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0화 (40/956)

오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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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루치드는 이른 아침부터 외출을 준비했다. 지도원 한 명이 붙어서 씻기고 입혔다. 가진 옷이 많지 않아 고르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저 깨끗한 이미지면 된다는 윗분의 지시가 있었지만, 루치드의 평소 생활은 조선시대 선비의 환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숙하고 고아하였다. 때문에 소년의 옷들 대부분이 단정하고 깨끗해서 딱히 손 볼 게 없었다.

이후 보육교사와 함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오늘의 촬영은 세트장 안에 준비된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촬영하는 것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기껏 골라온 옷은 금방 벗어 던졌다. 스태프-코디네이터가 미리 준비해 둔 여러 벌의 의상들을 번갈아가며 입기 위해서였다.

스튜디오 한 편에서 미리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 입고, 헤어메이크업을 받고, 스태프가 건네 준 책을 받아 들고는, 스태프들이 조명을 키고, 사진작가가 현장을 최종 조율한 뒤 촬영이 시작되었다. 내심 책 한 편 읽고 있으면 금방 끝나겠지, 라는 마음으로 차분히 있으려고 했다. 하지만 현장은 각종 소음과 번잡한 움직임으로 인해 방학식이 열리는 학교운동장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혼잡하고 북적거렸다.

고개를 들고, 약간 숙이고, 허리 세우고, 어깨를 약간 왼쪽으로 기울이고, 립밤 한 번 바르고, 머리를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책상 각도를 체크하고, 조명 한 번 바꾸고, 카메라를 반대편으로 이동하느라 루치드는 책을 제대로 펼칠 여유가 없었다.

촬영 중간 중간에 쉬는 타임이 있을 때면 여자 스태프들이 찾아와서 같이 사진 찍자고 들러붙고, 밥 먹을 때도 핸드폰을 들이밀고, 의상을 갈아입다가도 불쑥 내밀어진 렌즈를 바라보며 표정을 굳혀야 했다.

정신없이 사람들의 지시에 따르다 보니 어느새 촬영이 끝이 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스태프들이 서로의 수고를 격려하고 인사를 하는 사이에 루치드는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보육교사는 루치드를 차에 태우며 물었다.

“수고 많았어. 재미있었니?”

재미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정신이 없었다. 아예 혼이 빠져나간 인형이 되었던 것 같았다. 덕분에 스태프가 건네준 책은 한 페이지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사실은 책 제목도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

촬영을 끝내고 돌아온 날 밤, 루치드는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원장이 해 준 길고 지루한 이야기 중에 루치드를 고민하게 만든 주제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내 꿈은 무엇일까?’

원장과의 면담자리에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느라 제대로 곱씹을 여유가 없었다. 지나고 나니 머릿속에서 그 질문만이 꽃을 찾는 꿀벌처럼 맴돌았다.

돌이켜보면, 가족의 실종 이전부터 루치드는 딱히 꿈이란 것을 갖지 못했었다. 가질 생각조차 못했던 삶이기도 했다. 나무꾼? 약초꾼? 장사꾼? 사냥꾼? 어느 것도 자신의 꿈은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 가족들의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숲을 들락거렸을 뿐이었다. 이곳으로 온 뒤에는 변화된 사회와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매일 분투를 벌이다시피 신경을 곤두 세우고만 있었다. 마법을 배웠을 때도, 딱히 마법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진 않았던 것 같았다. 무슬라의 죽음 이후에는 자신의 힘이 약하다는 사실에 절감하며 조금이라도 많은 것을 배우고 힘을 기르자는 생각에 미친 듯이 공부에 몰두했지만, 그것을 자신의 ‘꿈’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루치드는 명수에게 물었다.

“넌 꿈이 뭐야?”

“나? 난··· 부자가 될 거야.”

“부자?”

“응, 그래서 우리 집에 운동장을 만들 거야. 하루 종일 친구들이랑 놀 수 있게. 그때는 너도 마음대로 운동장에 나와도 돼.”

“그렇구나.”

루치드는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첫째, 명수는 친구가 운동장에 나오지 않는 이유를 누군가가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은 운동장에 나가서 놀고 싶어 한다’는 전제가 성립해야 하지만, 명수에게 논리학을 들이대는 우행(愚行)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둘째, 명수는 꽤 소박하지만, 그래도 ‘꿈’을 가지고 있었다.

“어, 어, 근데 또 난 옷가게 사장도 할 거야. 그래서 맨날 멋진 옷 입고 다닐 거야. 너도 하나줄게.”

셋째, 명수는 착하다.

“아, 그리고 슈퍼마켓도 할 거야. 그래서 맨날 과자 먹을 거야. 매일 다른 거 먹을 수 있으니까.”

넷째, 명수의 꿈은 끝이 없었다. 그리고 저렇게 꿈 많고 소박한 아이가 범죄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

동인은 그 날 이후, 말수가 줄었다. 학교에서나 보육원에서나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생활하지만, 입을 여는 횟수는 확연히 줄었다. 학교 친구들은 그저 가을이니까,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보육원에서는 티가 나게 말문을 닫아 걸어서 보육교사나 지도원 선생님들의 걱정을 샀다. 트레이드마크 같았던 환한 미소도 그 이후에는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무슨 일 있니?”

괜히 걱정이 된 생활지도원이 동인에게 물었다. 동인은,

“아니요.”

라고 말하며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사실 동인은,

“소미가 그렇게 된 건 니 책임이 아니란다. 너무 마음 쓰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사실은 자신이 소미에게 잘못했다. 자신이 그녀를 ‘걸레’로 취급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그렇게 심한 말로 ‘모욕’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계기가 어떻든 결과적으로 소미는 더 이상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잘 된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인은 마음 한 구석에 바위를 얹어 놓은 듯 답답함을 느꼈다.

소미는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차라리 소미가 그 자리에서 화를 내거나, 혹은 소리라도 질렀다면 뭐라도 정리가 되었을 텐데. 동인은 그 날 이후 엉망으로 쓰러진 도미노 게임같이 난장판인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그 사건에 대해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친구들의 태도가 변함이 없었지만, 보육원 내에서는 어쩐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들이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 또래들, 형이나 누나들. 보육교사와 지도원 선생님. 모두 자신을 한심한 녀석, 못난 녀석, 나쁜 놈으로 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어쩌면, 학교에서도 알지도 몰라······.’

그래서 웃고 있기가 힘들었다. 말 한마디도 꺼내기가 무서웠다.

“뭘 잘했다고 떠들어!”

“너 뻔뻔하다?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가 있어?”

“사람을 그렇게 몰아세우고 몰랐다고 하면 끝이야?”

“그렇게 당당하게 이야기 하더니? 왜 물먹은 휴지 꼴이야?”

모두들 한 목소리로 ‘니가 소미를 쫓아 낸 거야!’ 라고 몰아붙이는 것 같았다.

“아니야! 난 소미를 보호해주고 싶었다고!”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동인의 속앓이는 계속되었다.

방학이 끝나기 하루 전, 보육원 현관 알림판에 광고지가 하나 걸렸다. 동인은 식당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눈에 띄어 바라보니, 시립도서관 홍보용 광고였다. 잘 생긴 소년이 진지한 얼굴로 책을 보고 있었다. 소년에게서 묘한 분위기가 흘러 나와 계속 바라보게 만드는, 그런 광고였다.

예전에는 저 아이를 잘 몰랐다. 원래 보육원내에서 활발하게 교우관계를 가졌던 것도 아니었고, 가끔 오가다가 마주친다 해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 날 이후, 저 아이를 잊을 수 없게 되었다. 경찰과 함께 법원을 떠나려는 소미에게 달려간 유일한 아이. 소미를 붙잡고 안부를 묻던 모습, 그리고 그 아이를 바라보던 소미의 표정까지.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바라볼 때와 전혀 다른 표정과 눈빛을 저 아이에게 보냈다.

어쩐지 자신의 것을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도둑맞은 느낌. 강탈당한 기분. 자신은 이렇게 엉망인데 저 아이는 자신의 것을 빼앗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렇게 광고까지 찍고 얼굴을 팔고 다녔다.

마침, 그 아이가 식사를 마치고 보육원 현관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동인은 그 아이, 루치드를 쳐다보았다.

명수가 루치드 옆에 매달려 칭얼대고 있었다.

“같이 나가자. 나도 도서관 갈래. 도서관 가고 싶어.”

그럴 리가. 그냥 보육원 바깥으로 외출을 나간다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하지만 루치드로서는 명수를 나가게 해 줄 권한이 없다.

“선생님한테 말해봐.”

“니가 말해줘, 니가. 나랑 같이 도서관 가고 싶다고 말해봐.”

말해주는 정도는 해줄 수 있지만, 과연 선생님들이 허락을 하실지는 모르겠다.

“너는 선생님한테 졸라야지, 왜 엄한 친구한테 조르고 있어? 직접 가서 가고 싶다고 이야기해.”

언제 뒤에서 따라왔는지, 윤정이 명수의 채근을 나무랐다. 명수는 찔끔하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선생님한테 이야기하는 건 무서워요.”

“선생님이 너 때려?”

“아니요.”

“선생님이 너 괴롭혀?”

“아니요.”

“그런데 왜 무서워?”

“원래 선생님은 무서운 거예요.”

우문현답이라는 생각에, 윤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래도 외출 허락을 받으려면 직접 가서 이야기해야 되는 거야.”

시무룩해진 명수를 보더니, 마음이 약해진 윤정이 명수에게 제안을 했다.

“그럼 누나가 옆에 있어 줄 테니까, 같이 선생님한테 가서 허락받자. 알았지?”

“그냥 누나가 이야기 해주면 안돼요?”

“안 돼.”

어쩔 수 없이 명수는 누나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루치드 역시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피식 웃으며 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야, 너. 거기 서봐.”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 루치드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니, 동인이었다. 법원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루치드는 그를 기억해내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이리 와봐.”

루치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몸을 돌려 동인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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