 된 애라고요.

“저 어린이가 보여준 열정과 노력이라면 앞으로의 모습이 무척 기대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응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아이는 천재다, 놀랍다, 대단하다, 국가와 사회가 나서서 도와야 된다, 라고 왜 말을 못해요.

희연은 어쩐지 심심해져 버렸다. 아이에 대한 자신의 기대가 너무 높았던 탓인지, 아니면 이 아이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자신의 착각이었는지 방송은 재미가 없게 끝나버렸다. 혹시 자신만 그렇게 느낀 것인지 궁금해서, 방송국 게시판을 찾아 들어갔다.

―방금 나온 아이, 예전 SNS에 나온 책 읽는 아이 맞나요? 잘 생겼네요.

―혼혈인가요? 꼬마 주제에 콧대가 나보다 높아요.

―눈동자 색깔이 묘한 것 같은데, 조명 때문인가요? 아니면 제가 잘못 본건가요?

―물리학에 관심이 많은 아이, 라는 소재가 이제 좀 식상한 듯. 게다고 오늘은 조금 억지스러운 면이 있었던 것 같음. 억지로 아이를 영재라고 포장하려 한 듯.

―1차 방정식 풀 줄 아는 초등학생이 없나요? 얘만 풀 줄 아는 건가요?

자신은 익숙해서 몰랐는데, 사람들은 아이의 외모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게시글이 아이의 ‘잘생긴’ 외모에 편중되어 있었다. 더러 아이의 실력에 대해 언급한 게시글이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영재’라는 기준에 못 미친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사실, 글이 많지가 않았다. 방송이 생각보다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던 것일까? 희연은 차라리 이 시간에 빨래나 할 걸, 하는 생각을 하며 책상 한 쪽에 밀어 뒀던 서류들을 끌어안았다. 묵은 빨래가 점점 더 숙성되고 있었다.

****

“장PD, 다른 제보 들어온 아이들 많잖아? 다음 회차 준비해야지.”

“다음 회차 때부터 잘하면 되는 거고. 너무 미련 갖지 말고, 낙담도 하지 말고.”

“시청률이 다는 아니잖아. 우리 아이들의 미래, 우리 대한민국의 교육문제도 잘 짚어낸 방송이었어. 괜찮았다니깐. 너무 실망하지 마.”

“장PD님, 죄송해요.”

마지막으로 편집실을 찾아온 막내 작가 나연이 울기 직전의 얼굴로 찾아와 사과했다. <영재를 찾아서>라는 프로가 시작되고 가장 낮은 시청률, 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 주 자동차 브레이크 등만 보고도 무슨 차인지를 맞추고, 경찰을 도와 도난차량을 알아내던 영재의 회차에 비하면 4%가 내려앉은 시청률이 나왔다.

“니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래. 다 제대로 연출하지 못한 내 잘못이지.”

연출보다 소재가 더 중요한 프로그램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청률 폭망의 원인을 막내작가에게 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말 작정하고 얼굴 파는 작전을 썼더라면 오히려 시청률이 더 잘 나왔을 수도 있으니까. 결국 연출의 잘못이었다.

사실 장PD로서도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연말이라 일정이 빡빡해 재촬영이 어려웠고, 게다가 누구도 예상 못한 일도 벌어져서 수습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일 덕분에 장PD는 시청률을 토막 냈어도, 윗선으로부터 제재를 받지 않았다. 그래도 억울한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아 괜히 혼자 속앓이 하느라 편집실 바깥으로 나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

“사장님, 구했습니다.”

“아, 이게 그 영상인가?”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비서가 내민 USB와 서류철을 받아들었다.

“예. 방송에는 내지 못하게 막았습니다만 대신 협찬 광고를 하나 붙여주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했습니다.”

비서가 금테안경을 추켜올리며 성과를 보고했다. 제품 특성상, 주 타겟층이 보는 시간대가 아닌 곳에 광고를 낸다는 것은 그냥 돈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식으로 방송국에 억지로 광고를 붙이는 대신 은밀한 뒷거래를 하여 방송국이나 회사가 각자의 이득을 취할 때가 있었다.

이번에도 회사입장에서는 불리하게 작용될 영상을 내보내지 않게 되었기에 만족스러웠고, 방송국에서는 시답잖은 영상 하나 편집해서 광고하나를 얻어냈으니 만족스러웠다. 장PD가 시청률 토막의 책임을 지지 않은 것은 덤이었다.

“영상 분석은 했고?”

“예, 미리 과학고에 요청해서 받은 실험 데이터와 영상을 비교하여 1차 분석을 마쳤다고 합니다.”

“1차분석이라니?”

서류철을 들추려다 비서를 바라봤다.

“실은 저희도 처음에 들은 결과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이 사실 아닙니까? 한 번의 영상분석으로 사태를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조금 따른다는 판단입니다.”

“그래서?”

“차후 다른 실험과 병행해서 좀 더 정밀분석을 해보기로 연구진이 알려온 상태입니다.”

“만약 그 영상 속 실험 결과가 사실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해당 실험은 고작 3회 정도 시행되었을 뿐입니다. 때문에 실험 데이터 자체의 신뢰도는 의심스러운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계수가 정확하다고 가정한다면··· 저희 제품보다 7배는 더 우수한 전달효율을 보이는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7배라.”

“만약 방송에서 그 장면이 조금이라도 나왔다면 입소문을 타고 시장점유율이 뒤바뀔 수 있을 만큼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데이터 말이야, 사실 말이 안 되는 거지?”

“예. 저희 연구진들의 의견 역시 그 데이터를 의심했으니까요. 문제의 촬영 이전에도 그 쪽 제품을 실험해 보지 않은 게 아닌데, 갑자기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 하니 저희 연구진이 많이 당황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영상 증거가 확실하고 증인들도 여러 명 있으니까요.”

“······.”

비서는 몸을 바로 세우고 헛기침을 했다.

“일단, 연구진들에게 맡겨보고 차후 다시 보고를 받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저 쪽 회사는 모르나?”

“아마, 모를 겁니다. 저희도 촬영현장에 박 이사님 자제분이 있었기에 우연히 알아낸 것이지 않습니까? 그 아이가 영민하게도 결과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저희 쪽에 연락을 주었기에 막을 수 있었습니다.”

사장은 USB를 집어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나중에 박 이사랑 밥 한 끼 먹어야겠군. 아, 장학금도 한 번 알아보고. 연구소에는 빠른 시일 내에 결과물을 내라고 해요.”

사장의 종합적 지시사항에 비서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

방학이 다가오는 것과 동시에 또 하나의 큰 행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크리스마스. 보육원에서는 12월 초부터 준비한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이곳저곳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현관 앞에 있는 작은 조경나무들에 꼬마전구가 걸리고, 실내 복도에는 갖가지 종이꽃과 트리모루들이 장식되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보육원이라고 바깥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여러 복지가들이나 자원봉사자들, 지원기관의 협조로 풍요로운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있게끔 준비되고 있었고, 아이들 역시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행사 등을 기대하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루치드 역시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사실 방송에 나간 이후, 더욱 물리학에 애정을 갖게 되었고 좀 더 심화된 공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졌다. 하지만 방송 촬영 자체는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이동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많다보니 너무 효율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을 봤다면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을 텐데.

방송보다 즐거운 일은 보육원 안에서 생겼다.

“우와, 이거 봐봐. 되게 많다.”

“여기 만화책은 없나?”

“이런 건 석고나 좋아하는 책인데. 별로네.”

보육원 안에 도서관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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