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4화 (44/956)

충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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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짙어지면서 원내에 몇 안 되는 단풍나무에도 물이 깊게 배어들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많이 떨어져 원생들의 건강관리에도 경계신호가 들어왔다. 그래서 생활 지도원들이 보육원 내의 위생시설이나 환경 점검에 부쩍 신경을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여름 중에 새로 들어온 신입 생활 지도원 윤보람 선생님 역시 환경 점검의 일환으로, 저녁의 찬 공기가 실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각 층 복도의 창문들을 잘 닫혔는지 점검하고 있었다. 실내 환기를 위해서 열어놓았을 창문들을 찾아 단속을 하며 돌아다니던 보람은 일을 끝내고 상담실로 돌아왔다.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창가에 당직 보육 교사 한 분이 서 계셨다.

“선생님, 뭐하세요? 저녁 드시러 가셔야죠?”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 보람이 들어온 줄도 몰랐었나 보다.

“아, 윤 선생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원래 신입은 고참의 눈치를 살피기 마련. 고참의 심기가 불편하다면 그에 맞춰 눈치껏 행동해야 하는 것이 직장인의 바른 태도, 라고 생각하며 물음을 던졌다.

“아, 아뇨. 걱정은요.”

그러나 뜸 들이는 것도 잠시.

“사실은요. 우리 애 때문에요.”

보육교사는 팔짱을 풀며 한 숨을 내셨다.

“사실은 말이에요. 우리 애가 핸드폰을 사달라는데, 그게 한두 푼이어야 말이죠. 사실 요즘 애들이 스마트폰 가지고 노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버티고 있었던 건데, 이제는 사줘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드네요. 어제 집에 갔더니 애가 절 붙잡고 하소연을 하더라고요. 자기 반에서 핸드폰 없는 사람이 자기 밖에 없다면서 그러더니 눈물까지 보이잖아요. 창피하다고.”

“몇 살인데요?”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에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벌써 스마트폰을 쓴다고요?”

보람이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자, 니 마음 내가 안다, 는 것처럼 피식 웃었다.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빠른지 선생님이 몰라서 그래. 윤 선생님도 나중에 시집가서 애 낳고 길러 봐요. 우리 때랑 아주 달라요. 선생님 때랑도 많이 다를 걸요? 우리 애도 보면 한글 떼기도 전에 인터넷을 하질 않나, 애 아빠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는데 잡으면 2시간이에요. 처음에는 우리 애가 천잰가 싶었다니깐. 알고 보니까 요즘 애들이 다 그렇대요. 어떤 애들은 인터넷으로 쇼핑도 한 대요. 정말 요즘 애들 보면 정말 하루에도 몇 번이나 깜짝 놀라는지 몰라요.”

요즘 아이들, 이란 말에 보람은 고개를 돌려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원생들을 바라봤다. 이제 곧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인데도 저 아이들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 마냥 뛰어 다니며 공을 차고 있었다. 보람의 시선을 의식한 보육 교사 역시 고개를 돌려 그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 아이들은······. 그래요. 요즘 아이들 같지 않은 아이들이죠. 순수하고 영악하지도 못하고 선생님이 시키면 다 예, 하고 잘 따라주죠.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니 불쌍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우리가 더 노력해야 하는 거예요. 저 아이들을 지켜주기 위해서.”

보람은 허리 뒤로 손을 가져가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순수하거나, 영악하거나 한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는 여기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말이에요. 다만 저 아이들이 그 흔한 피시방도 가지 못해서 저 곳을 뛰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사회로부터 격리된 아이들이란 생각이 드네요.”

‘격리’라는 단어에 격하게 얼굴을 굳히는 보육교사. 몸을 돌려 보람과 마주 섰다.

“격리는 아니죠. 우리는 저 아이들을 ‘보호’하는 거예요. 이 사회가 얼마나 흉흉해요? 저 아이들은 이 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이예요. 당장 거리로 내몰린다고 생각해봐요. 소매치기, 앵벌이, 도둑 등 온갖 범죄에 노출될 지도 몰라요.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아이들에게도, 이 사회에도 비극적인 일이고,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겁니다.”

보육교사는 단호한 어투로 말을 맺었다.

“저는 저 아이들이 이 곳을 졸업할 때까지 무사히, 건강하게 잘 자라나주길 바라고, 또 그걸 도울 거예요. 최선을 다해서. 그러니 윤 선생님도 항상 긍정적인 마음과 태도로 우리 아이들을 봐 주세요.”

보람이 보기에 이 선생님은 자기 일에 대한 직업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 저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것에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는 듯 했다. 어쩌면 오래도록 일하면서 생긴 고집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람에게 저 아이들은 많은 걸 포기당하고 살아야 하는, 그저 불쌍한 아이들이었다. 누구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싶지 않을까. 누구는 인터넷을 하고 싶지 않을까. 친구들과 피시방을 가거나 노래방을 가는 일상을 타의에 의해 거부당한 삶을 사는 아이들. 친구들과 하굣길에 학교 옆 분식점 매대에 서서 군것질 하는 것도 허락받지 못하는 아이들.

저 아이들에게는 오로지 놀이터만한 운동장에서 공이나 차는 것 밖에 허락된 것이 없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뭘 하고 싶냐고 묻지 않았고, 물을 생각도 없었다. 지금 당장 저 아이들에게 허용된 것 이상의 것을 들어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보육원 바깥은 21세기인데, 이 아이들은 18, 19세기 삶을 사는 사람들 같았다.

‘어쩌면 저 아이들은 선생들도 모르게 심한 박탈감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마음을 잊기 위해 저리도 미친 듯이, 시간에 쫓겨 가며 공을 차는 것은 아닐까.’

저녁노을 깊어가는 가을 어느 날, 아네스 보육원의 신입 생활 지도원 한 명이 단상에 젖어 들었다.

****

루치드 개인은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지를 실감할 수 없었다. 다른 이들,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똑똑하다거나, 영재라거나 해도 자신이 또래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다는 생각을 갖기가 힘들었다. 사실 학교 시험에서 100점을 맞아도, 초등학교 1학년 시험 수준이 그저 그런데다가 한 반에 100점을 맞은 아이가 반 이상이 나오게 ‘설계’된 시험이었다. 여럿 중에 자기가 뛰어나다는 객관적인 근거는, 루치드가 보기엔 없었다.

특히 최근 기웅의 방에서 책을 빌려다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좀 더 많이 배워야 한다는 조바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고학년답게 가진 책들의 난이도가 상당했다. 수학은 아예 접근도 못할 정도였고, 다른 과목들 역시 중학교 교과과정을 뛰어넘은 수준이기에 초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루치드에게 그것들을 이해하란 것은 불가능한 미션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루치드는 걸신들린 거지처럼, 폭식하는 푸드파이터들처럼 난이도와 상관없이 책을 읽어 나갔다. 어려운 책들이라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도, 문장의 구성이나 글의 논리를 따라가는 연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다른 책들을 볼 때 이해가 빨라진다는 장점이 있었다.

루치드에게 기웅의 책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비쳐주는 일종의 지표였다. 저 책을 읽을 정도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은 아직 지식이 부족하고, 똑똑하지도 않으며,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한 상태, 라는 자가진단이 가능했다.

즉, 굉장히 ‘주관적’인 기준에서 루치드는 평범한 아이였다.

반면 객관적인 기준에서 루치드를 평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소년은 ‘세기의 영재’였다.

“왜 천재가 아니에요?”

희연이 육학년 담임을 맡고 있던 선생님에게 커피를 내밀며 물었다.

“천재라면 우리한테 묻지도 않고 다 알지 않았을까요? 묻기도 전에 아는 것. 그 정도는 해야 천재 아니겠어요?”

헛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받아들고는 잠시 향을 음미해보는 ‘아몽통’ 선생님.

“정말 스트레스 받아요, 걔 때문에. 수업시간에 절 빤히 바라보면 괜히 찔리는 마음까지 들더라고요. 어떤 질문을 던질지 몰라 계속 긴장해야 되고······. 그래서 요즘은 걔가 있는 쪽으로는 거의 시선을 안 보내게 되더라고요.”

“그럴 수 있지요. 사실 저도 지금까지 교직에서 10년 이상 있었는데, 그런 영재를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에요.”

“그래도 요즘은 수업시간에 질문도 잘 안하고 거의 책만 읽는 거 같더라고요. 거의 독학 수준인데, 그렇다고 수업을 들어라, 고 하기도 뭣해요. 솔직히 이대로 놔두는 게 좋은 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어요.”

‘아몽통’ 선생님은 입 안의 커피를 꿀떡 삼켰다.

“고민 많으시겠죠. 그래도 선생님. 우리가 아이들한테 단순히 지식만 가르쳐 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특히 초등학교 1학년에게 우리가 가르쳐야 하는 건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도록 도울 의무가 있어요. 다들 인성교육, 전인교육 하잖아요? 선생님이 그 아이를 바르게 지도해야 우리나라를 위해 노력하는 대들보 같은 인재가 또 한 명 나오는 거지요.”

“······.”

갑자기 교육학개론을 설파하시는 선생님의 기합에 눌려 희연은 군소리도 못했다.

“그리고 할 말은 아니지만, 만약 그 아이가 나중에 잘못되기라도 해봐요. 선생님 잘못일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걔가 희대의 사이코패스나 살인마가 되었다고 생각해봐요. 세기의 지능을 가진 천재 살인마, 혹은 천재 사이코패스. 이런 거 됐다가 잡혀 봐요. 그 아이가 초등학교 때 어떤 선생 밑에서 어떻게 교육을 받았나, 이런 가쉽거리들이 신문이고 종편이고 다 보도되고 그러지 않겠어요?”

의욕이 앞서 너무 나가신 것 같습니다, 선생님. 희연이 속으로 삭히는 동안, 본인도 무안한지 괜히 헛기침을 터뜨리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요즘은 교무실에 잘 안 나타난다면서요?”

“아, 예.”

그야 당연히, 교무실에 올 때마다 텅 비어 있는 걸 아는데 매번 헛걸음을 하면 ‘영재’가 아니지요.

“허, 혹시 또 마주치면 제대로 가르쳐 줄··· 용의는 있지만, 이제 6학년도 졸업학기라서 이것저것··· 진학상담 때문에 바쁘기도 하네요. 거 참.”

허세부리지 마세요. 선생님.

“근데 요즘도 그, 물리학을 공부하나요?”

“예, 그런데 관심분야가 조금 바뀐 거 같긴 하더라고요.”

“예?”

“한참동안 마찰력이니, 마찰계수니, 저항이니 하더니 요즘은 온도가 어떻고, 절대영도니, 분자운동이니 하더라고요.”

‘분자운동’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희연이 이를 꽉 깨물었다. ‘아몽통’ 선생님은 짐작이 간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해주었다.

“···영재는 영재네요. 아, 혹시 말이죠. 거 방송국에 제보나 해보시지 그래요?”

“방송국이요?”

“영재 아이들 정도의 소재면 방송국에서도 좋아라 하지 않을까요?”

“음”

솔깃한 이야기라고 희연은 생각했다. 부차적으로 영재를 담당한 담임으로 인터뷰를 할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런 게 방송되면 그 아이의 딱한 사정도 같이 방송 될 테고, 그러면 여론도 조금 움직여서 그 아이를 돕기 위한 성금이나 지원도 들어올지 모르고요. 이러나저러나 그 아이한테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하지만 선뜻 나서기에는 조금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다. 만약 부모님이 계셨다면 그 분들의 허락을 받거나 혹은 협의라도 해 볼 텐데.

“일단 한 번 해봐요. 제보한다고 다 방송되는 것도 아니고, 일단 와서 취재부터 할 텐데. 그쪽도 이것저것 알아보고 방송을 할 테고, 아이가 싫다하면 뭐 도루묵이겠지만 그건 그 때 생각해 볼 일 아니겠어요? 그것도 방송사에서나 걱정할 일이고 말이죠.”

잘 되면 좋고, 안 되도 별 일 없을 거다? 희연은 진지하게 생각해보겠노라 대답했다.

‘방송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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