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24화 (24/956)

야누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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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왜?”

“어, 저기··· 조금 전까지 핀체노 할아버지와 같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핀체노 할아버지 보고 미쳤다고 하니까, 다른 사람인거 같아서요.”

“··· 너 꽤 똘똘하구나.”

어둠 속에서도 번들거리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여겨 루치드는 한 걸음을 물러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식 웃음을 짓던 그는 평이한 어조로 대꾸했다.

“내 이름은 야누스다.”

“그럼, 핀체노 할아버지는······.”

“그 놈은 내 부(副)인격. 어느 날부터 나타나서 내 몸의 주인행세를 하려는 도둑놈.”

루치드의 이해선상에서 벗어난 대화 주제가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내가 원래 이 몸의 주인. 그런데 그 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 놈이 나타나 정신을 차릴 땐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잠들었다가, 내가 정신을 차리면 그 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더군. 최근에는 그 놈의 힘이 약해진 탓인지 내가 주로 이 몸을 이끌고 있었는데 말이야. 아주 오랜만에 정신을 잃었었는데 이런 핏덩이를 옆에 끼고 있어······.”

“어, 그럼 둘은 다른 사람이라는 건가요?”

“뭘 들은 게야. 흠, 그러고 보니 넌 아직 어려서 ‘인격’의 분화 따위를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그래, 이런 걸 처음 만난 네가 알 필요는 없겠지.”

“저기, 그런데요. 그럼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밤에 산에 들어가는 건 위험한데?”

“니가 알 필요는 없다··· 만, 일단 저 산을 넘어가는 게 목표다.”

“왜요?”

짜증난 얼굴이 되어 아이를 돌아보는 야누스.

“내가 왜 그걸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답을 해주겠다. 저 산을 넘어 이 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다. 왜냐고? 미친 핀체노란 놈이 너무 많은 죄를 지어서 그 죄를 풀 길이 없다. 그래서 사회 공헌과 속죄의 의미로 이 땅을 떠나려는 것이다. 알겠냐?”

“그런데요, 제가 본 핀체노 할아버지는 착하신 분이셨는데.”

“헛소리! 그 놈이 얼마나 미친놈인지 아느냐! 혹시······ 그 놈이 마법사라고 하더냐?”

버럭, 화를 내는 핀체노, 아니 야누스의 일갈에 흠칫 놀란 루치드.

“예. 저도······.”

저도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 마법을 배우고 있었어요, 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들을 생각도 없어 보이는 야누스가 한 팔을 휘두르며 노성을 토했다.

“그 미친놈은 말이다! 한 도시를 물에 잠기게 만들었어!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을 수장시켰단 말이다. 그리고 지명수배가 되어서 지금도 현상금 사냥꾼들과 기사들이 나를 쫓고 있을게다.”

생각지도 못한 과거사가 나오자 어안이 벙벙해진 루치드의 얼굴을 보고 픽, 비소를 날렸다.

“그 놈이 어떻게 마법사가 된건지는 모르겠다. 난 마법을 쓸 줄 모르거든. 어쨌든 그렇다. 그 놈이 무슨 말로 널 꼬드겼는지 모르겠지만 잊어라. 마법사? 자기 자신도 제어하지 못할 힘 따위 개나 주라 그래라.”

그리고 획 몸을 돌려 산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멍하니 있다가 달려가 야누스의 로브 소매를 붙잡았다.

“안돼요. 할아버지. 위험해요.”

“위험하기 때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난 오래 살았고, 이제 더 이상 미련이 없다. 그리고 더 이상 이 몸을 미친 놈 손에 맡기는 것도 싫고. 그래서 가는 것이니 막지 말아라.”

소매를 툭 털어 아이를 떨쳐낸 야누스는 화를 진정하려는 듯,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무릎을 꿇어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괜히 역정을 부린 것 같았다.

“너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묻지 않겠다. 인연이 길어지면 복잡해질 뿐이니 지금 내 사정에서 다른 것들을 신경 쓸 여력이 없다. 다만 똘똘해 보이는 아이야. 다른 사람의 사정을 제대로 모르면서 이런 식으로 길을 막는 것은 좋지 않다. 누가 니가 가려는 길을 막고 서서 가지 못하게 하면 넌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 니가 가려는 길에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곁에 서서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 이 길은 가지 마라, 저 길은 위험하다 참견하면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 충고라면 고맙겠지만 참견이라면 불쾌하다. 그리고 핀체노란 녀석은 불쾌함을 넘어 내 삶을 망쳤다. ···난 지쳤고 늙었다. 그러니 이제라도 나는 나의 길을 가야한다. 아이야, 사람은 누구나 자기 갈 길이 있는 법이다. 나에겐 이 길이 나의 길이다. 넌 너의 길을 가거라.”

말을 마치고도 잠시 동안 눈을 마주쳤던 야누스가 이윽고 몸을 일으켜 세우고 뒤돌아섰다.

“밤길 조심하거라.”

야누스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루치드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잠시 그 자리에서 야누스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 부엉이 울음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더 지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숲을 빠져나갔다. 숲을 겨우 빠져나왔을 때는 중천에 새하얀 달이 구름에 가린 채 떠올라 있었다.

언덕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침 구름이 지나가며 모습을 드러낸 둥근 달에서 희미한 백광이 빈촌 위로 떨어져 내렸다. 옆에서 불어온 바람 때문인지 서늘한 느낌을 주는 풍경이었다.

루치드는 선뜻 언덕을 내려가기가 주저됐다. 물론 빈촌은 여전히 비어있겠지만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이 겁이 나기도 했다. 명수나 경은이는 이런 경험을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1학년 3반의 동급생들은 언제나 소란스러웠고 활동적이고 즐거웠다. 함께 수다를 떨 친구가 있고, 돌아갈 집이 있고, 그들을 안아줄 부모가 있다. 그런데 자신은 이 언덕에 홀로 서서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저 서늘한 빈촌으로 들어가야 한다. 왜 그럴까?

루치드는 머리를 흔들고 빈촌으로 들어갔다. 어쨌든 밤이슬은 피해서 잠이라도 청해야 할 것 같기에. 저절로 긴 한숨이 내뱉어진다.

이번에도 산에서 불어온 바람 때문에 들창이 덜컥거리며 요란스러운 밤이었지만 워낙 피곤했던 탓인지 루치드는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잠에서 깰 수 있었다. 부스스한 몰골로 집을 나와 너럭바위에 누웠다. 해가 좀 더 높이 떠 있었던 덕분에 간밤의 추위가 금세 떨쳐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문득 루치드는 기분 전환도 할 겸 마법을 연습해보고자 마음먹었다. 고작 하루의 가르침이었지만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입문마법이라던 ‘프라에테’를 연습해보았다.

미끄러진다는 현상은 이해했다. 낙엽에 미끄러지며 넘어질 때의 그 느낌이 워낙 강렬해서 그 느낌을 재현보고자 마음먹었다. 사실 루치드는 잘 몰랐겠지만 그가 넘어지던 순간 그는 ‘디아포’, 즉 깨달음을 얻었다. 그 현상(포르마)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아나그노리시)가 이루어진 것이다. 때문에 마법의 구현원리에 따르자면 심상공간에서 그 이미지를 떠올리고 거기에 몇 가지 조건을 붙여 현실에 재현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심상공간에 그 이미지를 재현해 낸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왜 안 될까를 고민하던 루치드는 자신이 지금 마법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머릿속에서 너무 많은 생각들이 교차하며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의 실종, 수색, 핀체노, 야누스······.’

어젯밤에 야누스는 산으로 떠났다. 어쩌면 다시 핀체노가 되어서 돌아올지도 모른다. 자신이 갈 곳은 이 마을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테니까.

‘그럼 나는 다시 핀체노가 올지도 모르니 여기서 기다려야 하는 걸까?’

이렇게 되면 또 반복이다. 가족들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마을에서 기다리고, 마법을 가르쳐 주었던 핀체노가 다시 돌아올지 모르기에 기다려야 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마을에서 기다려야만 하는 걸까?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그 때 야누스의 말이 생각났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갈 길이 있는 법이다. ··· 넌 너의 길을 가거라.”

나의 길. 나의 길이 뭘까? 루치드는 고민을 거듭했다.

마을에서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어제처럼 용기내서 찾으러가는 것이 옳은 길인 것 같았다. 물론 어제는 핀체노가 함께 해주었기에 산에도 오를 수 있었지만, 어쨌든 그 곳에 올라갔던 덕에 사람들이 저 곳으로는 가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른 방법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런 방식으로 단서를 찾아 나서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바른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리지 말고 움직이자.’

루치드는 다른 집을 뒤져 먹을거리도 조금 챙기고 물주머니도 하나 구해서 물을 담아 허리에 매달았다. 배낭에 필요해 보이는 짐들, 그래봐야 낡은 옷가지 몇 개지만 그거라도 챙겨서 등에 매고 나니 어쩐지 기운이 솟는 느낌이었다.

힘찬 발걸음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빈촌을 나왔다. 루치드가 가려고 하는 곳은 이 근방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였다. 옆집 친구였던 브뤼엘이나 마을 어른들이 종종 가던 방향인지라 그 길을 따라 가면 시장이 존재한다는 그 ‘도시’로 갈 수 있으리라 희망을 가지고 루치드는 힘차게 나아갔다. 도시에 가면 사람들이 많을 테고, 어쩌면 그 곳에서 어떤 소문이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넓은 벌판을 가로지르는 통길이 난 덕분에 루치드는 길을 잃을 걱정도 하지 않고 걸었다. 가다가 힘들면 잠시 멈추기도 하고, 틈틈이 머릿속으로 ‘프라에테’의 이미지를 만드는 연습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법을 연습하지 않는 때에는 계속 잡생각이 떠올라 루치드를 괴롭혔기에 루치드는 계속 마법을 생각하려 애썼다. 당장은 그것만이 겨울 밭에 홀로 세워진 허수아비가 된 것 같은 현실을 이겨내는 방법이었다. 다만 마법의 구현이 좀처럼 쉽게 되지 않아서, 또 그거 나름의 괴로움을 주긴 했지만. 그래도 핀체노가 말했듯 - ‘평생을 연구’해야 하는 마법사의 노력을 상기해보자면 -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고민해야 할 것 같았다.

벌판이 끝나면 다시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야 했다. 하지만 하늘을 보아하니 그 고개를 넘기엔 시간이 애매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어제의 경험으로 봤을 때는 딱히 어려움이 있을까 싶은 낙천적인 마음도 생겼다. 하지만 핀체노라는 어른이 곁을 지켰기에 무서움이 덜 했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홀로 노상에서 밤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저 멀리 보이는 고갯길을 두고 루치드는 잠시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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