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명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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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생각해보고 결정할래? 아직 시간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결정해도 된단다.”
원장은 넉넉한 미소를 띠며 아이의 얼굴에 드러난 어둠을 관찰했다.
“네.”
역시나 영특한 이 아이는 쉽게 선택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혹시 했지만 역시나, 라고나 할까?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교사들로부터 들은 바도 그렇고 본인이 보기에도 이 아이는 남다른 면모를 보여주었기에 이런 상황도 예상해 본 원장이었다.
“그래, 알겠다. 그리고 혹시 이름을 새로 짓고 싶거든 언제든 찾아와서 이야기하거라. 아니면 다른 선생님들께 이야기해도 되고. 알겠지?”
그 이야기를 끝으로 아이와 원장의 2차 대담은 끝이 났다. 하지만 원장은 곧 3차 대담을 이을 것이라 예상했다. 여전히 아이의 얼굴에는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고, 원장은 그 어둠이 이전 보육원에 대한 부담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전의 이름을 쓰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원장은 책장으로 가서 퇴소자 명부를 꺼내 들추며 적당히 붙일 만한 이름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어쨌든 적당한 이름을 아이에게 지어주는 일도 원장 개인에게는 뿌듯함과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것이 벌써 3개월 전, 단풍나무에 물이 한참 들던 시기의 일이었다. 아이가 그렇게 잠시 지난 일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 동안, 이름을 물었던 자원봉사자 소녀는 대답 없이 멍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을 보다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생김에 짙은 감색 눈동자가 어딘지 이국적인 느낌도 주지만, 또 그렇다고 외국 혼혈 같지만도 않은 인상이었다. 옛날 조각 같은 외모로 유명했던 영화배우의 얼굴처럼 어린 나이임에도 살짝 날이 선 듯 한 턱선과 깊은 눈매, 두드러지게 솟지는 않았지만 낮지 않은 콧등과 다부진 입매가 어린 나이의 아이들에게서 선뜻 보기 힘든 얼굴, 이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다소 엉클어져 정리되지 않은 듯 한 머리는 오히려 공들여 가꾼 머리보다 얼굴에 어울린다는 느낌이었다.
대충 얼굴을 감상을 마치고도 아이의 멍한 얼굴이 계속되자 소녀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들었는지 아이가 소녀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이름을 물었는데 대답을 안 하네? 알려주기 싫어?”
소녀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아이는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요.”
아이는 소녀의 장난기를 받아줄 마음이 없는 지 이내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누나가 무섭게 생긴 얼굴이야?”
아이의 반응이 수줍은 많은 또래들의 반응처럼 보여 되레 신이 난 소녀는 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아, 아니요.”
아이는 아예 몸을 돌려 책상에 놓인 공책을 얼굴을 파묻듯이 했다. 소녀는 한 발 더 다가가 아이에게 접근했다. 소녀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아이는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낯선 이의 접근에 몸이 움츠려 드는 것은 아이에겐 당연한 방어기제였을지 모르겠지만 소녀에게는 흥미를 돋우는 리액션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를 구한 것은 밀대로 복도를 닦고 있던 다른 자원봉사자였다.
“지원아, 너 거기서 뭐해? 청소는 마저 하고 놀아.”
“예, 언니. 갈게요.”
소녀는 짓궂은 미소를 남기고 방을 떠났다.
“얘, 나중에 누나한테 이름 알려줘. 알았지?”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는지 금방 복도로 나가버리는 소녀였다. 아이는 그저 쥐고 있던 연필만 다시 한 번 그러쥐고 공책에 한 글자 한 글자 깊게 써나가기 시작했다.
“언니 언니, 저기 305호실에 있는 애 봤어요?”
“아니, 왜?”
괜히 청소는 안하고 딴 짓하는 모양새라 여겼는지 불퉁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자원봉사자에게 지원은 신이 난 얼굴로 자신이 보았던 아이에 대해 이리저리 설명을 하며 기분 좋은 웃음을 복도에 퍼뜨렸다.
겨울이 다가오며 날씨는 꽤 쌀쌀했지만 아네스 보육원은 많은 자원봉사자들의 활기로 온기가 가득했던 주말의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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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왔다.
어느새 보육원 주위의 나무들에서 뒷산에도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 창밖으로 봄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이 곳도 봄이 오는 것은 똑같구나.’
새벽의 찬 공기가 가시기도 전인 터라 창문을 열진 못하고 바깥을 바라보는 아이는 그 정경 위에 빈촌의 봄을 투영시켜 보았다. 숲 속에 새로 난 약초들을 캐기 위해 부지런을 떠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모습. 집들마다 아침을 준비하느라 때운 불길에 하얀 연기가 몽글 몽글 솟아오르는 모습. 언덕 위로 따뜻한 봄을 찾아 줄을 이어 날아온 철새들의 부지런한 아침 비행. 그리고.
“벌써 일어났어?”
한껏 과거의 편린에 떠돌던 아이를 돌려 세운 명수의 목소리.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아이는 꽤 잠겨 있는 목소리로 명수의 물음에 화답했다.
“응. 준비할 것도 있고.”
“으윽, 나도 준비할래. 이제 학교 가야 되는데.”
명수는 억지로 움츠린 몸을 피며 기지개를 켰다. 아이답지 않은 거친 신음소리가 절로 나온다.
“에구, 이제 좋은 날도 다 갔다. 그치?”
분명 명수는 행정국장님에게 저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틀림없다. ‘좋은 날은 갔다’라는 표현을 이제 8살이 된 명수가 자의적으로 할 리가 없으니까.
“일어났으면 씻어. 난 방금 씻고 나왔어.”
“그래야지, 으이구.”
답지 않은 표현을 내뱉는 모양새가 도리어 애처럼 여겨지게 만들었다. 아이는 미소를 머금고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소로 바깥으로 보이는 큰 길 위에 자동차들이 여럿 다니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소음으로 가득한 운동장. 이곳은 시내에 위치한 혜운 초등학교의 입학식이 열릴 운동장이었다. 수없이 많은 아이들과 그 아이들만큼 많은 학부모들이 운동장을 메우고 있었다. 아이는 여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본 적이 없었기에 자연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자기도 모르게 보육교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말이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반가웠던지 보육교사는 빙그레 웃으며 남은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교사들의 안내에 따라 운동장 한 쪽에 위치한 강당으로 인솔되어 들어간 아이들 무리는 지정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더러 몇 몇은 부모의 손을 놓아야 한다는 사실에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딱히 신경 쓰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마저도 흔한 입학식의 풍경이었으니까. 아이들은 지정된 의자에 앉고 학부모들은 강당 뒤편에 우르르 모여 서서 입학식이 진행되는 모습을 구경했다. 의자에 앉았지만 여전히 어수선한 아이들을 데리고 입학식은 진행되었다. 학생인사도, 교장 선생님 훈화도, 담당 선생님 소개도 어리바리한 초등학교 1학년들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었다. 보육교사의 품을 떠난 아이에게도 그 예식은 크게 다른 의미는 없었다. 다만 학교라는 공간에서 새로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마음가짐이 다른 또래들과 달랐을 뿐이었다.
아이는 1학년 3반으로 배정되었다. 담당교사의 등을 바라보며 따라간 교실에서 아이는 색다른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른바 자기 소개였다.
“자, 조용히 하세요. 선생님은 앞으로 여러분들과 1년 동안 같이 지낼 김희연 선생님이라고 해요. 제가 인사, 라고 하면 여러분들은 반갑습니다, 라고 대답해야 되요. 알았죠?”
“예!”
보육교사보다 더 어려 보이는, 20대 후반의 여 교사는 하얀 블라우스와 투피스 정장으로 세련되고 무난하며 단정한 이미지를 학부모들에게 보이고자 노력한 티를 내고 있었다. 선생님의 소개를 시작으로 아이들이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자기소개가 끝날 때마다 아이들은 반갑습니다,를 외쳤고 학부모들은 박수를 치거나 사진을 찍으며 호응했다.
이윽고 아이의 차례가 왔다. 아이는 덤덤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가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30명 정도의 아이들, 그리고 그 뒤에 비슷한 수의 학부모들이 오로지 자신만을 쳐다보는 광경에 아이는 덤덤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꼭 쥔 주먹이 금세 땀으로 젖어 들 정도였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학부모들은 그저 앞에 나온 아이의 묘한 외모에 서로 수군대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내 아이의 입이 벌어지며 목소리가 들리자 학부모들은 모두 아이에게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저는, 제 이름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마른 목을 적셔 보는 아이였다.
“제 이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