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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물결 (28/28)

4. 물결

반차를 쓴 나언은 업무 진행에 큰 지장이 없도록 마지막으로 일을 점검했다. 기원과 점심을 같이 먹기에는 시간이 애매해서 팀원들과 함께 가까운 한식당에 가서 백반 정식을 먹었다. 아직 정량을 다 먹지는 못하지만, 올해 초 크게 아팠을 때보다 양이 늘었다.

위염 약을 끊게 되며 자연스레 최지은 주임의 보고 임무 또한 사라졌다. 최지은 주임은 나언의 얼굴에 살이 조금 붙고 혈색이 도는 모습을 보며 제가 더 기뻤다. 기원이 건넨 그동안 고마웠다는 메시지에도 괜히 뿌듯해 발을 굴렀다. 성과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회사 앞을 지나가던 나언은 점심을 먹고 회사로 들어가던 김기영 대리와 딱 마주쳤다. 그를 먼저 알아본 나언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김기영 대리가 커피를 든 손을 흔들었다. 기영은 나언이 가방까지 챙겨 든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어 나언 씨 반차예요? 출장?”

“아, 저 내일부터 휴가요.”

“아 맞다. 여행 간다고 했죠?”

그제야 기억이 난 듯 김기영 대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언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볼 때마다 처음 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웃는 얼굴의 나언을 보며 기영은 그 여행을 누구랑 가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기원이 김기영 대리의 집에 무단 침입해 쑥대밭으로 들쑤셔 놓고 사라진 이튿날. 기영의 집 앞을 다시 찾은 나언은 그에게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리는 나언에게 기영은 손사래를 쳤다. 마침 내일 출근해서 주려 했다며 나언이 두고 간 넥타이를 종이 가방에 잘 담아 건넸던 기영은, 나언에게 일은 잘 해결되었냐고 물었다. 얼굴을 붉힌 나언은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진 못하지만, 모든 일이 오해였다고, 잘 해결됐다고 설명했다. 당황했지만 다행이라는 대답을 남긴 기영이 웃어 보이자 나언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였다. 버릇처럼 나언의 어깨를 두드려 주려던 기영은 뇌에 힘을 주고 팔을 내리눌렀다. 나언이 타고 온 차가 오피스텔 가까이에 정차 중이었는데, 왠지 누군가 운전석에서 이곳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언이 사과의 마음을 담아 건넨 다쿠아즈 세트를 든 기영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비밀은 꼭 지킬게요.”

“…감사합니다.”

나언은 그렇게 답했었지만, 사실 이제 별 상관없었다. 오히려 기원이 다른 사람과 엮여 타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이 더 불쾌했으니. 어쨌든 그로부터 2개월이 흐른 지금, 기영과 나언은 야밤의 난리를 치르며 비밀을 반강제로 공유한 죄로 조금 더 친해졌다.

기념품을 꼭 챙겨 오라는 기영에게 고개를 두 번이나 끄덕인 나언은 얼른 택시 정류장으로 뛰어갔다. 오늘 저녁 출발이지만 아직 짐을 모두 싸지 못했다.

4월의 볕이 싱그러운 계절, 기원과 나언은 첫 해외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나언의 연차가 많지 않아 긴 일정을 계획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괜찮았다. 나언은 기원과 여러 번의 국내 여행을 거치며 둘 다 사람이 많은 명소를 바쁘게 찾아다니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원은 제 성향에 따라 한적하면서도 소소한 볼거리가 있고, 편안하게 휴식할 수 있는 자동차 여행을 계획했다. 운전이야 자신만 할 수 있으니 나언은 그저 옆자리에서 편안하게 즐기면 됐다.

해외여행 준비를 시작하며 여권조차 없던 나언은 갑자기 증명사진을 찍어야 했고 기원에게 그중 두 장을 빼앗겼다. 하나는 기원의 지갑 속에, 하나는 확대 인화용으로 쓰인 후 서재 테이블의 유리판 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확대된 사진은 민망하게도 전실로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벽에 작품처럼 걸려 있었다. 그 곁의 액자들도 물론 기원이 그린 나언의 그림들이었다. 그러니 나언은 집에 들어올 때마다 수많은 제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어, 어……. 신발 좀 벗고.”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신발도 벗지 않았는데도 고양이들이 나언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일주일 동안 사용인과 지내야 하는 고양이들이 짠해 머리를 오랫동안 긁어 준 나언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짐을 마저 싸기 시작했다. 기원이 적어 준 러프한 체크 리스트를 하나씩 확인하며 짐을 옮겨 담았지만 옆에서 거들어 줄 기원이 없으니 어쩐지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칫솔 하나 가지러 갔다가 걸어 놓은 그림 앞에서 한참 시간을 죽였고, 빨아 놓은 바지를 챙기려다 바다를 껴안고 테라스의 정원을 한 바퀴 돌고 들어왔다.

기원은 회의를 마무리하고 조금 늦은 오후에야 집에 돌아왔다. 그때 나언은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는데, 기원이 오자마자 시키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뭐 하냐는 전화에 짐을 싸는 중이라는 대답을 남긴 것이 민망한 모양이었다.

“진짜 방금까지 짐 챙기다 잠깐 틀었어요.”

“대충해요.”

정작 기원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무겁게 챙기지 말고 잊은 건 가서 사면 된다고 설득했지만, 나언은 왠지 모든 것을 꼼꼼히 챙겨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예를 들면 기원은 그저 ‘바지’ 정도로만 적어 둔 체크 리스트를 보며 긴 바지, 짧은 바지, 운동복 바지, 수영용 바지 등을 고민하다 시간이 한참 흘러가고 자연스레 집중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샤워를 마친 기원은 편안한 반팔 티셔츠에 추리닝 바지로 갈아입고 곧장 나언의 방으로 갔다. 제가 나서지 않으면 출발 한 시간 전까지 캐리어 앞에서 용을 쓰고 있을 것 같았다. 차곡차곡 쌓인 짐을 빠르게 살핀 기원이 옆에서 서성이는 나언에게 말했다.

“가벼운 외투 하나 챙기면 되겠어요.”

캘리포니아의 4월은 대체로 맑고 쾌청했지만, 날씨에 따라 저녁에는 쌀쌀할 수도 있었다. 기원의 말에 나언이 잠시 생각하다 기원의 방으로 뛰어갔다. 조금 뒤 나언은 바람막이를 들고 왔다. 얼마 전 기원과 산책할 때 입고 그의 방에 두고 온 옷이었다. 나언이 들고 있던 바람막이를 잘 갠 후 캐리어에 넣은 기원은, 쏟아진 앞머리를 큰 손으로 쓱 쓸어 올렸다.

“웬만한 건 다 챙긴 거 같네요. 와서 봐요.”

기원이 제 곁의 러그를 툭 두드리자 나언은 기원의 곁에 쪼그려 앉았다. 제 물건으로 꽉 찬 캐리어를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짓는 나언의 뺨에 돌연 기원이 입술을 묻었다. 나언이 작게 웃으며 기원의 어깨를 밀자 기원은 나언의 손을 붙잡고 귓불을 살살 깨물었다.

“아, 간, 지러워요…. 흐흣.”

“아아, 꼬집지 마.”

킥킥대며 러그에서 한참 얽혔다 떨어진 둘은 겨우 일어나 캐리어를 닫고 현관까지 옮겼다. 냉장고에 있는 메뉴로 저녁을 만들어 간단히 배를 채우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체크인 서비스 이후 라운지에서 차와 다과를 먹으며 비행을 기다렸다. 얼마 가지 않아 비행시간이 다가왔고 기원과 나언은 입국 수속을 마치고 비행길에 올랐다. 길게 늘어선 줄 대신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좌석을 안내받은 나언의 눈에 긴장과 설렘의 빛이 혼재했다. 처음으로 비행기에 타는 것이지만 제가 보고 누리는 것이 흔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일등석은 너무나 편안했다. 예전에 살았던 원룸의 매트리스보다 안락한 좌석에서 액션 영화도 보고 가져온 책도 읽었다. 밤이 되자 비행기 내부가 어둑해지며 불이 꺼졌다. 이제 잘 준비를 해야 하는 조용한 시각, 기원은 나언에게 나직하게 물었다.

“약 먹을래요?”

“아, 네.”

나언의 대답에 기원이 챙겨 온 약을 꺼냈다. 나언이 처방받은 수면제였다. 미리 반으로 가른 수면제를 물과 함께 삼킨 나언은 담요를 가슴께까지 끌어 올리고 편안한 자세로 눈을 감았다. 어두운 비행기 안에서 홀로 깨어 있지 않도록, 얼른 나른한 잠기운이 번지길 기다렸다. 기원은 옆으로 누운 나언을 눈에 담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손에 든 약통을 응시했다.

엉망진창 프러포즈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온 나언은 기원을 제 방으로 끌어왔다. 소파에 느슨하게 걸터앉은 기원의 맞은편에 앉은 나언은 한참 머뭇대다 서랍에서 처방받은 약을 꺼내 와 테이블에 올려 뒀다. 이게 뭐냐는 기원의 얼떨떨한 질문에 나언은 그간 감춰 왔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고요한 방에서 나언의 차분한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나언이 말을 그치고 난 후 방은 침묵이 가득했다.

기원은 나언이 방에 약을 숨겨 놓은 사실과 홀로 병원을 찾았다는 것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나언의 입가에 맺힌 흰 거품과 녹다 만 알약이 끈적하게 바닥에 붙어 있던 장면이 눈 앞을 가리며 기원의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결국 초조함을 숨기지 못한 기원은 나언의 앞에서 표정 관리를 실패했다.

나언은 기원의 눈에 들어차기 시작한 절망감을 읽고 제가 더 불안해했다. 자신이 미안할 일이 아닌데도 핏기 가신 얼굴을 한 나언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안절부절못하다 결국 미안하다는 사과를 올렸다.

-너무 못 자서 죽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병원에 가면 좀 나을까 했어요. 걱정하셨죠. …죄송합니다.

살고 싶어서 그랬다는 나언의 조그만 목소리에 기원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죽도록 아픈 주제에 저를 걱정하며 사과를 뱉고 있는 연인을 마주하는 지금. 기원은 심장이 멎을 것처럼 뻐근해지는 통증을 느꼈다.

짓밟고 태우고 구겨 버린 시간을 보상하기 위해 망가진 나언을 몇 번이고 살리려 애썼다. 그 과정에서 나언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 주리라곤 기대한 적 없지만 더는 상처 줄 일은 없겠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도 제 이기적인 본성은 나언의 앞에서 처참히 박살 났다.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고통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나언을 두고 고고한 미래 따위나 그리고 있었다니. 이로써 벌써 두 번째였다. 애써 웃던 얼굴과 말라 가던 몸, 오해 한번 편하게 풀지 못해 곪아 가는 사람을 곁에 두고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것이.

어느새 식은땀으로 젖은 손바닥을 들어 제 뺨을 쓸어내린 기원에게서 낮은 목소리가 흘렀다.

-병원은 괜찮았어요?

-아, 네. 상담도 잘 해 주시고 약도 잘 맞아요.

-그래요. 혼자 가기 힘들면 말해요.

-……네.

-먼저 말 해 줘서 고마워요.

잠시 말을 멈춘 기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원은 무거운 걸음을 옮겨 테이블을 돌아 맞은 편의 나언에게 다가갔다. 나언이 앉아 있는 소파 팔걸이에 제 손바닥을 대고 상체를 숙여 나언을 가두듯 마주했다. 기원의 갈라진 목소리가 나언의 귓가에 흩어졌다.

-앞으로도 그래야만 해요. 알겠죠?

나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기원과 눈을 맞췄다. 거짓말을 했다는 것에 실망해 화를 내지 않을까, 윽박지르거나 하다못해 실망한 기색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그렸던 수많은 시나리오 속에서 이런 모습의 기원은 없었다.

기원은 진심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담백한 말투를 흉내 내는 기원의 눈에서 나언은 처절함을 읽었다. 나언은 손을 들어 기원의 손등을 덮었고 고개를 끄덕이며 기원을 안심시켰다. 기원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나언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작게 오르내리는 등이 감추지 못한 감정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과거의 상념에서 빠져나온 기원은 나언의 약통을 집어넣었다. 어느새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연인은 다행히 편안한 얼굴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언제쯤 이 약 없이 편안한 밤에 이를까. 흘려보낸 과거의 무수한 밤의 무게가 기원을 짓눌렀다.

***

공항에서부터 느껴지는 이국적 향취에 나언의 눈이 반짝였다. 살짝 부은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나언은 주위를 한 번 기원을 한 번 번갈아 살피느라 바빴다. 기원은 많은 것을 눈에 담으려 애쓰는 나언을 위해 부러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대신 기원은 연인을 살폈다. 붉은 귓불과 살짝 벌어진 입술, 작은 콧방울과 쭉 뻗은 다리는 한국이든 미국이든 예뻤지만, 나언의 표정이 생경했기에 기원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살짝 뻗친 나언의 검은 머리카락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잘게 흔들렸다. 홀린 듯 손을 뻗은 기원이 그의 정수리를 쓰다듬자 나언이 어깨를 움츠리며 주위를 살폈다.

“여기선 편하게 있자.”

우물쭈물대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언을 보며 기원 역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날씨는 쾌청한 수준이 아니라 초여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공항 앞에서 차량을 픽업하러 가기 위해 잠깐 바깥을 걸었다. 팔뚝에 개킨 점퍼를 걸친 나언은 레모네이드를 쭉 들이켰고 기원 역시 선글라스를 꺼내어 꼈다.

공항의 카페에서 기원도 나언과 같은 음료를 골랐는데, 두 개의 색이 각각 파랑과 분홍으로 달랐다. 바꿔 먹어 보자는 나언의 말에 기원이 제 음료를 건넸다. 기원의 빨대로 음료를 쭉 빨아 먹더니 맛은 똑같다고 웃으며 기원에게 다시 컵을 건넸다. 반달처럼 휜 눈으로 고개를 젖히더니 이번에는 저건 무슨 나무냐고 묻는다. 전혀 웃을 일이 아닌데 굳이 말을 건네 보고 샐쭉샐쭉 웃는 모습을 보며 기원도 웃었다. 시차 때문에 병든 닭처럼 흐물거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나언의 컨디션이 매우 좋아 보였다.

차에 캐리어를 싣고 기원은 운전석, 나언은 조수석에 앉았다. 긴 비행 직후 바로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기원이 걱정됐지만, 막상 차가 달리기 시작하니 눈은 차창 너머로 고정되었다. 처음, 기원에게 미국 서부를 차로 가로지르는 여행을 계획한 것을 듣고 어색하게 웃었었다. 평소 기원의 운전 스타일을 알기에 과연 자동차 여행이 안전할까 싶은 탓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한국보다 차량 통행량이 적고 도로가 복잡하지 않아 기원이 내는 속도가 무섭지 않았다. 시내를 벗어난 차는 순조롭게 해안 도로에 진입했다.

기원이 차창을 내리자 나언이 결국 입매를 활짝 끌어 올리며 기원을 돌아봤다.

“바다 냄새 나요.”

역시나 나언은 행복해했다. 원래부터 자연을 좋아하던 나언이었다. 남해에 살 때도 틈틈이 작은 숲길을 걸었고 바다 아래로 번지는 노을을 보며 멍하게 시간을 죽이는 것이, 켜켜이 쌓인 감정을 풀어내는 나언 나름의 힐링이었다.

그리고 열 시간을 넘게 날아온 타국의 압도적인 광경에 나언은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차가 질주할 때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절경이 영화처럼 펼쳐졌다. 고개를 젖혀도 눈에 담기 부족해 시트를 뒤로 완전히 눕힌 뒤 선루프를 열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키가 큰 나무는 좁은 도로의 양옆으로 뻗어져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숲길을 가로지르다 보면 어느 순간 암벽 사이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사진을 찍어 보려던 나언은 그냥 팔을 내리고 눈으로 열심히 구경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하나하나가 느리게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생각들이 풍경과 충돌하며 하얗게 변해 버리고, 순간의 색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행복이 고이는 순간이었다.

“한국에 가면 운전 배워 볼래요?”

기원의 물음에 나언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운전이요?”

“원하는 곳으로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건 생각보다 편할 거예요.”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기원이 나언을 살짝 마주 봤다가 다시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열어 놓은 선루프와 차창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세팅하지 않은 기원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의 입술에서 나온 ‘자유’라는 말이 너무나 생소했다. 출입문의 잠금을 거꾸로 달아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창문에는 창살을 달았던 사람이었다.

살짝은 분해서, 그래서 그에게 한 방 먹이고 싶은 생각에 나언이 한쪽 눈을 살짝 감으며 작게 대답했다.

“제가 어디로 갈 줄 알고요.”

나언의 농담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기원이 기가 찬다는 듯 웃어 버렸다. 그럼에도 은은한 미소를 띤 그도 여유로워 보였다. 겨우 믿음이 자라난 걸까. 모호한 눈빛의 나언이 고개를 돌려 차창에 팔뚝을 교차로 얹고 그 위에 턱을 괬다.

“생각해 볼게요.”

기원은 대답 대신 음악을 틀었다. 나언은 눈을 감았다. 저 숲이 끝날 때쯤이면 다시 바닷가가 빼꼼 고개를 내밀 것 같다. 미미한 바다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멜로디를 잘 모르는 노래의 끝 음을 따라 작은 허밍을 흘렸다.

밝은 노란색 태양이 태평양 위로 노을을 그려 냈다. 그 무렵 기원의 차는 해안 도로의 작은 도시로 머리를 돌렸다. 나언도 이제는 시차 때문에 지치는지 눈을 감고 편하게 졸고 있었다. 해변에 가까운 하얀 목조 건물 차고에 주차를 마친 기원은 잠든 나언을 차에 두고 먼저 캐리어를 옮겼다. 그럼에도 나언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죽은 듯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나언을 바라보던 기원은 천천히 손을 올려 나언의 뺨을 감쌌다.

눈에 예민한 기색이 살짝 스쳤으나 고루 내쉬는 숨소리에 안정을 찾은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나언을 깨웠다.

“도착했어요, 들어가서 쉬자.”

실핏줄이 돋은 커다란 눈을 꿈뻑인 나언이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잠이 잘 깨지 않는 듯 눈을 비비적대며 차고를 걸어 나온 나언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와….”

탄성처럼 흘러나온 나언의 작은 목소리에 기원 역시 바다로 시선을 옮겼다.

온 세상에 핑크빛 필터를 덧씌운 것처럼 따뜻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나언이 좋아할 줄 알았지만, 감동에 젖어 넋이 나간 듯한 얼굴을 하자 어쩐지 뿌듯해졌다. 이 숙소는 평소 알고 지내던 건축가 부부가 미국 서부에 머무를 때 거주하는 집이었다. 숙소 앞 전경이나 독특한 인테리어뿐 아니라 사람의 시선이나 발길이 닿지 않는 독립적인 곳에 위치한 것도 상당한 이점이었다.

숙소가 살짝 높은 고지에 지어져 해변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여유로운 햇살 아래에서 서핑을 하거나 모래사장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사람들이 점을 찍은 것처럼 작게 보였다. 나언은 그렇게 한참 동안 바다를 내려다보더니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기원은 숙소로 들어가려는 나언의 팔을 낚아챘다. 강하게 끌어당기자 가슴팍에 머리가 쿡 부딪치며 품으로 쉽게 안겨 들어왔다.

기원은 나언을 끌어안고 여독을 풀 듯 긴 숨을 내쉬었다. 나언 역시 가만히 숨을 죽이고 눈을 감았다. 몸을 살짝 물린 기원이 나언의 얼굴을 들어 내려다봤다. 마치 나언이 아름다운 광경을 눈에 담던 그 표정으로, 기원은 나언을 바라봤다. 나언의 맑은 눈동자는 분홍빛 노을을 머금고 밝게 빛나, 그의 눈동자 안에 그림자처럼 들어찬 자신의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 엄지를 든 기원은 나언의 사랑스러운 눈가를 천천히 문질렀다.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기원이 나언의 입술을 머금었다.

짧은 키스로 끝날 것 같았던 기원의 입맞춤이 끊이질 않았다. 숨이 차올라 입술이 벌어지자마자 뜨거운 혀가 나언의 혀를 옭았다. 기원의 손이 나언의 얇은 티셔츠 사이로 들어가 등허리의 옴폭한 부분을 훑고 허리를 쓰다듬었다. 하체가 진득하게 붙어 왔고 기원의 숨소리 역시 열기에 들끓어 갔다.

여전히 자동차 문은 열린 채였고,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아 밝은 저녁이었다. 나언이 고개를 비틀며 피하려 할 때마다 기원은 갈급증이 이는 사람처럼 몸을 바짝 붙여 왔다. 나언의 등허리가 차량 보닛에 부딪혔고, 기원은 나언의 목에 입술을 묻고 기어이 붉은 자국을 남겼다.

결국 조수석 시트에 눕혀진 나언의 다리는 아직 차 바깥에 있었다. 열린 문으로 가려지는 각도였지만 해변이 워낙 길고 넓은 탓에 반대쪽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나언의 바지를 끌어 내리려 하는 기원의 가슴을 나언이 있는 힘껏 밀며 몸서리쳤다. 팔자가 된 눈썹 아래의 커다란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아, 읏. 들, 어가서….”

“씨발, 진짜.”

처음 보는 낯으로 설레하는 나언을 곁에 두고 운전이나 하느라 아래가 터질 것 같았다. 극한의 인내심으로 눈을 질끈 감은 기원이 나언의 팔뚝을 낚아채 일으켜 앉히곤 집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끌려 들어가던 나언은 결국 현관에서부터 옷가지가 하나씩 벗겨졌다.

***

젖은 머리를 한 나언은 기원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도시에 들어온 후 가까운 펍에서 포장해 온 핑거 푸드와 맥주는 모조리 식었다. 어차피 축적된 피로가 몰려와 크게 입맛이 없었다.

“내일 가고 싶은 곳 있어요?”

“…….”

그런데 아무런 대답이 없다. 눈썹을 살짝 끌어 올린 기원이 고개를 내려 나언의 얼굴을 비스듬히 살폈다. 어느새 나언은 눈을 감고 고롱고롱 코까지 골고 있었다. 허벅지 위에 눌린 뺨과 그 앞에 가지런히 놓인 손을 보며 기원이 웃음을 삼켰다. 수면제 없이 편안하게 잠에 빠진 모습에 기원 역시 안도했다.

피곤할 것이다. 바깥에서 저를 밀어 냈던 것이 무색하게도 나언은 달뜬 신음을 흘리며 기원의 허벅지에 제 다리를 옭아맸다. 반쯤 힘이 빠진 눈은 결국 붉게 젖은 채로 일렁였고 무엇을 쥘지 몰라 소파 쿠션을 쥐어짜던 마른 손은, 기원의 손에 깍지를 껴 오며 진득하게 매달렸다. 이미 묽은 액을 싼지도 모른 채 몇 번이나 이른 절정에 경련하던 나언은 마지막엔 아무것도 싸지 않은 채로도 사정하는 것처럼 몸을 파르르 떨더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씻을 때까진 겨우 눈을 뜨고 있었는데, 눕히자마자 마치 마지막 남은 체력까지 끌어다 쓴 사람처럼 까무룩 정신을 놓아 버렸다.

기원은 잠든 나언을 보며 아래가 저릿하게 당겨 오는 느낌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이제 겨우 여행 첫날이었다.

***

“푸하!”

꼬로록 잠겨 들던 머리가 수면 위로 튀어나오는 것과 동시에 나언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뿌듯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파도 너머로 보이는 기원이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숙소에 가까운 해변은 서핑하기 좋은 곳으로 입소문이 났다고 했다. 햇볕이 쨍쨍한 낮, 기원과 나언은 충동적으로 서프보드를 대여했다.

뭍에서는 자세를 곧잘 따라 하던 나언은 바다에 들어가자 물을 많이 먹었다. 하지만 방금 나언은 처음으로 제대로 보드에서 일어섰다. 기원이 적당한 파도에 오를 수 있도록 타이밍 좋게 보드를 밀어 주었고 나언은 익혔던 자세를 천천히 다잡으며 보드 위에서 두 발로 섰다. 그다음은 파도의 역할이었다. 앞으로 쑥 밀리는 느낌과 함께 바람이 얼굴로 시원하게 불어왔다. 해변이 가까워질 무렵 보드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나언이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웃었다.

몇 번 바다를 거스르느라 허우적댔더니 나언은 금세 체력이 떨어졌다. 잠시 쉬겠다며 바다에서 헤엄쳐 나온 나언은 머리에 타월을 걸친 채 모래사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마침 기원이 보드를 타고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자주 타진 못해도 어릴 적 익혔던 운동이라 몸이 기억한다고 했다. 나언은 기원이 능숙하게 패들링하고 파도를 읽는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파란 바다 위에서 바람을 맞는 기원의 표정이 어린아이 같아 보여 신기했다.

‘어린 최기원…….’

나언은 기원이 능숙하게 영어를 하는 모습이 마냥 신기했다. 저도 아예 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영어를 할 때의 기원은 목소리도 조금 다르게 들렸고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 정도의 속도를 구사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태어났다고 했죠?

-네.

-그러면 한국말보다 영어를 먼저 했겠네요.

-음. 아주 어릴 적에는 영어가 더 편했지만, 엄마랑은 한국말로 대화했으니까 실은 비슷하게 익혔어요.

어제 차 안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집에서는 한국어, 친구들과는 영어로 이야기했다던 기원의 설명에 머리로 어릴 적 기원의 모습을 떠올렸지만, 그때는 잘 그려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의 기원을 보니 천진했을 어릴 적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느슨하게 웃을 기원을 생각하니 조금 설레기도 했다.

‘어렸을 때도 좀 까칠했을 것 같아….’

근거 없는 결론을 내린 나언이 혼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저 멀리 보드를 든 기원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옥죄는 슈트가 불편한지 지퍼를 내린 탓에 탄탄한 어깨와 복근이 드러났다. 옆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귀에 들어간 물을 뺄 때마다 단단한 팔 근육의 윤곽이 도드라졌다. 몸 선에 맞게 떨어지는 보디 슈트는 물기를 머금어 반짝였고, 너른 보폭으로 모래를 밟을 때마다 도드라지는 허벅지 근육에 본의 아니게 시선이 머물렀다.

한국에서도 눈에 띄는 외모였지만, 서양인이 많은 여기선 조금 더 튀어서 그런가 다른 사람들도 기원에게 살짝 시선을 둘 때가 있었다. 나언은 기원의 높은 코와 붉은 입술, 복근을 보며 소리 없이 감탄했다.

‘잘생기긴 했다.’

나언은 괜히 더워지는 기분에 수건을 살짝 흔들어 바람을 만들어 내며 눈을 피했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기원이 나언의 앞에 무릎을 바깥으로 접으며 앉았다. 나언의 수건을 걷으며 눈을 맞춘 기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새 탔나? 얼굴이 붉은데.”

“아, 그런가요. 좀, 더워서…….”

“더위를 먹었나.”

걱정스러운 혼잣말과 함께 커다란 손이 이마와 목덜미를 한 번씩 덮었다. 괜한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양심이 찔려 와 손길이 닿을 때마다 몸을 움찔대게 됐다. 나언은 아니라고 대답하며 손부채질을 했지만, 기원은 제 마음도 모른 채 나언에게 몸을 바짝 붙이며 서핑은 재밌었냐고 물었다. 나언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자신 또한 아래가 붙는 슈트를 입고 있었다. 민망한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나언과 기원은 숙소에 들러 몸을 씻고 도시를 둘러보기로 했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수채 물감을 쏟은 것 같은 석양이 보랏빛을 띠었다.

날씨가 좋아서 야외 테이블에 사람이 많았다. 기원과 나언 역시 바다가 보이는 한 레스토랑의 테라스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서핑을 하고 나니 허기가 졌다. 수프와 파스타, 햄버거 등 먹고 싶은 메뉴를 몽땅 주문하다 보니 테이블에 음식이 잔뜩 쌓였다. 목이 마를 때마다 생과일주스와 맥주를 번갈아 마셨다.

포크를 들고 소스에 절여진 감자튀김을 집은 나언이 물었다.

“최기원 씨는 언제까지 미국에서 지냈어요?”

나언의 질문에 잠시 미간을 찌푸린 기원이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지냈다고 해야 할까요. 미국에서 나오질 못했죠.”

기원의 표현에서 마음에 걸리는 단어를 느낀 나언이 씹던 것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아…. 실례되는 질문이었다면 죄송해요.”

“그게 무슨 실례라고. 어제 내 몸 위에 잔뜩 싸지른 게 실례지.”

질 낮은 농담을 한 기원 때문에 나언의 얼굴색이 확 붉어졌다. 다급하게 누가 듣지 않았을까 주위를 살폈지만 모두 외국인이라 다행이었다. 급소를 찔린 다람쥐 같은 반응에 기원은 다음 조롱은 영어로 해 볼까 싶은 못된 생각이 들었다. 피식 웃은 기원이 맥주를 하나 더 주문하며 말했다.

“내 이야기를 전혀 안 하긴 했죠.”

나언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커다란 눈에 맺힌 미미한 호기심을 읽은 기원이 몇 없는 옛 기억을 끄집어내 보았다. 말해서 즐거울 건 없지만, 굳이 숨길 내용도 없었다.

“엄마는 열여덟 살에 지병으로 돌아가셨어요. 둘이서만 지내서 좀 막막했는데, 가까이에서 지내던 이웃 한인 아저씨가 엄마 장례까지 치러 줬어요.”

“아…….”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 쪽 수행 비서 중 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한국 들어갈 때 같이 들어갔거든요. 몇 년 지나서 회사에서 마주쳤을 때 얼마나 민망하던지. 동네 아저씨처럼 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쌩까기도 그렇고.”

그 뒤로 미국에서 홀로 지내야 했던 기원은 종종 그분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그게 실질적으론 아버지의 도움이었지만. 아버지는 기원이 태어나 청소년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표면적인 접촉을 시도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엄마가 죽고 나서 두 달 뒤에 아버지가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

“갈까, 말까 하다가 갔어요. 엄마가 우스갯소리로 했던 말이 있어요. 나중에 혹시 아버지가 부르면 꼭 한국에 가라고.”

한국에서 마주한 아버지는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역겨웠고.

“아마 여기 내버려 두기 불안했던 것 같아요. 슬슬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거든.”

자칫하면 어긋날 법한 시기였다. 친구랍시고 어울리는 무리는 질이 좋지 않았고, 기원 역시 세상 모든 것이 무료하게 느껴지곤 했다. 일탈의 자극에 중독되고 소소한 범법 행위쯤은 가책이 느껴지지 않을 무렵 아버지는 결국 기원을 한국으로 데려왔다. 물론 아버지의 본처인 새어머니와 최지원이 있기에 한국에서도 온전히 기댈 곳 없는 천덕꾸러기였지만, 살아남기 위한 판단은 빠르게 섰다.

기원은 제가 잘하는 것을 스스로 찾았다. 미술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지냈지만, 기원은 단연코 행복한 적이 없었다. 열등감이 만들어 낸 비틀린 과거 때문에 제 자리를 찾을수록 헤매는 기분이 들었고 지원의 그림자에 짓눌려 의무감에 굉음같이 살 뿐이었다. 해소되지 못한 욕구는 어느새 백나언에게 얽혀 들기 시작했었다.

나언을 알게 되고 조용히 그를 담아 가던 몇 년, 최지원의 빈소에서의 첫 만남, 협박과 강간, 폭력과 감금, 자해와 이별 그리고 재회까지. 백나언이 제 앞에 있다는 사실이 가끔 꿈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참으로 지난한 과정이었다.

나언과의 첫 해외여행으로 미국을 선택한 분명한 이유도 있었다. 비틀린 욕구가 제 속에 자리 잡기 전에 살았던 이 나라의 향취만큼은 나언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의자에 편하게 앉은 기원이 세팅하지 않은 머리를 가볍게 쓸어 올리며 말했다.

“미국에서 백나언이랑 만났으면 좋았겠다.”

기원의 말에 나언 역시 옅게 웃으며 주스를 들이켰다. 시작이 달랐으면 우리의 과정 또한 달랐을까. 같은 생각을 한 둘의 가슴이 먹먹하게 조여 왔다.

“여기 마을, 축제 기간이래요.”

나언의 눈빛에 스민 어두운 기색을 기민하게 느낀 기원이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축제요?”

“네 마켓도 열고 작게 공연도 하고. 크진 않지만 은근히 볼거리는 많을 겁니다. 쉬다가 저녁에는 그거 구경하러 가요.”

“좋아요.”

나언과 기원의 잔이 가볍게 부딪쳤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나언의 고개가 테라스 너머로 돌아갔다. 해가 쨍쨍한 낮, 머리끝까지 잠겼던 바다가 파란 수정처럼 일렁였다. 바다는 참 아름답다. 짙은 물결을 보며 하염없이 아파했던 때가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

미국에 떨어진 지 삼 일차. 기원과 나언은 숙소를 옮겼다. 첫 숙소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탓일까 내심 여기서 일주일 내내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나언도 막상 차량이 도로를 따라 질주하자 금세 입가가 헤실거리고 눈이 반짝였다.

어스름한 새벽, 그간 드라이브를 하며 보았던 것과 사뭇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울창한 숲과 깎아지르는 듯한 협곡, 해안의 굽이치는 파도가 주를 이뤘던 것과 달리 이제는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평야가 펼쳐졌다.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던 동그란 나뭇잎과 초원을 뛰노는 야생 동물들이 자그맣게 보였다. 유리창에 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을 붙인 나언은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

동이 터 올 무렵, 황량하게 느껴질 정도로 광활한 풍경 너머로 점점 모텔을 비롯한 낮은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심에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앞에 묵었던 곳이 서퍼들과 관광객이 많은 활기찬 바닷가 마을이었다면, 이번에는 소박하고 조용한 소도시였다. 아름다운 색의 벽돌로 지어진 건물은 전체적으로 높이가 낮았고 건물 사이의 거리가 멀어 한적한 느낌을 줬다. 하지만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도시의 번화가에 가까워지자 샌프란시스코나 로스앤젤레스를 찾은 여행객이 꽤나 모여 있었다.

시내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계곡 너머 깔끔한 호텔이 둘이 묵을 숙소였다. 새벽같이 움직이는 일정이었던 탓에 둘은 도착하자마자 새 침구에 파묻혀 잠을 청했다. 그러나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기원은 침대에서 조용히 내려와 씻었다. 제가 움직이는 소리에 되레 뒤척이는 나언에게 더 자라고 일렀지만, 나언은 몰려오는 나른함을 이겨 내며 눈을 떴다. 잠기운이 묻은 큰 눈이 반만 뜨여 있었다. 가볍게 씻고 나온 기원은 셔츠에 팔을 끼우고 단추를 잠그며 나언에게 말을 걸었다.

“왜 더 안자고.”

“오후에 오시는 거죠?”

나언은 대답 대신 잠기운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기원의 일정을 확인했다. 슈트 차림의 기원은 넥타이를 고른 뒤 능숙하게 매며 그렇다고 답했다. 비공식적 휴가인 이번 일주일은 어떻게든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급하지 않은 일정들을 모조리 옮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려 했는데, 출발 하루 전, 기원의 미국행을 알게 된 아버지가 저 대신 행사에 참여하고 오라 일렀다. 내년도 기원의 호텔 사업과도 관련이 있는 자리였기에 얼굴을 비춰야 했다. 졸지에 5시간을 떨어져 있게 됐다. 묘하게 신경이 날카로워진 기원이 시계를 차며 말했다.

“조식 주문해 뒀으니까 챙겨 먹고 쉬고 있어요. 금방 올게요.”

“저기……. 저 점심때 잠깐 나갔다 와도 돼요?”

이불에 둘둘 말린 채 앉은 나언이 조심스레 물어 온다. 재킷을 걸치려던 기원이 고개를 휙 돌렸다.

“어디를?”

“아, 아까 오는 길에 보니까……. 계곡 주변으로 예쁜 가게도 많고 음식점도 꽤 있더라고요. 가 보고 싶어서요…….”

위험할까요? 그렇게 물으면서 눈을 살짝 접어 웃는다. 가고는 싶지만, 걱정이 많은 기원이 선뜻 그러라 하지 않을 걸 알고는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묻는 말이었다. 물론 기원은 나언이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보다 객실에서 얌전히 있었으면 싶었지만 그러라 할 순 없었다.

나언이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순간은 너무나 귀해서, 기원의 음험한 생각과 불합리한 통제는 모조리 자취를 감췄다. 저런 부탁쯤 눈치 보지 않고 언제쯤 가벼이 물어 올 수 있을까. 쓴웃음을 지은 기원은 온기 어린 목소리로 나언을 안심시켰다.

“그래요. 휴대 전화 잘 챙기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

“네.”

큰 눈과 홍조가 도는 뺨, 긴장한 듯 다문 입술이었지만 나언의 얼굴에 설렘이 번졌다. 소풍 가는 것처럼 들떠 하는 앳된 얼굴을 보니 아래가 저릿하게 당겨 온다. 결국 눈을 감으며 작은 한숨을 터뜨린 기원은 재킷을 의자에 걸쳐 두고 나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푹 자고 일어나 말랑해진 얼굴을 한 손에 쥐고 살짝 힘을 주자 입술이 새 부리처럼 툭 튀어나왔다. 나언이 눈동자를 위로 올리며 기원을 바라봤다.

쪽. 소리와 함께 짧은 뽀뽀를 남긴 기원이 목 아래로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씨발 이 얼굴로 혼자 돌아다닌다 생각하니까 그냥 방에 있으면 좋겠는데.”

“예……?”

기원은 대답 대신 한숨과 함께 나언을 세게 끌어안았다. 얼마나 힘이 센지 가슴이 콱 조여들 정도로 꽉 안아 오는 통에 작게 기침이 터질 정도였다.

“오, 옷 구겨지는데.”

“가기 싫다.”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항변하면서도 본능적으로 기원의 허리를 둘러 안은 손은 떨어뜨리지 않는다. 가벼이, 그러나 몸을 맡기고 안겨 있는 무게를 느끼며 기원이 인내하듯 눈을 감았다. 나언의 유순한 체향을 들이켜며 귓가에 조용히 말했다.

“빨리 올게요.”

“네.”

사르르 눈을 접어 웃은 나언은 호텔의 문 앞까지 나가 기원을 배웅했다. 그의 모습이 아주 작아져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언이 방으로 터덕터덕 걸어 돌아왔다. 커다란 거울에 제 인영이 비치자 나언이 흠칫 걸음을 멈췄다.

“헉, 머리가….”

흉하게 뒤집힌 뒷머리를 벅벅 긁었지만, 머리가 다시 붕 솟았다. 이 꼴을 하고 있었다니, 부끄러웠다.

***

한국에서도 혼자 외출하는 일이 잦지 않았기에 오랜만에 만끽하는 자유였다. 기원이 룸서비스로 시켜 준 조식을 먹고 여유를 부리던 나언은 옷을 골라 입고 호텔을 나섰다. 곳곳에 벽화가 그려진 좁은 골목을 벗어나자 광활한 광장이 펼쳐졌다. 하얗게 빛나는 햇살이 계곡 주변을 비추자 물결은 보석처럼 알알이 빛났다.

여유롭게 브런치를 즐기는 여행객과 계곡에 발을 담그고 노는 아이들이 내는 소음이 귓가에 울렸지만, 모두 영어라 그런지 머리까지 내용이 들리지 않았다.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풍경. 사람들이 왜 해외여행에 ‘힐링’이라는 말을 붙이는지 알 것 같았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나언은 괜한 설렘에 군것질을 꽤나 했다. 캐릭터 풍선이 잔뜩 달린 푸드 트럭에서 고소한 냄새를 맡고 우뚝 멈춘 나언은, 푹 끓인 치킨 수프 한 컵을 사서 먹었다. 짜면서도 고소한 맛에 한 그릇을 비워 내곤 바로 곁의 카페에서 달짝지근한 과일 주스를 사서 입가심했다.

작은 도시의 번화가인 이곳은 건물이 높지 않았지만 저마다 색이 있어 다채로웠다. 벽 곳곳에 넝쿨 식물이 달려 있고 목조 선반에 놓인 화분 때문에 간판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작은 서점과 건물 전체가 청록색으로 칠해진 이색적인 편집 숍에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언의 걸음은 다시 작은 가게 앞에서 멈췄다. 배가 불렀지만,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이면 자꾸만 관심이 갔다. 결국 허기는 지지 않으면서도 욕심껏 산 콘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문 나언이 벤치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제는 익숙한 거대한 팜트리 아래, 화단에는 이름 모를 키 작은 노란 꽃이 잔뜩 피었다. 단내가 아이스크림에서 풍기는지, 꽃 내음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

그때 나언의 시선에 아이들이 걸려들었다. 주언이 또래의 남자아이 한 명과 더 어린 여자아이가 나언의 가까운 곳에서 비눗방울을 불며 뛰놀고 있었다. 오빠로 보이는 아이가 뺨을 동그랗게 만들어 비눗방울을 힘껏 불면, 동생이 손바닥으로 그걸 모두 터뜨리며 다녔다. 사람들의 말소리 사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귓가에 꽂혀 들었다.

좋은 곳에 오면 필연적으로 떠오르는 주언이를 그리며 물끄러미 두 아이를 바라보던 나언의 무릎에 비눗방울 두어 개가 닿아 툭 하고 터졌다. 멍하게 앉아 있던 나언의 시선이 무릎으로 옮아갔다. 나언에게 방울이 닿은 것을 눈치챈 소년은 눈치를 살피듯 커다란 눈동자로 저를 흘긋댔다. 언짢은 기색이 보이면 얼른 사과를 하려는 듯 눈을 마주치는 순간, 나언이 씩 웃어 줬다. 그제야 안심한 듯 아이는 비눗방울을 마구 불어 댔다. 햇볕이 닿을 때마다 무지갯빛이 영롱하게 번지는 동그란 비눗방울은 선선한 바람을 타고 온 광장에 흩날렸다.

한참 비눗방울을 터뜨리느라 빙글빙글 뜀박질하던 여자아이가 나언에게 성큼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어디에서 내적인 친근감을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가 저를 보며 손을 흔든다. 양 갈래로 묶은 밝은색의 머리카락은 겨우 손가락 하나 길이 정도로 짧았다.

『안녕?』

『안녕.』

인사를 건네니 배시시 웃으며 인사해 줬다. 아이의 시선은 곧장 나언이 들고 있는 푸른색의 콘 아이스크림으로 옮겨갔다. 뭔지 알면서도 뭐냐고 묻는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이라고 대답하며 웃었다.

『먹고 싶어?』

『네. 그런데 돈 안 갖고 왔어요.』

『무슨 맛이 먹고 싶은데?』

맛을 세 개나 늘어놓는 아이를 보며 미소를 지은 나언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콘 2개를 샀다. 먼저 말을 걸어온 여동생에게 하나, 그 곁에 선 오빠에게 건네니 여자아이는 냉큼 받아 들고 한 입 크게 베어 물었고, 남자아이는 잠시 고민하다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조심스레 핥았다.

나언은 아이들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마저 먹고 벤치에서 일어섰다. 우연히 만난 아이들과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지금처럼, 다음 목적지 역시 우연에 맡기기로 했다. 느낌 가는 대로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작은 분수대 옆에서 정원이 예쁜 미술관을 발견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나언이 스스럼없이 걸음을 틀었다.

나언은 기원 덕분에 전시를 관람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휩쓸리듯 들어간 작은 미술관은 푯값도 너무나 저렴했다. 아이스크림을 사고 주머니에 쑤시듯 넣었던 거스름돈으로 표를 산 나언은 별도의 대기 없이 바로 입장했다. 입장하며 받은 작은 팸플릿은 손바닥 크기로 인쇄된 앞 뒷장이 전부였고, 그나마도 모두 영어라 더듬더듬 읽었다.

전시장에는 작가들의 구분 없이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파도를 그린 유화, 세 가지 색으로만 이루어진 추상화 등, 간단한 주제에 따라 가지각색 화풍의 그림이 하얀 벽 곳곳에 걸렸다. 나언은 작품을 해석하려 애쓰지 않았다. 마음이 가는 그림 앞에서 한참 시선을 빼앗겼고 기원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전시 관람이 끝난 뒤 미술관에서 나온 나언이 광장을 따라 내려온 길을 거슬러 가던 중, 아까 줄이 길어 들어가지 못했던 펍을 발견했다.

‘우와, 저긴 줄이 아직도 기네.’

두 시간 전에 봤을 때는 점심시간과 맞물려 손님이 길게 줄을 섰었는데 여전히 북적이는 걸 보니 저 펍은 아마도 로컬 맛집인 듯했다. 가게 자체가 소담한 편이라 테이블 회전이 빠르지 않은 것도 긴 웨이팅의 한 이유인 듯했고. 지금쯤이면 애매한 시간대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줄이 길게 나 있는 걸 본 나언이 걸음을 옮겼다. 저기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호텔로 돌아가면 기원의 도착 시각과 얼추 맞을 듯하다.

십여 분의 웨이팅 끝에 나언은 자리를 안내받았다. 창문가의 1인 좌석을 간절히 바랐지만 아쉽게도 테이블은 주방 가까이에 난 1인 좌석이었다. 자리를 고를 만한 상황이 아니기에, 나언은 받아 든 메뉴판을 살폈다.

나언은 버섯 버거와 소시지구이 세트,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기원 없이 주문하는 것이라 조금 긴장했지만, 사진을 손끝으로 꼭꼭 집으며 말하니 다행히 무리 없이 주문이 들어갔다. 음식도 굉장히 빠르게 나왔다.

“……!”

첫입을 베어 문 나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현지인들이 그토록 줄을 선 이유가 있었다. 따끈한 빵 아래에서 묵직한 버섯 향이 퍼졌고, 씹을 때마다 버섯에 스며든 특유의 소스가 깜짝 놀랄 만큼 맛있었다. 소시지 역시 싸구려 가공육이 아니라 텁텁하지 않았고, 겉은 매끈하고 속은 촉촉했다. 미국에 머무르며 느끼한 음식에 조금 질려 가려고 했는데 막상 너무 맛있으니 물린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버거는 금세 다 먹어 치웠고 커다란 소시지가 반쯤 남았다. 너무 정신없이 먹었나 싶어 머쓱해진 나언이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 전화를 찾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를 훑은 나언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

냅킨에 손을 닦은 나언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댔다. 이내 고개를 떨어뜨려 테이블 아래에 혹시 가방이 떨어져 있나 찾기 시작했다. 나언의 표정이 그야말로 사색이 됐다. 지갑, 휴대 전화, 호텔 키가 든 가방이 사라졌다.

‘정신을 어디에다 두고 다니는 거야.’

아찔한 기분이었다. 더 절망적인 것은 제가 들렀던 수많은 곳 중 가방을 어디에 흘리고 온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이다. 미술관에서 표를 살 때까지 지갑은 있었구나 싶다가도, 표는 가방이 아닌 주머니의 현금으로 구매했다는 사실에 순식간에 그 전의 상황까지 의심해야 했다.

유독 마켓을 많이 들렀고 길거리 음식도 자주 사 먹었다. 이미 늦었을 수 있지만 돌아다녔던 길을 되짚으며 가방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솟구쳤던 식욕이 모조리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언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리에서 일어선 나언이 펍의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에게 다가갔다.

『저기…. 실례할게요.』

바빠 보이는 여성이 고개를 들어 나언과 눈을 맞췄다.

『계산인가요?』

『아, 네. 계산을 하긴 할 건데….』

긴장에 마른침을 꿀꺽 삼킨 나언이 상황을 짧은 영어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가 지갑을 잃어버렸습니다. 잠시 찾으러 갔다 와도 될까요?』

그녀는 나언의 질문에 미간을 왈칵 찌푸리더니 나언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거꾸로 훑는다. 이내 콧방귀를 뀐 주인이 빠른 영어로 우다다 말을 하기 시작했다. 대충 듣기만 해도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는 뜻 같다. 제가 생각해도 황당하다 못해 화가 날 상황일 것 같긴 하다. 실컷 음식을 다 먹어 놓고 돈을 찾으러 다녀오겠다니. 게다가 자신은 연고 하나 없는 여행객 신분이었다. 더더욱 신뢰가 가지 않을 터였다.

‘하필 휴대 전화까지 잃어버려선….’

막막함에 생각나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사정이라도 속 시원하게 설명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영어 실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이러다간 꼼짝없이 경찰서에 가서 해명해야 할 판이었다.

『어린 학생이 사정은 딱해 보이지만, 정말 돈이 없으면 경찰이라도 불러야겠어요.』

『전화라도 한 통만 빌려 쓰게 해 주시면…….』

화가 난 주인에게서 ‘경찰’이라는 단어가 들린 위기의 순간, 아이 두 명이 카운터 안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주인의 허리춤에 매달리듯 안겨 재잘대던 여자아이가 제 엄마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나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언과 눈을 마주친 순간 두 명 모두 입을 크게 벌렸다.

『안녕하세요!』

『어? 아이스크림 오빠!』

『아, 안녕….』

나언이 얼결에 인사를 받자 나언과 제 아이를 번갈아 살핀 주인이 아이에게 물었다.

『데이지, 아는 사람이야?』

『응, 아까 광장에서 저 오빠가 아이스크림 사 줬어.』

역시나. 아까 광장 벤치에서 비눗방울을 불며 놀던 남매가 맞았다. 엄마와 꼭 닮은 머리 색을 한 아이가 재잘대는 것을 유심히 듣던 여자의 표정이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언을 향해 다시 질문을 던져 왔다.

『그러니까, 지갑을 잃어버렸다고요?』

『네, 가방까지 전부요.』

그제야 나언의 말을 조금이라도 믿는 듯 나언의 행색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줬다는 건 정말 원래는 지갑이 있었다는 뜻일 테고. 딱히 옷차림이 꾀죄죄하지도 않고, 신고 있는 신발도 꽤나 비싼 브랜드 로고가 붙어 있었다. 게다가 본의 아니게 딱한 마음이 들 정도로 착하고 순하게 생긴 인상에 거짓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커다란 눈을 본 주인은 고민되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래도 그냥 보내 주진 못하고.』

『봐줘, 봐줘! 착한 오빠야!』

『맞아, 엄마 저 형 엄청 착해.』

소년까지 거들고 나서자, 카운터 위를 툭툭 두드리던 손가락이 멎었다. 주인 여성은 제법 단호한 표정으로 나언에게 제안을 건넸다.

『애들 아이스크림 값 제하고, 남은 돈은 한 시간 파트타임 하는 거로 대신 계산할게요.』

『천천히 말씀 해 주시면….』

『한 시간 일하면, 당신은 나갈 수 있다. 알겠어요?』

쉬운 단어를 이용해 느리고 간단한 설명을 마친 사장이 이해했냐고 묻는다. 잠시 눈을 끔뻑이던 나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백나언입니다.』

『그래요, 한 시간은 ‘미스터 백’이라고 부를게요. 얼른 와요, 바쁘니까.』

‘한 시간 정도면….’

타이밍이 잘만 맞으면 기원과 시간상 크게 어긋날 것 같지도 않고, 조금 어긋나더라도 얼른 호텔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면 기원과 금세 연락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입매를 단단하게 굳히며 앞치마를 건네받은 나언이 그걸 허리에 둘렀다. 짧은 영어로 최선을 다해 주문을 받고, 주위 서버들을 어깨너머로 살피며 열심히 음식을 날랐다. 손님이 끊이지 않는 탓에 나언의 머릿밑에도 송골송골 땀이 맺혀 갔다. 그리고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가게 문이 벌컥 열리며 예상치 못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최기원 씨!”

그리고 나언이 최기원을 발견하자마자 눈썹을 아래로 끌어 내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나언에게 성큼성큼 다가온 기원이 화가 잔뜩 벼려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백나언. 너 왜 전화를….”

연락이 두절됐던 나언에게 윽박지르려던 찰나, 눈앞의 사람이 정말 기원임을 확인한 나언의 눈이 울먹울먹 부풀었다. 인제 보니 나언의 꼴이 좀 이상하다 싶어 기원 역시 미간을 옅게 찌푸렸다. 양손에는 다 마신 맥주잔 두 개를 들고 있고, 빨갛게 상기된 뺨이 땀에 잔뜩 젖은 얼굴까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가게 이름이 프린팅된 앞치마까지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

고생 잔뜩 한 꼬질꼬질한 고양이 같은 행색의 나언이 할 말이 많은 듯 입술을 달싹대다 꾹 깨물며 숨을 시근덕댔다. 그러더니 구세주라도 만난 얼굴로 기원에게 물어 왔다.

“저, 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동양인 남자가 별로 없는 동네라. 여기저기서 목격담이 많이 들리던데.”

푸드 트럭, 마켓, 서점과 미술관까지. 게다가 광장에서 나언을 봤다던 사람은 족히 다섯이 넘었다. 일정이 끝난 후 전화를 해도 전혀 연락이 닿지 않고, 호텔에도 인기척이 없는 모습을 보며 잠시 머릿속 퓨즈가 끊길 뻔했던 기원은, 나언이 돌아다닌 흔적을 따라다니며 그가 꽤나 열성적인 여행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쨌든 찾았으니 됐다. 짙은 한숨을 내쉰 기원은 상황을 파악해 보려 짝다리를 짚은 채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며 나언에게 물었다.

“아르바이트 체험하고 싶어서 자유 시간 달라고 했어요?”

“그랬겠어요?”

나언도 처음 겪는 일에 잔뜩 예민했다. 기원의 빈정거림에 서러워하긴커녕 발끈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건 모두 가방을 잃어버린 멍청한 제 탓이며 기원은 아무런 상황을 모를 테니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일 수 있었다. 나언이 얼른 목소리를 낮추고 빠르게 설명했다.

“가방을 잃어버렸어요. 폰이랑 지갑이 다 들어 있는데…. 아무튼 계산을 못 해서 갚는 중이에요.”

“알바 뛰어서?”

하지만 말끝에 웃음기를 감추지 못한 기원 때문에 이게 다 놀리는 질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언이 눈을 질끈 감으며 인내했다. 더 대거리했다간 괜한 원망을 기원에게 풀 것만 같았다. 하지만 놀리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나언은 기원에게 사과를 건네야 했다.

“사 주셨던 거 다 잃어버려서 죄송해요.”

나언이 너무나 속상했던 이유. 가방과 그 속에 든 모든 것은 기원이 저에게 선물했던 물건들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기원이 왔으니 얼른 찾으러 나가면 된다는 희망이 생겼다.

“제가 먹은 것 계산 좀 해 주세요……. 지금 가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이제 해결됐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탁 풀렸다. 그런데 나언의 부탁에 기원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대답 대신 기원의 입꼬리가 천천히 곡선을 그렸다.

멍하게 서 있는 나언을 내버려 두고 가게 내부를 슥 둘러본 기원은 빈자리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한 테이블로 걸어갔다. 기원이 테이블에서 식사 중인 외국인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실례합니다. 자리 좀 살게요.』

『무슨 자리요? 여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리키자 기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을 열었다. 기원을 보며 푸흐흐 웃음을 터뜨린 남자가 얼마나 줄 거냐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현금 뭉치를 꺼낸 기원이 돈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지폐를 들어 액수를 확인한 남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심이야?』

『당장 꺼져 주면 더 드리죠.』

『씨발 개쩌는데?』

욕설이 가미된 감탄사를 뱉은 손님이 지폐 뭉치를 하나 더 챙겨 든 채 자리를 뜨자마자 기원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곳과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행색을 한 그가 목 끝까지 맨 넥타이를 거칠게 흔들어 풀며 여유를 뒀다.

“최, 기원씨……? 제 거 계산 좀 해 달라니까요.”

나언은 자신이 먹은 것을 몇 번이고 계산할 만한 돈을 남에게 덜컥 건넨 기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기원은 재킷까지 벗고 의자에 편하게 앉았다. 턱을 괸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나언을 올려다본 기원이 씩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테이블 치워 주세요. 메뉴판도 주시고.”

“네……?”

“주문 좀 한다니까.”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나언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기원을 노려봤다. 기원은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리더니,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거듭 메뉴판을 요구했다. 질 나쁜 장난을 시작한 기원을 보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미스터 백, 뭐 해요. 음식 나왔어요.』

등 뒤에서 주인이 나언을 재촉했다. 결국 기원에게 메뉴판을 건넨 나언은 얼른 서빙을 했다. 다른 종업원이 기원에게 주문을 받으려 하자, 기원은 그걸 거절하며 나언을 콕 집어 호출했다. 눈을 한 번 굴리고 기원을 향해 걸어가던 나언은 며칠 전 레스토랑에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미국에서 백나언이랑 만났으면 좋았겠다.

농담인 듯 가볍게 말하면서도 어쩐지 생각이 많아 보이던 얼굴. 나언이 둘의 시작이 달랐으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는 동안 어쩌면 기원도 같은 생각에 빠졌을 수도 있었다. 창가 사이로 선선하게 부는 바람을 느끼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기원은 꽤나 즐거워 보였다.

요즘 기원이 저에게 자주 보이는 얼굴이었다. 서늘하게 날이 서 차가워 보였던 첫 만남의 얼굴, 텅 비어 가던 자신을 붙잡고 있던 절박한 눈빛을 한 마른 얼굴, 그리고 조금은 씁쓸한 웃음을 자주 터뜨리면서도 예민한 기색이 사라지지 않았던 얼굴을 거쳐 요즘 그에게선 편안하고 나른한 분위기가 자주 흘렀다.

“…….”

미국에서 남은 시간은 많고, 다행히 큰 문제 없이 기원을 만났다. 처음에는 곤란한 상황에 장난을 치려 하는 기원이 미웠지만, 내심 안도가 깃들고 나니 그런 애 같은 행동이 조금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나언이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리곤 장단을 맞춰 주기 위해 기원에게 다가갔다.

기원의 테이블 위에 놓인 메뉴판을 보며 단정한 손끝으로 제가 먹었던 버섯 버거를 꾹 눌렀다.

“이거 맛있어요.”

의외로 천연덕스럽게 구는 나언의 행동에 눈을 휘게 접을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뜨린 기원이 웃음기를 매단 입술로 대답했다.

“참나. 그걸로 주세요, 그럼.”

“음료는 안 드세요?”

“맥주도 한 잔 주세요.”

한술 더 뜨는 나언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 기원에게 깍듯하게 인사까지 한 나언이 자리를 떴다. 기원의 메뉴를 주문 넣은 나언은 다른 손님이 떠난 자리를 치우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기원의 눈동자가 나언을 끊임없이 좇았다. 다행히 손님이 조금씩 빠져나가며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듯, 나언은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쉬었다. 그 짧은 사이에 주인의 아이들과도 친해졌는지 웬 캐릭터 인형을 들고 장난을 치기도 하고, 여자아이 하나는 나언에게 와락 안겨 들기도 했다. 나언에게 일을 시켰던 주인도 어느새 엄마 같은 미소로 나언에게 마실 것을 건네주고 있었다. 긴장이 가신 나언은 자주 웃었다. 반달처럼 휘어지는 커다란 눈과 올라붙는 동그란 볼, 말을 할 때마다 살짝씩 보이는 입술 안쪽의 붉은 혀에 기원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또 사라진 줄 알았다. 이제 그럴 리 없다는 걸 머리로 알면서도 텅 빈 객실을 마주한 순간 속이 메스꺼워지는 망상은 그칠 줄을 몰랐다. 혹시 범죄나 사고에 휘말린 것은 아닐까, 아니면 몰래 우울을 키워 왔던 나언이 이대로 사라지길 원한 건 아닐까. 호텔을 뛰어나가면서 심장을 차가운 칼로 푹푹 찌르는 격통에 시달렸다.

하지만 의외의 곳에서 찾은 나언은 또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줬다. 땀까지 뻘뻘 흘리며 개고생을 하던 나언은 자신을 발견한 뒤 긴장으로 단단하게 무장했던 얼굴을 무너뜨렸다. 이내 매달리듯 제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다가왔는데, 그 순간 기원은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욕망이 들끓었다. 이대로 한 번 더 모른 척하면 저 표정으로 옷자락을 붙잡으려나 싶은 저속한 생각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기원은 그러지 않았다. 조금 골려 먹기로 했을 뿐. 나언은 속상한 듯 툴툴댔지만 이내 장난에 합류해 줬다.

쟁반에 맥주와 버거 세트를 잘 챙겨 든 나언이 기원의 테이블 가까이 걸어왔다.

“맛있게 드세요.”

음식을 받아 든 기원은 프렌치프라이 하나를 나언의 입에 가져다 댔다. 쑥스러운 듯 주위 눈치를 살짝 살핀 나언이 빠르게 입술을 벌려 받아 물곤 자리를 떴다. 기원은 향이 괜찮은 버거를 한 입 먹었다. 창가에서 부는 바람이 조금 더 거세지자 기다렸다는 듯 꽃향기가 창문 너머로 왈칵 쏟아졌다.

기원이 버거를 거의 다 먹어 갈 무렵, 한 테이블에서 나언을 불렀다. 아까 기원이 프렌치프라이를 나언에게 먹여 주는 걸 유심히 지켜보던 한 외국인이 나언에게 거듭 손짓을 했다. 나언이 가까이 가서 서툰 영어로 도움이 필요하냐고 묻자 그가 살짝 웃으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학생이야?』

『아, 아니요.』

『여행 왔어? 일본인?』

『한국인입니다.』

『엄청 귀엽게 생겼네.』

『가, 감사합니다.』

‘큐트’라는 단어를 용케 알아들은 나언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나 적당히 대답하고 자리를 뜨려 하면, 손님이 메뉴에 대고 이것저것을 물어 왔다. 단순한 대화가 지지부진하게 끊기질 않으며, 결국 메뉴 하나를 주문하며 10분간 나언을 붙잡아 둔 손님은 대뜸 나언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일 끝나고 같이 저녁 먹을래? 가까운 곳에 멋진 다리가 있는데 드라이브하면서 구경시켜 줄게.』

『예……? 뭐라고 하는,』

중요한 건 남자가 빠르게 말하는 탓에 거의 못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나언은 갑작스러운 스킨십이 불쾌했다. 얼른 손을 빼며 자리를 뜨려고 하던 찰나, 나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기원이 나언의 앞치마 리본을 풀어 끌어 버리곤 남자의 얼굴에 팽개치듯 던져 버린 것이다. 겨우 옷감이지만 뺨을 치는 소리가 나서 나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이거!』

『엿 먹어.』

욕을 씹어 뱉은 기원이 피식 웃었다. 비록 웃음을 매달고 있지만, 온기가 모조리 사라진 기원의 눈은 사나운 짐승 같았다. 아까 저에게 장난을 걸어 대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기원은 아무런 말 없이 나언의 손목을 끌어당겨 카운터로 걸어갔다.

『여기.』

나언의 것과 제 몫의 돈을 정중하게 건넨 기원은 본의 아니게 소란을 일으켜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주인 곁에서 소란에 고개를 빼꼼 내민 여자아이가 기원과 나언을 번갈아 살폈다.

기원이 허리를 살짝 굽히며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른 이가 보이도록 살짝 웃은 기원이 낮게 읊조렸다.

『너도 다음번엔 허락 맡고 안겨.』

나언은 그가 정확히 뭐라 말한지 몰랐으나 빈정대는 뉘앙스에서 좋은 말이 아니라는 건 눈치챘다. 어쩔 줄을 몰라 하던 나언은 모두에게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며 기원에게 끌려 나갔다. 앞치마를 뒤집어썼던 손님이 뒤에서 무어라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따라 나오진 않았다.

그렇게 나언은 광장 앞까지 숨 가쁘게 끌려갔다. 손목이 아프다는 말에야 기원은 걸음을 멈추었고 나언은 얼른 그가 붙잡은 손목을 떼어 냈다.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했다. 비스듬히 쏟아지는 노란 햇살을 맞으며 선 나언이 기원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기원이 한쪽 입꼬리를 자신만만하게 끌어 올린다. 어쩐지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기원을 보며 나언이 진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성격이 진짜 왜 그래요.”

“익숙해질 때도 됐을 텐데.”

장난스러운 대꾸와 함께 볼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놓은 기원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바람이 불어오고 둘 사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나 불편하지 않은, 소란 뒤에 찾아온 고요한 적막이었다.

얼굴로 쏟아지는 노을빛이 눈부셔서 손으로 차양을 만든 나언이 기원에게 물었다.

“아까 그 남자가 저한테 이상한 말한 거죠?”

“뭐 대충.”

“……잘했어요.”

바람 빠지는 듯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기원이 나언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반항이 한풀 꺾인 팔이 기원의 허리를 가벼이 둘러 안았다.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이 이곳을 흘긋대는 것이 느껴졌지만, 한국에서처럼 불편하지 않았다.

제법 많은 일을 겪었던 자유 시간 끝, 단단한 몸에 안긴 나언은 영어를 좀 배워야겠다고 말하며 힘 빠진 얼굴로 웃었다.

***

긴 하루였다. 기원도 일정이 있었고 나언도 본의 아니게 힘든 일정을 소화했기에 당연히 호텔로 가서 쉴 줄 알았다. 하지만 기원의 걸음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어디에 가냐는 질문에 기원은 절대 대답을 내놓지 않았기에 나언도 몇 번 물어보다가 말았다. LA로 넘어가기 전 기원이 이곳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는 건, 무언가 나름의 계획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에 가는 건가.’

새롭게 등장하는 예쁜 건물을 볼 때마다 저기에 가는 걸까, 저기가 목적지인가 하며 들뜬 생각을 했다. 그렇게 기원과 손을 맞잡고 이십여 분을 걸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희미하게 바다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얌전히 기원을 따라 걷던 나언이 눈을 반짝였다. 나언은 바다가 좋았다. 한국에서의 바다도 동해, 서해, 남해 가리지 않고 모두 좋았고 미국에서 만난 바다도 황홀할 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나언이 바다에 시선이 팔린 사이 기원은 작은 꽃집에서 꽃을 한 다발 샀다. 크라프트 종이와 노끈으로 포장된 꽃은 다양한 종류로 여러 색이 섞여 있었다. 제 것인가 싶어 흘긋댔는데 기원은 그걸 쥐고 계속 걷기만 했다.

그러다 점점 기원의 보폭이 줄어들었다. 낮은 울타리 너머 잔디밭 앞에서 걸음을 멈춘 기원이 뒤돌아 나언을 바라봤다.

“다 왔어요.”

“여기는…. 교회네요?”

뾰족한 지붕 위의 십자가가 아니라면 교회라고 생각 들지 않을 정도로 작은 건물이었다. 왜 갑자기 교회에 온 걸까. 나언이 기원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나언이 알기로 기원은 종교가 없었고, 오늘은 일요일도 아닌데 말이다. 동그란 눈에 호기심과 의아함이 깃드는 것을 본 기원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결혼하기로 했잖아요.”

“……예?”

“잠깐 시간 괜찮죠?”

나언의 하얀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확 번졌다.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나언이 입술만 달싹대고 있자, 기원은 맞잡은 손을 깍지로 바꿔 끼며 나언에게 물었다.

“왜. 싫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 그러니까…… 지금 한다는 말이에요? 여기서요?”

나언의 물음에 기원은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만 한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언의 물음에 기원이 난색을 표했다.

“성대하진 않지만 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 예뻐요. 엄청 예쁜 곳인데 제 말은 너무 갑작스럽다는 뜻이었어요.”

그제야 눈썹을 끌어 올리더니 안심한 듯 살짝 웃는다. 인제 보니 기원의 서늘한 눈에 살짝 긴장한 기색이 비치기도 했다. 입매가 굳어 있으면서도 눈은 따뜻하게 일렁이는 저런 표정은 나언에게도 낯선 모습이었다.

“주례를 아는 신부님께 부탁드렸어요.”

그래서 교회를 향한 것이었나. 나언은 제 손을 꾹 붙잡은 채 천천히 설명을 시작하는 기원을 올려다봤다.

“어릴 적에 엄마가 자주 찾던 교회에 계시던 분입니다. 수소문해 보니 줄곧 다른 지역에 계시다가 몇 년 전에 이 교회로 오셨대요.”

“아…….”

“하객은 없어도 주례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누구라도 한 명은 증인이 되어 줘야 하니까.”

말하고도 쑥스러운지 멋쩍은 미소를 보인 기원이 나언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나언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교회 안으로 들어간 기원은 신부님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 한 명과 함께 걸어 나왔다.

쿵쿵쿵. 그리고 그 순간, 나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프러포즈 이후 시간이 꽤나 흘러 나언 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진짜, 결혼식을 올릴 건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기원은 아침에 일정이 있어 멋들어진 정장 차림이었고, 신부님 또한 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헐렁한 청바지에 초록색의 잔 줄무늬가 들어간 긴팔 티셔츠를 입은 자신만 바보 같은 행색이었다.

“아…….”

예정에도 없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몸은 끈끈한 땀에 젖어 있었고 머리는 헝클어졌다. 나언은 얼른 손으로 머리를 털었지만 단정해지기는커녕 푸스스 부풀기만 했다. 어느새 제 곁으로 다가온 신부님이 따뜻한 인사를 건넸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요. 저는 마리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백나언이라고 합니다.』

나언은 귀가 빨갛게 익은 채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언이 허둥대는 모습을 보며 활짝 웃은 마리가 기원에게 말했다.

『인상이 아주 선하네요.』

『네, 착해요. 바보 같을 정도로.』

『바보라니, 파트너에게 그렇게 말하면 쓰나요.』

“그 정도는 알아듣습니다.”

둘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나언이 작게 읊조리자 기원이 나언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기원과 나언을 조용히 지켜보던 마리 역시 따뜻함에 젖은 미소를 띠었다.

마리는 처음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온 기원을 마주한 순간 반가움에 앞서 뭉클함을 느꼈다. 그 당시, 교회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힘겹게 발걸음 했던 사람이 많았다. 어릴 적 어린 아들과 함께 교회를 찾았던 젊은 동양인 여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영어에 능숙하지 않은 여자는 별다른 말 없이 교회를 찾아와 조용히 예배를 드리고 떠났다. 그 여성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던 건 마리였다. 외적으로 단단해 보였던 여자가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던 순간, 그녀가 애써 감춰 온 외로움에 짓눌린 아픔을 읽은 탓이었다.

영어에 서툰 여자는 속 이야기를 시원하게 터놓지 못했지만 그 이후 종종 마리를 찾아 작은 마음을 건넸다. 직접 구운 마들렌이나 코바늘로 짠 작은 가방, 캔버스에 그린 손 그림을 건네며 무엇이 그리 고마운지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었다. 마리는 기원과 여자를 집에도 종종 초대했을 만큼 가깝게 지냈었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 그녀는 별다른 언질 없이 이사를 떠났고,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었다.

그리고 무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예배에는 전혀 흥미라곤 없는 얼굴이면서도 엄마의 곁에서 얌전하게 앉아 있던 어린아이가, 비서를 통해 자신에게 연락을 넣었다. 미국에서 만난 어른 중 제일 믿음직한 사람이라는 전언과 함께였다. 쏟아지는 비처럼 짧았던 인연이 돌고 돌아 바다 물결처럼 밀려온 소중한 순간이었다.

『네 이름이 카일로였지?』

『아, 신부님. 오늘은 ‘최기원’이라고 불러 주세요. 파트너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라서요.』

『정원으로 들어갈까요?』

마리의 부드러운 안내에 따라 기원과 나언은 교회 앞의 작은 정원을 향해 걸었다. 키가 큰 보랏빛 꽃나무 아래에는 신부님이,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에는 기원과 나언이 섰다. 기원은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나언에게 건네고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나언의 어깨 위에 재킷을 둘러 준 기원이 나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준 뒤 그의 뺨을 툭 건드리며 웃었다. 나언 역시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웃음을 삼켰다. 기원의 재킷을 걸치고 화사한 꽃을 들자 추레한 제 행색도 어느 정도 융화가 된 것 같았다.

『두 사람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두 사람을 조용히 지켜보던 마리는 온화한 미소와 함께 조용히 운을 뗐다. 들뜬 기색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나언과 기원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황금빛 햇살이 교회의 작은 정원을 따스하게 내리쬈다. 바다 내음이 묻은 시원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에 흩날리자 기원의 넥타이와 나언이 든 꽃다발이 사이좋게 흔들렸다. 두 사람이 조용한 언약을 맺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마워요.”

그리고 식의 끝. 기원은 나언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온전하지 않은 애정 속에서 수없이 다쳤던 나언이었다. 그에게 앞으로의 평생을 바라는 건 너무나 이기적인 것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에 기원은 그토록 바라 왔던 이 순간이 역설적이게도 너무나 무겁고 두려웠다.

그럼에도 겨우 마음을 열고 곁을 내어 준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기원은 고맙다는 네 음절의 말을 뱉으면서도 목에서 무언가 걸리는 듯, 먹먹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나언은 묘한 표정을 한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여전히 저 커다란 눈으로 무슨 생각을 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언의 반짝이는 눈은 이제 텅 비어 있지도, 고통에 까무룩 가라앉아 있지도 않았다.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기원을 바라보던 나언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고개를 돌린 나언은 교회의 정원 뒤로 펼쳐진 황금빛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년에도 여기 오고 싶어요.”

살짝 웃는 옆얼굴이 빛을 받아 따뜻하게 물들었다. 역시나 영리한 놈이었다. 담담히 미래를 그리면서 동시에 바라는 것을 이야기한 나언의 대답은 기원이 예상한 그 어떤 말보다 황홀하고 소중했다.

진한 검정의 머리칼과 눈동자에 노을이 스칠 때마다 보석처럼 빛났다. 기원은 나언의 턱을 들어 올려 가볍게 입을 맞췄다.

기원과 나언은 바닷가로 걸어 나갔다. 푹푹 모래에 빠지는 걸음을 위태롭게 옮긴 나언은 신발을 벗고 바다에 발을 담갔다. 나언의 발자국을 따라 걷던 기원이 빙글 뒤돌아, 가까운 바위에 기대어 앉아 있는 마리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사진 한 장 부탁해요.』

마리는 필름 카메라를 들었다. 웃으라는 마리의 말에 나언은 기원의 곁에 나란히 선 채로 입꼬리를 힘껏 끌어 올렸다.

『나언, 일찍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해요. 혹시 로봇인가요?』

“네?”

익살스러운 마리의 농담을 뒤늦게 이해한 나언이 무방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 등 뒤로 바닷물이 철썩이며 부서지고 석양으로 물든 바다 위로는 작은 배가 떴다. 웃는 나언을 바라보던 기원이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봤다. 심장이 멎을 만큼 황홀한 풍경이었다.

해가 온전히 내리고, 어둑한 밤이 될 무렵에야 호텔로 돌아온 나언은 어쩐지 귀가 먹먹한 기분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꽃다발과 마리의 선물이 아니라면 오늘 겪은 일이 모두 꿈이라고 여겨질 만큼, 비현실적이고 붕 뜬 기분이었다.

기원이 준비한 입욕제 향은 굉장히 포근했다. 욕조에 오래 잠겨 있어서 그런가, 씻고 나왔는데도 코언저리에서 풍겨 오는 말간 향에 나언은 괜히 입가가 헤실거렸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은 나언이 손목에 코를 파묻고 숨을 들이켰다. 젖은 머리를 말리고 온 기원이 가운을 여미며 나언의 곁에 앉았다. 기원에게도 같은 향이 물씬 풍겨 괜히 설렜다.

“내일은 LA로 갈 거예요. 괜찮은 전시가 있어서 같이 보면 좋겠어요.”

“아, 저도 오늘 전시 하나 보고 왔어요.”

옅은 주황빛 조명 아래, 두런두런 크지 않은 목소리가 조용한 객실을 울렸다. 나언은 문득 결혼을 하기 전과 후가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기원과 자신은 미국 여행 중이며, 오늘 오전 그와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던 호텔로 돌아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 아까… 한 거. 실은 별로 실감이 안 나요.”

“그래요?”

‘결혼식’이라는 단어를 올리기는 부끄러운지 대충 말을 뭉그러뜨린 나언이 괜히 이불자락을 만지작댔다. 한편 나언의 말이 의외라는 듯 눈을 조금 크게 뜬 기원은 비스듬한 각도로 나언을 바라봤다. 나언은 제가 한 말이 나쁜 뜻이 아니란 듯 손바닥이 보이게 흔들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냥 딱히 달라진 게 없어서요. 계속 같이 지내 왔어서 그런가.”

“아아….”

나언의 말을 이해한다는 듯 대답한 기원이 나언의 두 손을 잡아 주며 말했다.

“그래도 동거랑 결혼은 달라요.”

기원의 커다란 손이 스르륵 움직였다. 나언의 두 손이 마주 보도록 한 뒤 마른 두 손목을 한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제 가운의 허리끈을 풀어 나언의 손목 위를 둘렀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언은 멍한 표정으로 기원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렇게 법적으로 꽉, 묶이는 거지.”

여러 번 둘둘 감긴 가운의 허리끈을 매듭지은 기원이 끈을 살살 흔들며 웃었다. 아니, 입매만 끌어 올린 기원의 웃음은 배 안이 오싹해질 정도로 무섭게 느껴졌다.

“뭐, 뭐예요. 풀어 줘요.”

“풀고 싶어도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스르르 간지럽게 나언의 팔뚝을 타고 올라간 손길이 나언의 가운을 벌려 어깨를 드러나게 했다. 기원은 나언의 하얀 목덜미를 이를 세워 물었다. 뾰족한 송곳니에 여린 살을 물린 나언이 ‘아!’ 하며 한쪽 눈을 찌푸리자 기원이 입술로 그 부위를 달래듯 꾹 문질렀다. 통증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스치듯 닿는 매끄러운 입술 때문에 목이 간지러워졌다.

나언이 손이 묶인 채로 몸을 움찔대자 기원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몸을 물린 기원이 나언의 묶인 손목 사이의 매듭을 쥐고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으로 한 번 흔들었다.

“내가 이렇게 해도, 이렇게 해도 끌려오게 되는 거야.”

그럴 때마다 나언의 몸이 이리 휘청, 저리 휘청 흔들렸다. 장난을 치듯 흔들던 손을 확 잡아당기자 나언이 기원의 허벅지 위로 풀썩 엎어졌다. 가슴 앞으로 모인 팔뚝으로 허벅지를 밀며 자신을 원망스레 올려다보는 나언을 보며 기원이 예쁜 미소를 지었다.

“너는 이제 좆 된 거지.”

기원이 나언의 뺨을 감싸 끌어 올렸고, 고개를 비스듬히 내려 입을 맞추었다. 장난을 치는 듯한 말투와는 달리 기원의 눈은 욕구에 젖어 붉게 떴고, 언제나 그렇듯 입술의 온도가 높았다. 입술이 벌어진 틈으로 공격적으로 밀고 들어온 혀가 나언의 입 안 곳곳을 범하듯이 핥고 지나갔다. 숨을 쉬기 위해 기원의 몸을 밀어 내고 싶어도 묶인 손목 때문에 몸을 마음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기원의 거친 숨소리와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가슴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하아…….”

순식간에 나언을 눕힌 기원이 벌어진 가운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뜨거운 물에 녹아 말랑해진 유두 끝에 뜨거운 혀가 닿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바짝 서며 단단해졌다. 눈을 질끈 감은 나언이 고개를 퍼뜩 저으며 앓는 소리를 참았다. 묶인 손의 손가락이 둥그렇게 말리고, 괜히 발이 시트 위를 뒤챘다.

“나 봐요.”

꾹 감고 있던 눈을 겨우 뜬 나언이 고개를 천천히 내리자 기원 역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늘 몸을 섞을 때 이성의 한 부분을 잃어버리는 그였지만, 오늘은 어딘지 모르게 미친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언은 그게 무서우면서도 어쩐지 배 안에 뜨거운 것이 불쑥 당겨 오는 기분이었다.

몸을 일으킨 기원은 제 가운을 벗어 내리곤 누워 있는 나언의 얼굴을 무릎으로 가두듯이 자리 잡았다. 속옷을 살짝 끌어 내려 이미 한계까지 발기한 것을 꺼낸 그는 젖은 귀두를 나언의 눈가와 뺨에 치덕치덕 문질렀다. 어쩐지 수치스러움이 몰려와 눈을 감자, 기원이 작게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뭉툭하고 뜨거운 선단이 쑥 들어왔다. 놀란 나언이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나 보라고.”

명령처럼 느껴지는 목소리에 나언이 겨우 눈을 들어 기원을 올려다봤다. 동시에 그의 성기가 입 안으로 깊이 들어왔다. 한 손으로는 침대 헤드를, 한 손으로는 나언의 머리를 붙잡은 기원이 무릎을 대고 앉은 자세 그대로 깊은 허리 짓을 시작했다.

“쿠, 흐윽. 읍.”

터질 듯 발기한 성기가 목구멍 입구와 혀, 치아까지 누르며 앞뒤로 움직였다. 구역질이 나오려 하면 허리를 물리고 잠시 숨을 쉬려 하면 다시 목구멍을 찌르는 탓에 나언은 몸을 움찔대며 헐떡였다.

“우, 으…….”

돌덩이 같은 허벅지를 밀어 내고 싶어 묶인 손으로 밀어 냈지만 역부족이었다. 느린 허리 짓이 조금씩 깊어질수록 나언의 얼굴에 열이 몰려 갔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에 생리적인 눈물이 맺히고, 오래 다물리지 못한 입술 사이로 흘러넘친 침은 턱 아래로 주륵 흘러내렸다. 마지막으로 목구멍 깊이 성기를 쑤셔 넣었던 기원이 허리를 물렸다. 나언은 결국 헐떡이며 젖은기침을 터뜨렸다.

“콜록, 콜록, 푸, 흐…….”

기원은 나언의 침으로 번들대는 성기를 쥐고 빠르게 흔들었다. 묶인 채로 흐트러진 나언이 기침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몸을 섞는 것 같은 성감이 몰려왔다. 허리를 숙인 기원은 눈물이 흐른 뺨과 젖은 입술, 목과 귀에 입술을 한 번씩 물고 핥았다. 이내 뜨거운 입술은 배꼽 옆에서 사타구니의 여린 살로, 그리고 동그랗게 올라붙은 고환으로 천천히 미끄러졌다.

“아, 흐읏, 으흑…….”

기원의 열 오른 붉은 혀가 나언의 전신을 애무하며 내려가자 나언이 묶인 손목을 뒤치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내 습한 입술이 나언의 귀두를 머금은 채 기둥을 빨며 쭉 내려갔고, 나언은 입술을 벌리고 목을 긁는 듯한 신음을 뱉었다.

“아, 아흣…….”

기원은 나언의 허리를 쓸며 혀로 나언의 귀두 끝을 간지럽혔다. 나언이 몸을 비틀 때마다 마른 배에 옅은 복근이 잡혔다.

“그, 으만……. 쌀 것, 같, 하, 읏…….”

나언의 부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뿌리 끝까지 성기를 삼킨 기원이 혀로 나언의 기둥을 둥그렇게 말아 핥아 올렸다. 고개를 젖힌 나언이 도리질을 하며 신음을 더 크게 냈다.

“제, 에발…!”

기원의 얼굴을 감싸 끌어 올리고 싶지만 손이 묶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손등으로 그의 옆머리를 밀었지만, 기원은 결국 나언이 사정에 이를 때까지 머리를 물리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은 나언이 작게 몸을 떨며 참았던 사정액을 쏟아 냈다. 뜨끈하고 비린 액이 기원의 입 안에 번지는 동안 나언은 본의 아니게 기원의 입 속으로 깊은 허리 짓을 했다.

“하, 으…… 하아.”

“쿨럭…. 꼴에 남자라고.”

나언이 입 안 가득 싸지른 것을 삼킨 기원은 터져 나오는 기침을 뱉으며 낮게 웃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나언은 기원의 입 속에서 사정한 것에 한 번, 제 것을 태연하게 삼킨 것에 한 번 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시근덕대기만 했다.

기원은 콘솔에서 젤을 꺼내 손가락을 듬뿍 적셨다. 그것도 모자라 나언의 가슴과 배, 성기 위에도 흥건하게 쏟아부었다. 얼마나 많은 양인지, 나언의 가슴과 배 밑으로 흘러내리는 젤이 시트 위를 축축하게 적시기 시작했다.

기원이 젤이 묻은 손으로 가슴과 배, 성기를 부드럽게 쓸자 전신이 미끈대며 겪어 보지 못한 성감이 치솟았다. 배 안이 간질대는 느낌에 나언이 묶인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우는소리를 냈다. 사정한 것을 잊은 듯 다시 힘을 받은 성기가 기원의 손길을 따라 불뚝 불뚝 꺼덕였다.

“응, 얼른 쑤셔 줄 테니까 보채지 말고.”

젖은 손가락이 나언을 달래듯 아래 구멍의 주름을 부드럽게 문지르고 좁은 구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나언은 소리가 되지 못한 신음을 삼키며 입을 크게 벌렸다. 그저 손가락 하나였다. 하지만 나언은 어쩐지 기원의 성기가 절정에 이른 자신의 안을 짓이기는 것과 비슷한 압박감을 받았다.

전신에 소름이 끼치며 발끝이 잔뜩 오므라졌다. 아마도 진득하게 정성을 들인 기원의 전희 때문이리라. 예민해진 구멍은 손가락이 하나, 하나 늘어 갈 때마다 빠듯하게 몸을 늘리며 기원의 손가락에 들러붙듯 좁혀 왔고, 기원은 손가락을 돌리고 꾹꾹 내리누르며 내벽을 헤집듯이 넓혀 갔다.

“아. 아, 흐읏, 으응, 읏!”

푹푹, 어느덧 손가락 세 개가 나언의 구멍을 드나들었고, 기원의 손가락 사이에 고인 액은 마찰 탓에 하얗게 변해 쿨쩍이는 소리를 냈다. 배려 없이 안을 넓히던 손가락이 쑥 빠져나가고, 젖은 채로 벌어진 구멍 사이를 뭉툭한 귀두가 비집고 들어섰다.

“아…… 씨발.”

짓씹듯 욕을 뱉은 기원이 허리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묶인 손을 덜덜 떨던 나언이 손가락이 드나들 때보다 훨씬 큰 신음을 터뜨렸다.

“아, 아읏, 아아…!”

퍽퍽, 귀두까지 뽑아 낸 성기가 뿌리 끝까지 처박히자 맞닿은 살갗끼리 거친 마찰음이 울렸다. 거의 허리가 반쯤 들릴 정도로 나언을 몰아붙이던 기원은 젤로 흠뻑 젖은 나언의 몸을 손바닥으로 쓸고 문질렀다. 유두가 가슴을 희롱하는 손가락 사이에 걸리자 헐떡이던 나언이 입술을 깨물며 눈가를 찌푸렸다. 터치 하나하나에 반응하고 몸을 떨어 대는 모습에 기원의 아래가 불뚝, 더 크게 치미는 느낌이 들었다.

“자, 잠시, 아, 이상…….”

나언의 애원에도 기원은 있는 힘껏 허리를 쳐올렸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몸을 바르작대던 나언이 도망가듯 발로 시트를 밀어 댔고, 그때마다 기원은 허리를 감싼 손으로 나언을 끌어당기며 허리를 맞붙였다. 퍽, 퍽 소리와 함께 나언의 몸이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읏, 싸, 쌀, 것 같… 흑.”

“벌써?”

물으면서도 기원은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기원은 도와주겠다는 말과 함께 나언의 성기를 쥐었다. 그저 꽉 쥔 것뿐이었다. 이제 손아귀에 힘을 주고 흔들어 주려는데 나언이 전신을 뻣뻣하게 굳히더니 발로 시트를 밀며 허리를 붕 띄웠다.

“아, 으윽…!”

괴로운 듯한 신음과 함께 나언의 성기에서 맑은 액이 왈칵 쏟아졌다. 의외의 사출에 기원 역시 허리 짓을 멈추고 나언을 내려다봤다.

나언의 귀두에서 푹 쏟아진 묽은 액이 나언의 가슴과 배 위를 흥건하게 적셨다. 처음 몸을 섞을 때야 이게 정확히 뭔지 몰랐지만, 가끔 나언은 아래를 지나치게 자극당할 때면 분수처럼 맑은 물을 쏟아 내곤 했다. 나언은 깜짝 놀라 묶인 손으로 귀두 부근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의지와 달리 왈칵 쏟아진 묽은 액은 묶인 두 손 사이로 줄줄 흘러내렸다. 긴 사정 끝, 나언이 털썩 소리와 함께 시트 위로 늘어졌다.

“와….”

기원이 나언의 배 위에 고인 물을 손가락으로 쓸어 부러 뚝뚝 떨어뜨리는 행동을 했다. 나언의 흥분이 극에 달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이럴 때면 필연적으로 나언은 당황 어린 얼굴로 눈물을 쏟았다. 역시나 후들후들 떨던 나언이 놀란 듯 가쁜 울음을 터뜨렸다.

“으, 으흑….”

“왜 울어, 네가 너무 걸레 같아서 그래?”

말을 가려 할 정신이 아닌 건 핀트가 나가 버린 기원도 마찬가지였다. 직설적인 질문에 나언의 눈동자가 더욱 부풀어 오르자 기원이 나언의 뺨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속삭였다.

“걸레는 좋은 건데. 존나 야한 거잖아.”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위로를 건넨 기원은 성기를 빼낸 후 하얀 몸뚱이를 가볍게 뒤집었다. 엎드린 채 색색대는 나언의 허리를 당겨 들자 무릎으로만 버티고 서 있던 작은 얼굴이 시트에 푹 파묻혔다. 묶인 손목 탓에 상체를 버틸 수 없었고, 치미는 성감에 허덕이느라 몸을 추스를 기운도 없었기 때문이다.

엉덩이만 높게 든 자세 탓에 구멍이 더욱 적나라하게 보였다. 가만히 그걸 응시하던 기원이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후려쳤다. 눈을 감고 시트에 뺨을 댄 채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나언이 눈을 크게 뜨며 몸을 떨었다.

“흐, 으! 왜 때, 때려요…!”

“미안, 미안. 예뻐서.”

성의 없는 사과와 함께 기원은 한 번 더 하얀 볼기를 내려쳤다. 마른 몸에 유일하게 조금 오른 엉덩이 살이 흔들리며 짝, 하는 소리가 방을 가득 울렸다.

“하, 윽!”

같은 곳을 때리자 금방 붉게 터 오는 여린 살을 보며 기원이 아랫입술을 핥았다. 나언은 이를 악물었다. 손으로 기원의 허벅지라도 밀어 내고 싶은데, 손이 묶인 탓에 허리를 흔드는 게 반항의 전부였다. 그마저도 기원의 두툼한 손에 잡혀 옴짝달싹 못 하게 됐다.

엉덩이를 빼려 하는 걸 보니 한 대 더 때렸다간 진심으로 화를 낼 것 같아 기원은 그쯤하고 참기로 했다. 발딱 선 성기 끝을 구멍에 맞추고 밀어 넣었다. 기원이 갑자기 엉덩이를 때린 탓에 씩씩대던 나언도 밀려드는 이물감에 무력하게 입을 벌렸다. 방금까지 오고 간 길인데도 자세가 바뀐 탓에 나언의 내벽이 다시 바짝 조여 왔다. 기원의 목에서 절로 신음이 흘렀다.

“힘, 좀 빼.”

“아, 읏… 흐윽.”

더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좁고 깊은 지점까지 귀두가 푹푹 처박혔다. 이제 나언은 신음이 아닌 우는 소리를 내며 시트에 이마를 처박고 흐느꼈다. 마른 목과 반듯한 어깨, 그림자가 진 어깨와 움푹 팬 등허리가 바르르 경련했고, 기원의 손이 나언을 안심시키듯 느릿하게 허벅지를 스쳤다.

“아, 아….”

부드러운 손길에 방심한 탓일까, 후드득 소리와 함께 나언의 성기에서 두 번째 사정액이 터져 흘렀다. 아니, 아까 싸지른 묽은 액과 지금의 탁한 정액이 섞인 애매한 줄기가 주르륵 흘렀다. 이제 더는 가리고 막을 처지가 아니었다. 겨우 정신을 붙들고 있는 나언은 나오는 대로 시트 위에 쪼르르 싸 버리고, 신음이 흐르는 대로 흐느꼈다.

잠시 뒤, 나언의 몸을 뒤에서 꽉 끌어안는 것과 동시에 배 안에 묵직한 기운이 번졌다. 울컥, 울컥 양이 많은 액이 쏟아질 때마다 내벽과 맞닿은 기원의 성기 역시 움찔대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후, 으…….”

“하, 흐읏…….”

기원이 성기를 빼자 겨우 시트 위에서 지탱하고 있던 무릎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붉은 엉덩이 살 사이로 다 머금지 못한 흰 액이 주르륵 흘러내려 시트 아래로 고였다. 반쯤 눈을 감은 나언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에 원망을 담았다.

“다음에는, 제가, 흐, 으, 묶을 거예요.”

“얼마든지.”

“하으, 윽…… 이, 거 이제 풀어 줘요.”

“미안한데, 다음은 멀었어요. 이제 시작했잖아.”

나언의 눈에 경악이 깃든다. 기원은 헐떡이는 나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온갖 체액에 젖어 축축해진 두 몸이 재차 엉겼다. 이제 좆 된 거라던 기원의 목소리가 혼곤한 머릿속에서 둥실 떠올랐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나언이 작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맞닿아 있는 뜨거운 입술이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시작했다던 기원의 말대로, 오늘은 겨우 미국에서의 나흘째 밤이었다. 앞으로 보고 느낄 시간이 많다는 것을 깨달은 나언이 코를 훌쩍이며 힘겹게 팔을 끌어 올렸다. 묶인 팔 사이로 기원의 머리를 넣어 끌어안자 기원이 나언과 코를 맞추며 기꺼이 안겨 줬다.

“내일 기념품 쇼핑도 해야 하고 전시도 봐야 하니까, 제발, 천천히요.”

“그래, 알겠어.”

필사적인 애교에 기원이 입꼬리를 올리며 나언의 볼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나언 역시 희미한 웃음을 터뜨렸다. 뺨에 닿는 기원의 입술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

채광이 좋은 너른 집에서 바다가 거실을 재빠르게 가로질렀다. 낚싯대를 든 나언이 꺄르르 웃으며 바다를 약 올리다, 바닥에 놓인 퍼즐을 밟고 미끄러졌다.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나언이 러그 위를 뒹굴었고 홈 바에서 차를 우리던 기원이 큰 소리에 깜짝 놀라 거실로 뛰어나왔다.

바닥에 떨어진 낚싯대를 향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바다가 돌진했다. 앞발을 세워 깃털을 낚아채는 바다 곁에서 나언이 누운 채로 무릎을 감싸 안고 있었다. 어이가 없는지 허탈하게 웃던 나언은 고개를 거꾸로 한 채로 기원과 눈이 마주쳤다. 거꾸로 보이는 기원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나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쳤어요?”

“아, 아니요.”

기원은 아니라고 대답하는 나언의 바지를 걷어 올려 큰 상처가 난 게 아니란 걸 확인하고서야 눈에서 힘을 뺐다.

“사고를 치지 아주.”

기원이 고개를 저으며 홈 바로 돌아갔다. 새초롬하게 웃은 나언이 누운 채로 떨어진 낚싯대를 주워 휙휙 돌리자, 얌전하던 파와 도까지 신이 나서 나언의 곁을 뛰어다녔다.

“간식 먹자.”

우려낸 차와 쿠키 세트를 들고 온 기원이 소파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 뒀다. 고소한 냄새에 몸을 일으킨 나언이 편안한 자세로 소파 쿠션을 끌어안았다. 나언의 곁에 앉은 기원은 쿠키를 반으로 쪼개 나언의 입에 넣어 줬다.

리모컨을 들어 영화를 고르는 나언의 뒤쪽엔 얼마 전 주문 제작한 커다란 액자가 걸렸다. 마리가 찍어 준 사진을 확대해서 인화한 결과물이, 은빛 프레임 안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기원의 먹색 재킷을 걸치고 꽃다발을 든 채 고개를 젖히고 웃는 나언과 그런 나언을 바라보며 옅게 웃는 기원의 순간은 새하얗던 거실 벽에 따스한 흔적을 남겼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딱히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고 그랬었나.

아직도 나언은 눈치채지 못했을까. 웃음이 헤퍼졌고 잠결에 뱉는 숨이 편안해지며 점차 약을 찾는 날의 간격이 늘어났다. 힘에 부칠 때면 저도 모르게 기대 오고, 속상하거나 억울할 때면 뾰로통한 얼굴로 감정을 솔직하게 터뜨리곤 했다.

“이거 볼래요? 초반에는 지루한데 뒤에는 재밌다고 하더라고요.”

“좋아요.”

어떻게 실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루하루 나아지는 나언을 보며 기원은 기꺼이 내일과 모레, 그다음 날들의 행복을 습관처럼 그렸다. 물결처럼 흘러가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리오퍼 (Reoffer)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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