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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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무슬라와의 거리가 10걸음 정도까지 가까워졌다. 이 정도 거리임에도 무슬라가 소리치는 내용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짐승들이 내는 소리가 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만나서 들으면 되니까.
“돌아가! 가라고!”
무슬라는 산에서부터 달려오느라 호흡은 이미 숨이 깔딱거릴 만큼 거칠어진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실제로 입 밖으로 피가 터지듯이 뿜어졌다. 있는 힘을 다해 경호성을 터뜨린 무슬라는 순간 호흡이 흐트러지며 일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달리던 와중에 블랙아웃이 된 무슬라. 눈이 뒤집히며 정신을 잃은 그는 앞으로 내딛던 발이 꺾이며 넘어졌다.
무슬라가 기우뚱거리더니 앞으로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하는 순간, 루치드는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무슬라!”
무슬라의 모습이 가까워 진만큼 뒤를 쫓는 무시무시한 크기의 스크로파들도 가까워져 그놈들의 코에 붙은 붉은 혈흔이 보일 정도였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냥감을 쫓는 몬스터의 야성이 감각을 따갑게 찌르고 있었다. 툭 튀어나온 코와 옆으로 삐져나온 날카로운 묵빛 송곳니가 금방이라도 치고 들어와 몸에 구멍을 낼 것 같았다.
루치드가 빠르게 거리를 가늠하니, 자신이 좀 더 무슬라에게 가깝지만 달려오는 속도를 보자면 저 짐승들이 더 빠를 것 같았다.
일단 무슬라를 구하고 봐야 했다. 감추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비켜!”
눈에 힘을 주고 프라에테를 시전했다. 가장 앞에서 달리던 스크로파 한 마리가 앞발을 미끄러뜨리며 그대로 땅에 코를 처박았다. 바로 뒤를 달리던 놈들이 연쇄적으로 부딪히며 넘어졌다. 그러나 뒤를 따르던 대부분은 넘어진 놈들을 옆으로 피하거나 뛰어넘으려 했고, 또 개중 몇 마리는 넘어진 놈들을 짓밟고 뛰어오르기도 했다. 넘어진 놈들도 금세 몸을 뒤집고 일어나 달리던 무리에 섞여 질주를 계속했다. 목표는 무슬라가 누워있는 방향.
루치드는 연거푸 프라에테를 시전하여 그들의 질주를 늦추려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짐승들은 나뒹굴거나 부딪히며 땅으로 고꾸라졌다. 그동안의 마법 수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워낙 많은 수의 스크로파들이 달려든 탓에 그 순간이 매우 짧았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무슬라는 쓰러진 채로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잃은 것은 순간이었지만 위험은 배로 커져 다가오고 있었다. 온 몸을 두드리는 땅의 울림이 경련처럼 몸을 뒤흔들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미 산에서부터 뛰어오느라 힘을 다 쏟았던 탓이었다.
간신히 고개만 들어 바라보니 흐릿한 시야 너머로 루치드의 얼굴이 보였다. 다리를 맹렬히 움직여 달려오고 있던 소년이 뭐라고 악다구니를 쓰는 모양이지만 들리지가 않았다.
루치드 역시 고개를 든 무슬라를 바라보았다. 바닥에서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일어나요! 제발!”
그러나 그의 말을 듣는 모습이 아니었다. 넘어진 충격에 정신을 차리고 있지 못하는 것이리라. 입술을 깨물었다. 아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깨물었다. 피가 새어나왔다.
이대로는 안 된다.
루치드는 순식간에 이미지를 떠올렸다. 피구라가 만들어졌다. 서둘러 조건을 붙이기 시작했다.
챕터 1. 대상 지정.
“전부······.”
챕터 2. 범위 설정.
“내 눈 앞에서······.”
챕터 3. 특수조건 설정.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꺼져버려!”
순간 평원의 한 가운데 빛이 터져 나왔다.
성벽에 서서 스크로파의 돌진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태양이 떨어졌다고.
한순간 작열했던 빛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쉬이 시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겨우 눈을 깜빡거리며 시력을 회복한 사람들이 다시 돌아봤을 때, 그곳에 백광이 서린 불의 장벽이 스크로파의 돌진을 막는 성벽처럼 우뚝 세워져 있었다.
가장 앞서 달리고 있던 스크로파들이 불의 장벽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평원 전체를 떨게 할 정도의 비명의 합창이 터져 나왔다. 불의 장벽에 닿는 순간 스크로파들은 녹듯이 타들어갔다. 기름기 많은 털들이 타들어가며 고약한 누린내를 사방에 뿌려댔다. 뒤에서 달리던 놈들은 자리에서 멈추거나 방향을 틀어 장벽을 피하려는 동작을 취했다. 하지만 모두가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 그 뒤에서 달려드는 놈들 때문에 떠밀리듯 장벽으로 밀려간 놈들은 숯불구이가 되었다. 아니 아예 장작이 되어버렸다.
꽥꽥거리며 내지른 비명마저 불에 녹을 정도로 불의 장벽은 거세게 타올라 몬스터의 거침없던 질주를 막아냈다. 숯덩이가 되어 장벽 맞은편으로 건너온 스크로파들을 보며 사람들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갑자기 평원에 세워진 불의 장벽, 이라는 기현상을 이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무슬라는 등 뒤에서 치밀어 오르는 열기에 정신을 차렸다. 힘겹게 고개를 돌린 그 역시 겨우 스무 걸음 남짓한 거리에서 성벽만큼 높이 치솟아 타오르는 불의 장벽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루치드가 힘겨운 발걸음으로 무슬라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아저씨. ···괜찮아요?”
불의 휘광에 압도되어 정신이 나갔던 무슬라가 화들짝 놀라며 루치드를 바라봤다. 어느새 눈을 마주할 거리까지 다가와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에서 무슬라는 피곤과 두려움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루치드가 이 기현상을 벌인 당사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이 어린 녀석이 자기를 위해 달려와 주었다는 사실이 기쁘고 슬펐다.
“···괜찮아.”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너, 넌 괜찮은 거냐?”
저 큰 눈망울에 맺힌 물기를 닦아주고 싶었다.
“예.”
루치드는 무슬라를 부축하려 무릎을 꿇었다. 내뻗는 소년의 작은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무슬라는 고개를 내젓고 자기 힘으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년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꾸에엑!”
갑자기 장벽에서 튀어나온 엄청난 크기의 스크로파. 성인 남성 10명을 합친 덩치의 놈이 흉포한 기세를 터뜨리며 불의 장벽 너머로 뛰쳐나왔다. 루치드가 무슬라를 마주하는 순간 긴장이 풀려 불의 장벽이 순간적으로 약해졌다. 그 틈을 교활하게 알아차린 스크로파의 대장 한 놈이 장벽을 넘은 것이다. 잔불이 붙어 군데군데 불타고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오로지 루치드만 바라보는 스크로파였다.
성벽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을린 송곳니를 앞으로 내뻗으며 달려드는 스크로파. 기력이 흐트러져 집중을 할 수 없었던 루치드가 무기력하게 달려드는 놈을 보던 중, 무슬라는 결단을 내렸다. 분명 조금 전까지도 몸에 힘이 없어 일어나 앉는 것도 힘들어했었건만.
무슬라는 루치드를 옆으로 힘껏 밀어냈다.
루치드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내던져지며 무슬라를 바라봤다. 무슬라는 끝까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피에 젖어 검붉어진 얼굴에 트레이드마크인 덥수룩한 수염마저 피에 젖어 엉망이었지만 루치드는 알 수 있었다. 무슬라가 미소를 짓고 있음을.
- 쾅
무슬라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황급히 쫓아간 시선에 허공을 부유하는 무슬라가 보였다. 허리가 기괴하게 꺾인 채로 멀어져가는 그를 보았다.
대장 놈은 무슬라를 치고도 몇 걸음을 더 나아갔다가 멈췄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루치드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짐승의 눈빛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루치드는 어쩐지 그 시선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왜?
“왜?”
왜 저 놈이 화를 내는 거지? 왜? 지가 뭔데 나한테 화를 내지? 정작··· 정작 화를 낼 사람은 난데?
“니가, 니가 뭔데!”
루치드는 똑같이 스크로파를 노려보았다. 저 놈만 보였다. 다른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스크로파가 발구름을 하고 뛰어왔다. 저 놈도 자신이 가진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하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서로의 숨결이 상대에게 닿을 정도가 되었다.
“죽어!”
****
스크로파의 준동이 끝나고 녹스의 사람들은 경비대를 앞세워 평원으로 나왔다. 불의 장벽은 사라졌고, 장벽을 피해 달렸던 스크로파 무리는 그대로 성을 비껴 나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안전이 확보되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평원으로 나서니, 평원에 남은 것은 불탄 스크로파 숯덩이와 미처 피하지 못해 짓밟힌 사람들의 시체들뿐이었다.
마지막까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었던 무슬라에게 가장 먼저 다가간 샤피로는 나이에 맞지 않게 울음을 터뜨리며 그 앞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끔찍한 모습에 다시 한 번 가슴을 쥐어뜯으며 희생을 슬퍼한 샤피로가 이내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딸 에리카가 사람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날뛰던 스크로파 대장 놈의 사체 앞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이 놈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하게 보지 못했다. 다만, 이 놈이 죽기 직전 어린 아이와 마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어린 아이의 주검은 발견되지 않았다. 에리카가 주변을 서성거리며 찾아보지만 끝끝내 찾지 못했다.
그 날, 에리카는 밤이 늦게까지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아무리 달래도 방법이 없었다. 샤피로는 딱히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했기 때문이다.
루치드는 다시 꿈을 꾸었다. 자신이 꿈속에 있음을 깨달았다.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노래인지 시인지 알 수 없는 읊조림을 들었다.
인간이 신이 만든 장난감이라면
운명은 태엽
감아놓으면 풀리고 풀리면 다시 감고
느슨하면 조이고 조이면 부서지는
인간이 장난감이라면
신의 놀이는 이제부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