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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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은은 머뭇대다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뭐해?”
뭘 하고 있었는지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시치미를 뗄 요량 이였을까? 스스로도 모르겠어서 경은은 괜히 등 뒤에 숨긴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 공부.”
참으로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아이였다. 사실 아이가 이성 친구와 이야기를 나눠 본 경험이 ? 보육원에서도 또래 여자 아이는 거의 없었다 - 많지 않다는 사실은 둘째 치더라도, 학교에 와서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잡담을 하며 하하 호호 해 본적이 없었기에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경은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너 책 좋아하지?”
누구라도 아이가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다. 다만 경은이 확인하려는 것은 아이의 책에 대한 호감도가 아니었다.
“응, 좋아해.”
저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는 지였다. 등교할 때부터 하교할 때까지 아이에게서 관찰할 수 있는 표정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오죽하면 ‘석고’라는 별명이 잘생긴 얼굴 때문이 아니라 감정 없는 표정 때문이라고 이야기할까.
그래도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경험 없는 아이라도 눈치 챌 만큼의 미미한 변화가 얼굴에서 보였다. 경은은 어쩐지 자기가 대단한 비밀을 캐낸 기분을 느꼈다.
“우리 집에 책 많은데 같이 가서 볼래?”
뜬금없는 초대에 말문이 막힌 것은 둘 다 였다. 의문이 든 아이와 당황하는 경은.
“우리 언니랑 오빠가 책 좋아해서 책이 많아. 나도 많이 읽어. 너도 보면 좋아할 거 같아서. 아니면 빌려줄까?”
횡설수설하는 경은의 태도가 어쩐지 밉지 않게 느껴진 아이는 그 호의를 매몰차게 거절하지 않았다.
“갑자기 가는 건 어려워. 나도 학교 마치면 ··· 집에 가야 되고. 그래도 니가 빌려준다면 고마울 거야.”
1학년에게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주지 않았기에 방과 후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책을 반납해야 했다. 그게 늘 아쉬웠던 아이였기에 경은의 제안이 반갑기만 했다. 아이는 고마움을 가득 담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경은은 잠시 멍하게 아이를 바라보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자기 자리로 급하게 돌아갔다.
“그래.”
짧게 대답을 남기고 돌아선 경은에게서 시선을 돌린 아이는 다시 풀던 문제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학교란 정말 좋은 곳이었다. 궁금한 것을 상냥하게 알려주는 선생님이 있었고, 몰랐던 사실들을 자세하게 알려주는 책들이 쌓여 있었고, 자신에게 기꺼이 친절을 베풀어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는 선생님도 있었고, 부모가 없다고 놀리는 친구들도 있었고, 준비물을 제대로 챙기지 않는다며 고깝게 보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아이에게 중요하지 않았고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풍족한 식사와 충만한 지식들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한 학교생활이었으니까.
방과 후 수업, 수리셈의 수업을 맡은 박해울 강사는 수학만 10여년을 담당한 경력 강사였다.
이름난 대학을 졸업했던 해울은 청년 취업난의 위기를 방과후 교사 자격증으로 탈출한 케이스였다. 과외 경력도 꽤 있었기에 만만하게 보다가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여간 쉽지 않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많이 고생도 했다. 하지만 10여년이 지나고 나니 이제는 베테랑이 되어 여유롭게 수업을 진행할 정도가 된 해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여유가 많이 사라졌다.
“선생님, 이렇게 생긴 것도 원인가요? 왜요?”
타원형의 동그라미를 가리키며 매우 궁금하다는 눈빛을 가지는 아이를 바라보며 해울의 이마에 땀이 송글 솟았다. 초등학교 교과과정상에서 타원을 설명하기란 어렵다. 특히 이제 갓 1학년이 된 아이에게는 더더욱 힘들다.
“둥근 모양이 원이라고 했죠? 이것도 둥글둥글하죠? 사실 정확히 원이라고 할 수 없지만 원과 비슷하기 때문에 원에 속하는 모양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은 중, 고등학교 학생들과 달리 형식적인 정의를 이해하기 어려워한다고 알려져 있다. 때문에 기하학적 개념을 설명할 때도 유사한 모형이나 모델을 내세워 개념을 가르치지, 형식적 정의를 가르치진 않는다. 예컨대, ‘평면에서 한 점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라는 정의 대신 농구공, 지구본, 동전 등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모양을 원으로 이해하게끔 가르친다.
“둥글둥글하기 때문이라면 이렇게 생긴 것도 원인가요?”
각이 사라진 별모양의 울퉁불퉁한 원. 해울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머릿속으로는 맹렬하게 아이를 이해시키기 위한 문장들을 만들어내며, 해결책을 제시했다. 아니 제시하려고 했다.
“이 책에 보면 원은 중심과 반지름을 가지는 도형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요. 이 모양들은 모두 같은 반지름을 가지는 모양들이잖아요. 그런데 이 모양은 여기는 긴 반지름이고 여기는 짧은 반지름이니깐 원이 아닌 거 아닌가요?”
와, 하고 속으로 탄성을 내뱉는 해울이었다. 이쯤 되니 그는 이 아이를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책만 보고 ‘반지름’의 개념을 이해한 것이 분명한 아이를 다른 초등학생 1학년 대하듯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여러분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여러분들의 형, 누나들이 배우는 방식으로 설명을 해볼까요?”
해울은 아이 외에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 사태가 어찌 흘러가나 궁금해 하는 학생들을 둘러보며 한계를 설정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매우 일반적이며 수학적인 정의를 들어 아이들에게 ‘기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삼각형은 여기, 여기, 여기 이렇게 점 세 개를 각각 이어서 만든 모양을 말해요. 이 때 점 세 개는 한 직선 상에 있지 않아야 되요.”
“두 개는 있어도 되는 거죠?”
“······.”
‘직선’이 뭔지 알려주면 폭풍같이 몰아치는 질문들도 끝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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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박 선생 고생 좀 했겠는걸?”
“말도 마라. 아주 진땀을 뺐다.”
해울은 김치를 집어 먹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양새가 웃겨보였는지 재차 웃음을 터뜨리는 친구이자 동료 논술 강사 미진이었다. 함께 방과후 교사로 활동하는 두 교사는 수업이 끝난 후 저녁도 먹고 스트레스도 풀 겸해서 감자탕 집으로 왔다.
혜운 초등학교에서 방과후 교사로 재직한 것은 미진이 먼저였다. 해울이 오고 난 뒤, 우연히 서로 같은 나이임을 알게 된 미진이 먼저 친목 도모를 위한 식사를 제안했고 이후 두 사람은 종종 식사 혹은 음주를 함께 하는 친구가 되었다.
“야, 내가 볼 땐 걔 천재다. 그냥 말만 천재가 아니라 진짜 천재. 내 수업 때도 걔가 발표하는 거 들으면 얘가 진짜 초등학생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니깐. 게다가 1학년이라니? 직접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일인데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어쩌겠어. 믿어야지.”
해울은 소주 한 잔을 꿀떡 비우고 쓴 맛에 인상을 찌푸리는 미진에게 물 한 컵을 건넸다.
“얘가 말이야. 처음에는 다른 애들하고 비슷했단 말야. 아니 오히려 조용했거든. 말도 없고. 그렇지 않든? 그런데 어느 날 부턴가 툭툭 질문을 던져대더니 지금은 아주 고슴도치야. 사정없이 찔러대.”
“내 수업도. 와, 난 애가 이렇게 말 잘하는 줄 몰랐잖아. 논술? 얘 1, 2년만 더 공부하면 말이지, 반쯤 과장해서 대입 쳐도 되겠더라.”
“에이, 그건 좀 심했다.”
“그래, 좀 심했어. 그치?”
둘은 웃으면서 소주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부글거리며 끓고 있는 감자탕에 숟가락을 들이밀며 주린 배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