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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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루치드는 마찰력을 응용한 마법 구현에 성공하며 잔뜩 흥이 오른 상태였다.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응용을 가할 수 있을지는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지만, 여기에만 몰입하기보다 계속 새로운 이론들을 습득하면서 다른 마법을 구현하는 것에도 관심이 갔다.
특히 물리라는 학문분야에 좀 더 많은 관심이 가면서 최근에는 그 쪽 분야로만 책을 읽고 있었다. 기웅의 책 중에서 『물리야 놀자』와 같은 제목의 책은 무조건 빌려서 읽어보고, 학교 도서관에서도 ‘물리’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일단 읽고 보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고, 이해가 전혀 되지 않아 그냥 넘어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런 부분마저도 자신의 지식을 늘리는 과정이라 생각하면서 즐겼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인지, 아니면 그냥 날씨가 유난을 떠는 건지, 가을이 되기가 무섭게 겨울이 와버렸다. 시기적으로는 늦가을 정도라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느새 길에는 패딩차림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극성인 부모들은 목도리까지 둘둘 말아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고, 그런 아이들은 교실이 탈의실인 냥, 들어오자마자 훌훌 벗어젖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요즘 교실에서는 히터가 빵빵하게 나왔다. 그게 아니더라도 교실 안에서 친구들과 책상 사이를 요령 좋게 지나다니며 술래잡기 몇 번 하고 나면, 땀으로 등이 젖을 지경이 되었다.
엊그저께 2학기가 시작된 거 같았는데, 어느새 2학기도 한 달이 남았다. 1학년은 국어, 수학 외에 통합 과목으로 여러 가지를 배우는데 이번 시간에 배우는 과목은 ‘겨울’이었다.
“자, 오늘은 사랑의 온도계 놀이를 할 거예요.”
담임이 맑은 미소를 띠며, 큰 목소리로, 우렁차게 외쳤다. 어지간한 목소리는 아이들 잡담소리에 묻힌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체득한 3년차 선생님의 변화였다.
“여러분, 이제 다음 달이면 12월이에요. 12월은 무슨 계절이죠? 그래요. 겨울이에요. 겨울에 대해서 말해 볼 사람?”
적절히 아이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참여를 독려하는 스킬이 익숙해진 3년차 선생님이셨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다친 친구를 도와주거나 이웃돕기 성금을 내거나, 길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행동들이 모두 봉사를 하는 행동인거예요. 특히 겨울에 추워서 덜덜 떠는 사람들이나, 먹을 게 부족해서 배를 곯는 이웃들을 돕기 위해서 자선모금들을 많이 하죠? 우리 것을 조금 나눠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베풀고 돕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행동들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좀 더 밝고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있게 되는 거랍니다, 여러분. 알겠죠?”
“예!”
“자, 그럼 선생님이 이 종이 온도계를 여러분에게 나눠줄 거예요. 여기에 여러분이 생각하는 나눔과 봉사의 방법들을 적어 봐요. 아래 칸부터 한 칸씩 적어나가면 점점 온도가 높아지겠죠? 이렇게 높아진 온도만큼 우리 교실에도, 우리 집에도, 우리나라에도 따뜻한 사랑의 온도가 높아지는 거예요. 아시겠죠?”
아이들에게 ‘나눔과 봉사’의 의미를 직접적인 사례들을 보여주며 가르친다. 아이들이 직접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을 스스로 생각하게끔 만든다. 나눔과 봉사의 생활에 대해 동기부여가 되도록 아이들이 발표하는 내용들과 경험담들을 격려해주면, ‘바른 생활 과목’이 지향하는 기본 생활 습관 형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나아가, 학교와 교실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공간에서도 ‘실천’의 습관을 들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이 단원의 목표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짝과 함께 선생님이 내주신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수다를 떨고 있을 때, 루치드는 다른 문제로 생각에 잠겼다.
얼마 전 루치드는 책을 읽다가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자신은 ‘불’이란 것을 ‘물’이나 ‘공기’와 유사한 갈래로 이해를 했었는데, 사실 불은 순수한 물리학적 ‘현상’이었던 것이다.
‘고열의 빛을 방출하는 연소 현상’
루치드는 고민에 빠졌다. 분명 자신은 깨달음을 통해 불을 ‘구현’해 낼 수 있었다. 적어도 자신은 불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었고, 지금도 당장 손바닥 위로 엄지 손톱만한 불꽃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불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했다고 착각했음에도 불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루치드는 마법을 배울 당시 핀체노가 한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법사는 구현해낼 <포르마-원형>의 고유성질을 온전히 이해하고 숙지해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포르마>를 현실에 구현해낼 수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고유성질을 모르는 <포르마>는 구현할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루치드가 이해하기로는 구현해내려는 대상의 고유성질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의 설명이었다. 고유성질을 모르는 원형(原型)은 실체화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자신은 지금까지 불을 ‘물질’의 한 종류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마법이 가능했지?
루치드는 손바닥 위에 놓인 불꽃을 관찰했다. 분명, 의심의 여지도 없이, 불이었다. 그런데 가만 살펴보니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자기가 읽은 책에서 불은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했다.
‘산소 또는 산소의 공급원, 가연성 물질, 발화점 이상의 온도’
그런데 지금 루치드의 눈에 보이는 불꽃에는 그 세 가지 요소 중 하나인 ‘불에 탈만한 물질’이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를 태우고 있다는 느낌 없이, 허공에서 빛과 열을 내는 현상을 지속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다시 예전의 기억을 돌이켜보았다.
“보통의 의지 가지고는 안 되지. 초월적인 의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칙을 아우름과 동시에 그 법칙을 넘어서라도 해내겠다는 의지. 다른 모든 잡념을 떨치고 단 하나, <컨슈메>를 해내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가능하지.”
핀체노는 마법의 구현에 필요한 의지에 대해 그렇게 설명했었다. ‘모든 법칙을 아우르’면서 동시에 ‘법칙을 초월’하는 의지.
“어쩌면!”
마법은 분명 <라티오>라는 공간에서 ‘원형’을 빌려오는 행위라고 하였다. ‘이미’ 존재하는 원형에는 속성과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조건이 붙지 않는 원래 모습 그대로가 바로 원형이란 의미.’
거기에 대해 속성이나 법칙을 부여하는 것이 마법사의 역할이었다. 마법사가 부여하는 조건들은 고유의 원형을 침해하지 않는다.즉, 마법사가 설령 물을 진득한 것으로 착각한다고 해도 물의 제대로 된 고유 성질만 이해한다면 마법사가 원형에 부정확한 정의를 내린다고 하더라도 물은 구현될지도 모른다. 아니 구현될 것이다. 그 오해마저 아우르며, 동시에 ‘초월’된 의지에 의해서 말이다.
불을 처음 구현해 낼 당시 루치드는 추위에 떨었고 죽은 늑대 앞에 앉아 있었다. 그때 처음 떠올린 고유성질은 빛이었다. 그 다음이 뜨거움, 즉 열이었다. 그 이후에도 불에 관한 고유성질을 찾느라고 이것저것을 떠올렸던 기억은 있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머지 것들은 불의 고유성질이 아니라 불의 가변조건들이었으니까. 고유성질에 대한 이해는 원형과 맞닿게 되고, 그 원형을 이미지화(化) 시킴과 동시에 초월적인 의지로 구현. 불의 마법은 그렇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의외의 깨달음은 다시 수업시간 중, 선생님의 설명을 듣던 와중에 이어졌다.
선생님이 교과서에 제시된 다양한 사례의 봉사활동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이게 봉사활동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봉사활동이란 무엇인가, 라고 정의를 내린 뒤 그 정의에 맞는 사례를 찾는 것은 다르다는 인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봉사활동의 정의에 맞춰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사례들을 찾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다. 막연히 다양한 사례들을 모아놓고 이것이 봉사활동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순환 논법의 함정이다.’
연역과 귀납의 차이는 마법을 연구하는 방법론에도 이어졌다.
‘열의 다양한 물리적 속성―에너지의 이동, 분자계(界)의 운동 등―은 <라티오>라는 공간에 존재하는 원형의 고유성질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원형을 접해본 경험이 없으니까 지금 당장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열에 대한 정확하고 보편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다면, 다양한 성질들을 접하더라도 고유성질에 대한 기준―보편성과 고유성에 의거, 원형 이미지의 구현에 도움이 될 것이다.’
고유성질인지 아닌지, 그 확인은 단순한 성질의 나열로만 판단할 수 없다. 이미지 구현의 성공여부에 따라 고유성질을 확인할 수 있다.
‘끊임없이 이미지를 만드는 실천도 병행해야 한다. 충분히 구현 가능한 이미지가 만들어지면 ‘초월적인 의지’로 구현하면 된다.’
결과적으로 루치드는 지금까지 잡식성 포식자처럼 이것저것 읽고 공부한 덕분에 자신의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이 깨달음 자체가 나중에는 거대한 딜레마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린 루치드가 이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공부와 시간이 필요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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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잠깐 이야기 좀 할래?”
희연이 가방을 싸고 있는 루치드에게 말을 꺼냈다.
“예?”
“사실은 선생님이 방송국에 제보를 했거든. 그래서 널 취재하고 싶다고 하는구나.”
“저를요?”
“사실 선생님이 부족해서 널 많이 도와줄 수 없었잖니? 부끄럽게도 말이야. 그래서 혹시 방송에라도 너의 사연이 나가면 널 도와줄 수 있는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선생님이 제보를 했어. 만약 방송에 나간다면 너를 후원해주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고, 아니더라도 널 위해 모금이 될 수 있어. 그렇게만 된다면, 니가 하고 싶은 공부나 니 수준에 맞는 수업들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몰라. 어떠니?”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왜냐하면 방송이라는 게 어떻게 진행될지, 그 내용이나 과정 자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루치드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만 이해했을 뿐이었다. 사실 그 부분이 가장 솔깃한 부분이기도 했다.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게 된다니.
“일단 보육원에도 이야기는 해뒀는데, 너한테 이야기하는 것은 선생님이 직접 하기로 해서 이렇게 하는 거란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돼. 대신 며칠 뒤에 방송국에서 작가 한 명이 와서 너랑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구나. 그 때 작가랑 이야기를 나눈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거야.”
방송에 관한 자세한 내용들을 그 작가로부터 들을 수 있다고 덧붙이는 담임의 설명에 루치드는 일단 작가를 만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며칠 뒤, 겨울 방학을 2주 정도 앞둔 12월의 어느 날. 방과후 수업을 마치고 나온 루치드는 방송국에서 왔다는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새침한 표정이 언뜻 보이지만, 대체로 수수한 옷차림에 털털한 느낌이 있는 20대 중반의 여자 작가였다.
“반가워. 난 이나연이라고 해. 선생님한테 이야기 들었지?”
“예. 안녕하세요.”
“그래. 가만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자리를 옮기자. 복도에서 계속 이야기하기엔 할 이야기가 좀 많아서 말이야.”
마침 나연의 뒤에 있던 선생님이 둘을 상담실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