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4화 (34/956)

크레센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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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이 앞에서 갑자기 차가 좀 막혀서 말이죠. 이거 참 늦어서 죄송합니다.”

행정과장은 너스레를 떨며 기다리고 있던 인평일보 기자 양희봉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유 별 말씀을. 저도 이제 막 왔습니다. 보니까 저 앞에서 공사를 하던 거 같더라고요. 도로가 깨졌나 봐요.”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는 양희봉은 지역신문의 정치부 담당이다. 말이 정치부지, 사실 인평시 정도의 지역에서는 그냥 다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복지서비스의 안정적 기여가 사회 전반적인 생활수준 향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평시’를 비롯한 지역사회 각 기관들의 적극적인 협조는 환영할 일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보육사업 지침상 보육시설과 지역 기관과의 상호 연계는 필수였다.

“가령 향토 박물관 견학. 각 지역의 역사와 향토성, 문화적 가치의 존속을 목표로 건립되지요. 그리고 이를 통해 문화적 자산과 활용, 사회적 연대성의 가치 상승이 기대됩니다.”

“뭐 그렇겠죠. 교육적으로나 지역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나 의미는 있겠죠.”

기자의 심드렁한 태도를 지적할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본론으로 들어가기 좋게 끼어 넣은 애피타이저 정도였으니까.

“지역사회 복지서비스의 활용도를 높이고 효율적인 복지프로그램 운영을 홍보하면, 지자체의 이미지 개선도 되고, 복지 서비스 확충에 관련된 자금 마련에 이득을 취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번 일의 경우에는 좀 다르다는 느낌이 오더군요.”

“예, 다르더라고요. 저도 그냥 넘어갈 뻔 했죠.”

“벌써 알아보신 거군요.”

기자는 술잔을 들어 눈높이에 맞췄다.

“예. 사실은 우리도 모르게 사고가 하나 났더라고요. 웬만하면 저희 후배들이 캐치했을 일인데 꽤나 잘 감춘 사건이었어요.”

노란 빛이 산란되어 눈을 어지럽히는 크리스털 잔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입에 털어 넣었다.

“혹시 어떤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비어버린 술잔을 채워주면서 행정과장은 기자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룸의 조명 때문에 그런지 기자의 눈매가 꽤 날카롭게 벼려져 있다는 인상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고약한 인상인 셈이다.

“사건 자체는 별 거 아니더라고요. 그냥 흔하디흔한 횡령.”

“…사람이 별거겠죠. 대상이든 저지른 사람이든.”

희봉은 컵을 빙빙 돌리며 안의 술이 얼음과 잘 섞이도록 했다. 시원할 때 마셔야 제 맛, 이라는 지론이 있었다.

“시장 친척 이예요. 외가쪽. 모르면 그냥 먼 친척이겠거니 했겠는데, 의외로 관계가 깊었나봐요. 검찰이 주변 인물 탐문 중에 시장과 밀접한 선이 있다는 걸 알았다나 어쨌다나. 아무튼 중요한 건 뭐 시장이 횡령범을 구하려 한다, 는 정도로 요약되겠네요.”

“그런데 왜…….”

“왜 보육원 행사를 벌이는 게 그 쪽과 관련되느냐, 는 거죠?”

희봉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3주 뒤라고 했던가? 견학이? 아무튼 다음 달 월요일에 법원 심리가 시작 돼요. 그런데 그 전에 좀 접선이 필요 했나 봐요. 판사랑. 그런데 그냥 만나도 될 일인데 왜 큰 판을 벌여서 잔치를 하느냐? 이번 시장이 연임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그 때문에 쫓아다니는 기자들이랑 시선이 좀 있더라고요. 이번 일을 조용히 만들기 위해서 여기저기 힘 좀 쓰고 다니는데 들키기라도 해봐요. 거기다 요즘 식당이나 여기나 눈들이 보통이 아니잖아요? 괜히 대접받니 마니 하면서 눈총에 맞느니 아예 판 벌이고 보는 거죠. 공식적인 듯 공식적이지 않게.”

“그런데 기자님은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요? 시장 쪽에서 알려줬어요.”

“예?”

“아니면 제가 지금 이런 룸에 와서 과장님이랑 있는 게 정상이겠어요? 법 하나 제대로 만들어진 덕분에 얻어먹을 거 못 먹고, 입을 거 못 입고 그러는데. 이번에 시장 친척이란 놈이 제대로 일 벌여준 덕분에 저도 입 좀 축이게 된 거예요.”

“…….”

“제가 왜 이런 이야기 하는지 아시겠어요?”

“모르겠습니다.”

“과장님, 정 이사님 라인이라면서요?”

행정과장은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기자는 휴지를 건넸다.

“정 이사님이 또 저기 시장라인이랑 연이 있대요. 아무튼 참 이 바닥도 완전 거미줄이야. 그쵸?”

거미줄? 아니, 이 바닥은 그냥 진흙탕이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처럼 깊은 진흙탕. 두 발을 빠뜨린 채 허우적거리면 주변으로 마구 선이 뻗는다. 휘저을 때마다 새로운 선이 생기고 사라지고 생긴다.

시장의 친척이라는 사람이 얼마를 횡령했고, 거기에 시장이 얼마나 관여되었으며, 시장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워삶았고, 얼마나 많은 돈을 썼으며, 얼마나 많은 돈을 쓸 건지는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아서도 안 되는 문제였다.

기자와의 간담회가 끝나자마자 마치 짠 것처럼 정 이사로부터 전화가 와서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원장 쪽은 신경 쓸 것 없다며, 다만 법원 쪽이랑 잘 협조하라는 지시만 내리고 통화는 마무리되었다.

진실의 무게는 무거운 법, 주머니에 밀어 넣은 휴대폰이 걸리적거렸다.

루치드는 한동안 공부에만 매진했다. 아니, 공부 말고는 하는 게 없을 정도였다. 수업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남는 시간은 오로지 책만 읽어서, 어떤 지도원은 아이가 활자 중독증에 걸린 것은 아닐까 의심을 할 정도였다. 학교에서는 자투리 시간이 될 때마다 백과사전을 꺼내들고 읽었다. 주제별로 구분된 백과사전은 흥미롭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마법에 도움이 많이 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루치드는 피구라, 즉 이미지 형성에 거의 성공 직전까지 다다른 마법을 4개 정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법 구현이 가능한 정도까지는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물질에 대한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았다. 보이는 형태만 가지고 이미지를 형성할라치면 기껏해야 검은 실루엣 정도의 이미지만 만들어질 뿐이었다. 사물 구현 마법이 어려운 이유는 역시 사물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핀체노가 물을 만들어낸 것은 거의 마법사의 정점에 다다른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었다.

“거의 평생을 바쳤지. 이 마법을 위해. 그럼에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던 것을 어느 순간 물에 대한 깨달음―디아포를 얻어 구현에 성공했다. 그 순간은 정말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단다.”

루치드가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은, 자신 역시 깨달음이 아니었다면 불의 재현에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정확한 명칭을 몰랐어도 연소와 산화, 가연에 대한 개념을 의식적으로 인식했기에 마법이 가능했었다. 지금은, 적어도 불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곳에서 책을 읽던 중에 ‘연소반응’이라든가 ‘가연물’ 혹은 빛의 파장에 의한 색의 변화 등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복잡한 물질 분석과 과학적 이론의 부재로 인해 피구라 근처에라도 간 사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읽고 관련 서적들을 찾아서 지식을 보충하다보면, 언젠가는 사물 구현 마법을 시전할 수 있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희망을 가졌다.

루치드는 읽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육원이 견학을 가기로 한 월요일이 왔다.

아침부터 분주하던 보육원 앞으로 법원에서 보내온 35인승 버스가 도착했다. 아이들은 줄을 맞춰 버스에 올라탔다. 같은 버스에 보육교사 한 명과 생활 지도원 2명이 동행하기로 했다. 원장과 사무국장은 자가용을 이용해 이동하기로 했고, 행정과장은 원에 남아서 잡무를 처리하기로 해서 같이 가지 않았다. 어차피 원장 역시 잠시 얼굴만 비춰서 사진만 찍고는 나올 예정인지라 그리 오래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명수야, 바로 앉아야지. 지혜야. 너는 중학생이 돼서 동생들 보기 부끄럽지 않니? 그러니까 명수가 따라 하잖아!”

명수는 누굴 따라 한다기보다는 자의적인 충동으로 움직이는 것이지만, 굳이 교사에게 고자질할 이유는 안됐다. 다 아는 사실을 고자질할게 뭐람.

루치드는 제 자리에 엉덩이를 딱 붙인 뒤부터는 고개도 들지 않고 책을 읽었다. 『생활 속의 물리』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중학생인 형에게서 빌리게 되었는데, 빌릴 때 책이 아주 깨끗해서 페이지를 넘길 때 손 때 묻을까 두려울 정도였다. 사실 루치드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거의 반 이상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만, 그래도 읽어두는 편이 나중에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해가 되든 안 되든 꾸역꾸역 읽어나갔다.

사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다름 아닌 프라에테 때문이었다. 미끄러진다는 현상이 물리학적으로 ‘마찰력’과 관계있다는 백과사전의 내용에 깨달음을 얻은 루치드는 물리학이 현상 재현 마법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다만 아직 물리학을 이해할 만한 배경 지식이 부족해서 이해는 못할지언정 외우기라도 하자라는 심정으로 책을 붙들고 있을 뿐이었다.

루치드가 책을 읽을 때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소년이 부상을 입은 이후,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루치드에게 접근하기를 꺼려했다. 주위의 분위기에 민감한 아이들은 루치드에게서 어쩐지 위험한 느낌이 난다는 이유로 꺼려했고, 어른들은 소년의 어두운 분위기를 애써 밝게 만들어야겠다는 의무감을 느낄 수 없었기에 꺼려했다. 요컨대, 보육원 애들이 다 그렇지 뭐, 라는 정도의 선입견이 한 몫을 했다 하겠다.

그렇지만 세상엔 예외가 존재하기 나름이고, 루치드의 옆에는 예의 명수가 존재했다.

“석고야, 내리자. 다 왔다.”

명수는 가장 먼저 버스에서 내렸다. 보육원 밖으로 나온 게 마치 쇼생크 탈출처럼 느껴지는 모양인지 나오자마자 두 팔을 뻗어 하늘을 찌를 듯 두세 번 흔들었다. 심하게 들떠있는 모습의 명수를 보며 루치드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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