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명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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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꽤나 심한 피로감이 느껴져 침대에 모로 누워 지친 몸을 달랬다. 역시나 침대는 포근했고 매우 고급스러웠다. 깨끗하게 세탁된 침대 시트와 푹신한 매트리스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안락함을 선사했다.
보육원 바깥으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창밖으로 오후의 햇살이 침대 위까지 다가와 아이를 어루만졌다. 그 따뜻함에 아이는 먹먹해져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엄마······.”
언제나 곁을 지켜주었던 어머니의 존재가 사라지고 아이는 홀로 세상에 남았다. 게다가 세상마저도 아이를 다른 곳으로 내던져 버렸다. 참으로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처지에 놓인 아이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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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다가왔다. 보육원 앞의 단풍나무 잎들도 어느새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보일 무렵 보육원 안은 주말을 맞아 대청소로 소란스러웠다.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동계 대비를 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주말 자원봉사자들도 이전보다 더 많이 찾아와 대청소를 돕고 있었다.나이가 든 아이들 ? 대체로 중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고 있던 큰 아이들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손을 거들어 청소를 도왔다.
하지만 모두가 그 소란에 동참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복도를 뛰어다니며 활기차게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이 몇 몇 있었는데 나이가 너무 어려 청소에서 열외가 된 아이들이었다. 개중 몇몇은 날씨가 춥든지 상관 않고 마당으로 뛰쳐나가 공이나 차며 놀자고 다른 이들을 꼬드기고 있었다.
하지만 또 그런 무리에도 어울리지 않고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좀 나가자. 답답하지도 않아?”
칭얼대듯 조르는 명수의 목소리에도 아이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이렇게 시끄러운데 공부가 되냐? 밥 먹고 운동해야 된댔어. 나가자 응?”
“난 이거 다 해야 돼.”
단호한 거절에 명수는 살짝 삐쳤다. 명수는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가 아이의 등 뒤에 서서 좀 더 애원조로 부탁했다.
“야 나가자. 응? 철용이 형한테 지면 안 되잖아. 그 형한테 이길 사람이 너 밖에 없어.”
아이는 대꾸도 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 열심히 받아쓰기를 했다. 반 토막이 돼 버릴 만큼 짧아진 연필을 잡고 공책에 한글을 한 자 한 자 힘주어 쓰고 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아이는 나름대로 처음의 절망과 슬픔에서 벗어나 보육원에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문물과 맞닥뜨려 당황했던 순간도 이제 점차 희미해져갔다. 오히려 낯선 생활이 익숙함으로 변할 만큼 빠르게 적응을 한 것이었다.
그 와중에 아이가 흥미를 보인 것은 바로 ‘배움’이었다. 귀족들의 전유물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을 여기서는 아무나 다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거듭하던 와중, 가장 흥미롭게 여겨졌던 것이 바로 ‘교육’이란 분야였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배울 수 있고 익힐 수 있다는 것은 놀라움이었고, 글자를 배우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즐거움이었다. 어차피 예전이나 지금이나 글자를 몰랐던 것은 매 한가지였기에 서로 다른 글자를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글자를 배우고 익힐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아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시간만큼은 다른 슬픔, 기억들을 잊을 수 있었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이가 적응의 시간을 갖는 동안 달라진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방을 쓰는 명수라는 아이와도 말을 터놓고 놀 수 있을 정도로 금방 친해졌고 단 둘 뿐이지만 보육교사들과도 길지 않은 대화 정도는 나눌 수 있을 만큼 친해졌다. 그들의 도움으로 아이는 글자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어머, 어쩜 이렇게 똑똑하니? 벌써 이걸 다 외운 거야?”
교사들은 아이를 가르치며 아이의 영특함에 자주 놀라움을 표시했다. 얘, 천재 아냐? 라고 생각할 만큼 아이는 빠르게 많은 양을 배우고 익혔다. 요즘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에 기본적으로 한글을 떼고 온다지만, 기간 대비 익히는 속도는 아이가 월등히 빠르다고 교사들은 판단했다. 게다가 아이는 부지런했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집중력이 금방 흐트러질 법도 했는데 아이는 어른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배움에 집중을 했다. 때문에 아이는 금세 한글을 익혀 웬만한 책들은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비단 공부에만 두각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아이들과 마당에서 공을 차던 명수가 아이를 억지로 끌고 와 함께 공을 찬 적이 있었다. 규칙도 질서도 없이 무조건 공을 차서 골대에 넣기만 하는 정도의 공놀이였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숲길을 다니며 단련된 체력과 각력은 그 나이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두드러졌고 명수가 속한 팀은 2살 많은 철용의 팀을 이길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종종 명수는 자기 팀에 아이를 끼워 넣으려 했고 아이는 절절한 부탁에 못 이겨 한두 번 나와서 어울렸다. 덕분에 다른 아이들과도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지만 공부에 대한 아이의 열정은 경기에 나서는 것보다 컸었기에 명수는 매번 아쉬움을 뒤로 하고 홀로 방을 나와야 했다.
오늘도 방에 홀로 받아쓰기 책을 보며 공부를 하던 아이는 문득 인기척을 느껴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는 새하얀 미소를 짓는 10대 소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부하고 있었구나. 내가 방해한 거니?”
아이는 고개를 절레 저으며 소녀를 보았다. 새하얀 미소만큼이나 하얀 피부에 가는 눈썹, 눈꼬리가 아래를 쳐진 듯한 눈웃음을 짓는 소녀는 분홍 입술을 열었다.
“너 잘생겼네? 어쩜 이리 예쁘니? 이름이 뭐야?”
“······.”
아이는 입을 오물거리며 대답하기를 머뭇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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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이는 원장실에 불려갔다. 원장은 예의 주스를 하얀 머그컵에 가득 따라 부은 뒤 아이에게 건네며 건너 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아이는 속으로 ‘의자 망가지겠네’라며 원장의 부푼 배에 깔리는 자신을 잠깐 상상했다.
“그래, 요즘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소문이 났더라. 선생님은 걱정이 많았어. 니가 여기서도 힘들어 할까봐 말이야. 그런데 지켜보니 이제 걱정을 덜어도 되겠다 싶더라. 공부가 재밌어?”
“예.”
아이는 이제 지난번처럼 주스를 받자마자 벌컥 마시는 행위가 예의 없게 보일 수 있다는 정도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적응을 했다. 그래서 가만히 눈치를 보며 머그컵을 흘낏 쳐다보기만 하면서 감히 마시지는 못했다. 그 모습이 또 귀엽게 보인 원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아이에게 주스를 마셔도 된다는 의미로 손을 까딱거려 보였다.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인 아이는 슬며시 컵을 들어 한 모금씩 아껴가며 주스를 마셨다.
“이제 너도 내년이면 학교를 가야 한단다. 근데 학교를 가려면 필요한 게 몇 가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이름이란다. 우리나 니 이름을 알아야 이것저것 서류를 챙겨서 학교에 가져갈 수 있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니?”
“······예.”
“그래, 그럼 이름이 뭐지?”
“······어, 이름은 ······.”
여전히 이름을 말하기 어려워하는 모습에 원장은 아이의 속사정을 지레짐작하고 넌지시 제안을 했다.
“그럼 말이다, 새 이름을 지어줄까?”
아이는 화들짝 놀라 원장을 쳐다봤다. 새 이름이라니?
“혹시 예전의 이름을 쓰기 어렵다면 말이다, 새 이름을 만들어서 쓰는 방법도 있어서 하는 말이란다. 물론 새 이름을 만들면 앞으로도 그 이름만 계속 써야 할 거야.”
“새 이름······.”
“이름이 있어야 학교도 갈 수 있고 니가 좋아하는 공부도 계속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제 그 정도는 너도 알겠지?”
아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 새 이름을 짓는다는 것.
사실 처음 이 세계에서 눈을 뜨고 난 뒤 이름을 묻는 질문들에 대답을 하지 못했던 것은 꿈의 여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는 꿈 속 아버지의 말은 말 그대로 언명이 되어 각인이 되었다.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내뱉는 행위가 자연스럽지 못해 우물쭈물 거리는 사이에 어른들의 오해가 깊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또 다른 의미로 이름을 섣불리 말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이름이 이 곳의 흔한 작명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을 말했다가 그 이름으로 인해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그래서 이름을 쉽사리 말하지 못했는데.
새로운 이름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