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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22화 (22/956)

야누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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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두 사람이 산을 오르고 한 참이 지난 후였다. 사람의 왕래가 없는 곳이라 산에는 흔한 자드락길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산짐승들이 오가는 길이 드문드문 보이긴 했지만 그런 길은 더 위험하다는 핀체노의 의견에 따라 험한 곳으로만 피해 다녔다. 덕분에 어린 루치드의 체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팔다리가 후들거려 위로 한 발짝 내딛는 것도 힘겨웠다. 사실 핀체노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루치드보다 못한 체력을 가졌음은 물론이고, 근래 이토록 험한 산을 오르내린 경험이 없었던 탓에 저도 모르게 입에서 침이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산 아래서 다소 시간을 지체했던 터라 머뭇거릴 여유는 없었다.

루치드는 연신 두리번거리며 혹시라도 단서가 될 만한, 혹은 사람의 흔적이 있었는지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실 여기까지 왔어도 흔적이 없다면 더 올라가봐야 무의미하다. 마을에서부터 최단거리로 산에 올라왔는데 이곳에서 발견되지 않는 흔적이라면, 사람이 온 적이 없다고 확신해도 무방할 것이다. 루치드는 이곳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찾아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미련을 갖지 않을 테니깐.

잠시 무릎을 굽히고 숨을 고르는 루치드의 옆에 선 핀체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거진 숲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지만 해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해가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향했을 테지. 조만간 해거름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할아버지, 포르마를 챕터한 다음에 현실에 나타내는 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마법사란 의지가 강한 사람이어야 한단다. 쉽게 의지가 꺾여서는 안 되지.”

핀체노의 동문서답에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핀체노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루치드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웃음에서 물기가 배어나오는 듯하다.

“심상공간에서 챕터를 끝내면 포르마는 구체적인 형상을 갖게 되지. ‘피구라’라고 한다. 그리고 그 피구라를 현실로 구현해내는 것을 ‘컨슈메’라고 하지. 컨슈메를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마법사가 의지를 가지면 된다.”

“의지요? 그냥 의지만 가지면 되는 건가요?”

핀체노는 지팡이에 의지해 몸을 낮춰 자리에 앉았다.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는 모양새가 보통 피곤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노구를 이끌고 산에 오르는 일이 아무리 마법사라 할지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나보다.

“그래. 그냥 의지만 가지면 된다. 다만, 보통의 의지 가지고는 안 되지. 초월적인 의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칙을 아우름과 동시에 그 법칙을 넘어서라도 해내겠다는 의지. 다른 모든 잡념을 떨치고 단 하나, 컨슈메를 해내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가능하지.”

“······.”

오늘따라 말을 너무 많이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라 핀체노는 목 주위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어 끈적거리는 느낌이 그리 좋지 않았다. 로브에 쓱쓱 문질러 닦아내본다.

“쉽지 않은 일이군요. 마법이란 건.”

루치드는 고개를 돌려 지금껏 올라온 길을 내려다 봤다. 나무들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지만 꽤나 험한 길이란 기분에 심란해졌다. 저 길을 먼저 올라온 사람들은 ‘역시나’ 없었나보다. 다시 저 길을 타고 내려가야 할 텐데 핀체노의 상태가 조금 걱정되었다. 갈색빛 얼굴이 이제는 입고 있는 로브와 비슷한, 검회색으로 물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틀 전에도 산에 올랐다가 사고를 당했는데, 또다시 산에 올라 이렇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비록 지금은 비가 오진 않았지만, 보육원 뒷산보다 훨씬 험한 산이었기에 어쩐지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나쁜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는 루치드 곁에서 핀체노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내가 보기엔 사람이 온 적은 없었던 것 같구나. 어쩌겠느냐. 내려가 보겠니?”

“예.”

“그럼 조금만 더 쉬었다가 돌아가자꾸나.”

아무래도 바로 일어서는 것은 무리였던지 핀체노는 자리에서 좀 더 쉬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자신은 이 산을 넘을 생각으로 이곳까지 찾아왔다. 그런데 몇 십 년 만에 생긴 어린 제자 때문에 다시 돌아가려고 하고 있으니, 세상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갈 수 있을까······.”

“예?”

핀체노의 중얼거림에 옆에서 쉬던 루치드가 돌아보았지만 핀체노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루치드는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마법을 알고 나니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저기요. 혹시 마법으로 번개를 부리거나 불을 만들거나 하는 것도 가능한 거죠?”

“왜 안 되겠느냐? 물도 나타내는데.”

“물의 포르마는 뭐죠?”

“질문이 잘못되었구나. 물의 포르마는 물이지. 그리고 네가 궁금해 하는 것은 물의 샤락티라스겠지. 물은 어떤 고유성질을 가지고 있을까? 그런데 말이다. 우선 이걸 설명해 주어야겠구나. 어린 너의 눈으로 보는 것보다 세상은 복잡하단다. 굉장히 단순해 보이는 사물들도 많은 고유성질을 가지고 있지. 그리고 모든 고유성질을 파악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란다. 그래서 마법사가 되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단다. 단순히 사물의 외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특성을 살피고 이해해서 완전히 그 사물을 ‘아나그노리시’, 인식해야만 ‘피구라’를 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아나그노리시······.”

“잘 이해하는 것 같으니 하나 더 보여주마. 이 그릇을 봐라.”

어느새 큼지막한 대야가 땅 위에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맑은 물이 찰랑거리며 루치드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잘 보거라.”

이윽고 잠잠했던 물의 표면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더니 가운데를 중심으로 물이 회전을 시작했다. 처음엔 천천히 움직이다가 이내 그 속도가 빨라지더니 물 가운데가 쑥 가라앉고 대야 가장자리로 물이 넘쳐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 회전이 멈추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처음처럼 잔잔하게 가라앉아 입을 벌리고 있는 루치드의 얼굴을 비췄다. 루치드는 고개를 돌려 핀체노에게 이 사태의 해명을 요구한다는 강한 눈빛을 보냈다.

“일종의 소용돌이란다. 마법의 대상은 비단 사물에만 그치지 않고, 특정한 현상의 재현까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거란다. 신기하지?”

고개가 부서질 정도로 끄덕이는 루치드가 너무나 귀여워 보여 핀체노는 아이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었다.

“이렇듯 마법은 이론적으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을 재현해내는 힘을 일컫는다. 다만 이론적이라고 말했듯 현실적으로는 모두 재현해내기가 힘들지. 왜냐하면 아무리 사람이 노력해도 자연의 모든 것을 알기란 불가능한 법이거든. 가령 네가 요구했던 번개를 나는 구현해낼 수 없단다. 난 아직 번개의 샤락티라스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거든. 즉 아나그노리시가 실패했다는 뜻이다. 내가 마법을 배우면서부터 수련한 것은 보다시피 물의 아나그노리시였단다. 그것만 가지고도 거의 평생을 전념해서 노력한 끝에 이런 마법이 가능해졌지. 그만큼 아나그노리시, 즉 샤락티라스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란 사람들은 그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지. 너도 그 불가능에 도전할 마음이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주변의 사물과 현상들을 아나그노리시 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거야.”

‘사물과 현상을 완전히 이해한다!’

루치드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희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물의 샤락티라스는 내가 파악한 바로는 대략 100여 가지가 넘지 않을까 싶다.”

“예?”

“사실 나도 정확히 세어보질 않아서 모르겠구나. 다만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지. 네가 한 번 물의 샤락티라스를 생각해보렴.”

“물이면··· 우선 흐르는 성질이 있고, 맑고 투명하고······.”

“물은 빛을 투과할 정도 투명하지. 그 자체로 빛이 나지 않는다. 흐르지만 고이기도 하지. 맛이라는 것이 없고, 모래나 가루를 녹이기도 하지. 점성이 적어서 한 방울씩 떨어지기도 하고 또 한 방울, 한 방울이 뭉쳐 있지. 끓이면 기체가 되고 온도가 낮으면 얼어버리지. 물을 자세히 보면 한 방울은 대체로 동그란 모양을 유지하려고도 하지. 어떠냐? 물의 고유성질이란 것이 엄청나지 않느냐? 하지만 이것들은 겨우 내가 파악한 것의 일부분이란다. 그럼 마법사들은 이 물의 성질을 어떻게 파악하는 걸까? 먼저 정답을 말하자면 ‘아나그노리시’다. 사실 오랜 시간 경험하고 체험하고 실험하는 과정은 필수겠지."

잠깐 말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던 핀체노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 마법사는 단 한 순간 그 모든 속성을 파악하는 경우가 있어. 이것은 일종의 전지(全知)적인 깨달음이니 마법사들은 진정한 ‘아나그노리시’, ‘디아포’라고 부른다. ‘디아포’가 발생하는 순간, 마법사는 ‘라티오’의 포르마를 마주하게 되지. 바로 그 순간이 마법사로서는 가장 영광된 순간이지. 어떻게 생각하니? 루치드?”

‘디아포!’

루치드는 ‘디아포’, 그 말이 너무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지난 해 처음으로 책을 마주하고 느꼈던 감정, 그 설렘을 다시 느꼈다. 문득 루치드는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거대한 입을 연상했다. 그 입은 이 세상의 모든 책과 ‘지식’이라 일컫는 것들을 삼키고자 했다. 책 한 권, 한 권을 읽을 때 마다 느꼈던 만족감과 고양감은 포만감과 같았다.

더 많이, 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 더 많이 채우고 싶다!

루치드와 핀체노는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내려올 때는 올라갈 때보다 더 조심해야 하지만 루치드의 머릿속은 온통 오늘 하루 동안 들었던 내용들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포르마(원형)’의 ‘샤락티라스(고유성질)’를 완전히 알게 되는 것이 ‘아나그노리시(완전한 이해)’.

아나그노리시가 된 포르마는 심상공간에서 ‘챕터(특정화, 가공)’를 시켜 ‘피구라(특정 사물)’를 만든다.

마법사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컨슈메(재현)’.

끝으로 포르마를 완전한 아나그노리시 상태로 이끄는 ‘디아포(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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