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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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드 생애 첫 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방학 숙제도 ― 윤정의 도움이 있었다 ― 미리 다 해놨고, 방과 후 수업도 개학을 앞둔 3주 전부터는 하지 않아서 시간이 남아 돌았다. 덕분에 시립도서관을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소년은 원 없이 많은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 보육원에서 맛보지 못했던 다양한 먹거리들을 체험해 볼 수도 있었는데, 역시 윤정의 도움이 컸다. 덕분에 조금 마른 체형이었던 몸에 살이 붙기 시작했다.
어느새 개학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명수는 방학숙제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침부터 운동장에 나가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명수가 함께 놀자며 졸랐지만, 오늘 특별 면담이 있다는 이유로 도서관에도 가지 못했기에 그 핑계로 방에 남았다. 도서관에 가지 못해 아쉽긴 했지만, 그렇다고 할 게 없어 노는 것은 아니었다.
책상 위에 연필을 굴렸다. 가로 누워 또르르 굴러가던 연필이 갑자기 급브레이크라도 밟은 듯이 멈췄다. 루치드는 연필을 집어 다시 책상 한 끝에서 다른 쪽으로 굴렸다. 그리고 또 연필은 잘 굴러가다가 책상 중간쯤에서 우뚝 멈춰버렸다.
“마찰력을 최대한 높이면 멈추게 할 수도 있구나.”
루치드는 지금 물리학 실험을 빙자한 마법 수련을 하고 있었다. 임의로 정한 마찰계수를 최대한 높여 평면상에서 구르던 물체를 멈추게 하는 실험이었다. 이제까지는 ‘미끄러진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는데, ‘마찰력’을 공부한 뒤부터는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임의의 수치를 조건(챕터)으로 마찰력을 설정할 수 있게 되면서 루치드는 수학까지 활용하여 마찰력을 실험할 수 있었다.
“변수가 많구나.”
일단 마찰계수에 대해 임의의 수치를 지정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자신이 연필을 굴리는 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측정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항상 똑같은 힘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궁리를 하다가 문득 책꽂이에 꽂힌 소미의 책을 보았다.
책꽂이에 놓여 있던 책을 기울여 그 위에 연필을 놓으면 아래로 구른다. 얼마 전 ‘중력’의 힘이라는 것을 배웠다. 중력은―물체의 질량과 거리가 일정하다는 조건하에서―언제나 일정하다, 고 알고 있다. 때문에 경사각을 고정하고 지정한 위치에서 연필을 놓았을 때 적용되는 힘은 언제나 ‘중력’에 의해 일정해 질 것이다. 이럴 때 마찰력―정확히는 마찰계수―을 변화시키면서 구르는 물체의 변화를 관찰해보면 어떨까?
물리학 영재소년 루치드가 탄생하는 순간, 이라고 하면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또래들보다, 아니 중고등 교육을 포함한 이 곳의 교육 시스템 하에서 가장 진취적인 학습법으로 물리학을 공부하는 루치드였다.
아쉬운 점은 루치드가 아직 사인(sinθ)과 코사인(cosθ)을 배우지 못해서 제대로 계산을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마찰계수를 독립변수로 가장 기초적인 현상 변화 관찰 정도에만 그치고 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아쉬움과 별개로 마법의 응용력이 늘었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단순히 인지적, 추상적인 수준에서 마법을 구사할 때와 달리 정확한 수치를 지정하여 마법을 시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난이도였지만 마법의 활용도는 더욱 높아졌다.
미래의 천재 물리학자가 될지도 모를 루치드의 마법 실험은 보육교사의 방문으로 중지되었다.
“원장님이 부르시는구나.”
루치드가 보육교사에게 다가가자, 빠르게 위아래를 훑으며 소년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준 보육교사는 소년을 데리고 원장실로 향했다.
“왔구나. 거기 앉거라. 주스 마실래?”
매 번 원장실에 오면 주스를 마셔야 하는 건지 궁금했지만, 사양은 하지 않았다.
“그래, 요즘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구나. 선생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 아주 기뻤다. 사실 선생님은 말이야, 사람은 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꿈이 없으면 목표가 없는 것이고, 목표가 없으면 이 세상을 살기 힘들어. 그래서 어릴 때부터 목표를 세우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학생이 해야 할 본분인거지. 너는 학생으로서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인간으로서의 준비를 잘 해나가고 있는 거고. 그래서 선생님이 학생을 칭찬하고 싶어서 불렀어.”
칭찬 한마디 하자고 불렀을 리가 없다, 고 생각은 했지만 루치드도 이제 알만큼은 아는 아이였기에 얌전하게 주스를 마셨다. 이제는 이 주스 맛이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은 모두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지. 선생님도 그렇고 여기 함께 생활하는 형들이나 누나들도 그럴 거다. 그런데 이 세상은 사실 그게 힘들다. 예를 들어서, 이 세상에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항상 얼굴에 인상 쓰고 다니거나, 아니면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도둑질이나 하고, 그러다가 잡혀서 감옥에 가는 사람도 있어. 왜 그런 사람들이 있겠니? 그 사람들은 어릴 때 꿈이 없어서 그래. 꿈이 없고 목표가 없어서 공부도 게을리 하고 맨날 놀기만 하다 보니 직업도 제대로 못 가지게 되고, 그러다가 먹고 사는 게 힘들어서 범죄를 저지르는 거야. 선생님이 말하고 싶은 건, 바로 학생처럼 어릴 때부터 꿈과 희망을 가지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라는 거다. 그리고 학생의 본분에 맞게 열심히 공부하는 자세를 갖는 거지. 그래야 범죄자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게 되고 이 힘든 세상도 잘 이겨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야. 우리 학생은 그런 면에서 아주 모범적인 학생이라고 할 수 있어.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열심히 하잖아. 그치?”
루치드는 원장의 이야기가 ‘합리적’이지 못하다, 고 생각을 했다. 함께 방을 쓰는 명수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렇다고 그 아이가 나쁘게 변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명수는, 적어도 자신이 지금껏 살면서 겪어본 사람들 중 가장 활발하고 가장 명랑하고 가장 긍정적이며 가장 착한 친구였다. 그리고 설령 그 아이가 앞으로 공부를 안 한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범죄자가 된다는 말은 납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루치드는 이미 그런 사람들이 모여 이룬 마을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 심지어 부모님까지 그런 류의 범죄자로 단정 짓는 원장의 이야기에 루치드는 동의할 수 없었다.
“사실 우리 보육원이 학생과 같이 어려운 상황에 놓인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많이 불편하거나 힘든 부분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런 걸 불평하고 불만만 가지고 생활하는 건 옳지 못한 행동인거지. 그래서 선생님은 우리 학생이 더더욱 자랑스럽고, 또 예쁘다고 생각해. 물론 미안하기도 하지. 우리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더 많이 돕고 싶은데 여건이 되지 못해서 말이다. 그래도 선생님들이 우리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짜 부모와도 다를 게 없을 거야. 그렇지요 과장님?”
너구리가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리며 동의를 구하는데, 그 앞에다 대고 글쎄요, 라고 어깃장을 놓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과장은 그저 억지스럽지 않게 보이도록 미소를 지으며 보조 연기자 역할에 충실히 임했다.
“그리고 말이죠, 우리 학생이 이번에 도서관에 갔다가 아주 좋은 모습을 보여서 공부하는 학생으로서의 귀감이 되었다던데. 그 때문에 인터넷에서도 공부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우리 학생에 대해 바른 학생이라는 칭찬이 자자하더라고.”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대사가 없는 과장은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때문에 도서관에서 우리 쪽으로 부탁을 해왔단다.”
주스가 담긴 컵을 입에 물다가 드디어 본론? 이란 생각에 눈을 들어 원장과 눈을 맞췄다. 잠시 쉼표를 찍듯 말을 멈춘 원장이 소년의 반응에 즐거워하며 말을 이었다.
“도서관에서 우리 학생을 모델로 해서 광고를 찍고 싶다고 하네. 학생의 공부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우리 시 전체에 홍보용으로 알릴 거라는 구나. 어떠니? 아마 학생으로서는 조금 놀랄만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좋은 경험이 되지 않겠어?”
“저요?”
“그래. 뭐, 너무 부담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사진만 찍는 거니까, 그냥 잠깐 포즈만 취하면 되는 거고. 대신 이 일을 하게 되면 도서관에서 너에게 명예 홍보 대사로서 다양한 혜택을 제공해주겠다고 했다. 너로서도 명예로운 일이 될 테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거다.”
다소 어정쩡한 태도로 컵을 만지작거리는 아이의 모습에 살짝 불안한 느낌이 들었나보다.
“힘든 일은 없을 거다. 그냥 사진만 찍는 거라니까 가서 아저씨들 말만 잘 들으면 금방 끝날 일이지. 대신에··· 대신 니 사진이 인평시 전체에 널리 알려지게 되는 거란다. 신나지 않느냐? 마치 연예인들처럼 말이다.”
과장이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구리가 아무리 교활하고 정치적 권모술수에 능한 이라 해도 상대는 아이다. 아이가 뭘 원하는지를 전혀 모르니 겉만 번지르르하게 말을 포장하는 원장이었다. 빛 좋은 개살구가 딱 저 꼴을 일컬음이리라. 결국 참다못해 개입을 선언!
“혹시 뭐 원하는 거 있니? 만약 니가 도서관 홍보 모델로 활동한다면 대신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 거 같은데 말이다. 물론 우리가 들어줄 수 있는 걸로.”
보조 연기자의 애드리브가 맘에 들지 않았던 원장이 소리 나지 않게 눈치를 줬다. 과장이 헛기침을 하며 몸을 바로 세우는데 아이가 입을 열었다.
“원하는 거 말하면 들어주실 수 있나요?”
“어, 그래. 물론이지. 물론 너무 어려운 거면 우리가 들어주기 힘들지만 우리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줘야지.”
아이의 반응에 황급히 태세 전환을 시도하는 너구리는 다 들어줄 것처럼 하면서도 단서를 달았다.
“책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책을 많이 읽고 싶거든요.”
“책?”
너구리는 이 아이가 평소에 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대해 들은 바가 없어 전혀 알지 못했고, 과장 역시 잘 알지 못하지만 우선은 몇 권의 책이 얼마의 금액으로 구매가능하며, 어떤 식으로 조달했을 때 가장 효율적일지를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았다.
책 한 권으로 퉁치기에는 생색내기도 어려워 보이고, 그렇다고 너무 많은 책은 비용 절감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현 보육원의 정책상 맞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다섯 명의 인원―두 명의 보육교사와 세 명의 생활지도원을 추가하는 비용만 가지고도 이사회에서 어려운 결정을 했다는데.
“그래, 일단 알겠다. 그럼 우리가 그 소원을 들어 줄 테니 모델을 해 보겠니?”
“예, 그럴게요.”
우선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보는 원장이었다. 어차피 돈 계산은 행정과장이 할 테고, 자신은 적당한 수준에서 결정만 지으면 될 일이었다.
루치드는 꾸벅 인사하고 돌아섰다.
미래의 물리학자는 우선 시립도서관 홍보모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