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센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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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은 누구나 다 예상할 수 있는 순서대로 진행이 될 예정이었다. 인사말로 시작해서 사진 좀 찍고 법원 견학 및 재판 방청으로 진행한 뒤, 점심식사를 가질 것이다. 점심 이후로는 모의 법정 체험 및 재임 판사의 특별 강의, 그리고 마지막 저녁만찬으로 견학 행사가 마무리 될 예정이었다.
인사말은 간단히 끝났다. 어차피 나중에 저녁 만찬 때 저기 앞에 있는 시장이나 원장이나 법원장 등 높으신 분들이 함께 모여 한 마디 하시려면 빨리 빨리 진행이 되어야 했다. 때문에 최대한 간결하고 신속한 진행이 예정된 오늘의 견학이었다.
사진을 도대체 몇 장이나 찍으려는 건지 이 사람과 찍고 저 사람과 찍고 다 같이 찍고, 끝났나 싶은데, 높으신 분과 찍고 더 높으신 분과 찍고 또 다 같이 찍는다. 그럴 거면 각자 휴대폰 들고 와서 셀카나 찍고 가시지. 도대체 보육원 애들 사진을 찍어다가 어디에 써먹겠다고 그러는지 모를 일, 이라고 생각하는 보육원생들과 달리, 사실 윗분들은 이런 저런 식으로 많은 활동 기념사진들이 필요했다. 법원 홍보물에도 쓰고 사무실에도 걸어 놓고 신문에도 보내고, 몇 년 뒤 은퇴기념으로 발간될 책자에도 넣고, 정치인으로 전향해서 선거에도 나올라치면 또 어디 쓸데가 없겠는가. 결국 남는 건 사진 밖에 없더라, 라는 말이 나올 만 했다.
“석고야, 힘들어.”
덕분에 에너지 과다보유자 명수도 방전이 될 정도였다. 이제 또 이 넓은 법원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벌써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법원 순회 및 법정 견학은 소란을 방지하기 위해, 그리고 원활한 견학 활동을 위해 4팀으로 나눠서 진행하기로 했다. 팀당 8명씩으로 인원을 나눈 뒤, 인솔직원을 따라 아이들은 법원 내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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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경, 오랜만이야?”
등 뒤에서 불린 이름에 돌아보니 인평일보 소속 기자였다.
“아, 양기자님. 오랜만입니다. 법원에는 어쩐 일로?”
“나? 오늘 여기서 복지행사 있다고 해서 스케치 뜨러 왔지. 최순경은 근무 시간 아닌가?”
최순경이 보기에, 양기자가 자기 본류의 것도 아닌 복지행사 관련 기사를 쓰기 위해 이 곳에 왔다는 것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없는 말을 지어내는 투도 아니고 능청스런 얼굴로 되묻는 양기자에게 무슨 사정이 있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아, 실은 오늘 재판이 하나 있는데, 거기 참고인으로 부르더라고요.”
“어떤 거? 아, 혹시 강간미수사건?”
최근 인평시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사건 중의 하나가 강간미수 사건이었다. 피의자가 술에 취한 여성을 데리고 공원 화장실로 끌고 가 강간을 하려다가 순찰 중이던 경찰에게 걸려 도망을 가다 체포된 사건. 당시의 여성이 미성년자라는 점에서 논란. 술집에서 먼 공원까지 오게 된 경위와 그 과정에서 제지를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논란.
“예. 그 때 제가 최초 현장 발견자였거든요.”
“오호, 그럼 최순경, 이번에 경장 되는 건가?”
“아뇨,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뭐, 이렇게 열심히 하시니 조만간 최경장님이라고 부를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어. 그 때 모른 척하면 안 됩니다. 최경장?”
양기자의 너스레에 최순경이 부끄럽다는 듯이 손사래 치며 웃었다.
“아, 참. 양기자님도. 저도 이제 알 거 다 아는데, 너무 애 취급이시네요.”
“미안, 미안. 그냥 오랜만에 봐서 반갑기도 하고 해서 그냥 농담이나 한 마디 한건데 뭘 그러나. 그래도 진짜 나중에 시간되면 밥 한 번 먹자고. 오케이?”
최순경은 사람 좋은 얼굴로 악수를 청하는 양기자의 손을 마주 잡았다.
법원 순회를 하던 중, 루치드는 417호 법정 앞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파란 제복의 최순경이었다. 이 세계로 와서 가장 처음 본 얼굴. 그리고 사회복지사에게 넘겨지기 전까지 하룻밤을 함께 보냈기에 기억에 남은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먼저 나서서 인사할 정도는 아니라 여겨 지나가려는데, 최순경이 먼저 얼굴을 보고 아는 척을 해왔다.
“어, 너. 오랜만이다.”
아는 척 하는 얼굴을 두고 모른 척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서 쭈뼛대며 인사했다.
“예,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있지? 아저씨가 워낙 바빠서 너희 보육원에 한 번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시간을 못 내서 미안했었는데, 이렇게 얼굴 보니 반갑구나.”
“예.”
“오늘 견학 온 거니?”
“예.”
계속된 단답형 대답에 머쓱하기도 하고 더 이상 물을 질문도 없었던 최순경은 그냥 잘 지내라라는 인사를 끝으로 아이를 보내려 했다.
“누굽니까? 아는 사인가요?”
뒤에 서서 바라보던 양기자는 최순경이 보육원 아이를 보고 아는 척 하는 게 신기했다. 별로 접점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만약 접점이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호기심이 간다. 경찰이 안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사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랜 기자 생활의 노하우랄까. 게다가, 아네스 보육원이잖은가. 양기자는 미소 띤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아, 예. 예전에 인평공원 ··· 아니 좀 인연이 있어서요. 이 아이가 아네스 보육원에 들어갈 수 있게 좀 도울 수 있었거든요.”
“으흠. 그렇군요. 아, 거기요. 저 인평일보 기잔데요, 이 친구들 지금 어디 가나요? 만난 김에 따라가서 사진이나 하나 찍어놓게요.”
인솔직원이 길막(?) 중인 기자를 못마땅하게 여겨 누가 봐도 인정머리 없다 싶은 어투로 툴툴거리듯 대답을 했다.
“법원 견학이요. 민사법정 관람이 있습니다.”
물론 어투 가지고 마음 아파할 양기자가 아니었다.
“아, 그래요. 그럼 최순경. 이만 헤어지자고. 난 이친구들 따라갈게.”
“예, 그럼 다음에 시간 되면 한 번 뵙죠.”
“그래, 자네도 수고하시고.”
돌아다니기도 귀찮고, 바로 앞에 법정도 있고, 이제 막 만나 기자 끌고 이리 저리 가는 것도 마땅치 않고, 그래서 직원은 417호 법정으로 아이들을 인도했다. 마침 공개 재판이 열리기 직전이었던 417호 법정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배석해 있는 상태였지만 아이들이 앉을 수 있게 몇 몇 사람이 양보해준 덕에―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양기자의 설명이 덧붙여지기도 했던 탓에 8명을 자리에 앉힐 수 있었다.
“아, 이 사건이네.”
417호 법정은 강간미수사건이었다.
“이거 애들이 견학해도 되는 거요?”
“어차피 공개재판이고, 잠시 보다가 나올 거라서 상관없을 거예요. 변호사 모두진술까지만 보고 나올 테니까요.”
직원이 무심한 태도로 양기자의 질문에 답했다. 속으로만 혀를 차던 양기자는 대충 거리를 잡고 아이들을 앵글에 담았다. 잠시 후 판사가 입장했다. 판사는 방청석 뒤쪽의 아이들을 보고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직원은 검사의 공소장 낭독과 변호사의 모두 진술이 끝나면 퇴정하겠다고 알렸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변호사의 모두 진술이 끝난 직후 아이들은 조용히 법정을 빠져나왔다. 인솔직원의 안내에 따라 법정을 나와 이동하려는데, 명수가 손을 번쩍 들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물었다.
“강간이 뭐예요?”
당황스러울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직원은 매우 노련하게, 라는 모습으로 보이게끔 태연스럽게 웃음을 보였다.
“음, 여러분 성폭력 예방교육 들어 보신 분?”
다들 손을 들었다. 초등학교는 물론이고 유치원에서부터 시작하는 교육이다. 다만 ‘강간’ 혹은 ‘미수’ 혹은 ‘치상’ 등의 용어를 들어본 적이 없던 저학년 아이들이기에 저런 질문이 나왔다. 직원은 조금 전 기자의 질문에 답할 때와는 달리 아이들의 질문에는 친절하게 대답을 해줬다.
“폭력이나 협박으로 반항하지 못하게 한 다음 강제로 성행위를 할 경우를 강간이라고 해요. 강제적인 성행위가 상대방에게 아주 깊은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거 배우셨죠? 그런데 사람을 때리거나 협박까지 하게 되면 그 죄가 더 무거워져요. 그래서 강간은 아주 무서운 죄목이랍니다.”
이정도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임기응변을 칭찬하던 직원은 이어진 다른 아이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렸다.
“아까 검사님이 말씀하시길, 화장실에서 증거가 나왔다고 했는데 그게 뭐예요?”
이래서 이런 종류의 재판은 비공개로 해야 된다. 아니면 이런 재판에 애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던지. 직원은 자신이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사실은 잊은 듯, 괜히 법원의 시스템을 탓했다.
“그건 여러분들이 몰라도 되는 내용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옆에서 핸드폰을 보던 기자가 힐끔 쳐다보는 것을 느꼈지만 그냥 무시했다.
“그 이상의 이야기들은 아직 어린이 여러분이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일 수 있다고 생각이 드네요. 좀 더 자라서 많은 이야기와 교육을 받고 난 뒤라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정액이라도 나왔겠지.”
같은 팀으로 편성돼 함께 다니던 중학생 형이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복도 여기저기를 쳐다보던 중, 여기 실내 디자인 별로네, 라는 말을 꺼내는 모양새로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불량기 가득한 얼굴의 학생을 째려보던 직원에게 다시 손을 번쩍 들며 질문을 하는 용감하고 호기심 많고 진취적인 명수.
“정액이 뭐예요?”
직원은 괜히 단어만으로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와중에, 해맑은 얼굴로 호기심을 풀어야겠다는 눈빛을 보내는 용감한 명수의 질문에 난감함을 느꼈다. 직원이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꼬마야, 나중에 너희 형한테 물어봐라. 저 형이 잘 알려줄게다.”
양기자가 직원의 곤란함을 읽고 도움을 주었다. 은근히 이 코믹한 상황을 더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어린 애들 앞에서 고생하는 직원이 불쌍하기도 해서 한 마디를 던진 것이다.
“냄새나는 거 있어.”
중학생은 저기 저 벽에 얼룩이 있네, 같은 어투로 대답했다.
‘아, 저 얄미운 주, 중2병 말기 환자 같으니라고!’
직원은 티가 나게 인상을 쓰며 더 이상의 대화가 진행되지 않도록,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으로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여러분, 일단 이 앞에서 떠들면 안 되니까······.”
“너도 알잖아.”
중학생은 옆에 서 있던 학생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난데없이 툭 던져진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린 여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