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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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 잔 하자기에 호프집에라도 가나 했더니, 매캐한 냄새로 가득 찬 돼지 막창 집으로 왔다. 여자 둘이서 돼지 막창집 가는 거야 안 될 것도 없다만. 그래도 희연은 조금 조용한 곳에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불판 위에 고기 몇 점 올려놓고 소주 몇 잔 걸치니 이게 또 차라리 낫다 싶었다. 미처 닥트에 흡입되지 못한 연기들이 희뿌옇게 모인 가게 안은 시끌벅적 요란스러웠고, 덕분에 희연이 홧김에 된소리로 욕을 내 뱉는다 해도 누구 하나 신경 쓸 사람 없을 것 같았다.
“아, 정말 그 짧은 순간에 그리 될지 누가 알았겠냐고~.”
희연의 동기, 화수가 고기를 뒤집으며 맞장구를 쳐 줬다.
“그래. 솔직히 내가 너였어도 그 때는 어쩔 수 없었겠더라. 애가 다쳐서 우는데 혼자 양호실 가라고 할 수는 없잖아.”
역시 동기의 힘은 대단하다. 동기의 응원에 더욱 힘이 난다.
“교감도 맨날 안전, 안전 하는데, 그러면 교실마다 인터폰이랑 달아주지 그랬냐? 띠, 아 거기 양호실이죠? 여기 1학년 3반인데요, 학생 한 명이 다쳤어요. 데려가서 치료해주세요. 막 이래?”
화수가 상추를 두어 번 탁탁 털고, 그 위에 고기 한 점 올리고 마늘 하나, 고추 하나, 쌈장 조금 해서 먹기 좋게 싸서 희연의 입에 넣어준다. 역시 배려심, 이라며 엄지를 척 내밀어 보이며 맛있게 받아먹는 희연이다.
“근데 교감이 징계는 어떻게 한다니? 위원회 열겠대?”
얼굴이 절로 붉어지는 것이 매운 고추라도 먹었나 싶다.
“아니, 그게 무슨 징계위원회를 열 일이냐고. 응? 형오가 혈액공포증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지네 엄마가 나한테 한 마디 하지 않은 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도사야? 경은이는 수업시간에 왜 일어나고 그래? 누가 수업시간에 일어나서 돌아다니랬냐고? 선생이 교실에 없어도 얌전하게 기다려야지 말야. 내가 뭘 잘못했어?”
두서없이 이어지는 희연의 말은 소주 한 잔이 더해질수록 더욱 격앙되어졌다.
“근데 교감이라는 사람이 같은 선생을 보호해야지 말야, 자기 혼자 살겠다고 책임은 다~ 나한테 있대. 징계 위원회도 지가 나서서 열자고 했을 걸? 젠장.”
분기가 치솟는지 소주를 퍼붓다시피 들입다 마시는 희연을 화수는 제지하지 않았다. 한 쪽이 달린다고 같이 폭주해버리면 뒷감당이 안 된다. 적당히 풀어주는 것도 요령이리라.
“학부모들도 그래. 아니 자기 자식들 잘 봐달라고 굽실댈 때는 언제고 일 터지니깐 선생이 어쩌고, 자질이 어쩌고. 아주 내가 지들 껌이야, 껌. 맛있다고 열나게 빨다가 단물 떨어졌다고 뱉는 거 봐라. 내가 그래서 학부모들한테 정이 떨어져, 정이. 스승의 날 때 선물 갖다 바칠 때 표정 봐. 아이고, 우리 엄마가 그랬으면 내가 창피해서 달려가 말렸을 거다. 게다가 선물이라고 주는 게 바디 로션이다. 진짜 내가 지금까지 받은 바디로션으로 매일 쳐 발라도 10년은 쓰겠다. 그래놓고선 뭐? 선생이 한가하니까 애들한테 신경을 안 써? 아니 지들이 나랑 하루를 같이 있어 보길 했어, 뭘 했어? 오전 수업만 한다고 수업 땡 하고 나면 선생도 같이 노는 줄 아나? 수업 일지 작성해야지, 부교재 준비해야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지들이 뭘 안다고 노네 마네야? 아 씨, 진짜 더러워서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이 쯤에서 한 번 끊어줘야지. 자작하려는 희연을 말리며 화수가 대신 병을 건네받아 잔을 따라 주었다.
“니가 참아라. 나도 가끔 그런 얘기 듣는데 참고 있잖아. 솔직히 밴드 만들어서 일일이 하루 수업 내용을 보고하듯이 알려주는 거, CCTV로 감시하는 거랑 뭐가 다르냐고. 자기 하인 다루듯 하는 학부모들도 있다니까?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이 딱 그 짝이야.”
둘은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에 호응해주고 위로해주면서 술잔을 나눴다. 어느 사이엔가 불판 위의 고기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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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식 날, 아이들은 가볍게 등교해서 짧은 훈화를 듣고 더욱 가벼운 발걸음으로 학교를 뛰쳐나갔다. 어느 반은 긴급 학부모 회의가 예정되어 있어, 해당 반의 선생님이 아침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는 말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방학이고 무한한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조금 안타까운 날이었다. 도서관이 개방되지 않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다시 개방한다니 그 때까지는 학교 도서관을 이용할 수 없게 되었고, 덕분에 아이는 전 날 사서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시내 도서관 출입에 관해서 보육 교사에게 요청을 했다.
“미안하지만 넌 아직 어려서 보육원 외출이 조금 어렵 단다. 선생님이 한가하면 같이 가줄텐데 보다시피 선생님이 많이 바빠서 말이야.”
만약 도서관을 가려는 원생들이 많으면 단체로 도서관에 가볼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갓 1학년이 된 원생을 자유롭게 나갈 수 있도록 해 줄 보육원은 없었다.
“형이나 누나들이 따로 보는 책도 있으니 한 번 빌려달라고 해보지 그러니?”
그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까지는 학교 도서관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겼고, 두 번째 이유로는 아이가 썩 그렇게 넉살 좋은 성격만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별 다른 방법이 없으니, 쑥스러움은 강아지 꼬리 감추듯 숨겨놓고 부탁을 해 볼 요량으로 선배 원생이 있는 방을 찾아갔다.
“어라, 웬일이야? 석고가 내 방엘 다 오고?”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김형근은 같은 초등학교 6학년이다. 비교적 네모난 얼굴형에 묵직해 보이는 면도 있지만, 대체로 쉬는 시간마다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발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형이기도 했다. 보육원에서도 종종 애들 무리를 이끌고 다니는 활달함이 엿보였기에 먼저 찾아왔다. 우선 진입장벽이 낮은 순으로 접근해 볼 생각이랄까.
“책? 별로 없는데? 옛날에 쓰던 교과서도 다 물려줘서 가진 게 없는데. 아, 1학기 끝났으니까 이거라도 빌려줄까? 2학기 것도 개학 전까지 보고 준다면 괜찮고.”
방학 때는 책을 안 보실 생각이신가 보죠? 속으로 물음을 삼키며 아이는 1학기 책이라도 보겠다며 빌려다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다음 대상자를 물색했다. 형근의 옆 침대를 쓰는 철용은 그냥 포기했다. 프로축구선수를 꿈꾸는 철용과 책은 아무래도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이다.
똑, 똑.
열려 있는 문을 두드리고 복도에서 대답을 기다렸다.
“어? 석고네? 무슨 일이야?”
다정하게 말을 붙여주는 정다영은 5학년으로 얼굴만 보면 형근 못지않게 옅게 탄 피부에 장난기 가득한 눈을 가진 소녀였다. 기회가 된다면 금세라도 옆구리 콕콕 찌르며 친근함을 표현할 것 같은 쾌활함이 엿보이는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이의 손을 끌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에도 등교 때나 하교 때 유난히 아이를 귀여워해서 옆자리에 앉히려고 하지만 아이는 그런 접근이 선뜻 반갑지만 않았다. 너무 훅훅 들어온달까. 그래도 저 건너편 책상에 앉아 돌아보는 소미보단 낫다.
보육원에 단 둘 뿐인 6학년 중 한 명인 소미를 아이는 굉장히 꺼려했다. 이유는 다름 아닌 냄새 때문이었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는 대단히 예민한 후각을 가지고 있었고 - ‘스크로파’라는 별명에는 아이의 예민한 후각을 코를 킁킁대며 냄새 맡는 동물의 습성에 빗대어 붙인 것이기도 했다 ? 소미에게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쾌한 냄새가 맡아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는 냄새는 아니었다. 다만 과거 빈촌에서 맡아 본 적이 있는 냄새였다. 그리고 그 냄새를 풍기던 사람을 아이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뿐이었다.‘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말 그대로 왜 소미에게서 그 냄새가 나는 지, 원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 냄새를 잘 맡지 못하는 눈치였다.
같은 학년인 형근이 소미를 두고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린 적이 있었다.
“예쁘면 뭘 해. 걔는 너무 어두워. 자기는 찾아오는 아빠도 있으면서 그렇게 세상 근심 다 가진 애처럼 구는 데 정이 안가.”
그러면서도 틈만 나면 흘끔흘끔 쳐다보는 형근의 시선이 종종 들키곤 했다. 예쁜 건 자주 감상해야 된댔어, 라는 변명은 아이를 전혀 설득시키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주 관심을 갖고 있던 형근도 알지 못할 만큼 희미한 냄새였다.
어쨌든 찾아온 용건이나 빨리 이야기하고 나가려는 아이에게 뜻밖에도 여러 권의 책을 선물해준 건 소미였다. 주말마다 아버지가 찾아오는 소미는 그 때마다 먹을거리나 옷, 혹은 책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렇게 받은 책 중에 소설책 3권을 선뜻 내주는 것이었다.
“그냥 너 가져가. 책 좋아한다며? 난 다 읽은 거야.”
끝까지 읽은 건지 의심이 들만큼 깨끗한 책이었다. 아이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하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나중에라도 책 보고 싶으면 아무 때나 와서 빌려가.”
다영에게서도 몇 권의 책을 빌린 아이는 두 손으로 가뿐하게 빌린 책을 싸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돌아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볍지 않은 것은 단지 책이 무거워서는 아니었다. 어쩌면 아이는 책을 빌리기 위해 이 방을 다시 오는 일은 거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과거 그 냄새를 풍겼던 사람은 빈촌에서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 그 전까지도 마을 내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던 사람이었고, 가끔은 무거운 배낭을 메고 지친 발걸음을 옮기던 아이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던 ?어머니의 표현에 따르자면- ‘몹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쫓겨나던 날, 그가 풍긴 냄새, 그 냄새가 아이는 싫었다.
먹고 남은 음식 쓰레기를 뒤죽박죽 섞어 정체를 알 수 없게 만들면 맡게 될 것 같은 역한 느낌의 냄새, 그 불쾌함이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