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명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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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름이 뭐니?”
아이는 낯선 목소리에 정신이 점점 깨어옴을 느꼈다. 점점 시야가 밝아지는 동시에 웅웅거리는 주변의 소음에도 귀가 열렸다. 아이가 정신을 차리려는 모양새를 보이자 지켜보던 사람이 다시 한번 아이에게 물음을 던졌다.
“얘야? 정신이 들어? 이름이 뭐니?”
시야가 트이자 아이에게 보인 것은 이상한 복장을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파란색 상의를 갖춰 입은 남자의 모습에 살짝 경계심이 들어 입을 다문 아이는 이내 자신이 누워 있음을 깨닫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으윽.”
어쩐지 몸이 꽤 굳어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속으로 ‘어제 무리를 했나 보다.’ 라며 자신의 몸을 점검해보는 아이였다.
아이의 움직임에 남자는 어이쿠, 하며 바짝 다가와 아이의 등을 받치며 아이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왔다.
“어이구, 애가 바닥에 그리 웅크리고 있었으니 몸이 이렇게 차네. 괜찮니?”
“······네. 괜찮아요.”
아이는 억지로나마 몸을 일으켜 앉은 자세를 취하자 그제야 피가 제대로 돌면서 머리가 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 나니 뿌옇던 시야가 한껏 맑아진 듯 주변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는 이내 당혹스러운 감정에 휩싸이고 말았다.
아이의 눈에 들어온 그 풍경들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모습들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복장의 사람들이 여럿 있었고, 개중에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알아듣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리에 앉은 채로 멍하니 앞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젊은 사람도 있었고 나이 든 사람도 있었다.
또 아이가 앉은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의 키보다 약간 작을 법한 높이의 하얀 벽이 있었고 그 벽 너머 또 사람들이 있었다. 다만 그 벽 너머의 사람들은 모두 파란색 상의를 갖추고 있었다. 마치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비슷한 복장의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굉장히 밝았다. 살짝 시선을 올려보니 천장에는 눈이 부시도록 빛을 내뿜는 무엇인가가 여럿 있었다. 그런 기물(奇物)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그렇게 아이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을 보던 남자가 잠시 벽 너머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는 작은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물 좀 마시겠니?”
아이는 대답 없이 종이컵을 바라보다 슬그머니 그것을 받아들었다.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새하얀 종이컵에는 맑은 물이 담겨 있었다. 아이는 가만히 들여다보다 살짝 입을 대어 맛을 보았다. 익숙한 물이었다. 조심스럽게 안에 담긴 물을 받아 마시는 아이를 보던 남자는 싱긋 웃더니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래. 이제 정신이 좀 드니?”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사니?”
아이는 가만히 있었다.
“엄마는?”
아이가 눈을 번쩍 떴다. 그렇다. 어머니의 존재. 아이가 지난 밤 늦게까지 찾아다녔던 어머니.
“엄마가 없어졌어요.”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검지로 눈썹을 긁었다.
“아빠는?”
“아빠는······ 돌아가셨어요.”
“흠. 일단 잠시만 기다려볼래?”
남자는 몸을 세우고 벽으로 다가가 벽 너머의 사람이랑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사이 아이는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금 주변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고 처음 보는 복장이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집에 처음 보는 기물들이 주위에 널렸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자면 모든 게 이상한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자신은 아버지가 만든 의자에 누워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아버지가 만든 의자를 떠올리자 동시에 꿈에서 봤던 장면도 떠올랐다. 어렴풋하지만 아버지는 펜던트를 만들어 자신에게 주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와 동시에 아이는 자신의 목에 무언가 있음을 느꼈다. 설마 하면서도 손을 가져가 확인해보니 아이의 목에는 꿈속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펜던트가 걸려 있었다.
이제는 도저히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머니와 동생의 행방불명부터 꿈에 나타난 아버지의 선물, 그리고 그 선물이 현실에 나타나 목에 걸려 있는 이 상황.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것도 아이의 이해를 허락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때 남자가 다시 다가왔다.
“너 이름이 뭐니?”
“이름······ 이요?”
아이는 또다시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자신의 이름. 분명 자신의 이름을 묻고 있는데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아이를 채근하지는 않았지만 대답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에 의문을 가졌다.
“혹시 이름이 뭔지 몰라?”
“······.”
아이는 묵묵부답. 남자는 답답한 마음에 이것저것을 물어보았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름을 물었던 그 순간부터 아이는 묵비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봐. 최 순경. 거기만 있지 말고 저기 저 아저씨 좀 조용히 시켜봐.”
“예.”
최 순경은 고개를 숙이고 발끝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잠깐 바라보다 이내 파출소를 노래방으로 착각이라도 한 건지 괴성을 지르며 발을 동동거리는 취객을 제압(?)하러 발을 옮겼다. 그러한 소란에도 아이는 아무런 미동 없이 인형처럼 의자에 앉아 자신의 발끝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파출소에서 밤을 새웠다.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는 아이는 마치 말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입을 꾹 다물었고, 식사 때 준 밥도 먹지 않았다.
아침 일찍 복지센터에 연락해둔 덕에 점심시간이 되기 전 복지사 한 명이 찾아왔다. 40대는 넘어 보이는 외모의 여성 복지사는 눈이 벌겋게 충혈된 최 순경에게 아이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인평공원을 순찰하다가 우연히 봤어요. 조그만 애가 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길래 처음에는 애인 줄도 모르고 갔다가 깜짝 놀란 거 있죠. 몸을 흔들어봐도 깰 생각을 안 하길래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나 했는데 우선 파출소가 가까워서 일단 데리고 들어와서 저기 저 의자에 담요 몇 장 깔고 눕혀뒀죠. 그랬더니 금세 애가 깨더라구요? 처음에는 물어보는 말에 몇 마디 대답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대답을 안 해요. 말을 아예 안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고 그래요.”
최 순경은 눈썹을 긁으며 인상을 조금 찌푸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 애가 잠깐 말을 할 때 물어봤더니 아빠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안 계시데요.”
복지사는 가만 생각하더니 뭔가 짐작이 간다는 듯이 순경에게 자기 생각을 밝혔다.
“혹시 복지원에서 있다가 나온 거 아닐까요? 방금 말대로면 고아라는 말인데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은 그 복지원에서 몰래 나온 거죠. 그리고 거기로 다시 돌아가기 무서우니깐 이름을 밝히지 않는 거고요.”
“음······ 왜요?”
“요즘 좀 줄었다고는 해도 가끔 복지원 내에서 가혹 행위가 있는 곳도 있잖아요?”
“아, 그 뉴스에 나오는······?”
“그쵸. 아니면 같이 사는 애들한테 왕따 당해서 도망친 걸 수도 있고요. 어쨌든 이름을 모르면 그 복지원을 찾을 수 없을 테니깐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거죠.”
복지사는 꽤나 확신한다는 듯한 어투로 최 순경에게 말을 건넸다. 마치 자신이 꽤 많은 경험을 통해서 이런 케이스를 종종 봐왔기 때문에 알 수 있다, 는 것을 자랑하는 것처럼 느껴져 최 순경은 괜히 머쓱해졌다. 최 순경의 멀뚱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복지사는 자신이 이 사태를 깔끔히 마무리해야겠다는 사명감이라도 가진 듯 말에 힘이 넘쳤다.
“제가 아이를 데리고 다른 복지원에라도 들어갈 수 있게 알아보도록 하죠.”
“어, 저기······.”
최 순경은 일이 이렇게 술렁술렁 넘어가는 모양새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전문가의 판단에 따르기로 했다. 어쨌든 저 아이의 일은 복지사가 처리해야 할 일이었으니 자신이 이러쿵저러쿵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따뜻한 미소를 짓는 복지사의 두툼한 손을 잡고 파출소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