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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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의 경비대장 포우는 대원들을 독촉해서 성문을 닫고 있는 중이었다.
“서둘러라. 어서!”
쉰 목소리로 명을 내리는 경비대장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 하나 급하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특히 포우는 몸과 마음을 다하여 위급함을 드러냈다.
평소 누구보다 친절하고 용기 있는 행동으로 도시민들에게 신뢰받는 경비대장은 이제 2년차 대장이지만 경비대에서만 8년을 보낸 베테랑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보기에도 지금의 스크로파 무리의 준동은 심상치 않게 보였다. 단순히 시기만 문제가 아니라 도시 앞 평원을 가득 채운 듯한 먼지구름의 크기가 문제였다.
“세상에, 저 정도 숫자라니······.”
함께 성벽에 올라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부대장의 독백이 그의 마음과 같았다. 지난 8년간 매년마다 스크로파 무리의 준동을 경계하고 관찰해왔던 본인 역시 저 정도의 무리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대장님, 저기! 사람이 있습니다.”
한 경비원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쪽은 성문으로부터 정서쪽 방향이었다. 분명 먼지구름을 등 뒤에 두고 달려오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크로파 무리에 쫓겨 달아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직 거리가 멀어 신원이 확인되진 않았지만,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스크로파 무리와 사람들 사이의 간격이 점점 좁아지고 있음은 먼지구름이 다가오는 속도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어떡합니까? 대장님?”
다급한 음성으로 포우의 결정을 묻는 부대장이었다. 포우가 보기에 거리가 애매했다. 도개교를 올리기 직전인 상태이기에 이대로라면 사람이 겨우 들어올 수 있을 만큼 문을 열어놓는다면 저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뒤의 스크로파들이 잇따라 들어와 성 안을 헤집어 놓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저 정도라면 성문을 닫는데 성공한다 쳐도 맨몸으로 부딪혀 성문을 부수고 들어올 수도 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녹스’가 준비한 것이 깊이 파인 해자였고, 도개교였다. 그리고 도개교는 들어 올리는 데 시간이 걸린다. 서둘러 결정해야 했다.
쫓기는 사람들도 분명 이 도시의 시민이다. 도시민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경비대장으로서 그들을 모른 척 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현실적으로 감당해야할 위험이 크다. 그의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주저하지 않고 성문을 닫았을 것 같았다. 과거에도 그렇게 했으니까. 하지만, 포우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에게는 개인적으로 스크로파 준동에 따른 아픈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스크로파 준동과 그것들에게 쫓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순식간에 도시 반대편까지 알려졌다. 그 사이에 위치한 번화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루치드는,
“가봐야겠어요.”
라는 짧은 말 한마디만 내뱉고 가게를 뛰쳐나갔다. 샤피로가 얼른 일어나 소년을 막으려 했지만 소년은 이미 상점을 벗어나 번화가 중앙길을 내달리고 있었다.
루치드는 어떻게든 무슬라가 무사하기를 기도했다. 이 곳으로 돌아와 벌써 반 년가량 흘렀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무슬라와 함께 했다. 그는 처음 어색하게 마주쳤던 그 때의 인상과는 달리 항상 자상하고 배려심 넘치는 태도로 루치드를 대했다. 그의 말마따나 자신의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보상일수도 있고 혹은 가족을 잃어버렸다는 공통점을 가진 이에 대한 측은지심일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슬라와 함께 생활하면서 행복했다는 점이었다. 그와 함께한 6개월은 마치 새로운 아버지를 만난 것과도 같아, 오히려 가끔씩 죄책감을 느낄 만큼 이 생활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그만큼 무슬라는 루치드의 마음속에서 상당히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루치드는 서문에 다다랐다. 성벽 위로 올라가보고 싶었지만 이내 경비대의 제지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자신을 제지하는 경비대원을 붙잡고 하소연을 하는 것 밖에 없었다.
“이 곳으로 달려오는 사람들을 구해야 돼요. 제발, 제발 문을 열어주세요.”
물론 이 곳에서 그런 하소연을 하는 사람은 루치드 뿐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서문으로 몰려와 문을 닫지 못하고 명을 기다리는 경비대원이나 성벽 위의 경비대장을 향해 울음 섞인 탄원을 올리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요, 아버지 좀 구해주시오!”
“제 남편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구요! 문을 열어줘요!”
경비대원들은 몰려든 사람들의 사정이야 안타깝지만 당장은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경비대장의 명이 떨어지기 전에는. 그리고 포우는 소란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만 환영과 싸우며 고민을 이어갔다.
“더 이상은 안됩니다. 빨리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부대장의 다급함이 포우를 돌아보게 하였다. 분명 그의 말에서는 성문을 닫자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그게 옳은 일일 것이다. 다만 포우의 눈에는 자신의 형이었던 포레프가 성문 앞에서 스크로파의 송곳니에 치여 하늘로 떠오르는 장면만 반복되고 있었다.
부대장은 여전히 정신이 나가 있는 듯한 포우를 재촉했다.
“대장님”
“야! 거기 서!”
거의 동시에 터져 나온 소리, 그리고 소란스러움에 포우는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미처 꽉 닫지 못했던 문틈으로 아이가 빠져나가 도개교를 건너고 있었다. 저 아이는··· 죽을 것이다.
“성문을··· 닫아라.”
지금껏 트라우마와 싸우던 포우의 가장 큰 고민은 양심이었다. 자신의 형은 성문 바로 앞에서 죽었다. 어쩌면, 만약 당시의 경비대장이 문을 열어놓고 기다렸다면 형은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뒤의 일은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다.
지금도 달려오는 저 사람들을 어쩌면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까. 다만 당시에는 고민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고민이 되어버린 문제가 있었다.
다수와 소수의 선택. 그 흔해빠진 딜레마에 빠져버린 것이다.
개인의 존엄성이나 다수를 위한 공리주의 따위의 철학적 논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포우 개인의 양심의 문제였다. 한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을 희생해야 한다면, 고민은 되지만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희생이 점차 자신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리면 그 때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고 사람들을 살릴 수 있을까. 자신의 양심은 어느 정도까지 허용하거나 선을 그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지금 깨달았다. 지금 도개교를 뛰쳐 나간 아이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저 아이 외에 또 다른 사람이 희생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떠올리자마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뱉은 사과는, 당연히 루치드에게 닿지 않았다. 설령 그 소리를 들었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루치드는 달려가면서 앞을 내다보았다. 급격히 가까워지고 있는 먼지구름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거리가 있어서인지 쫓기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확대.’
순간적으로 시야가 변했다.
루치드는 샤피로의 창고에서 일하는 동안 마법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기록하고, 집중하고, 고민했다. 그 성과 중의 하나가 바로 ‘확대’였다.
시작은 사소한 계기였다. 약초를 정리하던 중, 비슷해 보이는 약초 두 종류를 비교하다가 학교에서 봤던 돋보기가 생각이 났다. 돋보기로 ‘확대’를 해서 비교를 하면 더 잘 볼 수 있을텐데, 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구현 가능한 마법의 목록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먼저 스크로파의 무리들이 보였다. 황토색 분진을 온 몸에 두르고 흉포한 눈빛을 한 스크로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멧돼지라고 부르기에는 그 덩치가 만만하지 않은데다가 특히 앞으로 삐죽 나온 송곳니의 묵빛은 심상치 않을 정도였기에 몬스터에 포함되는 스크로파였다.
그놈들을 뒤에 두고 달리는 사람들도 찾았다. 그 중 가죽 재킷을 입은 무슬라가 보였다. 이미 상처를 입었는지 얼굴 반쪽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안돼!’
이를 악물고 달렸다. 뒤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또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정신없이 달리던 사람들의 눈에도 마주보고 달려오는 루치드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특히 무슬라는 루치드를 알아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오지마! 도망가!”
왜 이곳으로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빨리 도망가야 할 때이다. 산기슭을 벗어나면서부터 도시까지 펼쳐진 평원에 스크로파 무리가 가득했기에 어느 쪽으로든 도망갈 길이 없었다. 있다면 단 하나, 성 뿐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래서 그 동안 ‘녹스’에서는 매년 성벽을 보수하고 해자를 깊게 하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베테랑 경비대장이 경악할 만큼 그 수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상태. 과연 성안에 있어도 안전할지 미지수라 여길 정도였다. 그런데 이 곳으로 달려오다니?
“돌아가! 가라고!”
무슬라의 외침은 뒤쫓는 스크로파들이 내는 괴성과 땅울림에 묻혀 루치드에게 닿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