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6화 (46/956)

충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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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형아, 내가 전에 말했지? 내가 들어오기 전에는 회의실 꼭 치우라고. 이게 회의실이냐, 돼지우리냐.”

“좀 전에 다른 팀들이 회의실을 먼저 써서······.”

“야, 야. 내가 변명하지 말고 움직이라고 했어, 안했어? 뭘 시키면 변명부터 나와? 습관 참 이상하게 생겼어? 응?”

장PD가 손을 번쩍 드는 시늉을 하자, 이에 화들짝 놀라 고개부터 숙였다.

“죄송합니다.”

“빨리 치우라고.”

막내PD가 서둘러 테이블 위의 먹다 마신 커피, 이면지, 굴러다니는 볼펜, 마커 등을 허둥지둥 대며 치웠다. 어째 새로 들어온 신입이 이렇게 어리바리해서야 뭘 시켜먹지를 못하겠다며 궁시렁대는 5년차 장수혁 PD가 가장 상석으로 가서 털썩 앉았다. 뒤이어 눈치를 보던 작가 세 명이 쪼르르 뒤따르며 자리에 앉았다.

“김 작가님, 제보 들어온 거 확인하셨어요?”

“막내가 갔다 왔어요. 나연아, 얘기해봐.”

나연이 준비해둔 사진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혹시 2~3달 전에 SNS에서 잠깐 화제가 됐었던 ‘책 읽는 꼬마’ 사진 기억하시나요? 왜 묘한 분위기 나던 꼬마 사진인데.”

“잘 모르겠는데.”

장PD가 머리를 긁적이며 테이블 위의 사진을 집어 들었다.

“잘생기긴 했네.”

“아, 저 봤어요. 그 때 보고 묘하게 잘생겼다, 고 감탄했었는데.”

막내PD가 커피 잔을 돌리다 입을 열었다.

“우리 막내가 알 정도면, 꽤 유명했었나보네?”

“예, 그때는 실시간 검색어에도 아주 잠깐 올랐었나 봐요. 아무튼 이번 제보 주인공이 바로 그 아이였어요. 이 사진은 이번에 인터뷰 갔다가 찍은 사진이고요.”

그리고 앞에 놓인 태블릿을 두드려 무언가를 급히 찾았다. 그 사이 장PD를 비롯한 사람들은 인터뷰 사진을 집어 들고 감상을 했다.

“얼굴을 보니, 잘생겼네요. 카메라 잘 받겠는데요?”

“일단 얼굴만으로 반은 먹고 들어가겠네.”

그 사이 나연이 찾아낸 사진을 들어보였다.

“여기 이것 좀 보세요. 이 아이를 모델로 한 광고.”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 아이가 책 한권을 열심히 읽고 있는 모습이 담긴, 시립도서관 광고 사진을 보여주었다.

“모델이야?”

“전문 모델은 아니고요, SNS 열풍 때 나돌던 사진이 바로 이 도서관에서 찍힌 사진이래요. 도서관에서 그걸 기회로 가을기획전 도서관 홍보 사진의 모델로 이 아이를 썼다더라고요.”

“그래, 오케이. 그건 거기까지. 이제 제보 내용 확인한 거 이야기 해봐요.”

조용히 듣고 있던 PD가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우선 제보내용 확인차 선생님과 먼저 이야길 나눴는데, 선생님 말씀으로는 아이가 보통이 아니라더군요. 교무실 선생님들도 모두 그 아이를 알 정도로 학교에서는 유명하고요. 수학을 잘하고 최근에는 물리학 계통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한 대요. 주로 독학이고요.”

“독학?”

“예, 제보내용대로 학교에서나, 보육원에서나 따로 아이를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낸다고 하더라고요. 보육원에서도 물어봤는데 보통은 선배들의 책을 빌려서 읽는 시간이 대부분이라고 하던데요. 당연히 과외 같은 없었다고 해요. 이 애도 자긴 과외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하고.”

“책만 읽었다, 라······. 테스트는?”

“일단 미리 준비한 테스트 지를 주기 전에 인터뷰를 했어요. 그런데 범상치 않은 애라는 걸 금방 알겠던데요?”

나연은 어제 인평초등학교에 갔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

상담실에 들어간 두 사람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여기는 따뜻하구나. 요즘 학교 난방이 잘 된다더니, 정말 좋네?”

“······.”

“혼잣말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우선 몇 가지만 물어보도록 할게. 이름이······.”

루치드는 딱 부러지는 어조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니?”

“아뇨. 지금 제가 있는 보육원의 원장선생님이 지어주셨다고 알고 있어요.”

“어, 그래? 이름이 너랑 어울리는구나. 아무튼, 책 읽는 걸 좋아한다고 선생님이 그러시던데, 어떠니?”

“음, 책 읽는 걸 좋아하기는 하죠.”

루치드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답을 했다.

“묘한 뉘앙스네.”

“책 읽는 걸 좋아한다, 고 표현하기 보다는 책을 통해서 공부하는 걸 좋아한다고 표현해야 될 것 같아서요.”

뭐라고 하는 거지? 순간 방심하다 사각에서 날아온 잽으로 관자놀이를 맞은 느낌에 멍해진 나연이었다.

“··· 지금 초등학교 1학년이라고?”

“예.”

확인할 필요는 없겠지만, 괜히 나이도 물어보고 싶어졌다.

“그래, 어쨌든, 그 두 개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줄래?”

“책을 읽는다는 것과 책으로 공부를 하는 것은 목적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처음 학교에 왔을 때는 책을 읽는 게 좋아서 아무 책이나 읽었어요. 위인전이나 수학책이나 과학책이나 문학책을 가리지 않고 읽었어요. 그리고 그 때는 그 책의 내용을 감상하거나 감흥에 빠지는 걸 목표로 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공부가 목적이에요. 한 분야의 지식을 얻기 위해서, 글을 읽고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목적이 다르니까 두 행위도 다르게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쩐지 다른 인터뷰를 진행해보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초등학교 1학년생이 이렇게 유려하게 논리적인 이야기를 할 정도라면, 이미 ‘천재’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방송 소재? 대박 소재였다.

“그럼 요즘은 어떤 책을 읽고 공부하니?”

“최근에는 물리학을 공부하려고 해요. 물리적 현상들에 대해 호기심이 많이 생겨서요. 그런데 물리학을 공부하려면 수학도 많이 알아야 하더라고요. 그래서 수학책도 읽는데, 제가 수학을 잘 못해서 물리학 책을 읽어도 이해하기가 아직은 쉽지 않아요.”

“수학은 어느 정도 하는데?”

“아직 사칙연산 수준이고요. 일차방정식 정도는 이해를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초등학교 1학년? 중학교 1학년 아니고?

“초등학교 1학년이 일차방정식을 한다고? 걔 중학생 아냐?”

장PD 역시 나연과 비슷한 개그를 떠올렸나 보다. 나연은 속으로 자신의 개그가 아재개그 수준임을 한탄하며 대답했다.

“어쨌든, 더 이야기 해 볼 것도 없이 걔는 방송 적합용 얼굴에 대박 소재임이 분명해요.”

장PD는 고개를 돌려 왕작가를 쳐다보았다.

“진행 스토리는?”

왕작가가 시선을 들어 올린 채, 한 손으로 펜을 돌리는 묘기를 부렸다. 검은 펜 한 자루가 손가락 사이를 현란하게 누비고 다녔다.

“우선 아이 학교생활이나 보육원 생활 좀 따고요, 인터뷰 좀 곁들이고, 아이큐테스트 받고, 과학고나 대학교에 협조 부탁해서 전문가 선생님 모시고 테스트 해보고 그러면 오케이?”

나연이 덧붙였다.

“진짜 실물로 보면 얼굴이 장난 아녜요. 딱 한국 사람의 얼굴 같지 않은 게, 그렇다고 외국사람 같지도 않고 그래서 뭔가 묘한 분위기인데 밸런스는 또 잘 맞으니까, 잘생겼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되는 얼굴이랄까? 아무튼 그런 얼굴이라서 내용 상관없이 시청률 보장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막내야, 자신감은 좋은데 얼굴 뽑아먹는 건 카메라가 할 일이지, 작가가 신경 쓸 게 아냐.”

“그래도 잘 나오면 좋죠. 기왕이면 다홍치마고, 보기 좋은 떡이 좋잖아요.”

가볍게 시선을 돌리며 나연을 무시한 장PD가 막내PD에게 촬영스케치 준비를 시켰다.

“재형아, 카메라 준비시키고. 왕작가님, 스케줄이랑 스토리 잘 따서 정리해주세요.”

“몇 분 컷으로 쓰시게요?”

“아직은 불확실하니까, 우선 20분 컷으로 가봅시다.”

우선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회의실을 나오며 조윤선 작가가 나연에게 물었다.

“그리 잘생겼든?”

“아, 언니! 대박! 진짜 솔직히, 웬만한 아역 배우들보다 훨씬, 훠얼씬 잘 생겼어! 나는 딱 보자마자 안아버릴 뻔 했지 뭐야?”

“아주 반했네, 반했어. 회의 때 스토리 아이디어는 없고 주구장창 얼굴 이야기만 한다 싶더니··· 너, 혹시 로리?”

“언니~! 무슨 큰일 날 소리예요? 그냥 애 얼굴이 계속 아른거릴······”

-찰싹

“야, 야. 그게 더 큰일 날 소리다. 애 얼굴이 아른거리는 거면 중병이네 중병.”

맞은 팔뚝을 감싸 쥐면서도 애써 자기변호를 해보려는 나연의 입을 왕작가가 막았다.

“적당히 해라. 장PD도 얘기했지만, 얼굴 파는 건 카메라나 할 일이고, 우리는 스토리 만들어야지. 나연이 너 이직하려고?”

“에이, 우리 왕작가님. 무슨 그리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요. 제가 천직이 작간데요.”

되도 않은 애교나 부리며 상황을 정리하려는 모양새가 귀엽다. 왕작가는 풋하고 웃더니 저녁이나 먹자며, 후배들을 이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

물리학을 공부하며 동시에 기초 중등 수학에 까지 이른 예비 방송스타 루치드는 얼마 전 수업 때 얻은 아이디어를 기초로 새로운 마법에 도전하고 있었다.

루치드가 ‘영재’로 주목받으면서 얻게 된 것들 중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수업시간에 딴 짓을 해도 담임교사가 제재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경호야, 선생님이 수업 중에 딴 짓하면 된다고 했어요, 안된다고 했어요?”

“근데, 석고도······.”

석고도 지금 딴 데 보고 있는데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허, 경호야. 선생님이 말씀하시잖니? 어른이 앞에 있으면 말을 잘 들으라고 했어요? 듣지 말라 고 했어요?”

“잘 들으라고 했어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억지로 답을 하는 경호였다.

“선생님 이번 한 번만 봐 줄 거예요. 우리 경호가 평소에 수업 잘 듣고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친구니까, 선생님 이번에는 그냥 봐주는 거예요. 대신 나중에 또 딴 짓하면 선생님이 진짜 벌줄 거예요. 알겠어요?”

“예.”

어쩐지 억울해하는 것 같지만, 희연은 애써 눈을 돌렸다. 이 와중에도 정신이 딴 곳을 헤매고 있는 듯이 보이는 루치드였지만, 오히려 희연은 고맙기만(?) 했다.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동안 아이들은 루치드가 질문하고 선생님이 대답을 하지 못해 얼굴이 붉어지는 상황을 보고 즐거워 했었다. 그 상황이 일종의 게임처럼 여겨졌는지 아이들은 루치드가 수시로 선생님께 질문하기를 바랐고, 뒤에서 종용하는 모습까지도 보였었다.

다행히 루치드가 금세 흥미를 잃고―분명히 흥미를 잃은 것이지, 선생님에 대해 낙담을 한 것은 아니라고 희연은 믿고 있다―혼자 고민에 빠지거나 책을 읽는 시간이 늘면서 질문을 하지 않게 되자, 희연이 곤란에 빠지는 상황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 때부터 희연은 루치드를 자유롭게 방임하였다.

쉬는 시간, 창밖을 바라보던 루치드가 외투도 입지 않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마침 옆 반의 명수도 운동장으로 나오고 있었다. 열혈소년 명수는 오늘도 10분의 휴식시간을 알차게 활용하기 위해 운동장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어, 석고야? 안 추워?”

두꺼운 잠바를 입고 뛰어나온 명수가 티셔츠 한 장만 입고 나온 루치드를 보며 물었다. 루치드가 씩 웃었다.

“어. 안 춥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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