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3화 (33/956)

크레센도(2)

-------------- 33/952 --------------

월요일부터 3주간 방학기간 방과후 수업이 학교에서 진행되었다. 다른 아이들은 질색을 할 일이지만 루치드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지식을 쌓는 일이 즐거운 이유도 있겠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기억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게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이유가 컸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루치드가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 주말의 그 ‘사고’ 이후 아이가 부쩍 말수가 줄어든 데다가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분위기를 풍겨 쉽게 다가가기 어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단, 명수는 그런 분위기를 전혀 모르는 듯, 루치드의 옆에 앉아 재잘대면서 함께 등교를 했다.

“방학인데도 학교 나오느라 힘들었죠?”

수학선생님의 너스레에 반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 웃음이 과연 수업이 끝날 때까지 지속될지는 봐야겠지만, 당장은 친구들과 만나서 수다떠느라 기분이 좋은 상태다.

“수업시작할께요.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수학시간에 옛날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하니, 아이들의 호기심에 찬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봤다. 지난 밤, 나름의 수업준비를 하면서 아이들의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던 중 떠올린 아이디어가 제대로 먹혔다고 생각하며 선생님은 미소를 지었다.

“옛날 아주 무서운 왕이 저 더운 나라에 살고 있었어요. 그 왕은 평소에도 나라를 위한다면서 젊은이들, 어린이들 할 거 없이 마구 일을 시켰어요. 그 일이 너무 힘들고 고단해서 죽는 사람도 있었죠. 그런데 어느 날, 왕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잡아 와서 또 다른 일을 시켰어요. 벽돌을 불에 구워서 뜨겁게 만든 다음, 그 돌을 나르는 일을 시켰어요. 그렇지 않아도 더운 나라인데 뜨거운 돌을 들고 나르는 일을 하니 많이 힘들었겠죠?”

“예!”

“뜨거워서 손다쳐요!”

아이들이 잘 집중하는 것 같아 기분이 업된 선생님은 계속 말을 이었다.

“예, 그렇게 힘든 일인데도 무서운 왕은 신경도 안 쓰고 무조건 일만 시켰어요. 왕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한 사람당 9소스 씩의 벽돌을 지고 나르도록 하라. 벽돌 한 묶음은 60개의 벽돌로 되어 있어요. 그 일을 시킨 날은 사람 수의 3분의 2였어요. 사람 수와 일한 날의 수와 벽돌의 샤르 수를 모두 더하면 140이 되요. 여기서 샤르는 60소스예요. 그럼 문제예요. 몇 개의 벽돌을 운반하기 위해 몇 사람이 며칠 동안 일한 걸까요?”

갑작스레 튀어나온 문제에 아이들은 침묵으로 대응했다.

“어렵죠? 사실 여러분들이 풀기 어려운 문제예요. 그런데 이 문제는 4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만든 문제예요. 이렇듯 아주 옛날에도 사람들이 수학을 통해서 생활의 지식과 문제를 해결하는 습관을 길렀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어떤 수학자는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 혹은 생각의 방식까지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했어요. 그만큼 수학은 우리 삶과 아주 가까운 학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아주 중요해서 여러분들이 방학 때도 이렇게 학교에 나와서 배워야 하는 거예요. 알겠어요?”

말이 조금 길어졌나 보다. 아이들이 다소 시큰둥한 모습이었다. 처음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하고 바라보던 아이들의 호응에 너무 흥분했었던 건 아닌지 잠시 반성해보는 선생님 이였다.

“자, 그러면 선생님이 문제를 하나 낼게요. 같이 풀어보도록 해요.”

루치드는 선생님의 흥분과 다른 의미로 흥분했다. 수학은 ‘자연현상’, ‘사회현상’, 심지어 ‘생각의 방식’까지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선생님이 설명하시는 순간, 머릿속에서는 ‘수학 = 마법’이란 공식이 떠올랐다.

‘수학을 공부하면 마법에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사실 선생님이 말하려던 내용은 수학자 키스 데블린(Keith Devlin)의 ‘패턴 수학’을 인용한 것이다. 정확하게는 「수학은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의 패턴, 나아가 생각의 모든 패턴까지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 내린 것인데, 어찌 보면 그냥 수학에 대한 여러 정의들 중의 하나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반 상식까지 갖추기에는 많이 어리고 부족한 루치드였기에 순수한 마음으로 선생님의 말씀을 금과옥조처럼 여겨 받아들인 셈이다. 하지만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선생님이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온 내용을 각색하여 수학 문제를 푸는 동안, 다른 누구보다 집중하여 수업을 듣는 루치드였다.

방과 후 수업이 끝나고 루치드는 교내 도서관으로 향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은 그였기에 도서관에서 가장 먼저 백과사전을 찾았다. 이전까지는 책을 읽을 때 나름의 취향이라는 것이 있어, 주로 인문학 서적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마법 구현을 위한 이미지를 만드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지식 부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루치드는 그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백과사전을 읽으려고 책을 펼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명수가 데리러 왔다. 보육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방학 동안에는 학교에 오래 남아 있을 수 없었기에 루치드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학교를 나섰다.

학교 앞에는 벌써 고학년 보육원생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형근이 소미와 다영 앞에서 혼자만 재밌을 법한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고, 다영은 그 재미없는 이야기를 차마 재미없다고 이야기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들어주는 척을 했고, 소미는 대놓고 시선을 돌려 듣지 않는다는 의사를 보였다. 철용은 고학년 세 명의 이야기에 끼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이며 교문을 힐끔 쳐다보다 명수와 루치드를 발견하고 두 손을 번쩍 들어 환영했다.

뒤이어 소미도 명수와 루치드를 발견했다. 다가오는 루치드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너 많이 다쳤다며? 괜찮아?”

“···네.”

여전히 그녀에게서 희미하지만 기분 나쁜 냄새가 나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매너이기 때문에, 라는 핑계보다는 그냥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깐 나도 말하지 않겠다, 정도의 태도로 보는 것이 맞겠다.

형근의 수다에 질린 와중에 말 붙일 상대가 보여 안부라도 물으며 말을 이어 가려던 소미는 어쩐지 달라진 분위기의 루치드를 느끼고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했다.

“내가 석고 업고 산에서 뛰어왔다니까? 정말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얘 위험할 뻔 했어. 선생님이 내가 너 살린 거라고 그랬다니깐.”

생색이라도 내 보려는 형근의 말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아 괜히 뻘줌해진 형근이 철용이에게 뒷말을 붙였다.

“너 봤지? 그 미끄러운 산을 안 넘어지고 뛰어온 거?”

“응. 봤어. 내가 뒤에서 보는데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거든. 그냥 뛰는데도 미끄러워서 혼났는데 형은 미끄러지지도 않더라고.”

고학년도 아니고 저학년도 아닌 철용이가 그간 심심했었나보다. 말을 붙이기가 무섭게 호응을 하는데, 형근 못지않게 입이 근질근질 했던 모양이었다. 다영은 철용이에게서 아까 들은 이야기를 다시 듣게 생겼다. 뭐 대단한 모험을 했다고 저리 신이 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때마침 보육원의 차가 오지 않았다면 ‘형근과 철용의 뒷산 대모험’ 파트2가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파트1과 파트2가 똑같은 내용일 게 뻔해서 듣고 싶지 않았던 소미와 다영은 얼른 차에 올라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철용의 입이 풀리기 시작했을 때는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둘은 보육원에 도착할 때까지 파트2를 들어야만 했고, 차에서 내릴 때는 파트3 예고편까지 들었다.

“다음에 또 토끼 잡으러 갈껀데, 같이 갈래? 다음에는 꼭 잡을 수 있을 거야.”

“괜찮아. 우린.”

대답이라도 해줘야 인지상정. 소녀 둘은 자기 방으로 달음박질하듯 뛰어 들어갔다.

****

“견학이요?”

“예, 인평고등법원 자원봉사회에서 저희 원생들을 초청하여 법원견학 및 만찬 등을 시행하고자 하는데 어떠냐는 취지의 협조문을 보냈습니다.”

원장은 커피를 한 입 마시고, 그 뒷맛을 음미했다. 새로 들어온 커피인데 어디 품종인지는 까먹었다. 그냥 비싼 커피라는 정도만 기억해뒀다.

“당일 법원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차량을 보내주고, 저녁 만찬까지 함께 한 후 일정을 마칠 예정이랍니다.”

“우리가 먼저 협조 공문을 보냈던가요?”

“아닙니다. 하지만 지역사회 연계서비스의 일환으로 ······.”

사무국장의 원론적인 이야기에 원장은 손사래를 쳤다.

“그런 순진한 이야기가 아니죠. 보육기관에서 공문을 보내기 전에 저 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면,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거죠.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에게 영향을 주던, 저 쪽에게 영향을 주던 우선은 파악을 해 놔야지 돼요. 남들이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우리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죠. 우리도 우리 일정이 있는데요. ···혹시 우리가 일정을 정해도 되는 겁니까?”

“아, 아뇨. 실은 3주 뒤 월요일부터 수요일 사이에 일정을 잡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함께.”

“거 보세요. 우리 마음대로 일정 정하는 것도 아니고 저 쪽에서 미리 날짜까지 박은 거잖아요. 그러면 뭔가 있는 거죠. 행정과장님 한 번 알아봐주세요. 제 생각에는 아마 저쪽에서 기자들까지 불러서 성대하게 한 판 벌이려는 모양인데, 구정물이면 피하고 굿판이면 떡고물 좀 얻어먹고 그래야죠.”

멀쩡하게 사무국장이 두 눈 뜨고 앉아있는데 일은 딴 사람 시킨다. 행정과장은 고약한 심보라며 속으로만 투덜댔다. 누구는 일이 없어서 노는 줄 아시나. 귀찮은 건 죄다 내 몫이지.

“예, 알겠습니다. 원장님.”

대답이라도 잘 해드려야 저 욕심 많은 원장이 허허거리며 넘어갈 것이다.

“허허. 우리 행정과장님이 워낙 유능하시니까 우리 원이 이리 잘 돌아가는 겁니다. 그죠? 사무국장님?”

빈말에도 속 좋게 웃어야 하는 행정과장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사무국장이 피식 웃었다.

“그럼요. 저도 행정과장님 덕분에 한 손 덜게 생겨 다행입니다.”

이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는데 그 모습을 보고 원장과 사무국장이 웃음을 터뜨린다. 속내야 어쨌든 웃음꽃이 활짝 핀 어느 더운 여름 날 오후, 원장실의 풍경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