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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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해가 서편으로 많이 기울었다. 특히 대산맥에 위치한 산이었던지라 더욱 빨리 산에 어둠이 찾아들고 있었다. 아이의 반짝거리는 눈빛에 기분 좋게 호응했던 탓에 다소 지체한 면도 있었다. 아무래도 숲에 들어섰을 땐 어둠 속을 헤맬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어둠보다 더 큰 걱정이 있었지만 어린 루치드에게 선뜻 말하기란 쉽지 않았다.
‘숲에 들어서기 전에 이야기는 해야 되겠지.’
핀체노는 지팡이로 중심을 잡아가며 혹여 루치드가 넘어지진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종종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어리다 해도 루치드는 이런 산과 숲의 길에 익숙한 아이였다. 통길 하나 나지 않은 길이라 해도 어느 곳을 어떻게 밟아가며 산을 타야 하는지를 이제는 거의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실행하는 수준인, 말하자면 아마추어 산악동호회의 대장 정도의 실력은 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실력이 있었으니 루치드는 산을 타고 내려가면서도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었다.
‘마법으로 구현할 수 있는 대상은 제한이 없다. 다만 아나그노리시가 되지 않으면 구현할 수 없다. 내 수준에서 아나그노리시가 가능한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배우면 써먹고 싶어지는 법. 특히 영특하기로 소문(?)난 루치드에게 그 호기심과 열망은 참기 힘든 것이었다. 이를 눈치 챈 핀체노가 지나가듯 말하기를, 사물을 구현해내는 마법은 매우 어렵다고 했다. 구현 마법보다는 재현 마법이 비교적 쉬우니 그 쪽으로 연구를 해보라는 핀체노의 조언을 따르기로 한 뒤로 이제까지 고민 중인 루치드였다.
그러다 루치드는 움푹 파인 땅에 쌓인 낙엽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단순한 실수였지만 충분히 식겁할 만한 상황은 만들어졌다. 내딛었던 발이 미끄러지며 몸의 중심이 급격히 흐트러지고 말았다.
-쿵
눈 깜짝할 사이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다행히도 다른 발에 힘을 가해 몸을 지탱하는 순발력을 발휘해서 더 큰 사고로 이어지는 일은 방지했다.
“괜찮으냐?”
핀체노가 황급히 돌아와 루치드의 안부를 물었다. 루치드는 멍한 얼굴로 핀체노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너무 놀라서 얼이 빠진듯해 핀체노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루치드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다행히 큰 부상은 보이지 않았다. 핀체노가 다시 루치드의 눈을 마주보며 물었다.
“괜찮으냐, 루치드?”
“···이거예요.”
“응?”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하는 얼굴. 루치드는 자신이 방금 넘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처럼 해맑게 웃으며 핀체노의 두 팔을 붙잡았다.
“넘어지는 거요! 미끄러지는 거요! 이것도 마법이 되는 거죠?”
그제야 루치드가 아나그노리시한 대상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핀체노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이렇게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해도 되는 걸까? 이 아이를 알게 된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건만, 마법사의 운명을 타고난 아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영특함을 보여 핀체노를 놀라게 했다.
“시작이 좋구나. 사실 우리가 추구하는 마법은 네가 예전에 말했었던 주문이나 별칭이 붙지 않는단다. 다만 예외적으로 몇몇 마법들에는 특별한 이름이 붙곤 하는데, 방금 네가 말했던 미끄러지는 마법이 그 중의 하나지. ‘프라에테’. 그게 그 마법의 이름이다. 왜냐하면 처음 마법을 배우는 마법사들이 연습하기 좋은 마법 중의 하나거든. 말하자면 입문마법이라 할 수 있겠지.”
핀체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난 루치드의 엉덩이를 털어주며 설명을 계속했다.
“프라에테는 단순하다. 미끄러지는 것. 네가 방금 아나그노리시한 감각과 이해라면 충분히 컨슈메를 할 수 있을게다.”
루치드는 땅에 놓인 지팡이를 들어 핀체노에게 건넸다.
“그런데요, 재현마법은 피구라를 어떻게 하나요?”
핀체노는 다시 앞장 서 걸으며 지팡이로 땅을 콕 찍었다.
“마법에 따라 다르지만, 프라에테의 경우 피구라는 심상공간에서 감각을 재현해야 한단다. 이게 쉬운 일은 아니지. 일반적으로 재현마법의 경우에, 아나그노리시는 다소 쉽지만 피구라는 어렵다. 반대로 구현마법은 아나그노리시는 어렵지만 피구라는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야. 그래서 어떤 마법사는 재현마법에 강하고, 어떤 마법사는 구현마법에 강하지.”
루치드는 핀체노에게 바짝 붙다시피 하여 그의 설명에 귀 기울였다.
“프라에테의 경우에는 감각의 재현도 어렵지만 챕터도 쉽지 않단다. 예를 들어 미끄러진다는 성질을 어느 곳에, 어느 정도의 길이까지 적용할 것인가를 바로 챕터로 결정하는 것이란다.”
핀체노는 손가락을 들어 옆에 서 있는 나무 두 그루를 가리켰다.
“저 두 나무 사이의 거리만큼 땅을 미끄럽게 할 것인지, 아니면 저 나무와 이 나무 사이만큼 할 것인지를 챕터 해야겠지. 또 살짝 미끄러질 정도로 할 것인지, 아니면 발이 닿자마자 미끄러지도록 할 것인지도 챕터 해야 되고.”
루치드는 머릿속으로 핀체노가 알려준 내용들을 수차례 복기하며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두 사람은 숲의 경계에 닿았다. 벌써 숲 속은 많이 검기울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루치드, 하나 알려 줄 게 있구나.”
“예?”
“마법사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는 말, 기억하느냐?”
“예.”
“난, 사실 의지가 약한 사람이란다.”
“무슨 말씀이세요?”
“이제 조금 있으면, 넌 조금 다른 모습의 나를 보게 될 게다. 아니지, 다른 모습이 아니라 아예 다른 사람일게다. 그리고 그 사람은 아마도 널 모를 거야. 그래도 너라면 충분히 상황을 이해하고 협력해줄 게다. 부디, 놀라지 말고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길 바라마.”
뜬금없는 말을 놀란 루치드가 대꾸도 못하고 핀체노를 바라보지만, 핀체노는 그저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시 말을 이어주길 기다렸지만 더 이상 핀체노의 설명은 없었다. 어둠이 짙어가는 가운데 침묵도 길어지자 루치드는 참지 못하고 물음을 던졌다.
“저기, 할아버지. 무슨 말씀이신지······.”
핀체노는 깊은 한 숨을 토해내더니 고개를 내려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깊은 주름에 내려앉은 눈꺼풀 안으로 묵광이 번쩍였다.
“누구냐, 너는?”
“예?”
“누구냐고.”
갑작스런 어투의 변화에 루치드는 황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어버버거리며 핀체노를 바라보는데, 핀체노가 손에 든 지팡이를 바라보더니 다시 한 숨을 쉰다.
“이 놈의 지팡이는 버리고 버려도 다시 돌아오는군. 미친 핀체노.”
그리고 다시 루치드를 바라보며 말없이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어둠이 깊게 밀려든 숲 속에서 정체 모를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던 핀체노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루치드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냐?”
어디라고 해도, 루치드는 지명을 모르기 때문에 그 질문에 대답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 상황 자체가 이해되지도 않았다. 때문에 루치드는 아무 것도 대답 하지 않았다.
“흠, 저 산을 보니 대산맥에 가까이 온 거 같긴 한데.”
딱히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듯, 여상한 어투로 말을 잇다가 시선을 깔고 루치드를 바라보는 핀체노. 그 눈매가 여간 날카로운 게 아니었다.
“어제는 없었는데, 오늘 옆에 있는 걸 보면 오늘 낮에 만난 것이로고. 너 누구냐?”
재차 날선 물음이 날아들자, 이번에는 어쩐지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치드인데요.”
핀체노는 허리가 결린다는 듯,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허리께를 두드리고 허벅지를 주물렀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루치드 역시 온 몸이 쑤시고 알배기는 느낌에 몸을 비틀어가며 뭉친 근육을 풀어주었을 테지만 지금은 옴짝달싹도 못할 만큼 긴장된 상황이었다.
“어디 사냐?”
“···저 숲 바깥 마을에······.”
루치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져보지만, 이미 숲은 어둠으로 가득 찬 상태. 핀체노는 짧게 혀를 찼다.
“여기에 마을이 있다고?”
“······예.”
왠지 모르게 신경질이 잔뜩 난 핀체노의 목소리에 루치드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날카롭게 변한 핀체노의 시선이 신경 쓰여, 뒤로 숨긴 손가락만 꼼지락거려보지만 가슴이 쿵쿵대는 느낌이었다.
“그럼 여긴 왜 온 것이냐?”
우물쭈물 하면서도 루치드는 아침의 만남부터 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던 얘기까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 미친 핀체노. 지가 뭐라고 오지랖인지.”
계속 자기 자신을 남 부르듯 하는 태도가 심상치 않게 보였다.
“너, 꼬마. 알겠으니 이제 집에 가라. 난 가야할 곳이 있다.”
“어?”
루치드는 뒤돌아서는 핀체노를 붙잡았다.
“뭐야?”
“저기······.”
루치드는 쉽게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대로 두면 핀체노가 절 두고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 혼자 남겨진다는 두려움과 이 어둠에 다시 산으로 돌아가려는 핀체노에 대한 걱정이 버무려져 아이는 무작정 핀체노의 로브를 붙잡고 말았다. 하지만 붙잡고 나니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그 때 핀체노가 ‘모르는 사람일거다’라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누군지 부터 알아야 할 거 같았다.
“누구세요?”
문제의 해결은 언제나 올바른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