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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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떴지만 여전히 주변은 어두워서 주위의 사물이 구별되지 않았다. 1년 전에도 이런 경험을 했었음을 떠올린 아이는 이내 자기가 쓰러져 있음을 깨달았다.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는데 쉽사리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애면글면 팔에 힘을 줘서 일어나보는 아이. 입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여긴 어디?’
방금 전까지 명수와 산에서 비를 맞고 있었다는 기억까지는 떠올렸다. 그 이후.
‘명수가 넘어지고 난 ······.’
등에 강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 그러고 보니 등이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선은 주변을 파악해야 할 것 같아서 의자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지만 여전히 어둠에 묻혀 보이는 것이 없었다.
손을 뻗어 어디 걸리는 것이 없는지 휘저어 보지만 당장은 의자 밖에 없다.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주변을 더듬어 나갔다. 그리고 손이 닿았다. 벽으로 추정되는 그것에서 거친 나무의 차가운 질감이 느껴졌다. 아이는 그 느낌이 익숙했다.
"음?"
한 손은 벽을 짚어 의지하며 다른 한 손은 이 곳 저 곳을 더듬어가며 정체를 파악할 만한 무엇인가가 손에 잡히기를 바랐다. 직각으로 꺾이는 벽이 나타나고 다시 그 벽을 따라 게걸음을 걸었다.
이윽고 다른 이질감이 느껴지는 벽이 나타났다. 가로방향으로 정렬되어 있던 벽이 세로방향으로 바뀌는 느낌. 아이는 문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힘을 주니 바깥으로 밀려나는 문이었다.
열리는 틈새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아이는 문을 나섰다.
“아······.”
여전히 주변이 어둡긴 매 한가지였으나 서서히 어둠이 옅어지고 있는 하늘이었다. 동살이 잡힐 무렵이라 보라색과 감청색이 뒤섞여 신비로움이 가득한, 한 눈에 담기도 어려울 만큼 넓은 하늘. 이세계로 떨어진 1년 동안 저렇게 넓은 하늘은 보지 못했다. 하늘을 가리는 높은 건물도, 이 곳 저 곳으로 복잡하게 펼쳐져 시선을 어지럽히던 전선들도 없기에, 맨살을 드러낸 듯 오롯이 드러난 넓고 넓은 하늘이었다.
또 바로 앞으로 보이는 전경 역시 너무 익숙하고, 또 그리웠던 장면이었다. 늙은 전나무 껍질로 지붕을 메우고 통나무를 세워 벽을 만든 집들. 집들 사이로 익숙한 속길과 드문드문 소담스럽게 솟아난 잡초들. 정리를 하지 않은 흙길에는 생겨난 허방들. 어른들의 힘으로도 뽑을 수 없어 그냥 내버려둔, 한 때는 놀이터 삼아 놀던 바위들. 그리고 새벽이슬을 머금어 살짝 고개 숙인 꽃들과 듬성듬성 솟아 그늘을 만들어주던 나무들.
이곳은 빈촌이었다.
입술을 깨문 채 아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나온 집의 실내가 희미한 빛을 받아 어렴풋하게 그 정체를 드러냈다. 탁자와 의자, 벽에 걸린 장식물들까지.
“엄마······.”
저도 모르게 신음처럼 터져 나온 한 마디에 아이는 정신을 차렸다. 엄마.
“엄마? 엄마!”
안으로 뛰어든 아이는, 어둠에 싸인 집에서, 방에서 끝끝내 어머니를 찾을 수 없었다. 바깥 공기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싸늘함이 집안을 채우고 있었다.
어느새 해가 떠올라 주위가 환해졌다. 이맘때면 부지런한 사람들이 아침을 준비하랴,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하랴 분주했을 텐데, 1년 전과 마찬가지로 빈촌은 조용하기만 했다. 집 밖 외벽에 기대어 앉은 아이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엉망인 상태였다. 어떻게 이곳으로 다시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여전히 모든 게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상황이라는 것만 재확인했을 뿐이다.
팔을 들어 눈 주위를 쓱쓱 문지른 아이는 벌떡 일어나 집으로 들어갔다. 주변이 밝아진 틈에 ‘조사’를 해 볼 요량이었다. 비록 1년 정도였지만 타지에 나가 수학한 유학생(?)으로서 나름 머리가 깨인 상태이기도 했던 아이는 그간 배우고 익힌 바를 실천해 볼 생각으로 집 안 구석구석을 살폈다. 1년 전이야 어머니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당황해서 어리숙하게 행동했었다지만 이제는 배운 머리를 써먹어야 할 때였다.
아이는 조사를 시작하고 몇 가지 단서를 추려낼 수 있었다. 하나는 집 안에 먼지가 많지 않았다는 것. 만약 자신이 집을 떠나 있던 1년간 이 집이 방치되었다면 거실 탁자가 이렇게 깨끗하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누군가 청소를 한 흔적은 없어보였다. 만약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다면 벽 아래로 떨어진 마른 약초 다발을 주워다 어디에든 올려놨을 테니 말이다.
두 번째는,
“모든 것이 그대로.”
아이가 기억하기에 1년 전, 그러니까 자신이 마지막으로 이 집에 있었을 때와 같은 상태라 가정한다면 이 집에는 모든 것이 평상시와 같은 형태로 존재했다. 방에 걸려있는 몇 안 되는 어머니나 동생의 옷가지들도 그대로였고, 주방에 놓인 그릇들도 가지런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마치 전 날 저녁, 세 식구가 다 함께 식사를 하고 난 뒤 뒷정리를 마치고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면 바로 지금과 같은 모습일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세 번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집들도 들어가 보고 난 뒤의 단서였다.
“아무도 없다.”
다른 집 역시 자기 집과 마찬가지로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고, 다른 모든 의복이나 생필품들이 제 자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결론.
“사람만 사라졌다.”
그럼 또 다시 의문점 하나. 왜 사라졌는가? 혹시 도시의 기사들이 와서 데리고 갔을까? 예전에 옆 집 아줌마와 아저씨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여기는 걷어 갈 것도 없고 하니깐 사람들이나 끌고 가서 노예로 만들게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그려.”
“아이고, 그런 무서운 소리는 하지 마요. 말이 씨가 될라.”
“별 수 있나. 만약 들키면 또 도망가야지 뭐.”
그러나 아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했다.
‘도망이라면 급하게 집을, 마을을 뛰쳐나간 흔적이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또 도망가는 사람들이 짐을 모두 그대로 두고 몸만 비울 리도 없어.’
하다못해 체온을 보존할 담요라도 싸들고 가지 않을까? 바로 얼마 전에 비슷한 경험을 했기에 아이는 나름 합리적인 추론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 끝에 다다른 결론은 ‘알 수 없음’이였다. 사라진 이유도,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도.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전 내내 마을을 둘러봤지만, 마치 사람만 골라다 빼놓은 것처럼, 마치 마을 전체가 박물관이 된 것처럼 보였다.
해가 중천에 올랐을 때, 아이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허기가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아이는 아침을 먹고 뒷산에 오른 뒤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솔직히 정신을 잃었던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벌써 이곳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오전을 보냈기에 배가 고플 만 했다. 오전에 살피면서 봤던 빵이 생각났다. 부엌 선반에 올려져 있던 빵을 꺼내보니 겉으로는 먹을 만 해 보였다. 한 꼬집 뜯어내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더니 맛이 꽤 괜찮았다. 이곳은 이세계와 달리 냉장고라는 것이 없어 음식을 오래 보관할 수 없었다. 때문에 어떤 음식이든 오래 두고 먹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지금 아이가 있는 때와 이세계로 가기 전의 시간차가 거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른 재료들도 선반에 있었지만, 요리를 할 줄 모르는 아이로서는 그저 보기 좋은 떡에 불과했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이 곳, 자신의 고향은 이세계에 비해 굉장히 낙후된 곳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 곳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이 여기서는 하나같이 놀라운 문명의 산물들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니, 그 중 하나라도 있다면 생활에 불편함이 없을 것 같았다. 반대로 여기서는 모든 게 불편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음을 아이는 인정했다. 비록 1년일지라도 그 곳에 적응했었던 아이에게, 딱딱하고 냄새나는 침대와 방풍·방한이 되지 않는 집은 그리움보다 불편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까닭 모를 서러움에 아이는 눈물을 훔치며 먹던 빵을 마저 먹었다. 주전자를 들고 우물에서 물을 떠와 목마름을 채우고 간단한 식사를 마쳤다.
어쩌면 잠시 자리를 피했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지도 몰라. 아이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침대로 가서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기다려보기로 결정했다. 침대에 누워 있으니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1년 전, 숲으로 땔감 등을 주우러 들어가기 직전, 침대에 누운 채로 다친 허리를 한 손으로 짚으며 배웅하던 어머니의 모습.
“엄마 잘 돌보고 있어. 형 금방 갔다 올게.”
라고 했더니, 씩씩한 얼굴로 대답하던 동생의 모습. 모두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모습이 마지막 모습이 될 거라곤 어머니나 동생도 몰랐을 것이다.
명수도 생각이 났다.
“괜찮겠지?”
아무래도 산에서의 모습이 영 쉽게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넘어지기 전에도 추위에 입술이 파랗게 질릴 만큼 힘들어하던 명수였다. 자신의 팔을 꼭 붙잡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산을 내려가던 명수였는데 구르기까지 했으니······.
보육원에 들어와 처음 방에 배정되어 명수와 같이 있게 된 날, 낯선 사람이 들어와 한 방을 쓰게 되었으니 아무리 활달한 성격의 명수라도 쉽게 다가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명수는 명수였다. 어색함이 가득했던 그 순간을 참기 어려웠는지, 아니면 호기심이 다른 모든 것을 누를 만큼 강했던 건지, 그 아이가 먼저 다가와 말을 붙인 것이다.
“그거 목걸이야?”
펜던트를 가리키며 궁금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던 명수였다. 그랬던 친구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다.
잡생각이 끝도 없이 밀려들어왔다. 해거름이 다 되어서도 아이는 침대에서 말똥말똥한 눈으로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