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센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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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석고 눈 떴어요!”
잠에서 깨어난 루치드는 의식을 깨우는 목소리에 신음을 흘리며 반응했다. 매우 익숙한, 그리웠던 목소리였다. 몇 번 눈을 깜빡거리며 초점을 잡으려 애썼더니, 시야에 명수의 웃음이 보였다.
“일어났어? 괜찮아? 나 보여?”
아직 일어난 거 까지는 아니고, 정신을 차리는 중이니 괜찮은지 아닌지는 좀 더 두고 보고, 보이기 전부터 네 목소리가 들리는데 더 정신없으니까 제발 목소리 좀 낮춰줘.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목이 잠겨서 그런지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모든 것을 함축하는 의미로 미간을 살짝 찌푸려주었다.
“일어나는 거야? 눈 좀 떠봐. 너 정말 잘 잔다! 다 잔거야?”
통하지 않았나보다.
“명수야, 좀 조용히 해라. 너 때문에 다시 아프겠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보육교사가 명수에게 핀잔을 줬다. 그러거나 말거나 명수는 루치드를 바라보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호기심을 드러냈다. 몸이 정상이라도 호응을 해 줄지 말지 고민을 했을 텐데 다행히 지금은 병상에 누워 있다는 좋은 핑계거리가 있었다. 깔끔하게 무시했다.
“일어났구나, 다행이야.”
다가온 보육교사가 루치드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어디 아픈 곳은 없니?”
가만히 누워 몸을 체크해봤다.
“괜찮은 것 같아요.”
루치드의 대답에 흡족해 하는 교사의 낯빛이 밝았다.
“다행이구나. 일단 오늘은 여기서 자도록 해라. 명수는 니 방으로 돌아가고.”
명수가 끼어 들었다.
“저도 오늘 여기 있으면 안돼요? 석고랑 같이 이야기할 거 많은데.”
“안 돼. 아픈 사람 괴롭히면 어떻게 쉴 수 있겠어?”
교사의 말에 명수는 너무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저 안 괴롭혀요. 그치?”
루치드는 피식 웃음이 삐져나왔다.
“전 괜찮아요. 선생님.”
“내가 괜찮지 않아요. 어차피 여긴 침대가 하나뿐이니 명수는 어서 니 방으로 가. 알겠지?”
상대가 안 되건만 괜히 실랑이를 벌여보다, 벌 받고 싶냐고 으름장을 놓는 교사의 엄포에 아쉬움 가득한 눈빛을 하고 명수는 돌아갔다.
교사가 방을 나서며 불을 껐다. 그제서야 해가 진 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루치드였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곳은 보육원 내의 양호실 이였다. 양호교사도 없는, 불 꺼진 양호실에 홀로 남은 루치드는 주위를 둘러보며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녹스’에서만 6개월을 지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는데 그간 워낙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아서 마치 6년을 보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이 현재 누워 있는 공간에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거미줄과 먼지가 가득했던 아저씨의 집 천장을 바라봤었는데, 지금은 때 묻지 않은 하얀 도배지가 발린 깨끗한 천장을 마주하고 있다. 불 꺼진 형광등을 대신해 창문으로 달빛이 쏟아져 실내를 비춰준 덕분에 주변 파악이 어렵지 않았다. 달력과 액자 속 풍경화. 동그란 벽시계, 유리문이 끼워진 서랍장, 철제 책상과 의자 등.
그제야 자신이 이 곳, 놀라운 과학문명과 발전된 지식을 배울 수 있는 ‘이 세계’로 왔음을 눈치 챘다. 현실을 파악하고 나니 주변의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푹신한 침대와 두터운 이불. 외풍은 당연히 없었고, 오히려 낮 동안 에어컨을 틀어 놨었던 건지 시원한 공기가 실내를 채우고 있었다.
자다가 깼다는 말을 떠올려보면, 당연히 자신이 눈을 떠야 할 곳은 양호실이 아닌 자기 방이었어야 하는데 왜 이 곳에 누워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가만히 누운 채로 몸을 더듬어보니 팔 다리는 제대로 붙어 움직임에 지장이 없었다. 다만 어쩐지 피곤한 기분이었을 뿐이다.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번쩍 눈을 부릅뜬 루치드. 잊고 있었다. 자신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니 조금 전까지 자신이 보고 있었던 광경이 떠올랐다.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던 스크로파의 광기서린 눈빛, 번들거리는 입과 거친 콧김을 내뿜던 뭉툭한 코. 미친 녀석이 지 몸에 불이 붙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오던 그 광경을 잠시 잊고 있었다.
죽음의 위기, 혹은 복수의 기회였다. 자신은 달려오는 그 놈을 마주 보며 질세라 악을 질러댔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일순간에 쏟아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눈을 뜬 것이다.
결국, 방금 전까지 녹스의 서편 평원에서 사투를 벌였던 그 기억을 떠올리고 말았다. 동시에 잊고 싶었지만 잊을 수 없는 장면의 기억까지 함께 떠올렸다.
“아저씨······.”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려 했다. 이불을 집어 들고 입에 물었다. 이불이 튿어질 만큼 세게 물었다.
그 밤, 루치드는 밤이 새도록 울었다. 파란 달빛이 방 안 깊숙이까지 들어와 루치드를 감쌌지만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
일요일 아침은 일반 가정집이라면 보통 느긋하기 마련이지만, 보육원은 바쁘기 그지없었다. 특히 자원봉사자들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 바쁜 보육원 직원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특히 여름방학을 맞이하며 시작된 자원봉사자들의 활동 개시로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일요일이다 보니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았다. 더군다나 내부의 모습이 외부에 공개되는 상황이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준비를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깨끗하고 시설 좋은 보육원, 원생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피는 보육원. 이 타이틀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원장의 으름장도 직원들을 빠릿빠릿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정작 자기는 골프나 치러 가고 말이지.”
생활지도원 한 명이 봉사자 예약 명부를 점검하며 투덜댔다. 전날 일어난 사고 때문에라도 입조심 하라고 으름장을 놓던 원장은 시장과의 라운딩이 예약되어 있다며 골프채를 그렇게 열심히 닦더니 오늘은 코빼기도 비출 마음이 없나보다.
“그런 강심장도 없어. 어제 그 사단이 났는데도 119에 전화도 안했대잖아.”
“애가 무사히 깨어났으니 망정이지. 어휴.”
“그런 사람이니까 원이 이 만큼 인지도를 갖고 운영되는 것일 수도 있어. 사고가 알려졌어 봐. 오늘 자봉이 아니라 기자를 맞이해야 했을걸?”
“덕분에 우리 애들이 편안하게 잘 사는 거고?”
“아니라고는 못하겠네.”
지도원 두 사람이 자기 일처럼 열심히 뒷담화를 나누면서, 정작 해야 할 일은 점점 미뤄지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무국장이 사나운 눈짓으로 째려보지만 않았다면 아예 일은 제쳐 두고 만담을 펼칠 기세였으니까.
그런 분위기와 의미는 다른지만 소란스러운 곳이 있었다. 바로 명수와 루치드가 함께 쓰는 방이었다.
“난 정말 너 죽은 줄 알았어. 너 쓰러지고 안 일어나니까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명수의 호들갑은 여전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연극 준비라도 하나 싶었을 것이다. 혼자 넘어지고 부딪치고 기절하는 시늉을 다 냈다.
“···그래서 형근이 형이 너 업고 뛰었잖아. 형 아니었으면 너 죽었을지도 몰라.”
걸핏하면 '죽음'이란 단어를 쉽게 내 뱉는 명수에게 과연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고마워요, 형.”
“괜찮아. 아무것도 아냐, 그런 거. 그보다 너 이제 괜찮아? 어제 밤에 깨어났다며?”
누가 뭐래도 초등학생 가운데서는 최고 맏이시다 보니 어린 동생들에 대한 염려가 지극하시다. 허풍만 줄인다면 꽤 리더십 있는 형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쉽다. 어제 비만 안 왔으면 형이 토끼 잡아줬을텐데.”
정말 아쉽다는 듯 한숨을 푹 쉬는 명수의 어깨를 형근이 두드려주며 위로했다.
“다음에, 다음에 꼭 잡아줄게. 어제는 우리가 준비가 덜 돼서 그런 거야.”
루치드는 갓 잡은 토끼 가죽을 벗겨 시장에 내다 팔고, 고기로 죽을 끓여 먹던 6개월을 보냈더니 더 이상 토끼를 보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형근과 명수 둘이서 대화를 주고받으며 미래의 창대한 계획을 설계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혼자만의 생각에 몰입할 수 있었다.
‘난 6개월을 보냈는데, 여기서는 고작 6시간 정도 밖에 흐르지 않았어.’
시간의 갭을 이해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 시간의 비율을 계산하기에는 아직 상식이 부족했다.
‘그 곳에서 입은 상처가 아직 남아 있어.’
어깨에는 희미해진 상처가 남아 있었다. 전날 ?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이상했지만,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고작 하루 전의 일이었으니까 ? 산에서 구르며 다친 상처라고 보기에는 오래된 상처였고, 실제로 ‘저 곳’에서 다치기 전까지는 어깨를 다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마법도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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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근과 명수는 루치드를 방에 남겨두고 나왔다.
“쟤, 어제 심하게 다쳐서 그런가? 평소보다 말이 없네.”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요?”
“아냐, 내가 보기엔 조금 분위기도 이상해. 음··· 아직 피곤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어. 석고가 공은 잘 차지만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는 애는 아니니까, 체력이 약한 거야. 그래서 어제도 그렇게 심하게 넘어진 거고. 넘어지고 나서도 정신을 못 차린 거지.”
그냥 넘어진 게 아니라, 명수를 구하기 위해 몸을 굴린 것이지만 형근은 그 부분을 묘하게 왜곡해서 말했다. 사고 직후 보육원으로 돌아와서도 정황을 묻는 보육교사에게
“명수가 토끼 보고 싶다고 졸라서 산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비가 왔어요. 잠깐 비를 피했다가요, 너무 늦으면 위험할 거 같아서 내려오는데요, 명수랑 석고가 같이 넘어졌어요. 근데 석고가 정신을 못 차리길래 제가 업어서 데려왔어요.”
라고 보고했다. 다친 아이를 업고 데려온 아이를 혼내는 교사는 없었다. 당장 혼날 일이 무서워 임기응변으로 대답을 했지만, 어느새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형근이었다. 하지만 진짜 사실을 기억하는 그로서는 깨어난 루치드가 어떤 진술을 할지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때문에 아침부터 병문안을 핑계로 명수의 방을 찾았던 것인데, 어쩐지 아이의 분위기가 무겁고 진중해서 같이 있기가 불편했다. 눈치를 보니 자기 생각에 빠져 신경을 쓰지 않기에, 명수를 데리고 방을 빠져나온 것이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루치드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한참을 침대 위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겨있던 아이는 천천히 앞으로 손을 내 뻗었다. 펼친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끔 동작을 취하고 그 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손바닥 위에 조그만 불빛이 반짝이며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