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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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아프면 양호실로 가야한다고 알려주셨던 게 생각나서 데리고 갔어요.”
경은이랑 형오를 업고 복도를 질주했던 아이에게 ‘상황’을 물었더니 나온 대답이 그야말로 FM이었다.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하는 아이의 태도가 신기하게 여겨져 다른 질문을 던져보는 교감에게,
“무섭진 않았고요. 그냥 걱정이 됐어요. 빨리 양호실에 데려가서 치료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야무지게 대답한다.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했어요. 형오나 경은이는 제가 충분히 업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니요, 형오는 숨을 못 쉬는 거 같았는데 먼저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때는 선생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라도 저보다 빨리 경은이를 데려갈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어지는 질문들에도 똑 부러지는 대답을 내놓는 아이가 비범해 보이는 것이 비단 교감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잠시 후 아이는 꾸벅 인사하고 상담실을 나갔다. 교감은 잠시 나간 아이의 흔적을 눈으로 쫓다 왼편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3년차 교사 희연을 쳐다보았다. 역시 3년차에게 1학년을 맡겨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괜한 마음에 출산휴가를 신청하고 나가버린 교사 두 명을 속으로만 타박했다.
“김 선생님. 일단 내일 방학식이나 준비 잘 하세요. 징계위원회는 방학 중에 열릴 거 같으니 그 전 까지 경위서 제출해 놓으시고요.”
“···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형오 학생 부모님도 이해를 해주셨고, 경은 학생 부모님은 ··· 일단 천천히 해결해 봅시다.”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아니 100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저 ‘복불복’이었을 뿐이다.
“형오 학생은 집에서 쉬기로 했다니깐 방학 끝날 때까지는 학교에 못 올 겁니다. 어차피 2학기 반장도 새로 뽑아야 하니 형오 어머니는 내일 안 나오셔도 괜찮지요?”
학기 초, 형오 어머니가 학부모 모임에서 ‘반장 엄마’로 뽑히면서 형오가 ‘반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졌던 것이었기에, 시기적으로는 형오 어머니의 반장 사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내일 방학식 이후에 가질 학부모 간의 비상 대책 모임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갈지는 희연으로서도 알 수 없었다. SNS에서 이미 엄청난 양의 말들이 오고 가는 판국이었으니까. 이마에서부터 흐른 땀이 똑, 하고 책상 위로 떨어졌다.
상담실을 나온 아이는 곧장 도서관으로 갔다. 이미 수업은 끝났고 대부분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방과 후 수업은 방학 이후로 연기된 탓에 아이는 고학년 학생들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만약 오늘 일이 없었다면 명수가 와서 운동장에서 놀자고 꼬셨을 테지만, 마침 상담실로 불려갔다가 늦게 나온 덕분에 아이는 홀가분하게 도서관으로 향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데스크에 앉아 업무를 보던 사서 선생님이 아이의 인사에 환하게 웃으시며 반겼다.
“왔어? 아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늘 활약이 대단하다고 하더라. 역시 똑똑한 애들이 뭔가 달라도 다른가봐?”
“칭찬 고맙습니다.”
“어쩜, 대답도 저리 야무지게 잘할까?”
학생들 독서 지도 수업 외에는 하는 일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따분한 일상에 지루해하던 찰나,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의 액션 활극(?)을 듣고 신이 난 사서 선생님은 아이를 보며 연신 싱글벙글 이었다. 그러던지 말던지 아이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곧장 교양서적 칸으로 가서 책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형오가 왜 그런 증상을 보였는지였다. 다른 선생님들께 묻기엔 분위기가 저어해서 차마 물어보기가 어려웠다. 당연히 양호 선생님에게 여쭤 보는 게 가장 좋은 일일 테지만, 아쉽게도 선생님은 형오와 경은을 데리고 병원으로 간 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곧 학교로 돌아오실 테지만 그 전까지는 도서관에서 그 증상에 대해 찾아볼 생각이었다.
서가에는 다양한 제목의 책들이 아이를 유혹했다.
‘내가 혼자 하는 여행, 새로운 생활교육, 리더십······.’
시간만 허락한다면 다 읽어보고 싶은 주제와 내용들이지만 너무 서두르지는 않기로 했다.
아버지가 가르쳐 준 제 1 원칙, 서두르지 마라.
숲에서 서두르다가는 길을 잃을 수 있다.
사냥에서 서두르다가는 오히려 다칠 수 있다.
사람에게 말을 할 때 서두르다가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수 있고, 오해를 부르며, 싸우게 된다.
그러니 서두르지 마라.
‘의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서적들은 모조리 빼서 독서대로 향한 아이는 한 권씩 읽기 시작했다.
‘감기가 추위 때문이 아니라 200여 종의 바이러스들 때문에 걸려······.’
‘5억명이 넘는 사람이 죽을 정도로 위험한 바이러스, 문명을 멸망시키기도 ······.’
바이러스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병의 원인이라는 사실 정도는 맥락을 통해 이해할 정도의 통찰력을 가진 아이였다.
‘의사는 화살을 잘라내고 진통제를 뿌려주기 때문에 만인(萬人)에 해당되는 가치가 있다.’ 는 ‘일리아스’의 시구가 의사에 관한 서양 최초의 기록이라는 내용도 읽었지만 아이가 찾는 내용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 정도 내용들을 알고 있는 걸까, 내가 알아야 할 지식이 끝이 없겠구나, 라는 정도의 감상을 남기고 다음 책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여러 책들을 읽다보니 내용들이 거의 대동소이함을 알게 되었다. 거의 대부분 신체적 구조 혹은 역할에 대한 내용일 뿐 구체적인 병명과 그에 대한 증상과 치료에 관한 내용을 서술한 책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사서 선생님께 물어보니,
“여기 그런 책들이 없기도 하지만, 그런 내용들을 이해하기엔 니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단다.”
라며 유쾌한 음성으로 대답해주셨다. 어디서 그 책들을 볼 수 있겠냐는 질문에
“학교 도서관 말고 시내 큰 도서관을 가면 볼 수 있지.”
라고 대답하는, 어디서 신나는 노래라도 들었다는 듯 입술 끝을 지긋이 올리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서 선생님이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어쩐지 다른 걸 물어도 잘 대답해주실 것 같아 아이는 다른 도서관을 찾아가는 대신 선생님께 질문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반 반장이요, 갑자기 숨도 못 쉬고 부들부들 떨더라구요. 왜 그렇게 된거죠? 입을 막은 것도 아니고 누가 때린 것도 아니었는데 숨을 못쉬었어요. 어떤 병에 걸린건가요? 갑자기 병에 걸리는 경우도 있나요?”
그제야 아이가 궁금해 하는 것을 알게 된 사서 선생님은 이 아이의 또 다른 비범한 능력, 통찰력에 대해 알게 되었다. 숨을 못 쉬는 반장의 모습에서 ‘병’의 원인을 찾고 ‘해결 과정’을 탐구하는 자세는 다른 또래에게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모습일 것이라고 선생님은 생각했다. ‘증상’과 ‘병’을 연결시켜 ‘치료’를 떠올리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게다가 다행(?)히도 그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몇 몇 선생님들을 통해 전해 들었던 선생님은 아이가 최대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고 싶었다.
“반장이 갑자기 병에 걸린 건 아니란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특정한 대상에게 공포를 느끼는 경우가 있어. 예를 들면 주사 바늘을 무서워한다거나 어두운 실내 공간을 무서워한다든지 말이야. 그리고 그 대상과 마주하게 되면 갑자기 몸이 말을 안 듣기 시작하는거지.”
선생님은 아이의 반응을 지켜보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우리가 숨을 어떻게 쉬는지 아니?”
“코나 입으로 공기를 들이마시면 폐로 들어와 혈액을 타고 온 몸으로 전해진다고 했어요. 그리고 불필요한 이산화탄소를 다시 입으로 뱉어낸다고 했어요.”
조금 전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기에 아이는 냉큼 대답했다. 이 똘똘한 아이가 여간 사랑스러운게 아니다. 선생님은 더욱 신이 나서 아이에게 ‘포비아Phobia’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의학 상식은 있지만 의료 윤리에 대해서는 까마득한 사서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고 아이는 형오의 보여준 병의 ‘병명’과 ‘증상’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선생님도 ‘원인’만큼은 잘 알지 못했다. 덕분에 형오의 프라이버시와 바닥까지 치달았던 의료 윤리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똘똘하고 재능있는 학생 앞에서 '선생님'으로서의 위엄과 풍부한 지식을 과시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아이는 오늘의 일을 통해 사람의 병이 반드시 신체적 결함이나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정신’에 상처를 입으면 병이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시내의 큰 도서관에 가면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부록이었다.
오늘도 나름 뿌듯하게 하루를 보냈다는 느낌에 승합차로 보육원을 향해 가는 동안 명수의 투정이 그리 거슬리지 않았다.
반면, 희연은 오늘 하루가 그 어떤 날보다 지옥 같았다. 하루 종일 윗분들에게 시달린 것도 모자라 핸드폰은 끊임없이 알림메세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통에 일일이 확인하는 것도 지쳐 그냥 책상 서랍에 던져두었다. 확인해봐야 별 시답잖은 내용으로 학부모들끼리 이러쿵 저러쿵 하는 내용일테니.
“희연아, 가자. 술이나 한 잔 하자.”
5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동기가 위로주를 쏘겠단다.
“그래, 그러자. 오늘 같은 날 한 잔 해야지.”
희연은 책상을 가볍게 탁,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이 방학식이니만큼 만취하기는 어려워도 목을 축이는 정도까지는 괜찮으리라.
빛을 잃은 갈색 플랫 구두가 주인을 데리고 교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