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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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이 밝았고, 아이는 어김없이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뒷산 정상에서 일출을 바라봤다. 조금쯤은 다른 아이들처럼 느긋하게 생활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이전의 습관이 그림자처럼 남아서, 또 아침 햇살이 스며드는 숲의 향기가 좋아서, 라는 이유로 산에 오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천천히 밝아오는 아침 하늘을 오롯이 혼자서 감상하는 이 순간만큼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나 분위기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리라. 무덤덤한 표정과 달리 거의 항상 신경을 세우고 있었던 아이의 남모를 고충이었다.
산에서 내려오니 보육원도 조금씩 아침잠에서 깨어나는 분위기였다. 아이가 아침을 먹으러 식당엘 갔을 때 원생들이 다소 들떠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이 달의 마지막 주말이었고, 이 날에는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자원봉사자 중에 피자와 등갈비 폭립(Pork ribs)을 가득 싸들고 오시는 분이 계셨다. 당연히 ‘외식’을 연례행사처럼 손꼽아 기다리는 원생들에게 가장 인기 많은 메뉴라 할 수 있었다. 아이 역시 놀라운 재료들과 맛으로 무장한 그 음식들을 좋아했다. 다만 그 음식만큼 보육원 식당에서 제공하는 아침도 맛있었고, 끼니를 챙겨 먹을 수 있다는 만족감을 포기할 수 없었던 아이는 남들보다 더 많이 아침을 챙겨 먹었다. 아침 등산을 하기 시작한 후로 부쩍 식사량이 늘어난 아이였다.
“너 진짜 많이 먹는다. 배 많이 고파?”
명수의 걱정 가득한 오지랖에도 아이는 부지런히, 맛있게 식판을 비워냈다.
“너 그렇게 많이 먹으면 돼지 된다. 안되겠다. 내가 너 운동시켜야겠다.”
역시나 명수다, 싶은 생각에 아이는 싱긋 웃고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방학이기도 했고, 주말이기도 했다. 오늘 하루, 아니 오전쯤은 같이 놀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은 마음에 명수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이따가 형근이 형이랑 산에 가서 사슴벌레 잡을 거다. 예전에 형이 새하얀 토끼도 봤다는데, 엄청 빨리 도망가서 잡진 못했대. 혼자라서 잡기 힘들었는데 둘이 가면 한쪽에서 막고 한쪽에서 잡으러 가면 쉽게 잡을 수 있대. 철용이 형이랑 너까지 해서 넷이 올라가면 토끼 잡을 수 있을 거야.”
여태 산을 오르면서 토끼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이다. 토끼똥 하나 구경 못해본 아이는 저 산에 토끼 없어, 라고 말하는 대신 이 손 저 발 써가며 신나게 이야기하는 명수의 재잘거림을 묵묵히 받아주었다. 어쩐지 명수의 모습에서 옛 친구의 수다가 생각났다. 명수의 식판은 점점 식어갔지만, 얼굴은 점점 뜨거워졌다.
보육원의 남자 초등학생 4명은 신발을 동여매고 산에 오르기 위한 준비를 했다. 형근의 지시에 따라 보육원 현관 앞에 모인 동생들을 등 뒤에 세우고 형근은 보육교사에게 산에 다녀오겠노라고 허락을 구했다. 마침 보육교사는 주말 외출을 신청한 아이들을 배웅하느라 현관에 나와 있던 상황이었다.
“니가 큰 형이니까 동생들 안 다치게 잘 돌봐야 한다. 너무 멀리가지 말고. 알았지?”
“예, 선생님!”
가자, 라고 신나게 외치는 큰 형을 졸졸 따르는 작은 병아리 무리들. 그들의 뒷모습을 눈에 담고 있던 보육 교사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머, 소미 아버님 오셨네요? 어머 소미야, 오늘 너무 예쁘게 차렸는데? 아버님 올 때마다 소미가 저렇게 꽃단장을 하네요.”
원생들의 부모님들에게 립서비스는 기본이지만 소미의 경우에는 진심으로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꾸밀 필요가 없었다. 넉살 좋은 웃음으로 소미와 소미 아버지를 배웅하던 보육교사는 보육원 정문을 빠져나가는 소미의 어깨가 많이 지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반에서 우등생으로 소문난 소미였기에 그간 공부하느라 힘들었었나 보다, 라고 짐작해 볼 따름이다.
‘아버지한테 맛있는 거 얻어먹고 그러면 힘도 나고, 기운도 내고 그러는 거지. 그래도 찾아오는 아버지가 있는 게 어디야.’
부모와 함께 외출을 떠나는 원생들을 걱정하느니, 뒷산에 올라간 철부지 꼬마 애들을 걱정하는 게 바람직하리라. 보육 교사는 걸치고 있던 앞치마를 괜히 툭툭 털어 내고, 원내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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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고야, 석고야. 뭐하니?”
“······.”
“석고야, 석고야. 뭐하~니?”
“··· 가만히 있어봐.”
“석고야, 석······.”
“자, 여기.”
“윽, 뭐야!”
뒷걸음질 치는 명수에게 다가간 아이는 눈앞에 들이대고 설명했다.
“새똥하늘소.”
“으··· 응? 하늘소? 이게?”
너무 작고 희어서 얼핏 지나가다 보면 잎에 떨어진 새똥처럼 보인다고 ‘새똥하늘소’라 이름이 붙은 곤충을 눈앞에서 본 명수는 조금 전까지의 지루함이 싹 날아간 듯이 보였다. 배 부분만 허여멀건 것이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새똥이다. 이 작은 걸 찾아낸 아이의 관찰력은 명수의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엄지와 검지로 조심스럽게 건네받아 가만히 살피니, 6개의 조그만 다리가 꼼지락 대는 것이 여간 신기한 게 아니다.
어디 나도 한 번 보자, 며 몇 걸음 떨어져 걷던 철용도 달려와 같이 감상했다.
“아까 거랑 또 다른 거네? 석고는 이런 거 정말 잘 찾네?”
형근은 두어 걸음 떨어진 곳까지 왔다가 슬쩍 눈치만 보고는 다시 멀어진다. 눈을 부릅뜬 모양새가 조만간 뭔 일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힘을 빡 주고, 주변을 샅샅이 훑으며 산을 올랐다. 아이가 3마리를 찾는 동안 자신이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산을 오르다보니 아무리 기운 넘치는 꼬마 아이들도 지치기 마련인데, 먼저 우는 소리를 내는 것은 역시 명수였다.
“형.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 될까?”
이미 이마와 볼이 발그레 달아오른 형근이 어쩔 수 없이 허락한다는 듯,
“그래 잠깐 쉬다 가자.”
라고 말한 뒤 제일 먼저 풀썩 주저앉아 버린다. 뒤따라 다른 아이들도 형근의 옆에 주르르 주저앉고는 거친 숨을 달래며 올라온 산길을 내려다 봤다.
“형 우리 너무 멀리 온 거 같애.”
평소 누구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뛰는 ‘운동장의 지배자’ 철용도 산길은 힘들었나보다. 대충 이만큼 왔으니 이만 돌아가자는 뉘앙스가 담긴 말에 형근은 잠시 고민하느라 대답이 늦었다. 그러자 명수가 순박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토끼 잡을 때까지 더 올라가야지.”
이 정도면 되겠지, 라고 속으로 생각하던 형근은 명수의 말에 당황하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철용이 또 한 마디 했다.
“너무 멀리 와서 길 잃어버리면 어떻게 돌아갈래? 너 길 모르잖아?”
“형근이 형은 길 잘 알아.”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맞다고 할 수도 없는, ‘사면초가’ 상태다.
“선생님이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했잖아. 선생님 말씀도 들어야지.”
“선생님도 토끼 잡아가면 좋아하실 거야. 보육원에서 토끼 키우는 사람 우리 밖에 없을걸?”
이미 명수는 머릿속으로 토끼집을 만들어 놓고 밥까지 챙겨주고 있었던 것 같다.
“야, 토끼가 바보냐? 우리가 4명인 걸 봤으면 벌써 도망쳤겠다.”
“아니야, 토끼는 형근이 형이 금방 찾을 거야.”
명예와 실리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형근. 그는 이미 ‘자가당착’에 빠진 상황이었다. 옆에서 말없이 지켜만 보며 어제 저녁 외운 고사 성어나 떠올려 보던 아이가, 이제 적당히 말려야 할 때인 것 같아 둘 사이를 중재했다.
“지금 하늘에 구름이 낀 걸 보니 곧 비가 올 거 같은데. 비가 오면 산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음에 다시 오는 게 좋을 거 같애.”
셋이 고개를 들어보니 과연 하늘에 먹구름이 모이고 있는 듯 어두워지고 있었다. 비를 맞기는 싫었던지 명수가 마음을 돌려 하산을 결정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툭툭 털고 일어선 형근은 다시 앞장서 산을 내려갔다.
그렇지만 그들의 선택이 늦었던 건지 혹은 생각보다 하늘이 짖궂은 건지 산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이내 소나기가 되었다. 아이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거리기만 했다. 형근이 결심한 듯 뛰어가자, 고 했지만 이내 아이의 제지에 걸려 걸음을 멈췄다.
“위험해요. 지금은 비 때문에 미끄러워서 뛰다가 넘어지면 크게 다쳐요.”
아이는 두려움이 가득한 아이들에게 우선 해결책을 제시했다.
“저 옆으로 가면 비를 피할 데가 있으니 거기로 가요. 소나기는 금방 멈춰요.”
아이가 앞장서 길을 옆으로 틀었다. 아이의 기억에 저기 어디쯤에 기이하게 큰 바위가 비스듬하게 땅에서 솟듯이 묻혀있는 지형이 있었다. 완전히 비를 피하지는 못해도 잠시나마 몸을 숨길만한 곳은 되리라, 판단한 아이였다.
진정한 ‘사면초가’는 바로 지금이리라. 스치듯 지나가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