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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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방학식이다. 교사에게 방학이란 반쯤은 휴가이기도 하다. 교사 좋은 게 뭔가? 회사원들이나 일반 공무원들은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휴가를 공식적으로 누릴 수 있다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던 희연이었다. 하지만 방학 때도 방과 후 수업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에는 수업이 없더라도 일단 학교에 나와서 출석을 체크해야 되고, 출석을 체크하고 나면 잡무가 이어지게 되고, 잡무를 보다보면 퇴근이 늦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평소보다 빠른 퇴근은 할 수 있겠지만, 과거의 교사들이 방학 때 해외로 가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선배 교사들로부터 듣게 되면 괜히 아쉬움만 커졌다.
그런 아쉬움을 펜 끝에 담아 꾹꾹 눌러쓰고 있는 ‘방학 기간 학급 운영 계획서’다. 그러고 보면 요즘 아이들이 불쌍하기도 하다. 예전에는 방학이 참 길었던 거 같은데, 주 5일제를 택한 이후부터는 방학이 짧아졌으니 말이다.
잡생각이 들어 잠시 멈췄던 펜을 움직이려는 찰나, 수업 종이 울렸다.
“자, 내일부터 여름방학이죠?”
“예!”
이럴 때는 한 마음 한 뜻으로 소리친다. 애들이란.
“얼마 전에 선생님이랑 생활 계획표 만든 적 있죠? 오늘은 여름 방학 동안 지킬 생활 계획표를 만들어 볼 거예요. 여러분들이 여름 방학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도 아주 중요해요. 친구들이랑 방학 동안에 무엇을 하고 싶은 지 발표했던 거 기억하죠? 예를 들어서 지훈이처럼 운동 열심히 해서 튼튼한 어린이가 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되요? 네, 맞아요. 아침마다 일찍 일찍 일어나서 운동하고 아침밥 잘 챙겨먹고 해야겠죠? 또 음, 상우는 공부를 잘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요?”
“매일 매일 공부해야 돼요.”
“그래요. 매일 매일 공부하면 되는데 언제부터 언제까지 해야겠다, 라고 스스로와 약속을 정하고 실천을 하면 더 열심히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제부터 각자가 방학동안 하고 싶은 일, 또는 해야 되는 일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생활 계획표를 만들거예요. 다 만들면 친구들 앞에서 한 명씩 발표해서 친구들한테 약속하는 거예요. 나는 이 계획표대로 생활해서 내가 하고 싶은 거, 내가 되고 싶은 거 하겠다고 약속하는 거예요. 알겠죠?”
“예~!”
희연은 미리 만들어놓은 계획표 도안을 한 장씩 나누어준 후 지도를 시작했다.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몰라 고민하는 아이를 찾아 지도해주거나, 갑작스런 돌발행동으로 도안에 훼손이 됐을 때 예비 도안으로 바꿔주었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공식 악동’ 지훈이 종이 도안을 들고 이리저리 돌리다 검지를 길게 베인 것이다. 깊이 베이지는 않아도 피를 흘리며 울어대기 시작하니 어수선해지기 시작한 교실이었다. 희연은 재빨리 지훈을 양호실로 데려갔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1학년들이지만 잠시라면 별 일 없으리라는 생각이 있었다. 게다가 가장 높이 튀어 오르는 ‘공’을 희연이 붙잡고 있으니 큰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 면도 있었다.
선생님이 나간 후, 경은이 앞에 앉은 ‘석고’를 바라봤다. ‘석고’는 반의 어수선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왼쪽 손으로 턱을 괴고 도안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안을 받은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같은 자세다. 어머니의 다그침 이후 ‘석고’에게 제대로 말을 걸지 못했던 경은이다. 관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또 어머니의 당부를 어길 정도의 반항심도 없어서였다. 그래서 책을 빌려주던 일도 그만 두었지만, ‘석고’는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 애초에 먼저 다가간 것도, 매번 말을 붙인 것도 경은이었지만 자신이 갑자기 책을 빌려주지도 않고 말을 붙이지도 않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행동하는 ‘석고’의 모습이 얄밉게 느껴졌다.
조그만 입술을 삐죽이며 가만히 쳐다보다 괜히 시비라도 걸어보고 싶어졌다. 벌떡 일어나 앞으로, ‘석고’를 향해 걸어갔다.
1학년 3반 반장 배형오는 옆자리에 앉았던 지훈이가 피를 흘리는 모습에 가슴이 덜컥했다. 피를 보고 나니 괜히 자기가 다친 것 같고 지훈의 우는 모습이 마치 고통에 절규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책상 위에 뚝, 한 점 떨어진 핏자국을 바라보니 피가 흘러 붉에 물들었던 지훈의 손가락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미처 그 모습을 캐치하지 못한 선생님이 지훈을 데리고 간 뒤에도 심하게 몸을 떨며 컥컥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형오가 걱정스러웠는지 옆에 앉아 있던 짝이 물었다.
“괜찮아?”
그 말이 촉매제라도 되었는지, 형오는 목을 부여잡은 채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교실을 뛰쳐 나가려했다. 몸을 돌리며 뛰어 나가는 순간 앞에 누군가 없었다면 말이다.
“꺄악!”
쾅!
비명과 동시에 커다란 충돌음, 책상 넘어지는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오고 한 박자 늦게 아이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런 소란에는 아무리 주변에 신경 쓰지 않던 아이라도 뒤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돌아보니 같은 반 누군가가 다쳤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벌떡 일어나서 달려간 아이는 이내 두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중 한 명은 자신에게 책을 빌려준 고마운 소녀, ‘경은’이었다. 경은은 이미 정신을 잃은 듯 보였다.
“죽은 거야?”
한 아이의 눈물 가득한 추측이 틀렸다는 것을 아이는 알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비록 경은이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지만, 미약하게나마 가슴이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아이, 같은 반 반장 형오는 목을 부여잡고 교실 바닥에서 부들대고 있었다. 얼굴이 새빨갛고 눈은 부릅뜬 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발을 마구 휘젓는 통에 곁에 있던 책상과 의자들이 밀려나고 쓰러지는 탓에 학급의 누구도 형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위험하다!’
어떡해, 죽은 거야?를 웅얼대며 머뭇거리는 반 아이들을 제치고 달려간 아이는 형오를 등에 업었다. 자기보다 덩치가 큰 형오였지만 가볍게 둘러업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양호실은 기억자로 꺾인 건물의 맨 끝에 위치하고 있어 단순히 달려도 100M는 달려야 할 거리였다. 하지만 아이는 쉼 없이 발을 놀려 양호실로 달려갔다. 그 소리가 요란했는지 고개를 내밀어 보는 옆 반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그 선생님들이 뭐라 제지하기도 전에 아이는 이미 지나가고 없었다.자기 몸만 한 덩치를 업고 이를 악 문 채 달려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뒤늦게 교실을 뛰쳐나와 ‘무슨 일이야!’ 하고 비명을 지르는 선생님도 계셨지만, 이미 아이는 오른쪽으로 꺾인 복도로 향한 뒤였다.
아이가 양호실 문을 벌컥 열었을 때, 그는 복도로부터 들려오는 소란에 뭔 일인가 싶어 궁금해 하는 희연의 눈과 마주쳤다.
“형오가 위험해요!”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해 하는 희연을 대신해 재빨리 다가온 양호 선생님이 형오를 받아들었다. 손가락에 밴드를 감은 채 침대 위에 앉아 눈만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지훈은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바리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형오를 가까운 침대에 눕히는 양호 선생님 뒤에서 아이는 재차 소리쳤다.
“숨을 못 쉬고 있어요!”
아이는 제대로 숨도 가누지 않고 희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전히 자리에 말뚝처럼 선 희연이었다.
“경은이가 다쳤어요!”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양호실을 빠져나갔다. 이게 무슨 일이야, 하고 느긋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알아차린 희연.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양호실을 뛰쳐나왔을 때는 이미 멀어진 뜀박질 소리만 복도에 남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재빨리 교실로 돌아왔다. 담임에게 상황을 알렸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도움을 요청했다지만 그 도움이 올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릴 만큼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금세 교실로 돌아온 아이는 여전히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은 경은과 그 주위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학우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시 뛰어간 아이는, 이번에도 경은을 둘러업고 나가려 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고 찾아 온 옆 반 선생님이 경은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경은을 살피고 계셨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아이나 선생님이나 비슷해 보였다. 아이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선생님에게 이야기했다.
“양호실에 데리고 가야 돼요.”
때마침 달려온 희연이 열려 있는 교실 뒷문으로 들어왔다.
“선생님!”
어쩔 줄 몰라 하는 두 선생님이 바로 행동을 보이지 않는 것이 답답했던 아이는 그대로 경은에게 다가가 재빨리, 그리고 능숙하게 경은을 둘러업었다. 곁에 있던 선생님이 어리바리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희연을 향해 달려갔다. 정확히는 선생님의 뒤편 복도를 향해 뛰쳐나갔다. 다만 목적지는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에,
“양호실!”
이라고 희연에게 소리치며 복도를 내달렸다. 희연도 덩달아 아이 뒤를 함께 달렸는데, 이 때 희연은 매우 희귀한 경험을 했다. 자기 허리에 겨우 닿을 키를 가진 아이가 자기보다 훨씬 앞서 나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급박한 순간에도 희연은 잠깐, ‘이게 뭐지?’라는 의문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아이 뒤를 쫓았다. 식은땀이 절로 나는 이 상황에, ‘긴급’이라는 글자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데 한눈 팔 새가 없었다.
방학식 전날 벌어진 우연한 사고였습니다, 라고 경위서 첫머리를 떠올려 보는 희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