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명(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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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야!”
아이의 비명에 앞서 걷던 형근이 놀란 얼굴을 하고 급하게 돌아보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지만 형근은 그 고통을 느낄 새가 없었다. 낙엽에 미끄러져 넘어진 명수가 비탈을 타고 구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철용도 마찬가지.
자신을 붙잡고 걷던 명수가 아래로 푹 꺼지며 굴러가는 것을 인지함과 동시에 아이는 손을 뻗었다. 명수를 붙잡으려 했으나 한 끝 차이로 명수는 아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아이는 명수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급히 명수를 쫓았다. 아래쪽으로 구르는 명수를 금세 쫓은 아이가 폴짝 뛰어 명수를 넘었다. 양 발에 힘을 주어 미끄러지지 않게 균형을 잡고 돌아선 아이는 발 앞으로 굴러온 명수를 붙잡았다.
그러나 굴러 오던 힘을 감당 하지 못한 아이가 이내 명수와 뒤엉키며 쓰러졌다. 쓰러지는 순간에도 아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몸을 잽싸게 돌려 작은 나무가 서 있는 쪽으로 향한 아이는 이내 소나무 아래 줄기에 부딪히며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
“명수야! 석고야!”
형근과 철용이 한 발 한 발 조심해서 쓰러진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명수는 많이 놀랐는지 크게 울지도 못하고 컥컥 거리며 울먹거리고만 있었다. 반면 몸으로 명수를 받아냈던 아이는 땅에 엎어져 있는데 움직임이 없었다.
“명수야, 괜찮아? 다친 데 없어?”
말 없이 도리도리 고갯짓으로 대답하는, 눈물 범벅인 명수를 일별하고 형근은 아이에게 다가갔다.
“야, 정신차려봐! 야!”
몸을 흔들며 부르는데도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아이였다. 형근과 철용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명수가 가만히 보다 울음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죽은 거야?”
철용이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서다 주저 앉아버렸다. 형근의 두 눈은 이보다 커질 수 없다는 것처럼 커졌지만,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조심스럽게 돌려 눕혔다. 외관상으로는 크게 다친 부위가 없어 보였다. 어느새 부슬비가 되어버린 빗줄기가 내리고 있지만 붉은 피가 보이지는 않는 거 같았다. 피가 안 나면 크게 다친 건 아닐 것이다. 형근은 그리 판단하고 조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슬며시 아이의 가슴께로 손을 올려보았다. 옆의 두 아이가 그 모양새를 말없이 지켜보는데 명수가 끝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죽었어?”
울음을 억지로 참고 있음을 역력히 드러낸 형근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모르겠어.”
이번에는 손을 떼고 귀를 가슴에 대 보는 형근. 명수가 다시 말을 하려는데 이번에는 철용이 검지를 입술에 대며 명수를 제지했다. 그러기를 한참, 다시 몸을 바로 세우더니 궁금해 미치기 직전이라는 눈빛을 보내는 두 사람에게 형근이 말했다.
“살아 있는 거 같아. 가슴이 움직여.”
“와!”
“철용아, 내가 석고 업고 갈 테니깐 니가 명수 손 붙잡고 내려와. 명수야 걸을 수 있겠어?”
형근의 리더쉽이 위기 속에서 피어나는 순간, 시간이 갈수록 약해지던 빗줄기가 시나브로 멈추었다. 여전히 바닥은 미끄럽지만, 한 발짝씩 조심하며 보육원을 향했다. 다행히도 보육원까지 멀지 않은 시점에서 벌어졌던 사고였던지라 넷은 무사히 보육원의 후면이 보이는 곳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엉망진창이 된 모습으로 보육원에 나타난 아이들과 이를 발견한 다른 아이들.
선생님을 외치는 아이들과 급체한 얼굴로 나타나 전기라도 맞은 듯 부들부들 떨어대는 보육교사.
요란 법석을 떨어댄 아네스 보육원의 주말 오후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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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는 어때요?”
입 안 가득 담배연기를 베어 물었다가 뱉어내는 원장의 심각한 얼굴에 코를 막는 시늉도 못하고 그저 죄송한 마음으로 답하는 보육교사였다.
“일단 자기 방 침대에 눕혀 놓았고요······.”
“제가!”
갑자기 터져 나온 고성에 화들짝 놀란 보육교사의 좁은 어깨가 더욱 움츠려진다. 원장은 다시 한 번 깊이 담배 한 모금을 들이마셨다가 뱉으며 조용히, 천천히 말을 꺼냈다.
“제가··· 어디 있냐고 물은 게 아니잖아요. 아이 상태가! ···후우, 어떠냐고 물어본 거잖아요.”
“예··· 저··· 아이는 아직······.”
“아직?”
“예! 아직 정신을 잃은 상태입······.”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애가! 정신을! 잃었다고 가만히 있어! 당신 초짜야? 응? 초짜냐고!”
보육교사는 분기를 터뜨리는 원장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그저 죄송합니다, 만 반복했다.
“아이들이 산에서 다쳐서 내려올 때까지 당신, 뭐한 겁니까! 그리고 지도원 하나 없이 누가 애들만 산으로 보내래요? 예? 그리고 비가 그렇게 오는데 안 왔으면 보고를, 보고를 해야 할 거 아냐! 당신 그냥 시말서나 쓰고 말면 다일 줄 알았어? 응? 당신 말이야! 이거 구속감이라는 거 몰라? 이래 놓고 나한테 책임 씌어서 말이야, 나 한 번 엿 먹어 보라는 거야 뭐야! 저러다 애 잘못되면, 당신 인생 완전히 끝이라고! 알아 몰라!”
볼륨을 최대로 올린 후 기타 스트링을 울리면 앰프에서 이런 소리가 나지 싶었다. 보육교사는 원장이 질러대는 말이 드문드문 들리는데도 내용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만 할 뿐 대꾸는 하지 못했다. 그저 입술만 덜덜 떨며 눈치만 보는 그녀.
비 오는 록 페스티발의 진흙탕에서 뒹굴다 나온 얼굴처럼 거무죽죽한 그녀가, 사무국장이 보기에 안돼 보였다. 옆에서 된서리는 피하자는 식으로 묵묵히 서 있던 사무국장이 타오르듯 붉어진 얼굴의 원장을 말렸다.
“원장 선생님. 일단 고정하시죠. 혈압도 있으신데······.”
보육교사를 노려보며 씩씩대던 원장은 꽁초만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새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인 보육교사를 노려보는 원장의 품이 여간 사나운 게 아니었다. 동물원 철망을 뚫고 나온 흑곰이 날 선 눈매로 먹잇감을 노려보는 모양새가 딱 저러하지 않을까. 사무국장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데 원장이 입을 열었다.
“박 선생.”
동굴 벽을 긁는 소리에 흠칫한 보육교사가 눈동자만 올려 원장의 눈치를 봤다.
“혹시 전화했어요?”
“··· 전화요?”
“119 말이예요.”
“아! 아뇨, 아직······. 아, 지금 바로 하겠······.”
“하지마세요.”
“예?”
원장의 지시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눈이 마주친 보육교사는 앗 뜨거, 하며 금세 고개를 내렸다. 잠시 정적이 흐르는 원장실에 담배 끝이 타들어가는 소리만 울렸다.
“소문나면 안 좋으니까, 연락하지 마시라고요. 알겠죠?”
“예······.”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의 대답이 시원찮았는지 원장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알겠냐고?”
“예, 예!”
“나가봐요.”
곰에게 벗어난 보육교사는 환호성을 지르는 대신, 앓는 소리를 내며 절뚝거리는 무릎을 억지로 움직여 원장실을 벗어났다. 곰은 담배를 마저 피웠다. 원장실은 앞이 보이지 않게 연기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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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자신이 잠을 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잠에서 깨어나려고 하는데 깨어나 지질 않는 것이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어서 아이는 어찌해야 될지 몰랐다.
아이는 주변을 둘러 볼 수 있었다. 잠을 자는데 둘러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하지만 주위는 온통 어두워 사위를 둘러보아도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때 노랫소리인지 뭔지가 들렸다. 낭송시 같기도 했다.
미신(迷信)을 믿는 사람은
자신(自信)을 잃는구나
미몽(迷夢)에 빠져 세월을 낭비한 사람은
자만(自慢)의 숲에서 길을 잃었구나
미궁(迷宮)에서 벗어나려는 그대여
자해(自害)의 흔적을 남겨두었구나
혼란을 방조하였던 신이시어
이제는 돌아와 방종(放縱)의 무리들을 무찌르소서
혼구(昏衢)의 끝에 선 신이시어
이제는 빛을 열어 어둠을 무찌르소서
그리하여
미명(未明)의 시간, 창천(蒼天)의 뜻을 세우소서.
낭송이 끝날 때, 아이는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