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명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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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을 마친 아이는 배정된 방으로 이동 했다. 넓지 않은 방이었지만 양쪽 벽에 싱글 침대가 각각 붙어 있었고 정면으로는 큰 창이 나 있었다. 얼룩이 조금 있지만 깨끗하다고 평할 만한 정도의 하얀 커튼이 창을 가리고 있었고, 그 사이로 햇빛이 새어 들어와 아이의 발치까지 비추고 있었다. 아이를 안내했던 보육교사가 창의 커튼을 걷자 방안이 온통 하얀색으로 물드는 느낌이었다. 그 창 너머로는 보육원의 입구와 그 곁을 장식하던 조경수들이 보였다. 조경수 너머로 샛길과 큰 도로, 더 멀리에는 작은 마을도 보였다.
창밖을 보는 아이에게 보육교사가 말을 건넸다.
“이제 여기가 니 방이란다. 친구랑 같이 살게 될 거야. 너랑 동갑이니까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거야. 그치?”
아이는 교사를 돌아보았다. 갈색 머리에 눈썹은 짙고 가늘며 눈은 마치 순한 강아지모양으로 둥글둥글해서 선하다는 인상을 주는 여교사였다. 옅은 화장을 했지만 이를 알지 못하는 아이의 눈에는 그저 젊고 예쁜 여자, 거기다 피부도 동생의 그것만큼이나 고운 여자로 비쳐졌다. 괜히 어머니의 거친 피부가 함께 떠올라 마음이 아렸지만 아이는 애써 울적한 마음을 누르며 대답했다.
“······예.”
“그래, 대답도 잘 하는구나. 그럼 잠시 여기··· 아, 아니구나. 이제 곧 점심시간이기도 하니까 선생님이랑 같이 식당에 가자. 밥 먹어야지?”
교사는 아이를 이끌고 보육원 뒤로 데리고 나왔다. 거기는 단층 조립식 건물이 있었다. 들어가니 꽤 넓은 공간에 여러 개의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 있었고 이미 많은 아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벽에 붙어 늘어선 줄 뒤로 교사와 아이가 섰다. 이윽고 배식을 받은 아이는 교사와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이것저것을 알려주는 교사의 배려가 고마울 법도 하건만 아이의 표정이 굳어 있어 교사는 썩 신이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태도의 아이들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크게 문제될 일도 아니었다.
사실 문제는 표정 따위가 아니었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동작과 의기소침해 있는 모습들이 혹시 시설에 적응하지 못하게 될까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지금도 식판의 음식들을 조심스럽게 맛을 보며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는 동작들을 보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원장이 살짝 귀띔해주긴 했지만 이 아이, 꽤나 심하게 학대를 받아왔던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런 걱정을 하는 교사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쉴 새 없이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있던 아이였다.
‘식당’의 개념이 없었기에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속이 덜컥거리는 당혹감에 휩싸여 있던 아이는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실내에 가득 찬 음식냄새에 멀미가 나는 듯 했다. 식판에 받은 음식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맛을 보며 혹시 이 곳이 ‘천국’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이미 원장이 건네준 주스의 맛에 한 번 황홀경, 까지는 아니더라도 미각에 심대한 충격을 받았던 상태였다. 눈앞에 놓인 어마어마한 음식들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풍성한 식단을 자랑했고 다양한 색깔과 향, 맛을 함유하고 있었다.
어쩐지 이런 음식들은 도시의 귀족들만 먹는 게 아닐까 싶어 예의를 갖추고 조심스럽게 음미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주변 또래 아이들의 모습에서는 별다른 예의나 격식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숟가락으로 퍽퍽 집어먹기 바빠 보였다. 몇몇은 허겁지겁 먹는 모습에 시간제한이 있는 것인가 싶었지만 깔깔대며 먹는 아이들 곁으로 어른들이 천천히 먹으라며 등을 쓸어주는 모습을 보면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았다.
밥 먹는 아이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았다. 옆의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마주 앉은 아이들과 장난을 치는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지난 시간들이 어쩐지 처량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한 끼 식사도 어려워 동생과 스튜를 나눠먹기도 했었고, 다음날 끼니가 걱정되어 배낭을 가득 채워 와야만 했던 자신의 모습이 반추되며 더욱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왜 그러니? 밥맛이 없어?”
마주앉은 교사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물어왔다.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숟가락으로 맑은 국을 한 입 떠먹었다. 코끝이 시큰한 느낌이었다.
그 시간, 원장은 행정과장, 사무국장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원장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원장은 원두커피를 한 입 마신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아이, 어쩌면 정신적인 학대로 다른 아이들과 잘 못 지낼 수도 있겠다는 염려가 들었습니다. 때문에 안전관리에 조금 신경을 써주셔야겠어요.”
마른 몸매의 작은 눈매를 가진 행정과장이 안경을 벗어 렌즈를 살펴보며 말을 붙였다.
“그 부분은 안전관리 담당이 책임을 지겠죠. 김 선생이 워낙 책임감이 강하시니깐 원장선생님은 걱정 안하셔도 될 겁니다.”
“큼.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과장님도 혹시 필요한 게 있는지 살펴보시고 이야기 해주세요. 게다가 그 아이가 내년에는 8살이라는데 학교에 가야 하지 않습니까? 몇 개월 남지 않아서 서류 작업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행정과장은 안경을 고쳐 쓰고 앞에 놓인 커피를 들어올렸다.
“그것도 제가 준비 잘해서 처리하겠습니다. 이거 원장 선생님이 이것저것 신경 쓰시느라 살이 더 빠지시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허허, 저도 오랜만에 새로 아이가 들어와서 그런지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원장은 행정과장의 마른 눈을 살짝 째려보았다가 이내 손에 들린 커피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까지 아네스 보육원은 지역에서 꽤나 평판이 좋은 축에 속했다. 원장이 나름 신경 써서 관리를 한 탓도 있었고 복지재단 이사회와도 사이가 좋았기에 별 문제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로 언론 플레이를 하지 않아도 지역 내 봉사활동 장소로도 인기가 있어, 인근 지역의 학생들이 찾아와 봉사 활동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점점 보육원으로 위탁되어 들어오는 아이들이 줄어들면서 지원금의 규모가 일정이상 늘어나지 않게 되었다. 나라 전체의 경제도 썩 좋은 편이 아니어서 재단에서 들어오는 유입금도 점점 줄어드는 모양새라 원장은 내심 걱정이 늘어나고 있는 중이였다.
게다가 앞에 앉은 행정과장이란 사람은 재단 이사 중 한 명의 추천으로 들어왔는데, 성격이 모난 것은 아니지만 때로 말에 가시를 드러내기 일쑤여서 대화하기가 영 껄끄러웠다. 이 사람이 자기 라인만 믿고 까부는 것인지 감히 원장이란 직책을 우습게 만 보는 것 같았다. 틈만 보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꿔야겠다고 내심 다짐하는 원장이었다.
그 때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커피만 홀짝이던 사무국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애들 디딤돌통장도 다시 한 번 정리해야 할 듯 하더군요. 그간 조금 지저분해진 것 같아요.”
디딤돌통장은 보육원을 퇴소한 뒤 자립하는 아동들을 돕기 위해 후원금 등을 모아 만든 통장으로 언제든 아이들에게 돌아갈 수 있게 준비되어야 할 통장이었다. 후원금 관리 종합 통장이야 목돈이 오고 가니 특히 감사에 주의해야 함은 물론이지만 디딤돌 통장 역시 푼돈이나마 주의해야 한다. 아무래도 후원금 관리 통장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지는데다가 언제든 아이들에게 쥐어주고 나면 책임이 없어지는 통장이기에 감시의 눈에 덜 들어오는 부분이어서 꽤나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곧 연말이니 정리 할 때도 됐습니다. 사무국장님이 신경 써 주세요.”
평소 몸 관리를 조금 하는 듯 키는 조금 작지만 다부진 몸매의 사무국장은 그나마 원장과 소통이 제법 되는 인물이었다. 말주변도 없고, 말수도 많지 않지만 필요한 말만 고심해서 꺼내는 듯해서 믿음직했고 원장이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 이를테면 연말 감사 대비라든가 내부 인테리어 정비 업체 선발권과 같은 소소하나 중요한 것들을 잘 챙겨주는 편이어서 원장은 사무국장이 맘에 들었다.
반면 행정과장은 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겉으로야 깨끗한 척 하며 고상을 떨지만 지네들이나 자기나 별반 다를 것도 없는 인물들이다. 그런 주제에 껄껄거리며 가식을 떠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도 않을뿐더러 자기 라인을 타지 않은 인물이라 낙인찍고 따돌리는 모양새니 더더욱 두 사람의 행태가 불쾌하기까지 했다. 그 역시도 틈만 생기기를 바라며 두 사람을 노려볼 뿐이었다. 만약 기회가 생겨 두 사람을 쳐낼 수 있다면 자신과 자기 라인의 지갑도 꽤나 두둑해질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오월동주 하는 원장실의 분위기가 고조될 무렵, 아이는 식사를 마치고 배정된 방으로 향했다. 방에 홀로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은 아이는 그제야 깊은 한 숨을 내쉬며 잔뜩 긴장된 몸을 풀 수 있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정신없이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다니며 새로운 세계의 기이한 환경에 맞닥뜨려 멘탈이 부서지기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었던 와중에 겨우 홀로 신변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실은 정리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맨 몸으로 이 세상에 떨어져 낡은 옷가지 하나 있던 것도 어느새 새 옷으로 갈아입혀져 이 곳에 오게 되었기에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형편이었다. 다만 목에 걸린 펜던트만이 오롯이 자기 것이라 하겠지만.
“······.”
이 펜던트만 보면 더욱 싱숭생숭해진다. 꿈에서 받은 물건이 현실에 등장하여 목에 걸려 있는 이 상황이라니.
작은 손으로 펜던트를 쥐어보는데 어쩐지 펜던트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