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3화 (43/956)

충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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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름방학이 끝났다. 최초의 방학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루치드 개인에게는 그 사이에 6개월의 추가된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거의 8개월에 가까운 방학―정확히 말하자면 6개월의 사회생활과 2개월의 방학―을 경험한 셈이어서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

교실에 들어서니 오랜만에 보는 반 친구들이 루치드를 반겼다. 그 중에는 경은과 형오도 있었다.

“오~ 모델!”

아이들은 시립도서관의 광고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깔깔대며, 환호하며, 발을 구르는 아이들의 환영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찾아갔다.

둘러보니 아이들은 방학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잊은 것처럼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형오는―이제 더 이상 반장은 아니다―언제 그랬냐는 듯 만화책 한 권을 두고 짝이랑 사이좋게 열독하고 있었다. 경은은 루치드와 눈이 마주치자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보였다. 루치드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교실 바깥 화단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하얗고 조그만 별꽃들이 지고, 그 자리에 열매가 맺히고 있었다. 나쁜 기억은 잊고 즐거움을 되찾은 반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 했다.

개학 이후에도 루치드는 여전히 독서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친 듯이, 까지는 아니지만 섣불리 방해하지 못할 정도로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 학생들과 선생님의 주목을 끌었다. 또 루치드는 다시 학교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시립도서관의 책들보다 질적인 면에서 조금 떨어진다 할지라도, 아직 지식이 충분히 쌓이지 않은 루치드에게는 오히려 적당한 수준의 책이었다. 때문에 공부를 하는데 모자람은 없었다. 도리어 더 넓게, 다양한 측면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깊이 있게 공부하지를 못하다보니 가끔 책을 읽다가도 궁금한 점이 생기면 자력으로 해결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학교라는 곳은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궁금증을 해결해주기 위해 대기 중인 교사가 수십 명이 계시는 곳이다. 특히(!) 언제라도 교실 앞으로만 걸어가면 답을 해주기 위해 기다리시는(?) 담임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 프리즘을 통과하면 빛이 무지개 색으로 보인다고 하던데요.”

“맞아. 책에서 읽었니?”

“예. 그런데요. 그 빛들은 색깔만 다른 건가요? 아니면 또 다른 차이점이 있는 건가요?”

“…….”

‘보통 니 나이 때 아이들은 그런 거 궁금해 하면 안 되는 거 아니니?’

라고 묻고 싶은 3년차, 하고도 한 학기를 더 보내신 담임교사 김희연이었다. 물리학을 전공하지도 않은데다가, 일반인 정도의 물리학 상식을 가지고 있을 뿐인 희연은 쉽게 답을 주지 못하고 ‘선생 노릇 하기 쉽지 않다’는 푸념만 속으로 쌓을 뿐이었다.

“선생님, 어떤 물건이 빛을 가려서 생기는 게 그림자잖아요?”

“그래, 그림자놀이도 해봤잖니?”

“예, 그런데요. 그림자도 색깔이 다르잖아요? 어떤 건 새까맣고, 어떤 건 덜 까맣잖아요? 왜 그런 건가요?”

“…….”

‘그림자 안의 그림자, 까지는 생각나는데…….’

왜 대학교 교양시간에 물리학을 듣지 않았는지 한탄스러워 괜히 가슴을 치는 초등학교 1학년 담임교사 김희연 선생님. 루치드는 선생님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지는 모양새를 보고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돌아섰다. 이제 선생님이 모든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된 소년이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교무실에 선생님들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1학년 남학생 한 명이 선생님의 손을 잡고 교무실에 나타난 이후부터 발생한 현상이었다. 여자선생님은 데리고 온 남학생을 고학년을 담당하는 선생님께 소개 시켰다. 예의 바르고 잘 생긴 남학생은 그 선생님께 질문을 던졌다.

“달리던 자동차가 마찰계수 0인 빙판 위를 지나게 되면 차는 미끄러지나요?”

“응? 어… 아마 미끄러질걸?”

“미끄러지는 상태로 빙판을 지나치게 된다는 건가요?”

“아마 그럴걸?”

“그런데 마찰계수가 0이라면 운동 마찰력이 발생할 수 없고, 회전 마찰력도 발생하지 않는 거 아닌가요?”

“응?”

“그럼 마찰력에 의한 반발력이 없으니 차가 앞으로 못나가는 거 아닌가요?”

“응?”

잠시 후, 그 선생님은 수업종이 쳤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서둘러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이후 시간이 흐른 뒤, 어느 6학년 교실에서 ‘아몽통!’(마찰력의 법칙=아몽통 법칙)을 외치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후문이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교무실 습격사건은 ‘현재 진행형’, ‘수습 불가’였다. 김희연 선생님은 자신의 짐을 동료교사에게 나눠줬고, 동료교사들은 쉬는 시간 교무실로 오는 일이 줄었다. 혹시라도 교무실에 잠시 들렀다가도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교무실을 급하게 빠져나갔다. 교감선생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가 워낙 바쁘시다보니(?) 쉬는 시간임에도 텅 비어버리기 일쑤인 교무실. 남학생은 허탕만 치고 돌아갔다.

****

점심시간, 명수가 교실에 찾아왔다. 명수가 나타난 순간 용건을 눈치 챘다. 아니나 다를까.

“축구하러 가자.”

루치드는 싱긋 웃고 같이 운동장으로 나갔다. 교내 남학생들의 반 이상이 차지하고 있는 운동장에서 공을 찬다는 것은 거의 교통사고를 예약하고 차를 모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축구라 부르고 럭비를 하는 초등학생들이었다. 게다가 운동장을 사용하는 학생들의 서열에서 가장 말단에 위치한 1학년 남학생들이 마음 놓고 뛰어다니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황. 자칫 공 한 번 잘못 찼다가 고학년 형들을 맞추는 불상사라도 일어난다면, 얌전히 교실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할 지경에 이를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대부분은 운동장 한 귀퉁이에서 서로 공을 주고받거나 뺏는 식으로 놀았다. 그러다보면 공 한 번 못 잡고 그저 구경만 하다 끝나는 경우도 허다했다.

루치드는 그 허다한 경우를 가장 많이 겪는 케이스였다. 물론 자발적 의사에 의한 관람객 모드였다. 명수도 그런 상황에서는 루치드에게 억지로 공을 차라고 하지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었고, 그런 참견을 할 시간에 공 한 번 더 차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명수였다.

그렇게 관람 모드로 바라보고 있던 루치드는 갑자기 어떤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만약, 저 공 자체의 마찰계수를 0으로 만든다면, 어떤 변화를 일으킬까?’

일단 머릿속으로 실험을 해보았다.

‘마찰은 일종의 저항이라고 했어. 그러니 마찰계수 0의 공이 날아갈 때 공기의 저항도 줄지 않을까? 땅에 붙었다 떨어질 때도 마찰이 적으니 운동에너지는 거의 그대로 보존되겠지?’

하지만 바로 마법을 시연하는 것은 참았다. 사람이 너무 많기도 했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특히 명수가 저기서 공을 차고 있는데, 확실하게 예측하지 못한 실험을 시도할 루치드가 아니었다. 루치드는 나중을 기약했다.

방과후 수업이 끝난 후, 루치드는 교실에서 나뒹구는 축구공을 들고 운동장 구석으로 갔다. 우선 벽을 향해 차보고 이후 넓은 운동장에서 차는 실험을 시도해 볼 예정이었다. 루치드는 우선 벽에서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세 걸음을 더 물러났다.

잠시 후, 루치드는 짧게 발을 구른 뒤 디딤발을 공 옆에 놓고 반대편 발등으로 공을 찼다. 가볍게. 공은 약 10m의 거리를 날아가 벽 중간쯤에 맞고 튕겨 나왔다. 잠시 공이 날아간 궤적과 속도를 눈에 담았던 루치드는 공을 주워 와 같은 자리에 놓았다.

짧게 한숨을 내쉰 루치드가 다시 세 걸음 물러난 자리에서 달려들어 비슷한 힘으로 공을 찼다. 공은 벽으로 날아가 아까 맞은 자리보다 훨씬 높은 곳을 맞은 후 튀어 올랐다.

차는 힘이 일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실험은 통했다고 보았다. 즉, 마찰 계수 0의 공은 공기의 저항을 어느 정도 이겨낸 것이다.

루치드는 넓은 운동장으로 나갔다. 고학년은 수업 중이었고, 저학년은 대부분 집으로 돌아간 시간이어서 운동장에는 몇 되지 않는 아이들만 있었다. 그 중에 명수도 있었지만 한 쪽 골대에서 다른 친구들이랑 몸싸움을 벌이며 공을 뺏고 뺏기는 놀이를 하던 터라 루치드의 등장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운동장 가운데로 간 루치드는 저 멀리 놓인, 아이들이 없는 골대를 목표로 정했다. 공을 내려놓고 아까와 비슷한 힘으로 차 보았다. 공은 빠르지는 않지만 기이하게도 쭉 뻗는 궤도를 그리며 나아가더니 40m 가량 떨어진 골대의 위쪽 포스트를 맞고 팅겨 나왔다. 결코 노린 것은 아니지만 신기한 장면이긴 했다. 루치드는 괜히 머쓱해서 눈썹을 긁었다. 그런데 마침 그 장면을 본 사람이 있었다.

“헉!”

수업이 따분해서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던 6학년 형근이었다. 운동장이 멀어 공을 찬 사람이 누군지는 정확히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그 아이가 찬 공이―빠르지도 않으면서―길게 뻗어 가더니 골포스트를 맞고 하늘 높이 팅겨 올라가는 장면은 턱이 빠질 만큼 신기한 장면이었다.

그 아이는 공을 주워 와 다시 운동장에 가운데 놓았다. 그리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뜀박질을 시작해 공을 찼다. 아까와 달리 지면 위를 낮게 스치며 날아갔다. 그런데.

“허억!”

형근은 이 보다 놀라운 장면은 볼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껏 살면서 저보다 빨리 날아가는 공은 보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프로축구 선수들이 찬다는 ‘캐논슛’이 아마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맨 눈으로 바라본 중에 가장 빠른 공이 방금 운동장을 가로질러 골대를 향했었다. 게다가 그 공은 그물을 뚫을 듯이 밀고 나가, 그물 아래가 거의 들리다시피 했다.

“김형근!”

선생님이 부르지 않았다면 형근은 계속 그 공이 보인 궤적에 마음을 빼앗겼을 것이다. 선생님은 얼이 빠진 제자를 위해 친히 몽둥이를 들어 참사랑을 실천하셨다.

루치드는 공을 챙겨 교실에 갖다놓았다. 공이 날아가는 궤적을 통제하기 위해 일부러 세게 차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왔다고 자평했다. 공의 마찰력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공이 날아가는 속도나 궤적의 변화가 유의미하게 변했음을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 공을 차면서 전해진 운동에너지가 그물에 닿을 때까지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확한 관측 장비가 있었다면 좋겠지만, 일단은 이런 식으로 테스트를 해 봤다는 것에 만족했다.

캐논슈터 루치드는 등장과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 어쩌면 그의 재등장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로 알려진 임명수에게 달렸을지도 모른다.

****

“야, 나가자. 사람이 부족하다니깐.”

명수가 책상에 앉은 루치드 옆에서 예의 칭얼거림을 시전했다.

“시간 늦었어. 조금 있으면 저녁 시간인데 그러다 선생님한테 혼나.”

루치드는 창밖으로 해거름이 되어 점점 붉게 물드는 하늘을 쳐다봤다.

“그 전에 오면 되지.”

이제 곧 저 하늘은 보랏빛으로 변할 것이다.

“학교에서 계속 축구하고 있었던 거 아냐?”

명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건 학교고, 여긴 원이잖아.”

예전에도 느꼈지만, 명수에게 논리학을 들이대는 건 참 못할 짓일 것이다. 루치드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랍게도, 자취를 감췄던 캐논슈터는 사라진 그날, 재등장을 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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