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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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아이는 이런 생각을 했다.
‘왜 난 그곳으로 갔을까?’
빈촌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실종에만 주목하여 이 생각 저 생각 다 하다 보니 정작 자기에게 벌어진 기현상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을 못했었다. 어쩌면 다른 모든 일에 앞서 그 일부터 고민을 했어야 했던 거 아닐까? 저쪽 세계로 넘어갔을 때는 그 세계에 적응하는 일만으로도 아이에겐 벅찬 일이었기에 생각하지 못했다고 쳐도, 다시 돌아온 지금 마냥 돌아왔으니 끝, 하고 넘길만한 일은 아닌 것이다. 단적인 예로 아이는 줄곧 거실의 ‘그 의자’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 의자’에 앉거나 누웠다가 다시 그 곳으로 가게 될까봐. 아이는 질문에 대해 논리적인 추론을 할 수 없었기에, 비논리적인 결과를 두려워하며 의자를 피하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 걸까?’
모르는 것은 너무나 많다. 애초에 글자 하나, 셈법 하나 배운 적이 없던 아이였다. 이세계에서 ‘학교’와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배웠지만, 자신은 고작 ‘1학년’이었다. 5학년이나 6학년, 혹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은 더 많은 걸 배우고 익힐 것이 분명한데, 그 과정을 밟지 못한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때문에 자신이 떠올리고 있는 온갖 의문들에 대해 정답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온갖 의문들이 된바람이 되어 아이의 몸을 두드리고 지나갔다. 아이는 손과 발을 바짝 끌어당겨 몸을 웅크린 채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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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이 산 위에서부터 천천히 다가오더니 난벌에 이르렀다. 듬성듬성 서 있던 잡목들 사이에서 꾸물대던 새벽안개가 자리를 피해주고 그 자리를 온기 가득한 햇살이 자리했다. 부지런한 솔새들도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며 먹이를 구하기 위해 움직일 무렵, 산기슭 아래 커다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아침을 깨우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그그.”
두터운 로브를 이불삼아 잠을 청했건만 - 노숙이란게 다 그렇듯이 - 새벽 찬 공기에 몸이 많이 굳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더니 절로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온 몸을 둘둘 말았던 로브를 풀어 헤치고 나오니, 마구 헝클어진 흰 머리가 어깨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풍찬노숙으로 단련된 두꺼운 피부도 세월의 흐름을 이기진 못했다.
그의 나이의 3배는 더 될 만큼의 주름이 새겨진 얼굴. 부르튼 윗입술과 그보다 두꺼운 아랫입술이 서로 멀어지며 지난밤의 냉기를 토해내듯 하품을 하는, 두꺼운 눈꺼풀과 아래로 축 처진 눈매를 가진 노인, ‘핀체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물이 흐르는 소리를 찾아낸 그는 천천히 일어나 로브를 대충 툭툭 털어내고는 몸 위에 걸쳤다.
“에휴, 에휴.”
팔 한 번, 다리 한 번 놀리는데도 한숨소리가 섞여 나오는 게 스스로 생각해봐도 이제 갈 때가 되었나 싶었다. 남들보다 더 오래 살았고, 더 많이 보았고, 더 많이 경험했다. 이 만큼 살고 겪었으면 이제 준비를 해야 되지 싶어 나온 여행길인데 영 처음과 같지가 않다. 그럴 만도 한 게, 어느덧 노숙 생활만 10년. 초심을 잃어버린 노인이었다.
“배는 고프고, 먹을 게 보이진 않고, 가진 건 없고, 얻을 수나 있으려나?”
자기 멋대로 음을 붙여 흥얼대며 물가를 찾은 핀체노는 손가락을 슬쩍 집어넣어봤다.
“윽, 차가워!”
시기상으로는 봄이지만 아직 겨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던 터라 이럴 때 곤란함을 느끼게 된다. 먹을 것이 보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오디나 버찌도 어찌 구해볼 수 있을 테고 더 시간이 지나면 살구도 어찌 구해볼 수 있을 테지만, 지금은 어렵다.
손에 물을 살짝 묻혀 얼굴을 설렁설렁 닦아내며 세수를 마친 노인은 로브 안팎을 뒤져보았다. 허리에 찬 주머니도 보고 소매 안도 보지만 먹을 거라곤 찾을 수 없었다. 이리되면 주변에 인가라도 있나 봐야 할 텐데,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침 끼니를 준비하기 위해 불을 때우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어휴, 별 수 있나. 내 인생이 이런 것을.”
궁시렁거리며 옷맵시를 점검하고 길을 나섰다. 가만 있어봐야 배를 채울 방법이 없으니 움직여서 찾을 수밖에 없다. 걷다보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핀체노였다.
그 동안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이곳은 처음이었다. 이 곳에 오기 전 들렀던 도시가 자신이 알기에 이 나라에서 서쪽으로 가장 끝에 위치한 도시다.
이 방향으로 가면 ‘대산맥’이 하나 있는데 북쪽에서 남쪽까지 거대한 장벽처럼 높이 솟구쳐서 동쪽과 서쪽을 가르고 있었다. 대산맥 동쪽으로는 자신이 지난 몇 년간 지냈던 ‘부오노’ 공국을 비롯, 수십 개의 국가들이 존재한다. 수년간 전쟁을 벌인 나라들, 십 수 년간 정쟁(政爭)에 시달리는 나라들 등이 생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해온 역사를 가진 땅이 대산맥 동쪽, 통칭 ‘드뷔시’라고 불리는 땅이다.
‘드뷔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산맥 쪽으로 올 일은 거의 없었고, 있다하더라도 이 곳까지 올 이유는 별로 없었다. 대륙에 이름난 특산물이 나는 것이 아니어서 상단들이 일부러 찾아올 일이 없고, 정치적으로 중요성을 가진 위치도 아니기에 권력자들의 시선에서도 벗어난 곳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쓸모없다는 의미로 사람들은 ‘아크리스토스’라 불렀다.
핀체노도 웬만하면 대산맥으로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산맥은 사람이 넘을 수 없는 곳이었고 넘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기에 마지막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곳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은 마지막을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이 곳으로 오게 되었다. 다만 그 마지막을 아사(餓死)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기에 주린 배를 움켜쥐고 먹을 것을 찾아다닐 뿐이었다.
****
새벽에 언덕을 넘어 온 바람이 지나가며 아이가 자고 있던 집을 두어 차례 흔들었다. 들창이 흔들리는 소리에 흠칫 놀래며 깼다가도 어두운 사위에 방 안을 휘도는 공기 소리만 들려올 뿐이어서 다시 잠들기를 반복하며 긴 밤을 보냈다. 그 덕분에 아이는 꽤 오랜만에 숙면을 취하지 못하게 되었다.
찬바람이 머리까지 얼렸던 것인지 자리에서 일어나자 가벼운 현기증이 느껴졌다. 해바라기라도 해야 겠다는 생각에 집 밖의 너럭바위로 갔다. 바위가 차갑긴 했지만 침대보단 낫다는 생각에 그 위로 올라가 벌렁 드러누웠다. 생각해보니 꽤 오랜만에 주변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과감한(?) 행동을 했다. 보육원에서 애들이 심심치 않게 풀밭에서나 운동장에서 드러눕고 뒹굴어도 자신은 눈치가 보여 그러지를 못했었다. 산에 올라가는 것도 다른 사람들 모르게 새벽에 몰래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식이어서 역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바위에 대(大)자로 드러누워 햇볕을 쬐는 행동을 하다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눈꺼풀 위로 따사로운 햇살을 내리쬐니 지난밤 찾아온 냉기가 밀려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을 만끽하던 도중, 자신이 처한 현실이 떠올랐다.
“이런 바보 같은.”
아무래도 이 곳에 마법사라도 다녀 갔었나보다. 지난밤의 냉기가 사람을 이처럼 멍청하게 만든 것을 보니 마법사의 손길이 닿은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자책은 그쯤해두고 아이는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나 집 밖을 나올 때도 못 느꼈고 지금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니, 간밤에 마을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역시 찾으러 나가야 하는 걸까?’
혼자서 이 마을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렵기도 했다. 올 때까지 기다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그리고 그 동안 버틸 수 있을까?’
라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마을을 떠나는 것 보다는 낫지 않을까?’
라고 이유를 갖다 대며 선택지를 저울질했다.
저 멀리 시선을 던져보니 높게 뻗은 산에 허리 안개가 길게 걸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만약 마을을 떠난 사람들이 저 산으로 갔다면, 자신도 저 산을 가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아무리 숲길에 단련이 된 아이라도 저 곳만큼은 가지 못했었다.
“······.”
가만 보면 저 허리안개가 걸린 산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뜨거운 한 낮에도 산머리에 걸린 구름이나 중턱에 걸린 안개들이 쉬이 사라지지 않아 예전부터 줄곧 어린 아이의 상상력을 끝없이 자극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저 곳은 금지(禁地)였다.
어른들은 허락된 숲 속의 경계선까지만 다녀왔고, 그 너머로는 결코 가지 않았고 가지 못하게 했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이지만 굵은 눈썹을 꿈틀대며 단호하게 ‘안 돼’를 외쳤던 아버지의 말씀을 어길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른다. 그저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정체불명의 ‘위험’도 호기심을 자극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어른들도 가지 않는 땅을 서슴없이 벗어날 자신은 없었던 아이였기에 아버지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모양새가 됐다.
아이는 종종 동생이나 친구와 함께 너럭바위 위에 서서 산을 바라보곤 했다.
“뭘 보고 있누?”
흠칫 놀란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보육원에서 쓰던 걸레를 연상시키는, 우중충한 회색 로브를 걸치고 해를 등지고 선 ‘노인’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아이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다 너럭바위 끝에서 발을 헛디뎠다. 중심을 잃고 바위 밑으로 떨어지는 아이에게 잽싸게 다가와 잡아주는 노인이었다. 아이는 큰 부상의 위기에서 벗어낫다는 사실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에게 손목이 잡혔다는 사실이 더 큰 위기로 느껴졌다. 몸을 비틀며 바위 아래로 뛰어내린 아이는, 순순히 손목을 놔준 노인 덕에 몇 걸음 물러나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바위 위에 선 노인은 고개를 이리 저리 돌려 마을을 훑어보고 있었다.
“흠, 이 마을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건가?”
아이는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노인을 관찰했다. 아까와 다른 위치에서 바라봐서 그런지 음영에 보이지 않던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짙은 갈색 빛의 얼굴에는 자글자글한 주름이 잡혀져 있는데, 자신이 알던 사람들 중 가장 많은 주름을 가진 노인이었다. 머리카락이나 눈썹, 수염은 모두 흰색이긴 한데 어쩐지 명수가 가끔 침대 밑에 숨겨둔 속옷 색깔을 연상케 했다. 허리까지 닿은 수염이 인상적이긴 했다. 이야기 속 마법사가 저럴까 싶다가도 옷이나 수염에 붙은 잔풀이나 마른 찌꺼기 같은 것들이 ‘나는 거지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왼 손에 든 지팡이는 말라비틀어진 나무를 꺾어다 길잡이용으로 들고 다니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리라 여겼다. 가죽샌들을 신었나 싶었는데, 가만 보니 앞코가 뜯어진 것에 불과하다.
반면, 노인이 보기에 아이는 신기했다.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이 곳에서 보기 힘든’ 아이였다. 선입견일 수 있지만, 이런 빈촌에서 자란 아이라면 얼굴에 노랑꽃이 피어 있거나, 피죽이 말라붙어 있어야 할 거 같은데 저 아이는 마치 대도시의 귀족 아들래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을 ‘관찰’하는 저 또랑또랑한 눈은 여느 학자의 눈과 비교 해봐도 손색이 없을, 총기가 넘치는 눈이었다. 제대로 수선도 안 된 낡은 옷을 걸치고 있지만 뽀얗고 밝은 빛이 도는 얼굴을 가진 아이, 라면 뭔가 사연이 있을 듯 했다.
한 사람은 입을 꽉 다물고 경계어린 시선을 보냈고, 한 사람은 재미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너 누구니?”
“누구세요?”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