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7화 (47/956)

충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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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정 시간 일정 부분의 온도를 루치드의 뜻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다른 마법도 마찬가지였다. 마찰이든, 불이든, 확대든 오랜 시간 마법시연을 할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마법이 무효화되든지, 취소가 되었다. 단, 예외적으로 오랜 시간 마법시연에 성공한 적이 있었는데, 이전에 ‘불의 장벽’을 만들었을 때였다. 돌이켜보면, 그 때 꽤 오랫동안 ‘불의 장벽’이 유지되었던 것 같았다. 대신 몸에 힘이 급속도로 빠졌던 것을 보면, 분명 마법의 반작용이 있었음을 추측해 낼 수 있었다.

어쨌든, 루치드는 또 하나의 마법에 성공했고, 그 사실이 마냥 뿌듯했다.

10분의 쉬는 시간이 끝날 무렵, 루치드는 교실로 들어왔다. 의자에 걸쳐진 보라색 잠바가 보였다. 마법을 시연해내면서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보다 신기한 것은 이 세계의 과학문명이리라. 오랜 시간, 오랜 경험들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문물들이 마법의 효용성을 무력하게 만들고 있는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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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번에 실시한 아이큐 테스트에 대해 간단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살짝 긴장한 듯 보이지만, 몇 번 연습을 했었는지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질문에 답하는 의사선생님이셨다.

“예, 이번 아이큐테스트는 웩슬러 지능 검사라고 부르는 테스트로 가장 범용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입니다. 특히 우리 어린이가 받은 검사는 6세에서 15세까지의 아동들이 받는 ‘웩슬러 아동지능검사’(WISC)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 아이가 받은 점수가 124입니다. 124라고 하면 보통 상위 7% 안에 드는 우수한 IQ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흔히 영재라고 부르는 아이들의 IQ가 130이상의 상위 2%에 속하는 경우임을 감안한다면, 이 어린이는 영재라고 부르기는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결과에 가장 실망한 사람은 다름 아닌 제작진. 왕작가는 스토리를 궁리하고 장PD는 영상을 채우며 시간을 끌었다.

“좀 더 자세하게 결과 분석을 해주신다면?”

장PD가 조 작가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 부분은 자막으로 처리하라, 는 뜻.

“아, 사실 검사 결과를 살펴보면 거의 다수의 부분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습니다. 특히 산수, 어휘, 이해와 같은 언어성 검사에서 높은 두각을 보였습니다. 반면 동작성 검사는 대체로 평범한 수준보다 조금 높은 정도의 점수를 얻었습니다. 이 검사를 통해 보아도 이 어린이가 평소 독서를 자주 하면서 인지, 지각, 이해에 대한 부분이 훈련이 많이 되고, 동시에 많이 발달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독서와 아이큐 발달이란 키워드에 동그라미를 치는 왕작가 옆에서 장PD가 연필로 선을 쭉 긋더니, ‘평범한 영재’와 ‘노력하는 영재’라고 빠르게 써내려갔다.

왕작가가 장PD의 뜻을 빠르게 캐치했다. 생각해보니, 원래 천재이거나 영재인 것보다는, 독서를 통해 영재 수준의 아이가 되었다는 ‘후천성 영재설’이 훨씬 좋은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병원에서 촬영을 마친 제작진은 서둘러 이동할 준비를 했다. 다음 장소는 서울과학고였다. 다행히도 제작진은 과학고 물리 담당 선생님께 촬영 협조를 얻었다. 예전에는 촬영 협조라고 하면 다들 거리낌 없이 해줬는데, 요즘은 시국이 워낙 흉흉해서인지 TV에 나오는 걸 많이 꺼리는 분위기다. 덕분에 제작진만 열나게 뛰어다니며 캐스팅부터 로케이션까지 촬영 협조를 부탁하는 신세였다.

승합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에게 나연이 물었다.

“아침부터 검사받느라 피곤하지 않니?”

“괜찮아요.”

“그래? 오늘따라 날이 더 추워져서 말이야, 누나가 너무 미안하네. 다음 촬영만 끝나면, 오늘은 모두 끝날 거야. 참을 수 있겠지?”

춥지는 않았다. 아이큐 테스트라는 것도 재미있었다. 다음 촬영은 과학고의 물리 선생님을 만난다고 귀띔을 들었는데, 더 재미있지 않을까? 피곤하기 보다는 기대가 더 많이 됐다.

“자, 모두 탔어요? 출발합니다.”

과학고에서는 멀쑥한 차림에 단정하게 빗은 머리, 굵은 안경테를 쓴 선생님이 실험실 앞에서 제작진과 루치드를 반겼다.

“물리학에 관심이 많다고?”

똑똑한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며,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교사의 운명이며, 숙명이고, 자부심이라고 생각하는 물리 선생님은 루치드에게 포근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예.”

“최근에 어떤 걸 공부하고 있니?”

“지금은 온도의 변화에 대해 관심이 가는데, 책이 없어서 제대로 공부하고 있지는 않고요. 그 전에는 마찰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어요.”

조금은 안타깝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아이가 제대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분야를 계속 공부할 수 있겠지만, 듣기로는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아이라 제한이 많다고 했다.

“음, 그럼 혹시 궁금한 게 있어?”

“몇 가지 있는데요. 우선 마찰력이 필요한 분야와 필요하지 않은 분야에서 마찰력이 어떻게 응용되는지, 실제 사례들을 많이 알고 싶어요. 그리고 마찰계수가 극단적인 상황에서 어떤 변화들을 관찰할 수 있는지도 궁금하고요. 예를 들면, 모터의 축이 돌아갈 때 마찰에 의해 에너지가 손실된다고 하는데요, 만약 마찰계수가 0이 돼서 마찰에 의한 에너지 손실을 거의 0으로 조정할 수 있다면 모터의 에너지 효율이 올라가겠죠? 근데 그 효율이 영구기관에 준하는 효율이 될 수 있는지, 아니면 다른 요인 때문에 영구기관이 불가능한지도 알고 싶어요.”

이 아이 뿐만 아니라 물리학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구기관’에 대한 환상을 꿈꾸기 마련이지. 이런 걸 보면 또 어린 아이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초등학교 1학년이라고 했지.

하지만 물리 선생님은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인해 루치드와 같은 영재나 천재에 준하는 아이들을 여럿 본 경험이 있었다. 당장 이 과학고에 재학 중인 아이들만 해도 개중에는 정말 뛰어난 지성을 뽐내는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우선 마찰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힘과 에너지에 대해 알아야 할 것 같은데, 힘과 에너지는 공부를 해봤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자세히는 모른다고 해야 될 것 같아요. 제가 아는 게 어느 정도인지를 비교해 볼 수가 없어서요. 다만 책을 읽다보면 개념이 헷갈릴 때도 있고,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어서 제가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란 사실은 알고 있어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꽤 진도가 나간 셈이라고 칭찬해주고 싶구나. 그럼 선생님이 우선 힘과 에너지에 대한 설명부터 해줄게. 그러고 나서 니가 말한 마찰력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괜찮지?”

“네.”

장PD는 다소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문답들을 보며, 잠시 편집 방향을 고민했다. 분명히 이 아이가 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 아니 또래의 수준을 뛰어 넘는 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아이큐가 영재 수준으로 높지는 않지만, 적당히 의사의 소견을 곁들이고 스토리를 만들어낸다면 ‘노력파 영재’라는 수식어 정도는 타이틀에 걸 수 있을 거 같았다.

문제는 지금 진행되는 방향이 의외로 심심해보일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뭔가 임팩트가 필요한데, 그 임팩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다른 스태프의 의견이 궁금해서 고개를 돌리는데 왕작가와 눈이 마주쳤다. 왕작가의 눈에서 걱정의 빛이 보이는 것을 보니, 자신과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깐 쉬었다가 가겠습니다. 괜찮죠 선생님?”

“예, 뭐 그러세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선생님은 자기 옆에 앉아 있던 루치드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더구나. 혼자 공부 했다며?”

“아뇨,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지, 이해를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이해를 못해도 계속 공부하다보면, 이해가 될 날도 올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중학생 형들이나 고등학생 형들은 이런 거 다 이해하고 공부하는 거잖아요.”

물리선생님이. 촬영 전, 제작진에게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저 아이는 지식욕이 꽤 강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의외로 루치드는 조바심을 내지 않았고, 꾸준한 근성도 가지고 있음을 물리선생님은 알게 되었다. 그러니 괜히, 더 많이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혹시 장래 희망이 뭐야?”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왜?”

“제가 좋아하는 것과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니까요.”

어쩐지 아까부터 자신의 아들을 생각나게 하는 화법이었다. 어쩌면 보육원 생활이 저 아이가 자유롭게 자신의 꿈을 꾸는 것에 제약을 걸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리학을 특별히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어?”

“음··· 물리학은요, 주위에 보이는 현상들의 진실을 파헤치는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진리를 알아야, <라티오>에 접근이 가능하고 마법구현을 할 수 있으니까,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잘 한 일이었다. 물리선생님은 루치드에게서 자신의 아들과 같은 증상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그것이 ‘중2병’이라는 증상임을 루치드가 알게 된다면, 마음의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겠다.

물리선생님은 촬영이 재개되기 전까지 중2병 증상을 보이는 환자, 아니 초등학교 1학년과 소소한 질문을 주고받았다. 그 동안 장PD와 왕작가는 급하게 대책회의를 열었다.

“저 아이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되지 않을까요?”

왕작가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당장 스토리를 만들기에는 버겁다. 지금도 후배작가들이 머리를 굴려보고 있지만, 자갈 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보기에는 영상에 임팩트가 부족하지 않아요?”

“그럼 진짜 얼굴이라도 팔아야 하나?”

다양한 앵글로 아이의 얼굴을 촬영하는 방식을 통해 외모를 부각시켜 시선을 끌어보자는 이야기. 카메라 감독은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지만 장PD는 아니었다.

“얼굴도 한계는 있어. 스토리가 없으면 도리어 말이 나올 거예요. 차라리 어떤 어려운 문제를 내고 맞히는 상황을 연출하는 정도로 타협하는 건 어때요?”

“문제는 저 아이가 수학이나 물리부분이 고르게 학습된 상황이 아니어서 어중된다는 것이겠지요.”

“일단 촬영을 마저 끝내야겠어요. 학교 측에서 마냥 촬영하게 놔둘 리 없으니까요.”

언제나 시간은 자기들 편이 아니었다.

이윽고 촬영이 재개되었다. 물리선생님이 힘과 에너지를 간략히 설명한 후, 몇 가지 공식을 칠판에 적어가며 마찰력에 대해 설명하고 그 실제 응용 사례들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주었다. 루치드는 어느 때보다 집중한 모습으로 선생님의 설명을 머리에 새겨넣었다.

“잠시만, 선생님.”

장PD가 선생님을 불렀다.

“혹시 준비하신 물리 실험이 있으면 지금 당장 가능한 게 있을까요? 아무래도 이론 수업만 하면 시청자들이 지루해 할 수도 있어서요.”

“일단 준비한 실험 중에 마찰력 효율 테스트가 있습니다. 마찰계수가 다른 두 개의 실험체를 모터를 이용해 돌렸을 때 에너지 효율이 어떻게 차이 나는지를 실험하는 것입니다. 저쪽에 학생들이 미리 준비를 하고 있으니 가서 실험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장PD는 루치드에게도 동의를 구해서 바로 실험 장면을 촬영하기로 했다. 두 종류의 쇠막대를 동일한 속도로 회전하는 모터에 부착하여 회전수의 차이를 비교하고 에너지 효율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실험하는 것이었다. 정확한 수치를 산출해낼 수 있다는 점과 이를 통해 에너지 변화과정―전기에너지에서 회전에너지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손실되는 에너지의 차이 비교를 통해 마찰력이 에너지 전달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아본다.

실험 내용을 들은 루치드는 마찰계수 차이에 의한 비교를 어림짐작으로 알아보는 것이 아닌, 정확한 수치로 그 변화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흥미가 생겼다.

게다가.

“선생님, 혹시 마찰계수를 최대한 낮췄을 때의 변화도 같이 측정할 수 있나요?”

“음, 가능하지. 보통 윤활유 회사에서 많이들 실험하는 건데, 동일한 쇠막대에 특정 윤활유를 사용한 뒤, 에너지 효율을 측정하지. 여러 회사의 윤활유를 사용해서 어떤 제품이 더 좋은 효율을 내는지를 검사하기도 하고.”

“여기서도 실험 가능한가요?”

“그래, 제품 이름만 방송에 나가지 않는다면 말이야. 그렇죠? 피디님?”

피디는 기업들에서 실제 실험하는 것이라 하니 괜찮은 그림이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실험이 준비되는 동안 루치드는 잠깐 장난스러운 호기심이 생겼다. 윤활유를 사용해도 마찰계수가 낮아질 뿐, 0은 아니다. 그러니,

‘만약 마법으로 마찰계수를 0으로 만든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윤활유를 이용한 실험에 살짝 끼어들어 보면 되리라.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 계수는 루치드에게 유의미한 결과 값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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