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3)
-------------- 29/952 --------------
아이는 선풍기 하나 없는 곳에서 더위와 싸우며 일을 시작했다. 어찌 보면 매대 앞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다른 상점의 점원들에 비하면 배부른 투정일수도 있지만 초등학교에서는 방학이 시작되기 2주 전부터 2교시만 지나면 에어컨을 틀어주었고, 보육원에서도 방마다 설치된 선풍기를 쐬며 책을 읽었었다.
“바람아 불어라, 불어라.”
명수가 침대 위에 올라가 벽에 설치된 선풍기를 향해 팔을 내뻗고 장난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복도를 지나던 보육교사가 그 모습을 보고 손가락 다친다며 혼내던 모습도 떠올랐다. 경은이는 여름방학 때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배워오겠다고 했었다. 그러고 보니 경은이도 옆구리를 다쳤었는데, 다 나았을까? 형오는?
“루치드, 점심이나 먹자꾸나.”
“예!”
루치드는 매일 매일 들어오고 나가는 약초들의 수를 체크하는 일을 했다. 더불어 창고에서 기존의 약초들이 얼마나 있었는지를 가감해서 장부를 표기했다. 이곳에서 쓰는 숫자를 새로 배워야했지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루치드는 샤피로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중장부를 만들었다. 학교에서 배운 숫자로 표기하는 장부와 샤피로가 볼 수 있게 만든 장부로 나눠서 작업했는데, 표기법이나 계산은 익숙한 방식으로 하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샤피로가 볼 장부는 결과만 깔끔하게 정리해서 주는 게 샤피로에게도 좋았기에 각종 계산을 여백에 쓰느라 지저분해진 루치드식(式) 장부는 따로 관리했다.
노트를 하나 더 만든 다른 이유는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글을 써서 기억을 보조하는 행위는 매우 중요했다. 자신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고, 특히 마법을 연구할 때 갑자기 떠오르는 단상(斷想)들을 기록할 수 있었다. 덕분에 루치드는 단순히 머리로만 마법을 연구할 때보다 좀 더 구체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나오는 거야. 빨리 와서 같이 먹어야 빨리 치우지.”
앙칼진 목소리로 루치드를 타박하는 이는 샤피로의 딸, 에리카였다. 에리카는 루치드보다 2살 더 많은 10살이었다. 루치드가 고용되기 전에는 종종 상점을 나와 아버지의 일을 도왔었는데, 루치드가 가게를 나오기 시작한 이후로는 점심시간 때 식사를 가져다주는 일을 주로 하게 되었다. 가끔씩 약초를 정리하기 위해 창고에도 들어가 보지만 숫자를 맞춰 정리해놓은 탓에 손댈 게 없었다. 때문에 일이 없어진 에리카는 도리어 시간이 넉넉해져 좋아해야 하건만, 이상하게도 루치드를 보면 타박하기 일쑤였다.
“장부 정리하느라 늦은 거예요.”
“군소리 말고 어서 와서 밥이나 먹어.”
“이 녀석아. 일 잘하는 애를 왜 구박하고 그래.”
“아빠! 내가 무슨 구박을 했다고 그래? 이러다 나중에 ‘학대’라는 말까지 나오겠네?”
“무슨 말버릇이야, 그게!”
“치.”
날카로운 눈매로 자신을 바라보는데, 루치드는 차마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아 슬쩍 시선을 피했다.
하루는 점심을 먹고 난 뒤, 잠시 가게 뒤편에서 샤피로와 쉬고 있는데 에리카가 다가왔다.
“문제, 시네디움 10뿌리랑 앤젤리가 50뿌리로 약을 만들면 몇 개의 약을 만들 수 있어?”
“5첩”
이 정도는 생각하고 자시고도 없이 바로 답이 나왔다. 에리카는 샤피로를 돌아보았다.
“···맞아?”
“이 녀석아. 니가 문제를 내 놓고선 나한테 답을 묻는 거냐?”
“아이 참. 맞냐구?”
못 말리겠다는 듯 피식, 실소를 금치 못하는 샤피로였다.
“맞다. 그 정도는 너도 계산할 줄 알아야지.”
“에이. 뭐 이런 애가 다 있담.”
“너도 그렇게 놀지 말고 공부 좀 해라. 동생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냐?”
“베이커 아저씨도 나보다 산수 못하던데 뭘.”
“어이구. 말이나 못하면.”
“아빤 내가 말도 못하는 벙어리였음 좋겠어?”
“에리카!”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가는 에리카를 보며 한숨을 내쉬는 샤피로. 그의 모습을 보며 루치드는 괜히 심란해졌다.
물론 지금 상황이 나쁘진 않았다. 샤피로는 절대 자신을 못살게 굴지도 않았고, 매 끼니도 챙겨줄 만큼 자상했다. 지금쯤 도시 동쪽의 산을 타고 있을 무슬라 역시 자기 아이 다루듯 애정 어린 시선, 까지는 아니어도 늘 고마움을 느낄 만큼 잘 대해주었다. 다만 자신은 할 일이 있었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루치드였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늦여름의 뜨거운 공기가 루치드의 이마를 슬며시 누르고 지나갔다.
동쪽과 북쪽의 산들이 노을 색으로 물들며 계절이 바뀐다는 신호를 보냈다. 성급한 사람들은 두터운 ‘카울(Cowl)’을 준비했고, 부지런한 사람들은 옷장 깊숙이 보관해온, 가죽을 덧댄 ‘지폰(Gyphon)’을 꺼내 햇볕에 말렸다.
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또 그 반대 유형의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무슬라는 날씨가 더울 때도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고, 추워진 지금도 가죽 재킷만 입고 있다. 산을 타는 사냥꾼이란 이런 모습이다, 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 했던 그가 갑자기 손에 ‘클록(cloak)’을 들고 루치드 앞에 나타났다. 지금 막 아침 식사를 마치고 상점을 가기 위해 준비를 하던 루치드는 그런 무슬라를 쳐다봤다.
“아침, 저녁으로 날이 꽤 춥다. 걸치고 나가도록 해.”
그러고 보니 손에 들고 있는 클록이 무슬라가 입기에는 많이 작아 보이긴 했다.
“아저씨, 그건 너무 ··· 겨울용인 거 같은데요?”
무슬라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 수염이 더 자란 탓인지 광대뼈 아래까지 덥수룩해서 얼굴색을 확인하기 위해선 이마를 보는 수밖에 없었다 ― 클록을 높이 치켜 든 채로 대꾸했다.
“입어라.”
거절은 거절한다, 는 단호한 어투에 루치드가 되레 얼굴색을 붉히다가 클록을 건네받았다.
“먼저 가마.”
뒷모습을 바라보던 루치드가 한 박자 늦게 인사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별다른 제스처 없이 굳은 걸음으로 산을 향하는 무슬라를 바라보던 루치드는 이내 클록을 걸치고 상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 너 뭐야? 추워? 가을하고 겨울도 구분 못하는 거야?”
대꾸할 말을 찾을 필요도 없다 여긴 루치드는 그저 클록을 벗어 상점 한편에 고이 접어두었다.
“에리카, 그게 무슨 말이냐. 날이 추우면 입을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너야말로 여자애가 옷 좀 제대로 입거라. 아침에 입으라고 줬던 카울은 어쩌고 그렇게 나왔어?”
“내가 무슨 애야? 맨날 이거 입어라, 저거 입어라 그래? 그리고 튜닉만 입어도 충분하거든요?”
에리카는 더 이상의 잔소리는 듣기 싫다며 상점을 뛰쳐나갔다.
“저 녀석 언제 철들려고 저러는 건지.”
힐끔 루치드를 바라보는 샤피로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반응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시늉을 하며 장부를 챙겨 창고로 향했다. 그간 품목들의 변화도 많고 매수, 매도에 의한 재고 변화도 잦아서 창고 내 물품들의 재고 수량 확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계절이 변하기 전에 재고물품 정리를 마쳐야 한다는 샤피로의 의지와 격려에 힘입어 요며칠간 더 많은 시간을 창고에서 보냈던 루치드는, 마침내 오늘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창고 내의 수많은 서랍장들 중 마지막 2종의 서랍장만 남은 것이다. 오늘 중으로 재고 확인이 끝나면 모든 물목에 대한 재고장부가 완성된다. 그러면 앞으로 들어오거나 나가는 물목에 대한 수량만 확인하면 언제나 정확한 수량의 재고 관리가 이루어질 것이다.
샤피로는 그간 중구난방으로 방치되었던 창고가 깔끔히 정리된다는 기쁨에, 오늘 일이 끝나게 되면 루치드에게 보너스 명목으로 삯을 더 쳐주기로 했다.
루치드는 그 돈으로 무슬라에게 선물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특히 오늘, 클록까지 챙겨주는 마음씀씀이에 남몰래 감동받았던 소년 루치드는 어떤 선물을 사줘야 할지 고민을 하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준비한다는 것은 루치드의 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선물을 받는 사람이 기뻐할 모습을 기대하는 행위 자체가 신선하면서도 뿌듯한 기분을 갖게 만들었다.
아침 일찍 무슨 바람이 불어 아버지와 출근길을 같이했었는지 모를 에리카가 다시 가게로 돌아온 것은 점심시간 때였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나타난 에리카는 평소처럼 점심식사용 도시락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첫 마디는 평소와 달랐다.
“아빠, 산에 멧돼지 떼가 나타났대.”
“어, 그래? 잘하면 무슬라가 오늘은 돼지고기를 가지고 오겠는데? 루치드. 어쩌면 오늘 포식하겠구나?”
창고에서 나와 있던 루치드가 그 말을 듣고 씩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에리카의 표정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마치··· 그 날의 명수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그게 아냐, 아빠. 멧돼지 떼라고. 스크로파 무리가 나타났다고! 지금 서쪽 산에서 성으로 오고 있대. 그래서 경비대가 난리 났대.”
순식간에 루치드의 얼굴이 에리카처럼, 아니 그보다 더 새파랗게 질렸다.
“스크로파 무리가? 아직 가을 초입인데 벌써 무리가 지어졌단 말인가? 루치드, 오늘 무슬라가 어느 산으로 갔니?”
무슬라를 먼저 걱정해주는 샤피로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어디로 간다고 했지? 모른다. 무슬라는 루치드에게 행선지를 밝히지 않았다.
고개를 젓는 소년의 안색이 심상치 않다 여긴 샤피로는 우선 자리에 앉히고 안정을 시켰다.
“걱정마라. 루치드. 무슬라는 그래도 이 도시에서 꽤 경력 있는 사냥꾼으로 통하는 사람이다. 그간 늦가을에 준동하던 스크로파가 갑자기 이 시기에 나타난 게 이상하긴 하지만, 경험 많은 무슬라라면 바로 눈앞에 스크로파 대장 녀석이 나타나더라도 현명하게 대처할 인물이다. 또 혹시 모르지. 오늘은 동쪽 산으로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느냐.”
소년은 고개를 숙였다. 매번, 정말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결과가 좋았던 적은 없었다. 언제나 소년의 주위에서 일이 벌어지면 항상 불행한 결과만 찾아오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그런 불길함이 엄습했다.
“이보게, 샤피로. 들었는가? 스크로파 무리가 나왔다네!”
거리 맞은편에서 장사를 하던 피혁점 주인이 가게를 찾아왔다.
“방금 딸에게 이야기 들었다네. 서쪽 산에서 나타났다는데 혹시 다른 이야기 있는가?”
“나도 방금 아내에게서 들었는데, 아내 말로는 오늘 서쪽 산으로 간다고 신고를 하고 나간 사람이 꽤 된다더군. 알다시피 서쪽 산이 이 시기에 약초가 많이 나지 않는가?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산을 올랐던 모양이야. 경비대에서도 우선 성문을 닫고 스크로파를 막은 뒤에 산으로 구조대를 보낼 모양일세.”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던 샤피로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앞머리를 한 차례 쓸어 올렸다.
그 때 상점 바깥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스크로파에게 쫓기는 사람들이 있다!”
루치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