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명(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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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고야, 추워.”
바위 아래로 몸을 숨겨 급하게 비를 피했지만, 오는 동안 적지 않은 비를 맞아 흠뻑 젖은 채인 아이들이었다. 특히 어린 명수가 체력이 많이 떨어진 틈에 비를 맞았던 탓인지 벌써 입술이 파래지는 것 같았다.
“조금만 참아. 금방 비가 그칠거야.”
아이는 명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형근과 철용도 다가와 서로를 껴안았다. 체력이 심하게 떨어진 상태만 아니었다면 이런 조난(?)을 당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별 수 없었다. 아이는 비가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위 때문에 시야가 많이 가려졌고, 그 너머로 댓살같이 내리 퍼붓는 소나기가 하늘을 가리고 있어 먹구름이 어디까지 지나갔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아이의 등으로 추위가 슬그머니 올라와 앉기 시작했다. 명수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남은 한 손을 들어 목에 걸려있던 펜던트를 꺼내 붙잡았다.
‘아버지.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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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원 안으로 중형 세단 한 대가 들어왔다. 이윽고 현관 앞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린 이는 원장과 사무국장이었다. 여름의 초입을 맞아 보신도 할 겸 백숙 한 그릇씩 거하게 드시고 오신 원장은 더욱 넉넉해진 ‘인성’을 두드리며 보육원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배곯은 표정을 지으며 사무국장이 뒤따랐다.
“원장 선생님. 그럼 분기 예산안 수정 보고서, 말씀대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예. 그러세요. 정말 사무국장이 계셔서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마음 아시죠?”
배도 부르고 일도 잘 풀리니 기분이 좋았다. 모처럼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가서 가장 노릇 좀 해볼까, 궁리해보던 원장이었다.
“그리고 이번 년도에 졸업하는 애들이 4명인데, 인원 감축을 해야 할지······.”
사무국장의 걱정에 너털웃음을 짧게 터뜨리며 해답을 제시해주었다.
“원··· 애들이 빠졌으면 빠진 만큼 또 데려오면 되죠. 지금 계신 분들 모두 경력자들이신데 함부로 감축할 수야 있나요. 일 할 사람이 너무 많다고 자르고, 부족하다고 새 사람 뽑고 그러면 애들도 혼란스러워 합니다. 일 할 사람이 많으면 일을 만들어야 보육원도 돌아가고, 나라에 보탬도 되고 그러는 거죠, 안 그렇습니까? 바로 그런 일 하는 게 우리 사무국장 님 일 아니십니까? 나중에 시청 이 국장 만나서 잘 이야기 나눠보세요. 혹시 압니까? 우리 쪽으로 들어올 아이들이 생길지.”
살짝 얼굴색이 변하는 사무국장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는 격려해주는 인자한 원장.
“아 국장님 같이 올라가셔서 커피나 한 잔 하시죠. 마침 좋은 커피도 들어왔다던데.”
“예, 알겠습니다. 원장 선생님.”
사무국장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능글거리는 원장의 뒤를 졸졸 쫓았다.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본 행정과장이 짧게 혀를 차곤 눈에 띄지 않게 재빨리 행정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행정과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여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이서림 씨, 커피 한 잔 부탁해요. 진하게요.”
“예, 과장님.”
자기 책상을 찾아 앉은 과장은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풀었다. 요즘 점점 살이 차오르는지 넥타이를 매는 것도 고역이다. 이게 다 나잇살이겠거니 싶다가도 ‘다이어트’를 좀 해야 하나, 같은 고민을 짧게 가져본다.
여직원이 커피를 가져왔다. 진한 고동색 커피를 들어 한 모금을 머금고는 창밖을 내다 봤다. 아까는 미친 듯이 쏟아지더니 이제 빗줄기가 조금 약해진 모양이다. 역시 여름 소나기는 짧고 굵게 존재감을 드러낸다싶다.
“소나기라······.”
“예?”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던 일 하세요.”
눈치를 보다 이내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는 여직원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이제 몇 가지 확실한 증거들만 찾으면 원장을 탄핵하는 일도 멀지 않았다. 정황상 원장의 비리가 확실해 보이는데 사무국장이란 놈이 어찌나 단단히 바리케이드를 쳐 놨는지 쉽게 뚫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원장의 라인도 여간 튼튼한 게 아니다. 위 아래로 확실한 줄을 잡고 있으니 그 지위가 꽤 단단해 보이기도 했다.
‘재단 이사 황희숙, 강명자, 거기에 사무국장까지.’
하지만 결국 ‘소나기’를 맞는 것은 원장이 될 것이라고 행정과장은 생각했다. 재단 실세 중의 실세가 자기 뒤를 받쳐주니 언젠가는 이 판을 엎을 수 있으리라. 진한 커피를 마시며 비가 언제 그치려나, 짐작해보는 행정국장이었다.
거세게 내리던 비가 조금씩 기세를 줄이기 시작한 것은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이었다. 고작해야 3시간 정도 비가 퍼 붓다 말았지만 ? 그리고 아직 비가 그친 것은 아니지만 ? 그 비 때문에 보육교사는 피가 마르는 심정을 맛봐야만 했다.
“박 선생님, 무슨 일 있나요?”
현관을 떠나지 못하는 보육 교사의 모습이 이상하다 여긴 생활 지도원이 말을 건넸다. 여름 소나기가 반가워 저러고 있을 양반이 아닌데, 라는 생각은 속으로만 하면서.
“아, 아니요, 별 일은요. 그냥 오랜만에 비가 오는 게, 좋기도 하구요. 오늘 외출 나간 애들이 무사히 돌아오나 싶어서요.”
저 양반 지금 자기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이나 할까? 라는 생각도 속으로 삼켰다. 외출 나간 애들이 돌아오려면 아직 4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제쳐두고라도 자기가 언제부터 그렇게 열심히 애들 걱정 했다고 저럴까. 생활 지도원은 괜한 물음을 던졌다 싶어 그냥 자기 할 일이나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돌아섰다.
‘지 할 일이나 하지 남의 일에 괜한 오지랖이람.’
보육교사는 돌아서는 생활지도원을 한 번 째려보고는 다시 바깥을 쳐다봤다. 비가 완전히 그치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다. 지금이라도 장난스런 미소를 얼굴 가득히 채워서 저 빗속을 뚫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왔으면 싶다. 그럼 자신은 꽤나 엄한 얼굴로 아이들을 채근할 것이다. 이렇게 비가 오면 바로 돌아왔어야지,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고. 자신이 얼마나 너희들을 걱정했는지 아냐고. 그러면 아이들은 빗물 섞인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잘못했다고, 선생님 말씀 잘 듣겠다, 며 잘못을 빌겠지. 그 후에 자신이 무릎을 굽히고 아이들과 시선을 맞춘 후 따뜻하게 안아주며
“선생님이 정말 엄마 같은 마음으로 너희들이 무사하길 기도했단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라고 말을 하는 모습을 지나가던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지켜보겠지. 그러면 관리 소홀이라는 명목으로 경위서를 쓸 일도, 징계를 받을 일도 없겠지. 원장의 찢어진 눈매를 마주하고 무릎 꿇을 일도 없겠지.
제발,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오늘 하루 무사히 지나가기를. 누가 들어줄지 모를 기도를 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그 시간 자신들을 걱정(?)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던 무리들은 잠시라도 쉬었던 게 약이 되었는지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렸다.
“형근이 형. 이제 내려가자.”
철용이 다시 한 번 하산을 종용하자 형근이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하겠다 마음먹었다. 힐끔 옆을 보니 명수도 많이 힘들어 보였다. 여기서 비가 그치기를 마냥 기다리는 것도 답은 아니지 싶었다.
“그래, 비도 조금밖에 안 오니까 내려가도 되겠다.”
아이도 이제 내려가는 게 옳다 싶어 고갯짓으로 동의를 표했다. 이상하게도 아까보다 덜 추운 느낌이 들기도 해서 체력이 많이 돌아왔다는 판단을 했다. 명수도 말은 없었지만 파랗게 질렸던 입술이 제 색을 찾은 걸 보니 움직여도 될 거 같았다.
형근을 위시한 무리들은 천천히 한 걸음씩 조심해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시 비를 맞아서인지, 아니면 젖어 있던 옷이 찰싹 들러붙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지만 잠깐 따뜻했던 몸이 이내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명수는 부들부들 떨며 아이를 붙잡은 팔에 힘을 더했다.
올라 왔던 길을 그대로 내려가는데도 길 위에 떨어진 젖은 낙엽 때문에 비틀대거나 넘어지기 일쑤여서 아이들은 더욱 긴장한 채로 하산을 했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위기감은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하지만 결국 제대로 걷지 못하던 명수가 헛발을 짚으며 미끄러지고 말았다.
“명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