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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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을 간단히 먹은 두 사람은 번화가로 향했다. 가는 동안 무슬라는 루치드가 이 도시 ? 도시 뿐만 아니라 드뷔시대륙 전체에도 해당하지만 ? 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간단하게 이 도시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이 도시의 이름은 ‘녹스’라고 불렀다. 드뷔시 대륙, 부오노 공국 내에서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한 도시로서 사실 이 도시가 처음부터 이렇게 컸던 것은 아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근방이 상업적·정치적·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도시가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과거에는 대산맥을 넘어 보려는 도전정신 가득한 모험가들이나 잠시 들리던 마을이었다. 그러다 부오노 공국을 집권했던 공작이 폭정의 칼날을 휘둘러 많은 사람들이 신음을 앓던 시기가 있었다. 도망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들은 이곳으로 모여들어 살기 시작.
“다른 곳으로는 왜 안가고 여기로 다 왔대요?”
무슬라는 괜히 목을 긁적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길이 험해서야. 공국에서 이 곳으로 오기 위해서는 천혜의 험지라 불리는 ‘리아빈’이라는 늪을 지나야 하거든. 그 늪지대가 워낙에 넓어서 마치 미궁 같다는 의미로 ‘리아빈’이라고 불렀다는데, 자세한 건 모르니까 묻지 마라. 아무튼 그 늪을 통과하는 데는 2달이 걸린다고 할 정도‘였’지. 건너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아. 만약 그랬다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올 생각도 못했겠지. 그런 이유로 잡으러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야. 두 번째 이유는 대산맥으로 들어가기 좋은 길목이라는 거지. 다른 곳은 대산맥 아래 몬스터 서식지가 있는 것으로 밝혀진 반면, 이 곳은 몬스터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 때문에 사람들이 여차하면, 그러니까 자신들을 잡으러 오는 이들이 있다고 해도 산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는 거지.”
사람들이 모여 큰 마을을 이룬 이후, 드뷔시 전역에서 알음알음으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도망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각자의 사정이야 모두 다 다르겠지만 삶의 터전을 버리고 찾아왔다는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기대하며 마을을 키워나갔다. 물론 처음에는 이 곳으로 온 사람들을 잡아가기 위해 군사들이 동원된 적도 있었지만, 앞서와 같은 이유로 병력들은 이 곳에 오기도 힘들었다. 더러 늪을 통과하고 도착한 병사들도 있었지만, 이미 그 때 그 사람들은 돌아갈 길이 막힌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부상을 당하거나 비 때문에 길이 막혀 돌아갈 수 없게 되거나.
“부상당한 사람도 생겼나요?”
“뭐, 그랬다고 하더라. 물론 이건 아주 옛날이야기이고 구전으로만 전해져 오는 거라 정확하지는 않겠지.”
이런저런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마을에 남게 되고 그 사람들이 마을을 키우기 시작하니 어느새 그 규모가 작은 마을 수준은 이미 넘어설 정도. 그래서 마침내 폭군이 처단되어 사람들이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음에도 쉬이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오노 공국의 정책이 바뀌었다. 이 곳을 ‘자유국경지대’라는 이름으로 지정하여 세금만 잘 낸다면 도망친 사연에 대해 특별히 죄를 묻지 않기로 한 것이다. 마을의 규모가 작지 않으니 세금만 잘 낸다면 오히려 공국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 위정자들의 처신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공국은 원활한 지역 관리를 위해 이 지역을 담당할 관리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오기 힘들다면서요?”
처음 이 곳에 온 사람들은 갖은 고생을 다 겪고 이 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사람의 힘은 위대하다, 는 격언처럼 누군가의 노력에 의해 늪지대의 지도가 만들어졌다. 지도라고 해봤자 모든 지역을 상세히 표기한 지도는 아니고, 단지 외부와 이 마을 사이를 왕래할 수 있는 길이 기록된 지도였다. 파견된 최초의 관리 이후로 이 마을과 공국 내부를 연결하는 다리가 건설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늪지대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동시에 사람들은 마을 주변으로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가끔씩 대산맥에서 내려오는 짐승들이나 혹시 모를 몬스터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결국 사람들은 부오노 공국 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한 성을 축조해냈다.
“마을이 커감에 따라 성벽의 규모도 점점 커져서 지금은 ‘도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규모가 되었기에 보다시피 ‘거대한’ 성벽이 만들어 진 것이지.”
사람들은 희망의 도시가 되리라는 뜻에서 이 도시를 ‘녹스’라 부르게 되었다.
“물론 니가 살았다는 빈촌처럼 알려지지 않은 촌락들이 더 있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가 공식적으로는 대산맥에 가장 가까운 도시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공국이나 인접 국가들의 상단들이 종종 방문하기도 하면서 이제는 상거래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편이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은 예전의 도망자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라는 이미지는 거의 사라진 상태지.”
무슬라는 루치드를 도와 빈촌에 대해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어떤 식료품 가게는 빈촌에서 온 사람들을 기억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빈촌의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나 실종에 대한 실마리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낙담한 루치드를 데리고 돌아온 무슬라는 이후의 일에 대해 의논을 했다.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도록 해라. 어린 아이가 홀로 이 도시에서 지내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게다가 그 부상이 나을 때까지는 뭘 하기도 어렵겠지. 그러니 우선 부상이 나을 때까지는 여기서 지내면서 쉬도록 해라.”
루치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요? 왜 ··· 이렇게 도와주시는 건가요?”
“···비록 이 도시가 도망자의 도시라는 타이틀은 버렸다지만 여전히 많은 지역에서 이 곳으로 ‘도망’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렇다. 자세한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도 ‘도망’을 온 것이지.”
“···전 도망을 친 게 아니에요.”
무슬라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이제는 믿는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어쨌든 이 곳에 오기 전 내게는 아내와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가 컸다면 지금쯤 너만 했을 거 같다.”
“왜 같이 오지 않았어요?”
“오는 길에 사고가 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무슬라는 입을 열지 않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루치드라고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그냥 침묵에 동참했다. 컵의 손잡이를 쥔 채 시선을 내린 무슬라의 표정은 딱히 슬프다거나 절망적인 표정은 아니었다. 그저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래서 더욱 마음이 시리게 느껴졌다.
다음날부터 무슬라는 본업으로 돌아가 산을 올랐다. 단순히 사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약초나 땔감을 구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루치드는 부상 때문에 집에서 쉬어야만 했는데, 그 시간에 마법을 연구했다. 불이나 프라에테 ? 미끄럼 마법은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재현이 되었기에 그 외에 구현 가능한 마법을 찾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2달이 지날 무렵, 루치드는 무슬라를 따라 산을 오를 수 있을 만큼 부상이 나았다. 어깨에도 새살이 돋아 작은 상처자국이 남았지만 거동에 불편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치료술사가 처치한 약의 힘인지, 자연 회복의 시간이 되었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친 갈비뼈도 대충 다 아문 것 같았다.
루치드는 무슬라에게 함께 산에 오르기를 부탁했다. 심심해서라기보다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얻어먹기만 하는 것이 내심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딱히 그 생각에 반대할 마음은 없었는지 무슬라는 흔쾌히 루치드를 데리고 산에 올랐다. 처음에는 부상을 걱정해 조심하는 면도 있었지만 의외로 루치드가 잘 따라와 살짝 놀라기도 했다.
루치드는 무슬라로부터 덫을 놓는 방법이나 약초를 구분하는 법 등을 배웠다. 다시 2달이 지나 한 여름이 되었을 때는 모슬라가 덫을 놓는 동안 루치드가 근방의 약초를 캐며 일을 나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무슬라는 루치드가 산을 잘 탄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가장 크게 놀란 사실은 시장에서였다. 가죽이나 약초를 팔기 위해, 상점을 들렀을 때, 루치드가 옆에서 능숙하게 셈을 하는 것을 본 것이다. 어린 아이가 ‘산수’를 할 줄 안다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단자리 셈법 정도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그 수가 오를수록 고도의(?) 수학적 지식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런데 10살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아이가 곱셈도 척척해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 묶음에 24쿠퍼를 주셨으니 8묶음에는 192쿠퍼를 주셔야돼요.”
상인이 깜짝 놀라며 여러 가지를 물으니 거침없이 대답이 나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너 차라리 내 밑에서 일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 산을 오르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니? 앞으로 너 하는 거 봐서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이 정도 ‘산법’을 할 정도라면 내가 삯을 좀 더 쳐주마. 어떠냐?”
무슬라 역시 어린 아이가 산을 타는 것보다는 몸에 덜 무리가 가고, 충분히 제 몫도 할 수 있어 보이니, 상점에서 일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상인의 제안과 무슬라의 권유에 루치드는 잠시 고민을 했지만 길지는 않았다. 자기 생각에도 산을 오르는 것보다는 셈하는 것이 더 ‘재미있는’ 일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무슬라 아저씨에게 갚을 빚도 있으니.’
무슬라는 상인에게 은근히 으름장을 놨다.
“어린 애라고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되오. 만약 내 눈에 띄면 가만 두지 않을게요.”
“걱정 마시게. 이 정도 ‘고급 인력’을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나도 저만한 애가 있어. 나름 양심적으로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니 걱정 말고 자네 일이나 잘 보게.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우리 집에 약초를 팔 때는 내가 셈을 잘 쳐주겠네.”
비록 초등학교 1학년이지만 수학만큼은 고학년 수준이라고 자랑할 만한 실력이 되는 루치드는 이 정도 ‘산수’실력만으로도 ‘고급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실력을 인정받아 기쁘다 쳐도 그만큼 이 세계의 수준이 낮다는 것일 테니 괜히 안타깝게 느껴진 것이다. 게다가 저 세계에서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수준 이상의 지식을 이곳에서는 얻기 힘들 것 같다는 전망에 안타까움이 더했다.
루치드는 비교적 서늘한 창고에서 재고관리를 맡게 되었다. 한여름에 매장에 나와 손님을 상대하는 일이 어린 아이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무슬라의 의견과 수에 능통한 상인들과 비교해 봐도 결코 뒤지지 않는 빠르기의 산수를 구사하는 아이의 능력이 재고관리에 어울린다고 판단한 상인, 샤피로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직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