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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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오늘은 여러분들과 가족 역할놀이를 할 거예요. 여러분들이 엄마 역할, 아빠 역할을 하고 동생 역할도 하면서 각자 느낀 점을 발표할 거예요. 알았죠?”
“예~.”
‘줄리앙’의 사정이야 안타깝지만 수업은 수업일 뿐이다. 각자의 사정이 없는 사람들이 있을까. 비록 초등학교 1학년, 한참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자랄 아이들이라지만 희연이 관심을 가져야 할 32명 중 1명에 불과한 줄리앙을 위해 수업을 안 할 수는 없었다.
희연은 4명 혹은 5명으로 가족을 정해주고 각자 맡고 싶은 역할을 정하게 시간을 주었다. 이후 아이들은 엄마, 아빠 혹은 삼촌, 할아버지, 할머니 역할을 맡아서 역할놀이를 수행했다.
“자, 니가 먹고 싶은 거 다 사 먹으렴.”
억지로 엄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아들 역할을 맡은 아이에게 돈을 내미는 시늉을 하는 아이는 자기 부모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반영한 것 일테다.
“안 돼, 손 떼. 안 돼, 이것도 하지마. 엄마가 너 이거 하지 말랬잖아.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나름 앙칼지게 꾸중하는 모습을 표현하며 엄마 역할을 수행하는 아이들의 연기에 아이들이 박수치고 환호를 보냈다.
“나 돈 좀 줘요. 게임해야 되요.”
“넌 무슨 역할이니?”
“우리 삼촌이요.”
“······.”
어쩐지 슬픈 미소를 짓게 되는 희연이었다.
‘줄리앙’이 속한 가족이 앞에 나왔다. 뜻밖에도 ‘줄리앙’이 아빠역할이었다. 여자가 셋이어서 엄마, 큰 딸, 작은 딸이 돼 버렸다. 엄마는 집안 청소를 하고 큰 딸은 엄마를 돕겠다며 바닥을 닦는데, 작은 딸이 엄마한테 매달려 과자 사달라고 마냥 조르는 통에 아이들이 왁, 하고 웃는다. 엄마보다 키가 큰 작은 딸이 팔을 붙잡고 휙휙 둘러대며 조르는 모양새가 희연이 보기에도 우스웠다. 그 와중에 ‘줄리앙’의 행동이 묘했다. 줄리앙은 가족과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도끼질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냐 물으니,
“의자를 만들 나무를 베고 있어요.”
라고 대답하는 줄리앙이었다. 그 대답에 우와, 하는 탄성이 아이들로부터 쏟아졌다. 희연으로서도 신기한 모습이긴 했다. 나무를 조립해서 만드는 의자도 아니고, 아예 처음부터 나무를 베어서 만든다? 희연의 상식에서 저런 행위는 불가능한 장면이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개인이 임의로 나무를 벌목하는 행위는 불법이었으니까.
그 때 한 아이가 외쳤다.
“의자를 어떻게 만들어. 너 아빠 없잖아. 거짓말이야.”
“······.”
악의 없이 악질적인 행동을 취하면서도 그 행위의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나이대의 아이들이다 보니 이런 모습들이 돌발적으로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 초등 3년차의 경험치로는 ‘돌발’에 곧바로 ‘비상 스위치’를 누르는 순발력이 떨어지나 보다. ‘3년차 선생님’은 당황해서 곧바로 대처하지 못했다. 희연이 어정쩡하게 웃으며 상황을 무마하려는 때였다.
“우리 집 뒤로 가면 숲이 있었어. 30··· 분 정도를 걸어 들어가면 붉은 삼나무가 많아. 거기 나무를 베어서 의자를 만들어.”
아이들은 동그래진 눈으로 아이를 쳐다보았다.
“붉은 삼나무는 다른 나무들보다 옹이가 적어서 모양이 예쁘고, 가볍고 단단해서 의자나 탁자용으로도 좋아.”
희연은 아이가 교실의 아이들을 향해 덤덤하게, 작지도 크지도 않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제지하지 않았다. 제지할 생각도 없었다.
“나무는 톱으로 의자에 쓸 만하게 잘라내. 이 때는 반드시 나무결 방향으로 나무를 잘라 써야 돼. 나무결 방향과 반대로 자르면 힘이 약해져서, 나중에 의자로 만들면 금방 못쓰게 된다고 하셨어.”
아이가 말을 잠시 말을 멈춘 순간에도 누구 하나 말을 꺼낼 생각이 없었는지 조용한 정적이 흐르는 교실이었다.
“적당한 모양으로 자르고 나면 사포로 문질러. 이때는 나도 도울 수 있어. 면이랑 모서리를 샌딩해주고 가루를 털어내면 아빠가 기름을 발라. 그리고 외벽에 세워서 말렸다가 3일 뒤에 다시 사포랑 기름칠을 해. 그걸 2번 더 하고 나면 나무가 잘 안 썩고 우리 가족이 앉아도 될 만큼 따뜻한 의자가 된다고, 하셨어.”
아이는 말을 잇는 동안 시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아이는 푹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말을 쉽게 꺼내는 아이들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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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아마 어디 책에서 본 게 아닐까?”
도서관의 사서를 맡았던 이 선생님의 말씀에 희연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그럴까요? 그러기엔 너무 디테일한 것 같기도 해서 말이죠. 제가 듣기에는 마치 본인이 직접 보고 경험한 것 같이 리얼했거든요.”
이 선생님은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바라보다 입술을 적시듯이 살짝 한 모금을 마셨다. 믹스커피는 너무 달다는 생각을 하면서 희연의 말에 대꾸했다.
“뭐 제가 직접 듣지 않았으니까 그 느낌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네요. 하지만 목재 가공에 대한 것은 이 도서관에서도 잘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저도 정확히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말이죠, 그 아이가 워낙 영특하니 마치 자기가 경험한 것처럼 꾸몄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되네요. 그런 거 있잖아요. 거짓을 진실로 믿는 거, 뭐더라?”
희연이 말을 가로 채기 전에 이 선생님은 말을 이었다.
“아, 리플리 증후군! 그니까 걔는 부모가 없다는 사실에서 아이들에게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허구의 진실을 만들어 낸거죠. 의자나 집을 뚝딱 만들어내는 만능 아버지. 아이 생각에는 그게 멋진 거예요. 요즘 누가 나무 베어서 의자 만들어요? 다 만들어진 걸 사서 쓰는데. 아, 물론 그 아이가 나쁘다거나 그런 건 아니예요. 저도 그 아이 좋아해요. 아침마다 제일 먼저 도서관 찾아오는 아이는 걔 밖에 없어요. 조금 숫기가 없어 그렇지 착실하고 부지런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너무 이야기에 몰두하다 보니 앞에 앉은 희연의 반응이 심상치 않기에 실수했다는 생각이 든 이 선생님은 급히 변명하듯이 말을 덧붙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연은 이 선생님의 추측이 심정적으로는 동의할 수 없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보육원의 보육교사에게도 해줘야 하나, 라는 고민을 가지게 되었다.
담임 교사의 섣부른(?) 고민을 모르는 아이는 그저 반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이미 오전수업이 모두 끝나고 오후 방과 후 수업을 앞두고 교실에서 대기 중인 아이였다. 이제 곧 수업을 받을 수학 과목은 아이가 독서 다음으로 학교를 좋아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초등학교 수학의 수준이야 뻔하지만, 그래도 아이에게는 신기하기 짝이 없는 학문이었다. 마치 이야기 속의 마법사들이나 이해할 수 있을 듯한 학문이랄까?
이전의 빈촌에서는 숫자를 다루는 사람들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수를 사용해도 나무 묶음을 세는 정도로나 사용했다. 이렇게 구체적인 숫자를 실생활에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된 아이였다.
흥미를 갖고 달려드는 아이에게 교과서의 진도는 의미가 없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 는 말이 실제로 수학에서는 적절히 응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비단 아이 뿐만 아니라 수학에 관심을 가진 아이들이라면 - 2학년 때나 배울 - 3자리 숫자도 이미 1학년 때 개념을 잡을 수 있었고, 3자리 숫자를 배우고 나면 4자리나 그 이상의 큰 수들도 이해를 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초등학교 수학은 다양한 문제 환경이 제공되고 그 속에서 연산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기 때문에 교과서만 보면서도 아이는 어려움 없이 독학 가능한 수준까지 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물론 방과 후 수업에서 배우는 것도 영향이 컸다. 그 덕분에 같은 반 아이들이 50까지의 수를 배우고, 홀수와 짝수의 개념을 배우고 있을 때 아이는 혼자 덧셈과 뺄셈은 물론 곱셈까지 개념을 이해하고 문제를 풀며 공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저도 모르게 연한 미소를 지으며 수학 책을 보고 있던 아이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이 있었다. 경은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아이는 같은 반 급우였다. 또래의 평균보다 조금 큰 키를 가진 탓에 교실에서는 아이와 조금 떨어진 뒷자리에 앉아서 수업을 들었다. 경은이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이 있고 나서부터 아이를 지켜보게 되었다.
학기 초에는 동성 친구들과 어울리기 바빴고, 이후에는 학급 내에서도 친하게 어울리는 몇몇 이성 친구들에게 관심을 가졌었다. 예를 들면, 선생님께는 매일 지적을 받지만 또래들 사이에서는 활기 넘치고 넉살 좋은 친구인 지훈이 대표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와중 가족 시간에 ‘아이’가 선보인 놀라운 ‘아빠’의 일이 그녀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 전까지 아이는 그저 조금 이질적으로 생긴, 하지만 같이 잘 어울려 놀지 않고 혼자 지내는 같은 반 아이 정도의 이미지였는데 그 일 이후로 ‘비밀을 가진 신비한 소년’의 이미지로 변한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대화 없이 지냈던 친구라 쉽게 말을 붙이기는 부끄러웠고, 그래서 그저 뒤에서 몰래 훔쳐보는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마침 방과 후 수업을 듣는 아이가 많지 않은 상황이라 다른 아이들의 시선도 적어진 틈에 부끄러움을 이겨낸 호기심을 앞세워 보기로 한 것이다.
“저기······.”
슬쩍 다가가 말을 붙였지만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공책에 숫자를 끄적이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였다.
“··· 석고야.”
스스로 말을 내뱉고도 아차, 싶었다. 가끔 다른 친구들이 아이를 부를 때 ‘석고’라고 부르는 모습을 종종 봤던지라 자기도 모르게 별명으로 아이를 부른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채고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목적은 달성했다.
아이가 시선을 돌려 경은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