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흔적
1월에 내리던 눈은 2월이 되자 더욱 자주 내렸다. 기원은 바쁜 와중에도 나언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주말에는 주로 근교의 별장으로 캠핑을 떠났고, 연차를 낸 날은 짧게 제주도에 다녀오기도 했다. 나언은 눈이 쌓인 산과 섬이 그토록 예쁘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따뜻한 불 앞에서 먹는 콘 수프는 정말 맛있었고, 몸을 섞고 누운 날 나란히 깊은 잠에 빠지는 느낌은 나른하고 편안했다.
기원은 나언이 눈을 밟으며 내는 뽀드득 소리에 입꼬리를 끌어 올렸고 나언이 진땀 흘리며 만든 걸쭉한 감바스를 억지로 먹어 줬다. 나언은 자주 아팠지만 행복했으며 기원은 그런 나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언은 결국 한 번 병원에 실려 갔다. 비와 눈이 섞여 내렸던 우중충한 날이었다. 함께 저녁을 먹지 않으면 나언이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기원은, 스케줄을 조정하거나 혹은 회의 중간에 자리를 비워서라도 웬만하면 함께 저녁 식사를 하려 했다. 그날 역시 급하게 잡힌 회의를 한 시간 미루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교통 체증으로 도로가 꽉 막혀 도로 한복판에서 가도 오도 못하게 되었다.
“사고가 났나 봐요. 차가 막히네. 미안한데 저녁 먼저 먹어요. 도착하면 너무 늦겠어요.”
[네, 알겠어요.]
고분고분한 대답에 어쩐지 신경이 예민해지는 건 제 집착 탓이라 여기며, 기원은 다정한 목소리로 연인을 협박했다.
“나언 씨한테 사람 붙이고 싶지 않으니까 조금이라도 먹어야 해요.”
[하하, 알겠다니까요.]
희미한 헛웃음과 함께 수화기 너머로 질린다는 듯한 어투가 역력한 대답이 들려왔다. 기원은 자기 전에 문자를 남기라는 부탁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차를 돌려 다시 회사에 도착할 무렵 휴대 전화에는 밥을 차린 사진과 이십 분 뒤 반 넘게 비운 사진이 두 장 와 있었다. 기원은 안심하며 회의에 들어갔고 한 시간 뒤 나언은 기원에게 전화를 두 통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저녁을 겨우 먹은 나언은 약을 먹은 후 고요한 집을 돌아다녔다. 소파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으로 업무를 하며 기원을 기다리려 했는데, 평소와 달리 속이 쓰려 집중이 되지 않은 탓이었다. 나언은 마른 배를 문지르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기원이 없는 집은 유독 넓게 느껴졌고 너무나 고요했다. 고양이들이 돌아다니며 내는 작은 소음이 반가울 만큼 적적함이 크게 다가온 나언은 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언이의 사진이 올려져 있는 선반 옆, 작은 상자를 연 나언은 소파에 걸터앉아 아이의 물건을 구경했다. 눈으로 하나씩 담아 보다, 옷이나 양말처럼 유독 애틋한 물건은 손으로 들어 조심스럽게 만졌다. 행여 아이의 향이 날아갈까, 뚜껑도 아껴 열었던 상자였다. 이젠 낡은 옷에 코를 묻어도 냄새가 희미해져 버렸고 머릿속의 기억만 선명했다. 아이와 나누었던 대화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열두 살에 멈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보고 싶었다, 너무나도.
“아…….”
쿡 찌르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나언은 상자에 물건을 담고 제자리에 두었다. 아무래도 몸 상태가 심상찮은 것 같아 일찍 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불자락을 쥔 손바닥 아래와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불을 끌어안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끙끙대던 나언이 웅크렸던 몸을 겨우 일으켰다. 토를 해도 나아질 기미가 없는 위가 어느 순간 뒤틀리는 듯한 통증을 자아냈다.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테이블 위의 휴대 전화를 들었다. 그러나 기원은 두 번의 전화를 모두 받지 않았다.
한 번 거세진 통증은 기름에 불붙은 것처럼 속을 태워 갔다. 기어가듯 현관을 향해 가던 나언은 복도 벽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나언은 결국 119에 전화를 걸었다. 구급차는 빨리 도착했고 나언은 가까운 응급실로 실려 갔다.
중간중간 끊어질 듯 의식이 희미해질 때마다 주위 구급대원들이 나언을 깨웠다. 나언은 눈을 감고 대답하면서도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기원에게 아무런 연락을 못 했다. 혼미하게 앓으면서도 손에 쥐고 있는 휴대 전화를 놓지 않았다.
나언은 진정제와 진통제가 든 수액이 절반쯤 들어가고 나서야 겨우 숨을 골랐다. 너무나 낯선 통증이었다. 이런 고통은 5년 전 스트레스 때문에 위 통증이 극심해졌을 때나 느꼈었는데……. 나언이 눈을 떠 휴대 전화를 더듬대려는 순간 커튼을 걷은 익숙한 인영이 다가왔다.
“어…….”
무감하고 차가운 얼굴로 침대로 다가서던 기원은 나언이 눈을 뜬 걸 발견한 순간 눈썹을 옅게 움찔했다. 차가운 공기를 묻히고 온 기원은 나언의 이마와 뺨을 한 번 쓸고는 곁의 간이 의자에 앉았다.
“연락, 못 했는데…….”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자 기원이 억지로 입매를 끌어 올리며 나언의 휴대 전화를 들어 흔들었다. 나언이 혼미한 상태로 잠든 사이, 끊이지 않는 전화를 간호사가 대신 받아 기원에게 상황 설명을 한 것이다. 기원은 웃고 있었지만 어쩐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얼굴이었다. 나언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연락 못 받은 건 나지.”
나언의 마른 손을 쥔 기원이 엄지로 손등을 약하게 문질렀다. 크지도 않은 목소리에 많은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어투였으나 목소리에 담긴 착잡한 심정은 그대로 와닿았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나언은 기원이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회의를 끝내고 늦게 집에 온 기원은 아마 텅 빈 집을 보고 걸음을 멈췄을 것이다. 흐트러진 이불과 벗겨진 슬리퍼를 살피며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테고. 연결되지 않는 전화기를 붙잡은 채 집 안 곳곳을 서성였을 것이다. 그러다 자신이 병원이라는 간호사의 설명을 듣고 여기까지 찾아왔겠지. 그러니 마찬가지로 많이 놀랐을 것이다.
“……괜찮아요.”
자그맣게 대답한 나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기원은 나언이 수액을 다 맞을 때까지 곁을 지켰다. 기사를 불러 차를 운전하게 하고, 나언과 함께 뒷좌석에 올라타 나언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나언은 반항 한 번 없이 그대로 어깨에 옆머리를 묻었다. 지친 듯 뱉는 유약한 숨소리가 고요한 차 안을 채워 갔다. 기원은 시트 위에 늘어진 나언의 오른손을 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가락 끝, 손톱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엄지로 차가운 손등 위를 쓸며 나언에게 물었다.
“……백나언. 스트레스받는 거 있어?”
“아니요.”
“아니면. 나랑 지내는 거 힘들어?”
잠시 조용히 숨을 내쉬던 나언이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아픈 거 아니에요.”
“그러면-,”
“저 잘래요.”
고단한 목소리 끝, 어깨에 기댄 머리에 조금 더 무게가 실려 왔다. 그럼에도 아주 약한 정도였지만, 그 몸짓은 어쩐지 기원에게로 더 깊숙이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기원은 자겠다는 나언에게 더는 곤란한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나언은 하루 병가를 쓰고 정상적으로 출근했다. 기원은 한 달 정도 쉬라는 말을 했지만 나언은 끝내 거절했다. 기원이 없는 집에서 온종일 그를 기다리는 건 상상만 해도 버거웠다. 솔직하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다는 말 한마디만으로 기원은 나언을 강제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함께 저녁을 먹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기원이 틀어 놓은 영화를 보며 나언이 꾸벅꾸벅 졸자 기원은 나언의 머리를 제 허벅지 위에 뉘었다. 처음엔 어색해 몸에 힘을 잔뜩 주고 버티던 나언도 끝내 잠을 이기지 못해 몸을 늘어뜨리고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기원과 나언은 영화 취향이 잘 맞지 않았다. 화려한 액션 영화나 흥행 영화를 좋아하는 나언과 달리 기원은 언제 개봉했는지도 모르겠을 영화만 틀었다. 주인공이 심오한 대화를 나누는 걸 보고 있으면 눈에 초점이 풀리며 몽롱해진다. 기원에겐 미안하지만, 나언은 기원이 고르는 영화가 그래서 좋았다. 조용한 영화를 보며 자연스럽게 조는 느낌이 나른하고 편안했다.
기원은 나언의 얇은 검정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며 영화에 집중했다. 소파 테이블 위에는 핑거 푸드와 와인, 나언 몫의 차가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한 입만 먹겠다며 기원의 와인을 홀짝이던 나언은 결국 제 허벅지 위에서 고른 숨을 뱉으며 잠들었다. TV 화면에 함박눈이 쌓인 장면이 나오자, 환한 빛이 나언의 얼굴로 쏟아졌다. 기원은 손을 차양처럼 만들어 나언의 눈꺼풀 위를 가려 주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 하고 울자 기원이 낮게 쉿, 했다. 시선을 느리게 내린 기원은 제 손바닥으로 전부 가려질 것 같은 작은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긴 속눈썹의 곡선과 작고 높은 코,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이 아름다운 만큼 어쩐지 가슴 한편이 먹먹해졌다.
낫지 않는 나언의 병이 왜인지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 그럼에도 곁을 비워 주지 못하겠기에, ‘그래서 아픈 거 아니에요.’라고 말했을 때 같잖게도 안도감이 먼저 차올라서 명치 아래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
기원의 허벅지를 베고 자던 나언은 새벽녘 늦게 눈을 떴다. 이미 다른 영화를 이어 보던 기원은 나언에게 들어가서 자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며 잠을 깨려 애쓰던 나언은 오늘도 따로 자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간단한 세안 후 스킨로션을 바르던 나언의 시선이 화장대 구석으로 향했다. 정확하게는 뜯지 않은 새 눈썹 칼로. 햇수로 6년 전 이맘때. 저걸로 손목이라도 그어 내려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던 시기가 있었다. 나언의 눈이 탁하게 가라앉았다. 누구를 원망하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 손목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던 순간이 떠오르며 물에 잠긴 것처럼 가슴이 꽉 막혀 왔다. 딱 이럴 때 상처를 내면, 비어져 나오는 붉은 피를 보며 속이 편안해지곤 했었다.
나언은 퍼뜩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눈썹 칼을 들어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다. 작게 헐떡인 나언이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뺨을 쓸어내리는 손이 작게 떨렸다.
“……정신 차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던 기원의 말이 떠올랐다. 나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살고 싶었을 지원과 주언을 떠올린다면, 그리고 자신을 살려 낸 후에도 몇 번이고 손목을 그었던 기원을 떠올린다면 다시는 하지 않아야 할 파렴치한 생각이었다. 나언은 제가 과거의 병을 다시 겪게 되었다는 걸 기원이 모르길 바랐다.
다음 날. 점심을 거르려던 나언은 요즘 들어 유독 점심 식사를 강권하는 최지은 주임 때문에 구내식당으로 끌려갔다. 오므라이스에서 소스를 빼 달라 부탁한 나언은 계란과 밥을 조금씩 떠서 꼭꼭 씹었다. 남들이 두세 입을 먹는 동안 나언은 수저질 한번을 제대로 못 했다.
죽이 될 정도로 씹어 넘기던 나언은 익숙한 직함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함께 밥을 먹던 여직원 한 명이 휴대 전화를 보며 ‘대박’이라 외친 뒤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장님 결혼한대요.”
“어어, 어제부터 찌라시 돌더라.”
그 사장님이 그 사장님은 아니겠지. 나언이 된장국을 호록 먹는 순간, 함께 식사를 하던 직원 하나가 나언이 궁금했던 것을 콕 집어 물었다.
“최기원이요?”
최기원이 친구냐…. 속으로 어린 직원을 향한 작은 비난을 남기면서도 귀는 이어진 대화를 향해 쫑긋 솟았다.
“네, 이미 결혼을 전제로 동거 중이래요.”
“동거?”
나언의 수저질이 움찔 떨렸다. 신기하게도 똑같은 타이밍에 최지은 주임도 기침을 쿨럭였다. 나언은 미지근한 물을 들이켰다. 역시 기원과 자신이 너무 무신경했던 것 같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최근 들어 여행도 자주 갔고 사람들이 많은 마트에 장도 여러 번 보러 다녔으니. 그래도 결혼을 전제로 동거라니. 저런 식으로 헛소문이 부풀려지는구나 싶었던 나언은 왠지 귀가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뒤이은 대화에 나언의 얼굴에 서렸던 표정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네. 여자가 미모의 재원이래요. 유명 로펌 소속 변호사.”
“나도 친구가 공유해 줬는데 벌써 신혼집 매매도 진행 중이래. 거기 있잖아, 재벌들 사는 펜트하우스.”
“오 역시. 근데 그냥 변호사면 좀 딸리는 거 아니에요?”
“그냥 변호사겠냐, 어디 재벌 집 딸내미겠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단어들이 귀에 쑥쑥 박혀 들었다. 너무나 구체적인 이야기에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에이 헛소문 아닐까요, 찌라시가 맞는 경우가 있나요.”
최지은 주임이 웃으며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왜 나냐며, 최기원이 매매한 집의 가격이나 어디선가 떠돌았다던 여자의 신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이어 갔다. 나언은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서도 머릿속까지 깊게 들리지 않는 기분이었다. 귀에 두꺼운 장막을 덧댄 듯, 한 걸음 멀리 들리는 목소리 속에서 유독 빠르게 뛰는 제 심장 소리가 불안하게 들렸다.
식사를 끝낸 사람들이 일어나자 나언도 느리게 일어났다. 결국 기원이 거론된 뒤로 한 입도 먹지 못한 식판 위에는 손대다 만 음식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나언의 식판을 바라본 손 차장이 눈썹을 끌어 내리며 물었다.
“아이고 나언 씨 다 남기는 거야?”
“……네.”
“아직도 몸 상태가 별론가 봐. 속이 그렇게 약해서 어째.”
손 차장의 걱정 어린 말에도 나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만 꾸벅 숙였다. 자리로 돌아와선 어떤 정신으로 일을 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퇴근 시간, 기원에게 문자를 넣자 기원은 일이 길어질 것 같으니 먼저 저녁을 먹으라는 전화를 남겼다. 평소 같으면 곧장 알겠다는 대답을 남겼을 나언은 몇 초간 전화를 끊지 않고 망설이다 결국 알겠다고 대답했다.
결국 기원은 처리하지 못한 일은 내일 오전으로 미루기로 했다. 주차장을 향하며 나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출발하니 같이 저녁을 먹자는 말에, 나언은 많이 바쁘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기원은 전화 너머로 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기민하게 눈치챘다. 낮에 최지은 주임이 남긴 문자에서도 나언이 점심을 거의 먹지 못했다고 했다. 지금 나언의 상태가 컨디션 난조 탓이든, 예민한 저의 기분 탓이든, 오늘 저녁에는 그를 혼자 두지 않아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조금 급한 운전으로 도착한 뒤 곧장 집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침대든 소파든 멍하게 앉아 있을 것 같던 예상과 달리, 나언은 현관 주변에서 바다를 안고 서성이고 있었다. 현관으로 들어서는 기원을 보며 반가운 눈으로 눈썹을 살짝 올리기까지 했다.
“빨리 오셨네요.”
그러고는 바다의 손을 쥐고 인사하는 것처럼 양옆으로 잘게 흔들었다. 덤덤한 목소리와는 달리 행동에서 묻어 나오는 의도치 않은 애교였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바다의 분홍색 젤리를 구경하던 나언이 먼저 다이닝 룸으로 걸어갔다. 기원은 앞서 걷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까 나언의 목소리에서 느꼈던 침울한 기색이 착각인가 싶었다.
식탁에서도 조곤조곤한 대화가 이어졌다. 나언의 수저질은 이미 제 속도를 잃었지만, 기특하게도 조금씩이라도 더 먹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잔잔한 분위기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식탁 위에 놓아둔 기원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웬만한 급한 일이 아니고선 식사 중에 전화를 잘 받지 않는 기원이 화면을 바라보더니 통화를 연결했다. 조익현 비서실장이겠거니 싶었던 나언의 눈동자가 예민해졌다. 수화기 너머로 들린 여자의 육성 탓이었다.
무어라 말하는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았으나 무언가를 제법 길게 말하는 소리는 전달됐다.
심심하게 끓인 순두부 백탕을 뒤적이던 나언이 다소 흐리멍덩한 눈으로 기원의 표정을 살폈다.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서늘한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대화 내용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아, 내가 그걸 두고 갔어요? 사람 보낼게요.”
“…….”
“뭘 그렇게까지. 고마워요.”
그러니까 온통 ‘예외’투성이였다.
식사 중에 전화를 받았고, 상대에게 고맙다는 말까지 했다. 최기원은 성격상 상대에게 ‘고맙다’는 말을 잘 하지 않았다. 애초에 기원이 누군가에게 고마울 만한 신세를 질 일이 없거니와 있더라도 당연하게 여길 때가 많았다.
“잠깐 정문에 다녀올게요. 천천히 먹고 있어요.”
그리고 식사 시간에 자리를 비우기까지 한다. 놀란 나언이 눈만 크게 뜬 채 일어서는 기원을 바라봤다. 기원은 별다른 설명 없이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순식간에 텅 비어 버린 맞은 편 자리를 바라보던 나언이 뒤늦게 눈만 깜빡였다.
“…….”
허공에 숟가락질을 하던 나언의 손목에서 힘이 쭉 빠지며 숟가락은 그대로 국그릇에 처박혔다.
표정은 무덤덤했지만 나언의 머릿속은 흙탕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복잡해졌다. 나언은 기원이 오기 전까지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기원처럼 유명한 사람에게는 이상한 소문이나 구설수 같은 게 심심찮게 붙으니까.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면, 늘 근거 없이 떠드는 악의적인 루머가 따르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번 것도 그런 뜬소문일 것이라고 되뇌었다. 그렇게 겨우 가슴을 다독이고, 애써 기원의 앞에서 기분 상하지 않은 척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그러나 방금 전화 한 통에 모든 마음가짐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본의 아니게 들은 대화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기원이 상대의 집이나 차에 무언가를 두고 온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기원은 요즘 일 때문에 바쁘기만 했다. 그 외에는 자신과 시간을 보냈고.
‘여자랑 단둘이 일정이 있다곤 안 했는데…….’
그러지 않고 싶었지만 나언의 상상은 나쁜 쪽으로만 뭉게뭉게 커졌다.
다행히 기원은 금방 돌아왔다. 그는 자리를 비우기 전후로 전혀 달라지지 않은 음식을 묘한 눈초리로 살펴보고는 약을 꺼내 뜯어 주었다. 그 다정한 손길을 받아들이면서도 나언의 상상은 좀처럼 밝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멋대로 이미지를 만들어 기워 넣고 살을 붙여 가며 불안함을 차곡차곡 축적했다.
알약의 씁쓸한 맛이 여전히 혀끝에 남았다. 결국 나언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다소 성급한 질문을 던졌다. 물컵을 꼭 쥔 손가락 끝에 힘이 바짝 들어갔지만 전전긍긍했던 마음이 티 나지 않도록, 단단한 표정을 유지하며 태연하게 물었다.
“누구였어요?”
“뭐가요?”
“방금 전화….”
“아, 업무 처리하는 변호사요.”
2월의 싸늘한 바람을 묻히고 온 기원 역시 나언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답했지만, 나언은 ‘변호사’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명치 아래가 꽉 막혔다. 기원은 나언의 물음에 대답하면서도 끌리는 후식을 물었고, 나언은 아무 과일이나 대답했다. 과일용 냉장고를 열어 먹기 좋게 손질된 것부터 툭툭 꺼내는 기원의 등에 대고 소심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여자분이시던데.”
나무 쟁반에 둥그렇게 딸기를 쌓던 기원이 고개를 돌려 나언을 바라봤다. 도통 이런 걸 묻지 않는 놈이었다. 기원의 길고 커다란 눈에서 흐른 직설적인 시선이 다가오자 되레 나언이 슬쩍 눈을 피했다. 뭔가 우물쭈물하는 듯한 모습에 기원의 대답에도 희미한 빈정거림이 묻었다.
“변호사를 남자만 뽑진 않죠. 왜, 여자 목소리에 관심이 가?”
“그런 거 아니에요.”
불똥이 엉뚱하게도 저에게로 튄다. 나언은 조그맣게 대답하곤 몸을 일으켜 거실로 갔다. 과일 그릇을 들고 온 기원은 먼저 걷는 나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소파에 앉았다. 딸기에 은색 포크를 푹 찍어 건네자 받아 든 나언이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나언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툴툴 털어 준 기원도 딸기 하나를 찍어 먹었다.
“머리 길었네. 잘라야겠다.”
“네…. 주말에 가야겠어요.”
기원이 영화 하나를 골랐다. 오늘은 나언의 취향을 고려해 온통 때려 부수는 액션으로 골랐다. 나언은 시작부터 폭발음과 함께 번쩍대는 화면에 눈을 고정했지만 정작 시선은 화면 너머의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 힘이 빠져 있었다. 히어로가 악당을 있는 힘껏 때려눕히는 장면에서, 나언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까 변호사분이 여기로 오신 거예요?”
“네. 정문에 다녀온다고 말했잖아요.”
“여기 주소를 말씀 안 하셨는데……. 그 변호사분은 기원 씨가 어디 사는지 잘 아시나 봐요.”
이 집은 기원이 나언에게 선물한 주거용 아파트였다. 거기에 기원이 눌러 지내는 것이었고. 기원이 여기에 지내는 걸 아는 사람은 정말 몇 명 없다. 그 뜻은 변호사 역시 그 ‘몇 명’에 속할 만큼 가깝다는 증거였다.
“등기 받을 것 때문에 알려 준 적이 있었어요. 어어, 왜 이렇게 질질 흘려.”
기원은 나언이 묻는 것에 꼬박꼬박 대답하면서도 틈틈이 나언을 챙겼다. 멍하게 딸기를 씹다 입가부터 턱까지 딸기 과즙을 흥건하게 묻힌 나언이나, 그런 나언의 작은 턱을 벅벅 문지르면서도 나언이 먹는 양을 틈틈이 확인하는 기원이나 틀어 놓은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정신이 팔려 있는 모양새였다.
그렇게 또 한참 적적한 거실에 영화 소리만 크게 울렸다. 약 기운이 번지며 조금씩 몽롱해지는 나언이 손을 올려 오른쪽 눈을 비볐다. 기원은 제 어깨에 나언을 기대게 한 뒤 거실 조명의 조도를 낮췄다. 어스름한 세피아 톤의 조명만 남은 거실은 눈을 편안하게 했다.
딸기의 빨간 부분까지만 열심히 갉작이며 먹고 가만히 들고만 있는 나언을 본 기원은 딸기를 거꾸로 찍어 하얀 부분을 먹은 뒤 나머지를 나언의 입가에 갖다 댔다. 신맛이 싫어 머뭇대는 것을 눈치챈 기원이 신기하면서도, 이런 다정한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이상한 반발심도 치솟았다.
“여기까지 온 거면…. 무슨 중요한 물건인가 봐요.”
너무나 나른한 순간이라, 제 질문이 갑작스레 튀는 고무공 같다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원은 소리 없이 입매를 예쁘게 끌어 올리며 평온하게 대답했다.
“내일 오전에 필요한 서류라.”
“아 그래서 직접 가져다주신 건가.”
자그마한 혼잣말을 들은 기원이 소리를 죽여 웃었다. 기원은 불쑥불쑥 던져지는 질문 탓에 이미 나언의 속마음을 눈치챘다. 지금 나언은 변호사와 자신이 통화한 사실에 꽂혀 있었다. 저래 놓고 필사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척 물으려 애쓰는 게 가여우면서도 웃겨서 장단을 맞춰 주고 있을 뿐.
하지만 이제 슬슬 신경이 긁히기 시작했다. 나언의 앞에서 업무와 관련한 일은 수도 없이 지껄여 왔다. 절대 알려지면 안 되는 이슈나 급한 사안이라도 나언의 앞에선 거리낌이 없었다. 함께 조용히 들으면서도 그에 대해 의문을 덧붙이거나 사소한 궁금증도 갖지 않았던 나언이 오늘처럼 구는 건 처음이었다. 수많은 업무용 전화에서 유일하게 달랐던 점은 오늘 통화한 변호사가 여자라는 것뿐. 기원의 관심 밖이지만, 이 여자는 업무 능력만큼 외모 또한 옛날부터 유명했다. 그렇기에 기원의 판단은 자꾸만 편협한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기원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나언을 차갑게 응시했다. 하지만 살살 놀리는 듯한 말투와 머리카락을 건드리는 손길에는 다정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나언에게는 그게 더 혼란스럽고 무서웠다.
“목소리가 이상형이야? 지적인 쪽이 취향인가.”
“아니요…….”
“그치. 백나언은 남자한테 깔리는 취향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물어보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왜 자꾸 물어봐. 신경 쓰여서 영화를 볼 수가 없잖아.”
“죄송해요…. 이제 안 물을게요.”
사과를 하면서도 울컥했다. 목소리 끝이 잘게 떨리는 순간 나언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기원은 나언을 천천히 바라보다 발긋해진 눈가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둑한 조명을 빌려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는 나언의 눈동자는 거멓게 부풀어 있었다.
숨죽이고 있는 나언을 바라보던 기원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울리고 싶지 않았는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결국 나언의 머리통을 붙잡고 고개를 힘으로 돌렸다. 울먹이는 시선이 제 턱 끝에도 미치지 못하고 다시 아래로 추락했다. 기원은 손으로 나언의 부드러운 볼을 톡톡 두드렸다.
“야한 입술이랑 혀는 좆 빠는 데만 쓰는 거야? 말을 해야 알지.”
“…….”
“왜 우는데.”
“안 우는데…….”
“그래, 그러면 왜 울 건데. 곧 울 예정이잖아.”
결국 한참 입을 닫고 있던 나언은 조금 온건해진 말투에 제 속을 털어놓았다. 커다란 주머니에 아주 작고 얇은 칼집을 낸 정도였지만, 지금 나언은 제 속마음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상상이 덧붙여진 쓸데없는 생각은 모두 잘라 내고 제일 선명한 것만 말했다.
“아까 전화 받고 갑자기 나가신 게 서운해요.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그랬어요.”
“…….”
“물론 급한 것도 알고, 중요한 서류였다는 것도 이해했어요. 이젠 괜찮습니다.”
아무런 대답을 돌려주지 않는 기원을 두고 나언은 얼기설기 엮은 변명 몇 가지를 더했다. 말을 하면서 스스로 감정을 정돈해 나가는 듯, 뒤로 갈수록 나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조용하게 나언의 대답을 곱씹던 기원의 회색빛 눈동자에서 점차 냉랭한 기색이 빠져나갔다. 여자 쪽 문제라고 여겼던 건 오해였던 모양이다.
오늘, 나언의 전화 통화가 평소 같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그리고 아픈 녀석이라는 걸 간과했다. 아프면 원래 평소답지 않게 예민해지고 잔투정도 많아진다. 어른스러운 척하려 늘 애쓰던 놈이니 티는 안 냈을지 몰라도 오늘은 유독 감정이 날뛰는 날인 듯하다. 얼마 전 혼자 저녁을 먹다 쓰러졌고, 아직 몸이 낫지 않았다. 일을 핑계로 혼자 두고 나간 사이 속상함을 느끼고 많은 생각을 했을 수 있다. 다만 이렇게 어르고 달래거나 뒤틀린 협박으로 윽박질러야 속을 조금이나마 비춰 주는 게 못내 답답할 뿐이었다.
“네가 피우는 어리광 얼마든지 좋으니까, 맘껏 좀 부려.”
어리광이라니. 틀린 건 아닌데 어쩐지 치졸해 보이는 정리에 나언은 형용할 수 없는 당혹감과 미미한 서운함이 일었다. 대답 없이 미간만 옅게 찌푸린 나언을 보던 기원은 무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고집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원은 나언에게 몸을 더 돌려 그를 다정하게 끌어안아 버렸다. 기원은 긴 팔다리를 엮으며 너른 소파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옆으로 누운 채 기원의 가슴팍 안에 파묻힌 나언은 무력하게 따뜻한 숨을 흘리기만 했다. 기원이 안는 완력에 숨이 막혀 끙 앓으면서도, 관자놀이와 뺨에 퍼붓는 그의 입맞춤이 못내 기꺼웠다. 케케묵은 상상이 거짓이라는 확인 도장이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조금은 잊고 지냈다. 어떤 날은 컨디션이 괜찮았고 어떤 날은 유독 버거웠다. 기원과는 종종 몸을 섞었고, 다가온 아이의 기일에는 납골당을 찾기도 했다. 근 2년 정도는 주언이를 앞에 두고 잘 울지 않았다. 그저 아이에게 두런두런 말을 걸고 오거나, 좋아했던 음식을 놓고 게임을 틀어 주고 왔었다.
하지만 눈이 많이 내렸던 주말 오후, 나언은 그날따라 꺼이꺼이 울었다. 아무런 말 없이 아이의 사진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나언은 툭 터진 댐처럼 눈에서 후두둑 눈물방울을 떨궜다. 이를 악다물고 버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처럼 서러움이 터져 흘렀다. 형은 잘 지내, 라는 말 한마디를 해 보려다 벌어진 일이었다.
기원은 서럽게 우는 나언의 곁을 묵묵히 지켰다. 끝내 가슴을 움켜쥐고 숨까지 가빠하는 나언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달래 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주언의 기일. 정말 오랜만에 들어 보는 나언의 짙은 울음소리에 기원은 천장을 바라보며 소리 없는 한숨을 뱉었다.
그날 저녁, 주언이 생각 때문에 울적했던 나언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기원이 얼마 전 TV 프로그램에서 소개되었던 요리를 해 줬기 때문이다. 물론 준비는 모두 사용인이 해 두고 집을 비워 줬지만, 기원은 프로그램에서 봤던 레시피를 토대로 더 소화가 쉬운 재료를 첨가해 저녁을 완성했다. 가볍게 흘렸던, 맛있겠다는 말을 기억해 준 그가 새삼 신기하고 고마웠다.
꼭꼭 씹어 제법 많은 양을 먹어 칭찬을 받았다. 기원과 함께 따뜻한 음료를 사 들고 아파트 주변도 천천히 걷고 왔더니 어느 순간 가슴에 쓰리게 고여 있던 감정이 서서히 옅어졌다. 그럼에도 기원은 자기 전, 나언의 방을 찾았다. 그가 무엇을 불안해하는지 나언 역시 어렴풋이 눈치챘다. 제 곁에서 잠들 때까지 뜬눈으로 버티던 기원은 나언이 뒤척일 때마다 선잠을 깨 그가 잘 있는지 수차례 확인했다. 나언은 혼몽한 와중에도 은은하게 느껴지는 기원의 숨결이 못내 고마웠다.
***
오랜만에 기원과 함께 출근한 나언은 꾸벅 인사를 남기고 후다닥 계단을 올랐다. 터벅터벅 로비를 가로지르던 나언은 최지은 주임과 입구에서 맞닥뜨렸다. 나언의 눈이 반가움으로 커졌다.
“어, 이제 오세요?”
늘 자신보다 일찍 출근하는 최지은 주임에게 물으니 그녀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에 든 작은 상자를 흔들었다.
“요새 이거 난리잖아요. 요기 사거리 앞 케이크. 아침부터 줄 서서 겨우 사 왔네.”
나언이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하자,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입소문 슬슬 타더니 얼마 전에 ‘식신 탐정’에 나오고 나서부턴 웨이팅이 너무 길어졌어요.”
“‘식신 탐정’이요?!”
“네, 거긴 진짜 숨은 맛집만 소개하잖아요.”
케이크 가게가 식신 탐정에 나왔다는 것보다, ‘식신 탐정’에서 제가 놓친 부분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 더 놀란 나언이 입술을 살짝 벌리며 눈을 크게 떴다.
‘식신 탐정’은 기원과 늘 함께 챙겨 보는 프로그램이었고, 거기에 나오는 패널들 모두 요리 센스가 뛰어난 사람들이라 툭툭 던지는 레시피를 듣고 함께 요리에 도전하기도 했었다. 무슨 케이크를 줄까지 서서 살까 싶었던 의문이 눈 녹듯 사라졌다. 나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쵸. 거기 나오면 진짜 맛집 맞죠.”
지금은 다 팔렸겠죠? 하고 물으니 최 주임이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오전이라 겨우 건졌지, 이미 자신의 차례부터는 맛도 몇 개 안 남았었다고 말했다. 어깨가 살짝 처진 나언을 보며 웃은 그녀가 정보를 슬쩍 전했다.
“점심시간에 한 번, 브레이크 타임 끝나고 또 한 번 줄 선다니까 도전해 봐요. 저녁으로 먹으면 딱 좋겠네.”
순간 기원과 마주 앉아 케이크를 먹는 나언을 생각하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최지은 주임은 걸음을 빠르게 옮겨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나언도 얼른 보폭을 넓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렇게 나언은 점심시간을 희생한 대가로, 운 좋게 제일 인기 좋은 케이크를 구했다. 단호박 베이스의 시폰 케이크가 제일 인기 상품이라고 들었는데, 제 앞에 선 사람들이 모두 그 맛만 고르기에 재고가 사라질까 봐 꽤나 불안했었다. 점심을 먹지 않고 부랴부랴 뛰어왔기에 망정이지, 나언은 하나 남은 케이크를 골랐던 순간의 희열을 며칠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회사로 돌아온 나언은 자신과 똑같은 케이크 상자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서로 무언의 눈짓 소통을 한 그들은 뿌듯한 마음으로 흩어졌다. 나언이 케이크 상자를 손에 들고 온 것을 본 최 주임은 제 일처럼 기뻐했다.
「늦어요, 저녁 먼저 먹어요. [오후 5:01]」
그러나 늦는다는 기원의 문자를 확인한 나언의 표정이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함께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 와인과 케이크를 곁들이고 싶었는데. 이러다간 밤늦게 케이크를 먹거나 자칫하면 내일이 되어서야 케이크를 보여 줄 수 있겠다. 고민하던 나언은 단어를 몇 번 고쳤다가 쓰며 조금 긴 답장을 보냈다.
「[오후 5:04] 네 알겠어요. 그치만 너무 늦지 않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핸드폰이 왕왕 울렸다. 어깨를 흠칫 떤 나언이 전화 발신인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언이 복도에서 전화를 연결하며 비상계단 쪽으로 몸을 틀었다.
“여, 여보세요?”
[잠깐 올라와요.]
다짜고짜 올라오라는 말을 하는 기원에게 나언이 쩔쩔매며 되묻는 대답을 했다.
“예……? 지금요?”
[아니면 내가 내려가고.]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웃음을 흘리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뚝 끊겼다. 가끔 기원은 나언이 일하는 층 주변을 내려와 굳이 부서 주변을 돌아보고 갈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나언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긴장한 사원들 사이에 섞여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선 나언은, 입매에 힘을 주고는 이쪽을 자꾸만 바라보는 기원의 눈을 필사적으로 피했다. 그럴 때면 기원은 일부러 나언의 앞으로 휙 지나갔다. 말까지 걸어 가며 나언을 놀려 먹고 싶은 욕구는 붉어진 귀 끝을 보며 애써 눌렀다.
저 때문에 괜히 긴장하고 불안에 떨어야 하는 사원들에게도 너무나 미안했기에, 나언은 기원이 오기 전에 얼른 그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를 향하는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나언은 부스스한 머리를 털고 재킷 매무새를 다듬으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평소라면 절대 누를 일이 없는 고층 버튼에 불빛이 들어왔다. 빠른 속도로 상승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제가 보낸 문자에 무언가 실수나 튀는 내용이 있었나 여러 번 되짚었지만, 그가 이렇게 호출까지 할 만한 내용은 아무래도 없는 것 같았다.
사장실이 있는 층에 내리자 마치 로비처럼 널찍한 공간이 펼쳐졌다. 안내용 데스크 안쪽에서 비서 직원 두 명이 몸을 일으키며 묵례했고, 나언 역시 그들을 향해 고개 숙였다. 그 사이 나언을 기다리던 조익현 비서실장이 나언을 사장실 앞으로 안내했다.
사장실 입구의 문을 열자 전실처럼 꾸며진 너른 손님맞이용 공간이 나타났다. 지난번에 왔을 때와는 다른 느낌의 작품들이 새하얀 벽에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에 두 개는 나언이 고른 것이었다. 괜히 입술을 꾹 말아 물고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임원단이 회의하는 널찍한 방이 나왔고, 다시 한번 안쪽으로 들어서자 이제야 그의 업무용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이 나왔다.
“사장님은 안에 계십니다.”
조익현 실장의 안내는 이곳까지였다. 나언을 향해 다시 묵례를 남긴 그가 조용히 왔던 길을 되돌아가자, 널찍한 공간에 나언 혼자 서 있게 됐다. 나언이 노크를 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담백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언이 들어오자 기원의 차가운 낯이 슬쩍 풀어졌다. 의자를 살짝 뒤로 물린 기원이 나언에게 가까이 오라고 말하자 나언은 그를 향해 단정한 걸음을 옮겼다.
사장실은 입사 이후 딱 두 번 와 봤다. 처음에는 모두가 퇴근한 늦은 밤, 기원과 함께 이곳에서 야근을 하며 시간을 보냈었고, 두 번째는 부서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딴지를 거는 척 자신을 호출한 뒤 한참 안고만 있다가 돌려보냈었다.
하지만 오늘은 기원이 자신을 부른 이유가 없었다. 사장실에 포진한 비서진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도 하고, 혹시나 기원을 찾을 다른 임원들에게 들킬까 싶어 조마조마했다. 나언의 작은 얼굴에 서린 걱정스러운 기색에 기원이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리며 소리 없이 웃음을 삼켰다.
“점심은 왜 걸렀어요?”
이제 막 최지은 주임에게 보고를 받은 참이었다. 최 주임은 나언이 케이크를 사러 가느라 점심을 거르게 된 것에 제 탓이 분명 있는 것 같아, ‘먹지 않은 것 같습니다.’라고 대충 둘러댔었다. 이제 익명의 누군가에게 보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도 않는 기원은 압박 면접을 하는 상사처럼 나언을 빤히 올려다봤다. 역시나 거른 것이 맞는지 커다란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바빴습니다….”
바빴어요, 라고 말해도 될 건데 자리가 자리인 탓에 저도 모르게 깍듯한 대답을 했다. 기원이 들릴 듯 말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턱을 괬다. 그러더니 비딱한 시선으로 회사 메신저를 바라보며 물었다.
“손진우는 점심 먹었어요?”
“차, 차장님은 드셨습니다.”
“이정훈은?”
“아마 드셨을 겁니다.”
“박희연은?”
부서원을 한 명 한 명 거론하며 점심 식사 여부를 물었고 나언은 드셨다는 말만 반복했다. 마우스를 툭 밀어 놓은 기원이 낮은 목소리로 음산하게 혼잣말을 뇌까렸다.
“막내는 뺑이 치느라 점심을 걸렀다는데, 이 인간 말종들은 다 챙겨 드셨다니…. 다 잘라 버리고 싶어서 어쩌지.”
문제는 다 들으라는 식의 혼잣말이었다는 것이다.
“그게 제가 속이 안 좋아서 그랬습니다.”
결국 나언이 뒤늦게 그들을 변호하고자 나섰지만 이미 기원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기원의 곁에서 벌받는 학생처럼 서 있는 나언은 당황 탓에 목덜미를 발갛게 물들인 상태였다. 조금 더 몰아세웠다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표정에 결국 기원은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앉아요.”
“의자가….”
주위를 둘러보며 앉을 만한 곳을 찾던 나언을 비스듬히 응시하던 기원은 제 허벅지 위를 툭툭 두드렸다. 소동물처럼 몸을 흠칫한 나언이 반사적으로 닫힌 문을 흘끔댔다. 하지만 기원이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마른침을 삼킨 뒤 조금씩 거리를 좁혀 다가왔다.
기원이 의자를 살짝 뒤로 물리자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나언이 기원의 허벅지 옆에 엉덩이를 슥 가져다 댔다. 그게 앉은 건가 싶어 결국 실소를 터뜨린 기원은 나언을 뒤에서 껴안듯이 들어 올려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강한 힘에 휘청대던 나언이 눈을 크게 뜨며 기원의 팔뚝을 붙잡고 균형을 잡았다. 나언의 엉덩이와 허벅지가 기원의 허벅지와 맞닿았다. 얇고 매끄러운 재질의 바지끼리 부딪치며 묘한 느낌이 들었다.
기원은 나언의 하얀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가까이에서 물씬 풍기는 나언 특유의 순한 체향을 들이켜자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점심시간마다 여기 앉혀서 먹여 줄까요?”
“죄송합니다.”
기원의 지시로 구내식당에는 매일 밥과 함께 흰 죽도 제공되었다. 점심 도시락을 원하면 소화가 잘되는 음식으로 준비해 줄 테니 말하라는 부탁에도 나언은 끝내 괜찮다는 대답으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놓았다. 하지만 나언의 입장에선 그러잖아도 몸이 좋지 않다며 팀원들에게 사소한 배려를 받고 있었다. 더는 튀고 싶지 않은 나언의 입장을 기원은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이런 식이면 점심 약을 계속 거르게 되잖아요.”
불안감에 엄지손톱 옆을 만지작대는 나언의 손을 붙잡아 내리며 그를 타일렀다. 이미 엄지 옆의 붉은 속살이 죄다 헤집어진 손가락은 2월에 접어들며 성한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 기원이 줄곧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말을 하는 게 간지러운 듯 나언이 한쪽 눈을 찌푸린 채 배시시 입술을 끌어 올렸다.
“잘 챙겨 먹을게요.”
퍽이나 싶은 마음이었지만 어떻게든 마음에 드는 대답을 들은 기원이 잠시 말을 멎었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제 등에서 느껴지는 기원의 단단한 가슴팍, 그리고 그 아래에서 토닥토닥 뛰어오르는 심장 고동 소리에 나언은 저도 모르게 마음에 안정을 느꼈다.
회사에서 기원은 무서운 편이었다. 잘 웃지도 않고 사원들의 인사를 친절하게 받아 주지도 않았다. 일적으로 보이는 실수에 칼같이 굴며, 그의 결정 하나에 회사의 굵직한 프로젝트 방향이 휙휙 달라지는 일도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껴안고 고작 밥 먹는 일 가지고 낯간지러운 말을 건네고 있다는 사실에 이상하게 뱃속이 간질대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왜 빨리 오라고 그랬어요?”
“그냥요….”
“그런 문자 보내면 내가 일에 집중을 못 하는데.”
기원의 손이 나언의 가슴께를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렸다. 손가락이 셔츠 밑의 유두 부근을 스치고 지나가자 나언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말랑한 엉덩이 부근도 움찔하며 당황스러운 움직임을 고스란히 드러냈는데, 나언이 엉덩이를 움직일 때마다 기원의 허벅지 인근에서 딱딱한 성기가 느껴져 당혹감은 더욱 짙어지기만 했다.
기원은 나언의 귓바퀴를 입술로 꾹 겹쳐 누르고 그대로 말랑한 귀뺨으로 미끄러뜨렸다. 피하려는 듯 목을 움츠린 나언이 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새하얗던 뺨이 붉게 달아오르는 모습이 선연했다. 나언의 허리를 감싸 쥔 손을 아래로 내려 지그시 누르자 본능적으로 힘을 가지기 시작한 성기가 이미 반쯤 발기해 있었다.
“섰네요.”
“여기, 누구, 오면 잠시만요….”
가빠진 숨 사이로 애간장을 녹일 듯한 목소리가 흘렀다. 크게 말하지도 몸을 완전히 빼내지도 못한 채 끙끙 앓는 것이 전부인 약한 모습에 기원은 아랫배까지 뻐근해지는 열기를 느꼈다.
“하…….”
혀가 나언의 귓불을 질척하게 핥았다. 커다란 손바닥이 셋업 바지 위를 문지르고 지나갈 때마다 나언은 밀려드는 쾌감을 누르느라 허리를 들썩이며 애꿎은 기원의 팔뚝만 꾹꾹 붙잡았다.
“으, 으읏.”
그러다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신음과 고개를 젖히면 젖히는 대로 몸을 내맡기는 순종적인 모습은 기원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결국 기원의 손이 나언의 벨트를 풀었다. 큰 손은 능숙하게 지퍼까지 내리고 금세 속옷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단단하게 치솟은 열기 때문에 따뜻해진 기둥과 미끈한 액이 새어 나온 귀두를 둥글게 문지르자 나언의 소리가 일전과는 달라졌다.
“흐, 으읏…… 아읏.”
상황이 주는 압박감과 여유가 없어진 기원의 집요한 애무에 나언의 허벅지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속옷을 천천히 끌어 내린 기원은 툭 튕겨 나온 나언의 성기를 움켜쥐고 흔들었다. 나언이 헉, 하는 숨을 뱉으며 허리를 둥글게 말았다. 이러다가는 여기서 실례를 할 것만 같았다. 아랫입술을 꾹 깨문 나언이 고개를 잘게 흔들었지만, 기원은 성기를 잡은 손을 풀어 주지 않았다.
“아, 아…… 최기원, 씨…. 너무, 하… 윽…”
귓가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눈앞이 핑핑 도는 것 같아서 죽을 지경인데 뭐가 재밌는지. 나언은 순간적으로 치미는 수치심에 눈가를 발갛게 물들였다.
“여기 회산데, 말을 까고 그래요.”
“하, 예? 무, 무슨…….”
“최기원 씨라니…. 사장님이라고 불러야지.”
지금 회사에서 이런 짓을 하는 주제에…! 따지려 드는 말도 귀두의 갈라진 부분을 엄지로 꾸욱 누르는 순간 어그러진 신음으로 바뀌어 버렸다. 나언이 발을 버둥대며 허리를 비틀었다. 잔뜩 예민해진 곳은 한계에 다다른 듯 잘 익은 자두처럼 색이 짙어졌다. 이러다간 기원의 업무 책상이나 옷에 실수할 것이 뻔했다. 비상이었다. 결국 나언은 기원의 요구에 응하며 흐느꼈다.
“사, 사장님. 으, 손 좀, 으읏…….”
“…….”
“이러다가 진짜, 읏, 저, 싸, 쌀 것 같은데…….”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원의 팔뚝만 붙잡은 채 몸을 떠는 나언의 목소리 끝에 물기가 어렸다. 긴장 때문에 소리 한번 크게 내지 못하고 쾌감을 온전히 느끼지도 못한 채로 나언이 버끔버끔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애원하는 말은 단어가 되지 못한 채 점점 줄어들고, 목구멍에선 신음만 비어져 나오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변하며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쾌감이 절정에 이른 것이다.
“아, 안 돼, 못, 참겠…….”
바르작대던 나언이 흠칫흠칫 몸을 떨어 댔다. 이윽고 고개를 푹 숙이고 허벅지를 콱 조였다. 툭, 투둑. 기원이 둥글게 말아 쥔 손 위로 하얗고 진득한 정액이 넘쳐흘렀다. 행여 속옷을 적실 새라, 기원은 뜨끈한 액을 큰 손으로 모두 받아 냈다. 다만 워낙 양이 많은 탓에 손등을 타고 몇 줄기가 넘쳐흐르긴 했다.
“하, 아…. 하아…….”
나언은 기원의 너른 가슴에 뒤통수를 비비적대며 가쁜 숨을 내뱉었다. 몸을 늘어뜨려도 가볍기만 한 나언을 추스르며, 기원은 열이 올라 뜨끈해진 말랑한 볼에 입술을 붙였다 뗐다. 손을 뻗어 물티슈와 휴지로 나언의 아래를 꼼꼼하게 정리해 주고 벌어졌던 바지의 지퍼를 닫아 줄 때까지도 나언은 시근덕대며 참았던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누가 보면 따먹은 줄 알겠네.”
“…흐, 후….”
“너무 늦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죠?”
아직 흥분이 정돈되지 못한 야한 얼굴을 한 나언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최대한 빨리 갈게요. 끝나면 전화하고.”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풋내 나는 얼굴은 기원을 더 동하게 만들었다. 못내 아쉬운 손길이 나언의 뺨, 가는 목과 따뜻한 배를 연신 쓰다듬었지만 이제 나언을 보내 줘야 했다. 내려오면서 앉은 채로 한 번, 바닥에 발을 대며 한 번, 총 두 번이나 몸을 가누지 못한 나언은 허리 뒤로 셔츠를 제대로 넣지도 않은 채 허둥지둥 사장실을 떠났다. 겨우 20분의 만남이지만 나언이 남기고 간 선명한 만족감에 기원은 나른한 미소를 띠었다.
***
나언은 스케줄러를 정리한 뒤 컴퓨터 전원을 껐다. 목도리까지 꽉 동여맨 나언이 전화를 걸자 통화 연결음이 두 번이 이어지기 전에 기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저 퇴근해요.”
[그래요. 추운데 차 타고 가요 사람 보낼게.]
“아니요, 운동 삼아 걸어갈게요.”
기원이 오기 전까지 씻고 조금 쉬다가 함께 저녁을 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하던 나언의 시선에 하얀 케이크 박스가 걸려들었다. 사람들이 떠나 적막이 남은 사무실에 우두커니 앉은 나언은 박스를 빤히 바라봤다. 정확히는 포장하며 함께 샀던 귀엽게 생긴 초였다.
이왕 케이크를 선물하기로 한 것, 깜짝으로 불을 붙여 주는 건 어떨까 싶었다. 자신의 부탁도 있으니 기원은 적어도 한두 시간 안에는 퇴근할 것이다. 그 정도면 회사에서 몰래 기다리다가, 그가 퇴근할 때에 맞춰 깜짝으로 케이크를 줄 수 있었다. 약 두 달 전 기원의 생일도 남의 손을 빌려 미역국을 끓여 준 게 다였고, 얼마 전에 그가 해 준 요리에 대해 보답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늘 차갑고 생기 없는 나른한 얼굴에 번지는 당혹감이 기대되는 것도 컸다. 항상 당황하고 놀라며, 어수룩한 것을 도맡느라 내심 억울함이 쌓여 있던 나언의 입꼬리가 소폭 솟아올랐다.
텅 빈 사무실에서 시간을 죽이던 나언은 기원에게서 출발한다는 문자를 받은 뒤 얼른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다행히 이제는 주차장 직원과 면을 텄기에 자연스럽게 인사한 뒤 비상계단까지 가는 데 무리가 없었다. 나언은 깨끗한 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케이크 상자를 내려 뒀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숫자를 살피며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파스텔 색조로 꾸며진 5개의 초 끝에 일렁이는 불꽃이 붙었다. 나언이 예쁜 케이크를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계단참의 공기는 제법 서늘했다. 하지만 따뜻한 초의 열기가 어둑한 공간을 밝히자 나언의 마음도 설렘이 번지기 시작했다. 기원은 자신을 발견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식신 탐정에 소개된 유명한 케이크라는 걸 알면 더 좋아할 것이다. 나언은 기원의 다양한 반응을 떠올리며 주황빛을 내는 둥그런 불빛을 바라봤다. 어쩐지 가슴 한쪽이 간질대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런 설렘은 너무 오랜만이라 생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엘리베이터가 본 층으로 내려오는 순간 나언은 빠끔 내밀었던 고개를 얼른 뒤로 숨겼다. 케이크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상자를 끌어안고 엘리베이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기원이 내리는 것과 동시에 문 뒤에서 걸어 나올 생각으로 준비를 하고 있던 나언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들리는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멈칫하고 말았다.
“변호사 앞에서 법 이야기하는 게 웃기긴 한데.”
‘변호사……?’
변호사라는 단어에 나언은 얼어 버렸다. 커다란 눈을 여러 번 깜빡이는 찰나, 나언의 낯에는 몇 가지 감정이 빠르게 지나갔다. 혼란, 당황, 그리고 불안. 어느새 온도를 잃고 차갑게 식은 손가락이 케이크 상자를 꾹 쥐느라 하얗게 질렸다.
“결혼? 문제 될 게 있나?”
뚜벅뚜벅,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오는 구두 굽 소리가 유독 나언의 귓전에 오래 맴돈다. 상대가 무어라 말하는 순간 피식, 웃음을 터뜨린 기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식은 뭐, 내가 알아서 준비할게.”
그리고 기원의 목소리로 결코 들려서는 안 될 단어가 들린 순간 나언은 잠시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결혼이라니. 그리고 식을 알아서 한다고…? 얼마나 놀랐는지 나언은 지금 말하는 사람이 기원이 아닐 수도 있을 거라는 말도 되지 않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살짝 스치듯 보인 정장 바지의 색깔과 매끈한 구두코의 주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제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기원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지만, 대화 내용은 선명하게 귀에 꽂혀 들었다.
“우선 입주부터 마무리 짓고. 필요한 서류는 조 실장님이랑 직접 상담 부탁해.”
“…….”
“벌써 소문 돌더라. 물론 알아서 잘하겠지만 서로 조심하자. 나 번거로운 거 싫어해서.”
나언은 제가 들었던 소문 그대로를 기원이 재차 읊어 주는 것만 같았다, 확인 사살처럼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 깍듯한 높임말로 대화를 나누었던 상대와 지금은 가볍고 편안한 반말로 전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언의 표정에 남아 있던 일말의 빛까지 아스러졌다.
기원은 전화를 끊은 뒤 곧장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요란한 바퀴 소리와 함께 빠른 속도로 차가 빠져나갔다. 나언은 물끄러미 케이크를 내려다봤다. 건드리면 금세 볼 아래로 흘러내릴 만큼 아슬아슬하게 차오른 눈물 때문에 자꾸만 시야가 멋대로 일렁였다.
눈물보다 촛농이 먼저 흘러내렸다. 반절 이상 타 버린 촛대 아래로, 녹은 모양 그대로 굳어 버린 촛농이 겹겹이 쌓여 갔다. 그렇게 되는 동안 나언은 서 있던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못했다. 기원의 차가 주차장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과 동시에 나언은 계단에 주저앉았다.
거의 바닥까지 타 내려간 초를 후, 하고 불어 꺼트리자 비상계단에 완연한 어둠이 내렸다. 나언은 꽝꽝 얼어 버린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
나언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집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리고 기원은 나언을 보자마자 살짝 초조함이 묻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다녀와요, 말도 없이.”
“미안해요.”
목이 멘 듯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마치 소리를 내면 진동이 울리는 목걸이를 찼던 시절처럼. 헛기침을 한 나언이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비상계단에 앉아 더러워진 촛농을 걷어 내고 다시 예쁘게 포장한 케이크 상자를 들어 보였다.
“케이크 사 오느라….”
“케이크?”
“‘식신 탐정’에 나온 맛집 케이크래요. 먹고 싶더라고요.”
하지만 기원은 나언에게만 눈을 맞췄다. 짧은 사이에 걱정이라도 한 듯 옅게 일그러진 미간과 사나운 기색이 미약하게 남은 눈동자를 한 기원이 작게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그러면 전화라도 받든가.”
“깜짝으로 사 오려 했는데…. 줄이 엄청 길어서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요. 미안해요.”
적당한 사실들 사이에 오늘 겪은 수많은 감정을 감추어 흘려보냈다. 다행히 그는 제 말에 화를 누그러뜨렸고, 그런 이벤트 필요 없다며 머리를 몇 번 거칠게 쓰다듬어 줬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케이크를 보며 기뻐하는 기원의 얼굴이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눈앞에 기원이 있고 그가 무어라 말을 하는데도 보이지 않는 막이 덧대어진 것처럼 모든 감각이 더디게 와닿았다. 분명한 건 심장과 명치 사이가 줄곧 얼얼하게 아팠다.
볼품없이 녹아 버려졌던 파스텔 색깔의 초가 잔상처럼 흩어졌다. 그때마다 나언은 억지로 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말이나 행동에도 너무나 즐겁다는 듯이.
***
지난 초겨울부터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우울은 자리가 부족했는지 소복하게 쌓여 가기 시작했다. 행여 와르르 무너질까, 나언이 억지로 쌓아 올렸던 둑은 결국 우울을 담아 내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 둑은 기원이 다정할 때마다 하나씩 쌓은 것이었기에 기원 때문에 무너지는 것도 당연했다.
기원이 결혼을 한다고 했다. 남자인 자신과는 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니, 그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린다. 망상이길 간절히 바랐던 소문은 어이없게도 기원의 목소리가 증거가 되었다.
나언은 요즘 쓸모없는 단어를 검색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일을 하면서도 재벌가의 결혼 사례를 살폈다. 점심시간에는 정략결혼이라는 단어를 검색했고, 복사기 앞에 서서는 최근에 결혼한 재벌가의 정보를 몇 번이고 거듭해서 읽어 봤지만, 예외는 없었다. 모두 잘난 사람이었다.
집에 홀로 있는 시간에도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의 곁에서 끊임없이 아프고, 마음도 온전히 열지 못한 자신에게 지쳐 버린 걸까. 그래서 다른 사람을 마음에 들이기로 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필요 때문에 결혼이라는 제도를 빌리려는 것일 수도 있다. 재계의 혼사에는 종종 그런 사례들도 있다고도 했으니까. 그래 정말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래도…. 나는?”
나언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꾹 쥔 주먹 탓에 손바닥에 진한 손톱 자국이 남았다.
나언이 할 수 있는 건 아닐 거라고 애써 부정하는 것뿐이었다. 기원은 여전히 다정했고 분에 넘치도록 많은 것을 쥐여 주려 애썼다. 그런 걸 보면 자신을 아직 사랑하는 것 같다, 라는 판단이 섰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비웃듯이 기원의 전화 속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나언은 지쳤다.
최근 들어 바빠진 기원, 불거진 소문. 연유도 모른 채 크게 다쳐 왔던 새벽과 변호사와의 통화, 결혼이라는 단어와 다정한 그의 목소리. 그리고 여전히 끓는 듯한 감정을 담은 채 자신을 응시하는 회색의 깊은 눈.
고요한 방 안 속에서 머리는 소란에 휘말렸다. 이불자락을 들춰 머리끝까지 덮어 버렸다. 오래전 쓰레기통에 버려 버린 뜯지 않은 눈썹 칼을 떠올린 나언은 애써 눈을 꾹 감았다.
나언은 퉁퉁 부은 눈으로 눈을 떴다. 어제 새벽 선잠이 깼고 또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통에 다시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생각을 그치기 위해 제가 세운 결론에 다시 자신이 반기를 들었다. 기원을 의심하고 제 마음을 의심하고 주위 모든 공기와 분위기를 의심하고 들었다.
형용하기 어려운 답답함에 가슴이 너무 아팠다. 주먹을 쥐고 가슴을 쿵 두드린 나언이 무릎을 세워 앉은 뒤 이마를 푹 숙였다. 한참 감정을 다스린 후 부스스 몸을 일으킨 나언은 조용히 씻었다. 새벽 내내 소리 없이 깊은 울음을 삼킨 얼굴이었다는 흔적은 차가운 물에 모두 씻겨 내려갔다.
말갛고 단정한 얼굴로 방에서 나온 나언은 어느새 옅게 웃으며 고양이들에게 인사했다. 커튼을 걷어 오전의 노란 햇살을 거실 깊숙이 들였다. 기원과 함께 아침을 먹고 약을 먹었다. 어지럽고 시린 바람이 부는 풍경 사이로 출근한 뒤, 점심시간에는 저를 걱정할 기원을 생각하며 죽을 담뿍 떠 최선을 다해서 먹었다.
그러나 나언은 조금 일찍 회사에서 나왔다. 기원은 모르는 일이었다.
나언은 오늘 반차를 신청했다. 택시에 오른 뒤 회사 근처의 건물을 말했다. 병원이 주로 들어선 메디컬 플라자였다. 택시에서 내리자 차가운 바람이 귓가를 날카롭게 스쳤다. 건물 안으로 들어선 나언은 로비에 붙은 커다란 안내판을 훑으며 자신이 예약한 병원의 층수를 찾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약하게 떨렸다.
아주 오랜만에 병원을 찾았다.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병원….’
더는 새로운 사람에게 과거를 털어놓고 싶지 않았기에 정신과를 찾는 것을 늘 망설였다. 우울의 기원을 토해 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올려야 하는 두 사람의 죽음과 그럼에도 제가 선택한 지금의 삶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참으로 막막했기 때문이다. 물론 의사는 겉으로 티 내진 않겠지만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거나 속으로 비난하지 않을까 하는 섣부른 걱정 역시 들었다.
그렇다고 한들 6년 전에 치료를 받았던 대학 병원을 갈 수는 없었다. 아무리 부탁해도 기원의 귀에 제 상태가 들어갈 것만 같았다. 이미 충분히 짐덩이처럼 골골대는 몸이었다. 더는 기원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꽤 양이 많은 검사지를 제출한 뒤 대기 의자에 앉았다. 회색 의자 위에서 손톱의 거스러미를 뜯어 대던 나언은 예약 시간에 맞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피가 맺힌 손끝을 감추며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날씨가 매서울 정도로 춥죠.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편안하고 따뜻한 곳이었다. 긴장에 뺨이 하얗게 질린 나언이 의자에 앉았다. 부드럽고 따스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선생님께서는 나언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어떻게 오셨을까요?”
눈을 살짝 휘고 편안한 미소를 흘리는 선생님을 마주 보지 못하고 끝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흩날리는 눈처럼 산발적으로 혀끝을 오갔다. 가만히 앉아 생각하고 생각하며 어떤 말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선생님은 고요하게 나언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손끝의 굳은살을 뜯던 나언이 건조하게 튼 입술을 열었다.
“제 자신이 이해가 안 가서요.”
“음…. 어떤 부분에서 그런 마음을 느끼셨을까요?”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가 그리고 피가 올라오는 손끝을 약하게 문지른 나언이 힘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망해야 하는 사람을… 사랑해서요.”
선생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야기를 이어 나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나언의 머리로 지난 6년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시작은 당혹스러웠던 첫 만남이었고 끝은 오늘 아침 인사를 나누며 눈에 담았던 그의 담백한 미소였다.
기억을 되찾고 기원을 떠난 뒤, 지독한 자기혐오와 우울증에 빠져 몇 년간 지옥 같은 삶을 살았었다. 일은 번번이 잘리고 약을 탈 돈조차 빠듯할 정도로 궁핍하게 지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는 살기 위해 꽤나 노력했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자신은 기원과의 과거를 거듭 떠올리면서도 주언이에 대한 죄의식에 이토록 괴로워하진 않았다. 아마도 제 삶이 너무나 시궁창 같았기에, 무의식중으로 벌을 받는 셈 쳤던 것 같다.
그러나 기원의 곁에서 편안한 지금. 자신은 더할 나위 없는 위선자였다. 주언이를 위한다는 이유로 아이의 마음을 다치게 했으면서 끝내 제대로 지키지도 못했다. 그런 주제에 기원이 건넨 안락한 집과 안정적인 직장에 기대어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런 걸 누려도 되는 걸까 하는 혐오적인 의문이 깃들면서도, 기원이 다정한 날이면 무심코 그 의문을 외면하기도 했다. 그렇게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들쑥날쑥한 감정을 억지로 삼켜 내던 중, 돌연 새로운 문제가 떠올랐다.
최기원의 결혼이었다. 그가 자신을 버리려 한다. 그리고 그건 6년 전 자신이 간절히 염원했던 일이었다. 아직도 그가 두렵고 무서울 때가 있고, 그의 곁에서 가슴이 차게 식는 날이 많았다. 죽은 주언이나 지원이 형까지…. 조금만 차분하게 헤아려 보면 기원과의 헤어짐을 무리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았다.
다 아는데. 다 이해하는데 왜 날이 갈수록 암담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걸까. 나언의 눈이 어둑하게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던 의사는 나직한 목소리로 질문을 건넸다.
“그 사람을 원망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이유요…….”
작게 읊조린 나언이 웃었다. 의사는 일그러진 웃음을 띠고 있는 나언의 입가를 유심히 살핀 후 더는 묻지 않았다. 순간 들어찬 나언의 표정에서 가슴을 짓누를 만큼 아린 감정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색은 금세 사라졌다. 아마 환자 스스로 감정을 지워 내는 것에 익숙한 듯했다.
“모든 이야기를 전부 할 필요 없습니다. 나언 씨의 마음이 제일 중요한 문제니까요.”
“……네.”
“그러면 이야기는 여기까지 듣고, 앞서 했던 검사지를 같이 보면서 이야기를 해 볼까요?”
상담은 자연스럽게 나언의 건강 상태로 넘어갔다. 설핏 보기에도 들쭉날쭉해 보이는 그래프를 보며 나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을 나서자 퇴근하던 시간대와 비슷해졌다. 결국 임의로 끊었다가 다시 처방받은 수면제는 가방 제일 아래쪽에 쑤셔 넣었다. 기원은 자신이 처방받은 약을 꼭 정해진 곳에 둔다. 손 닿는 곳에 잘 정리해 둔 비상약을 제외하고, 한 번에 많이 처방받는 약 봉투는 무조건 작은 금고처럼 잠금이 달린 상자에 넣어 둔다. 번거로울 텐데도 그는 늘 잠금 번호를 눌러 약을 꺼내 주었다. 기원이 왜 그렇게까지 불안해하는지 알고, 이것 역시 처방받은 약이기에 기원에게 알려야 할 텐데 그럴 수 없는 게 문제였다. 길을 걷다 잠시 걸음을 멈춘 나언이 피로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뱉었다. 그가 모르는 비밀이 쌓이는 기분은 영 좋지 않았다.
***
요즘 나언은 아침잠이 늘었다. 기원으로선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간 기원은 나언의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이불을 끌어안고 옆으로 누워 자는 인영을 몇 분간 구경하다 결국 나언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여 깨웠다. 하지만 나언은 잠시 뒤척이기만 할 뿐 하얀 이불 속으로 얼굴을 더 파묻어 버렸다. 일어나기 싫다는 투정처럼 보이는 행동에 기원이 소리 없는 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더 늦었다간, 그러잖아도 위가 약한 놈이 허겁지겁 밥을 삼켜 내는 꼴을 봐야 하기에 슬슬 깨우기로 했다.
“일어나요 늦는다.”
그러나 나언은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목 안으로 앓는 소리를 낸다. 나언은 모르는 제 버릇. 잠이 온전히 깨지 않았을 때 나언은 어려진다. 일찍 가장이 되며 어린 동생을 돌보았던 탓일까. 투정 한 번, 싫은 소리 한 번 제대로 하지 않는 나언의 이런 어리광이 기원에게는 꽤나 귀했다.
기원은 칭얼대는 나언을 달래며 등 아래로 손을 넣어 일으켜 앉혔다. 살짝 열이 올라 따끈해진 몸이 휘청대다 제 어깨로 푹 기대어 왔다. 어디 아픈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고분고분 안겨 드는 게 꽤나 만족스러웠다.
나언은 한참 그렇게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기원에게 기댄 채로 눈을 깜빡이면서도 나언은 그에게 안겨 있는 몸을 물리지 않았다.
아침잠이 버거워진 건 수면제 때문이었다. 이번 약은 잘 맞았지만 조금 독한 편이었다. 약 기운에 억지로 취한 잠은 아침이 되어도 달아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나언은 몽롱한 와중에도 그가 안아 주는 것이 좋았다. 수면제에서 깨고 나서 현실로 정신이 접어드는 순간 들이닥치듯 쏟아지는 불안한 기운은, 기원의 단단한 품 안에서 조금씩 사그라졌기 때문이다.
오늘도 기원의 짙은 체향과 고요한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하루를 시작했다. 퇴근 후 묻어 오는 바깥 겨울 공기의 냄새와는 조금 다른, 기원만의 순수한 체향이 코언저리를 맴돌았다. 나언은 숨을 크게 들이켜며 이마를 조금 더 깊게 묻었다. 가벼운 무게를 온전히 기대어 오는 가여운 연인을, 기원은 가만히 안아 주었다.
나언은 식탁 앞에서도 멍하게 앉아 흐리멍덩한 눈을 게슴츠레 뜨고만 있었다. 나언의 이마와 뺨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기원은 마른 손가락 사이로 숟가락을 쥐여 주고서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식탁 아래로 툭 떨어지는 모습을 본 기원이 턱을 괴고 물었다.
“아직 몽롱해?”
나언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겨울 되니까 잠이 안 깨요…….”
“피곤하면 일 좀 쉬어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은 나언은 따뜻한 계란국을 떠먹었다. 조금씩 뜬 밥을 꼭꼭 씹는 모습을 보며, 기원도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나언이 입술을 오물대며 기원과 눈을 맞췄다.
“오늘 늦어요?”
“당분간은 그럴 것 같아요. 먼저 저녁 먹어요. 먹은 것 사진 보내고.”
“네.”
기원은 요즘 들어 더 바빠졌다. 어제는 오랜만에 함께 저녁을 먹나 싶었는데, 결국 미안하지만 먼저 먹으라는 전화가 걸려 왔다. 식탁에 홀로 앉아 밥을 먹은 나언은 수면제를 빌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밤늦게 돌아온 기원이 곁을 한참 지켰지만, 나언은 그것까지 알 리 없었다.
“너무 늦진 않을게요.”
기원의 말에 나언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알겠다는 대답에서도 큰 기대가 느껴지진 않는다. 다 그만둔 채 저 여린 몸을 끌어안고 싶은 평범한 아침이었다.
***
오후 4시가 조금 넘은 시각. 버릇처럼 텀블러를 들었던 나언은 가벼운 무게를 깨닫고 곧장 탕비실로 향했다. 텀블러에 따뜻한 물을 받던 중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언 씨, 요새 얼굴 보기 힘들어요.”
“어 대리님.”
딱히 피하려고 한 건 아닌데 타이밍이 잘 맞지 않았나 보다. 나언이 김기영 대리를 보곤 눈을 휘며 웃었다. 김기영 대리는 목 끝까지 셔츠를 채워 입고, 머리 모양도 평소와 달리 단정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오늘 옷이 멋지신데요.”
“그쵸? 휴우…….”
그런데 으레 건넨 칭찬에 돌아온 대답이 지나치게 탄식처럼 느껴졌다. 김기영 대리가 뱉은 날 것 그대로의 한숨에 나언이 눈을 크게 뜨자, 그가 파안대소하더니 또 긴 한숨을 뱉었다. 오락가락하는 모습이 영 온전해 보이지 않았다. 나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레 안부를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기대하던 약속이 파투 났거든요.”
김기영 대리는 기다렸다는 듯 나언을 붙잡고 하소연을 시작했다. 퍽 안타까운 사연에 나언의 눈썹도 점차 팔자가 되었다. 오늘이 소개팅 이후 벌써 세 번째 만남이었다고 했다. 기영은 상대 여성에게 고백을 하기 위해 꽃집에 예약도 해 놓고 옷도 신경 써서 입고 왔는데, 방금 관계를 정리하는 게 좋겠다는 문자가 왔다고 토로했다.
“제 입장에선 좀 억울한 거 있죠. 갑자기 이러니까요.”
“정말 속상하시겠어요.”
“다른 남자가 생겼나…….”
“에이, 설마요….”
요즘 나언이 예민하다시피 신경 쓰는 문제가 거론되자 오히려 즉각적인 부정이 먼저 튀어나온다. 그게 제법 순진해 보였는지 김기영 대리가 미간을 좁히고 낮은 목소리로 속살댔다.
“결혼 적령기다 보니 선이나 소개팅을 여러 개 걸쳐서 하는 경우가 흔하더라고요.”
“흔, 하다고요……?”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갈아타고 하는 거죠. 환승 연애.”
김기영 대리가 잔 아래에 조금 남은 믹스커피를 털어 마시고 종이컵을 콱 구겼다. 나언의 머릿속에는 결혼과 선, 환승이라는 단어가 둥둥 떠다녔다.
“아무튼 이건 지나간 일이고! 나언 씨 그때 압구정 쪽 산다고 했죠?”
“아, 네.”
“거기 얼마 전에 꽃삼겹 진짜 죽이는 집 하나 오픈했는데 오늘 저녁 어때요? 제가 살게요.”
별 약속이 없었지만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우선 기원에게 허락을 구해야 했다. 지난 워크숍 사건 때문에 기원에게 기영의 이미지가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날은 순전히 기원의 독단적인 오해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어쨌든 오늘 약속도 미리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머뭇대는 나언을 보고 기영이 물었다.
“왜요, 약속 있어요?”
“그런 건 아닌데요, 원래 저녁을 같이 먹는 사람이 있어서요.”
“오, 여자 친구? 한번 물어봐요, 저녁 먹고 들어가도 되는지.”
“그건 될 거예요. 오늘 어차피 일이 있다고 했거든요. 그래도 늦게 들어가려면 허락은 맡아야 해서….”
부럽다며 너스레를 떠는 김기영 대리에게 나언은 적당히 웃고 말았다. 기영은 나언의 대답을 기다리려는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나언은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며 잠시 목덜미를 주물거렸다. 늘 퇴근 이후의 일정은 기원의 연락을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먼저 말을 하려 하니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마음이 쓰였다. 입매를 단단하게 굳힌 나언이 손가락을 움직여 메시지를 작성했다.
「[오후 4:22]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고 들어갈게요.」
그런데 문자를 보내자마자 읽었다는 표시가 뜨더니 전화가 울렸다. 어깨를 흠칫 떤 나언이 얼른 귀에 전화를 바짝 붙였다. 제 가까이에 기영이 서 있었다. 행여 기원의 목소리가 들릴까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기원은 다짜고짜 본론부터 물었다.
[회식이에요?]
“아, 아뇨. 김기영 대리님이 저녁 먹자고 하셔서요.”
[둘이?]
“네.”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지는 사이 휴대 전화를 쥔 손 아래가 괜히 뜨뜻미지근하게 달아오르며 땀이 솟아났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놓은 나언이 자그맣게 물었다.
“아, 안 되나요?”
[안 된다고 하면 안 갈 거예요?]
“그런 건 아니지만, 생각을 좀….”
고분고분한 대답을 듣자마자 기원에게서 낮고 허탈한 웃음소리가 흘렀다. 당연히 보내지 않고 싶지만, 아무도 없는 넓은 거실에서 혼자 저녁을 먹고 서성일 모습을 생각하니 그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 다 좆같으면 그나마 나언이 하고픈 대로 두는 게 낫다는 판단이 섰다.
[다녀와요. 소화제 잘 챙겨 먹고.]
조였던 심장이 탁 풀어졌다. 안도한 나언이 알겠다는 대답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나언이 기영에게 말했다.
“된대요, 대리님.”
“…….”
“된다는데….”
나언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기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어딘가 못마땅한 얼굴로 나언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언이 ‘대리님?’ 하며 기영을 부르자 그제야 기영이 얼굴을 풀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나언 씨 여자 친구분이 연…상이세요?”
“아, 느, 네.”
“혹시 여자 친구한테 책잡힌 거 있어요?”
“예?”
“왜 그렇게 쩔쩔매요.”
나언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기원의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는 것에만 더 집중하다 보니 제 말소리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애인에게 말하는 것치곤 지나치게 낮은 태도에 기영은 제가 더 답답함을 느꼈다.
“아…. 애인 성격이 조금, 단호…해서….”
“와… 그래도 그렇지, 나언 씨 정말 꽉 잡혀 사네요.”
“그런가요……. 하하.”
“이렇게 착하고 바른 남자가 어디 있다고!”
멋쩍게 웃기만 하는 나언이 너무나 안타까운지, 그렇게 기영은 한참을 열불을 내며 자리로 돌아갔다. 나언은 기영의 역성에 그저 말갛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누군가 제 편을 들어 주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고 그의 말이 영 틀리기만 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퇴근한 나언은 기영과 함께 버스에 몸을 실었다. 기영이 말한 고깃집은 벌써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제 막 오픈한 가게의 입구는 분홍 리본을 단 화분이 잔뜩 놓여 있어 더욱 정신이 없었다. 한참 대기하다 2인 테이블을 안내받은 기영과 나언은 외투를 벗었다. 바깥과 달리 안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훈기 덕분에 후끈했다.
기영은 대표 메뉴를 주문한 뒤 먼저 나온 술을 돌려 깠다. 소주잔을 들고 기다리는 나언을 보며 기영이 물었다.
“술 잘 못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간이 안 좋긴 해요.”
“그러면 탄산음료 마실래요?”
“아니요, 가끔은 괜찮습니다.”
속상한 일이 있는 김기영 대리를 두고 혼자 술을 마시라고 하기도 그렇고, 솔직히 오늘은 나언도 술이 당기던 참이었다. 맑은 소리와 함께 투명한 잔에 소주가 가득 들어찼다. 병을 건네받은 나언도 기영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입매에 가벼운 미소를 띤 나언이 어딘가 벅차오른 목소리로 자그맣게 말했다.
“입사하고 처음입니다, 이런 자리.”
“그래요?”
어엿하게 회사에 적응하고, 이제 사회 친구가 생기니 제법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근래 크게 앓으며 매일 똑같은 루트로 회사와 집, 회사와 병원만을 오가던 나언으로선, 오늘의 만남이 새롭기도 했다. 어딘지 모르게 눈을 반짝이는 나언을 보며 씩 입매를 끌어 올린 기영이 사람 좋은 목소리로 분위기를 띄웠다.
“진작 같이 먹자고 할 걸 그랬네요. 짠 해요!”
두 소주잔이 부딪치며 청량한 소리가 났다. 나언은 고개를 꺾어 투명한 액을 들이켰다. 목 뒤를 넘어가는 소주가 엄청난 쓴맛을 남겼지만, 홀로 삼키는 수면제보다 훨씬 달았다. 외롭지 않은 탓이었다.
그리고 이런 말이 있었다. 술이 달면 그날은 죽는 날이라고.
기영의 억울한 썸의 종료를 위로하며 거듭 몇 잔을 마셨고, 칼집 사이에 배어 든 진한 육즙과 고기가 너무 부드러워서 또 한 잔, 이어지는 대화 사이에 추임새를 넣으며 연거푸 잔을 비웠다. 기영은 괜찮았지만 원래 술이 강하지 않은 나언은 어느 순간 얼얼하게 취기가 올라왔다.
“저 대리님.”
그래서 마음 아래 아주 깊숙한 곳에 꾹꾹 눌러 담았던 불안감이 다소 섣부르게 튀어나왔다. 나언의 부름에 고개를 든 기영이 대답했다. 벌게진 제 볼을 스스로 슥 훑어 내린 나언이 입맛을 한번 다시고 물었다.
“그 ‘환승’이라는 게 많이 흔한가요?”
나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단어를 곱씹던 기영이 다소 느리게 반응했다.
“아 아까 이야기한 환승이요?”
고개를 두 번 끄덕이는 나언을 보며 기영이 뒷덜미를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음…….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흔하긴 하죠. 요새는 그런 걸 주제로 예능 프로그램도 만들 정도니까.”
“그러니까 환승이라는 게 정확하게 뭔가요. 바람피우는 거예요?”
“비슷한데 흐음…….”
기영이 담긴 소주를 확 털어 넣고 잔을 내려놓았다. 나언도 덩달아 술을 마시려 하자 기영이 제지했다. 이미 눈가에 힘이 풀어진 모습을 보니 주량을 넘기기 일보 직전인 것 같았다. 기영은 양쪽 손의 검지를 들어 탁탁 부딪힌 뒤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환승은 애인을 갈아탄다는 의미예요. 사귀다가 질릴 때쯤 먼저 마음 정리를 다 끝내고, 헤어진 다음에 다른 사람을 바로 만나는 거죠.”
“아…… 질릴 때….”
“헤어지고 다른 사람이랑 연애를 시작하는 거니까 바람은 아니지만, 사실 헤어지기 직전에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기 시작한 거니까 바람이랑 다름이 없는 거죠.”
나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영은 환승을 하는 사람은 버릇처럼 또 환승을 한다며 혀를 낮게 찼다.
“저는 그렇게 차여 봤는데 진짜 기분 더럽더라고요. 마음 식은 티는 다 내면서 절대 헤어지자는 말은 안 하고. 그러면서 연락은 잘 안 되고 퍽 하면 약속 파투에. 나중에는 대놓고 제 앞에서 전화를 하더라고요. 직장 동료라면서.”
동료는 개똥, 나중에 그놈이랑 결혼하더라고요. 라고 말하던 기영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소주잔을 꾹 쥔 나언의 얼굴을 보고 얼어 버린 탓이었다.
“나, 나언 씨?”
나언은 기영을 보며 가만히 숨만 내쉬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 비해 커다랗고 순진한 눈에는 아슬아슬하게 눈물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우, 왜 울, 휴지, 휴지….”
당황한 기영이 휴지를 뭉텅이로 뽑아 나언에게 건넸다. 나언이 소주잔을 쥔 채로 움직이지도 않자 결국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휴지로 꾹 눌러 줘야 했다. 나언은 뒤늦게 손을 끌어 올려 휴지를 받아 들고 눈을 꾹꾹 눌렀다. 나언의 목 티 아래의 목젖이 가쁘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소리 내어 울지 않기 위해 억지로 울음을 삼켜 내느라 바빴다.
“나언 씨 괜찮아요…….?”
“아, 예, 예. 죄송, 해요.”
“아니에요, 울어요! 참지 말고 실컷 울어요.”
그 말에 나언의 눈에서 다시 굵은 눈물이 후득 떨어졌다. 기영은 나언이 조용히 울며 감정을 추스르는 동안 기다렸다. 한참 뒤 감정이 잦아든 나언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송하다고 재차 사과했다. 기영은 얼른 컵에 차가운 물을 가득 담아 나언에게 건넸다. 나언은 물을 홀짝이며 눈을 끔뻑였다. 긴 속눈썹이 푹 젖은 모습에 기영은 가슴이 찌르르 아려 오는 것을 느꼈다. 우는 얼굴이 이토록 안타까운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
기영이 아이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언 씨 왜 그래요,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제, 제…… 애인이 요즘 그래요.”
애써 담담한 척 말을 꺼냈지만 나언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뭐라고요? 자세히, 자세히 좀 말해 봐요.”
“애인이 저한테 잘은 해 주는데, 요새 자꾸 신경 쓰이게, 흐으, 굴어요.”
울음이 섞여 들어 가빠진 숨을 억지로 갈무리하며 어깨를 바들바들 떤다. 기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나언의 팔뚝을 쓸어내렸다. 나언은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는데, 요즘 들어 그 사람이랑 연락을 자주 해요. 이상한 건 제 앞에서는 높임말 했으면서 제가 없을 땐 반말로 친하게… 막….”
횡설수설하며 소주잔을 쥔 손을 살짝 떨더니 가득 담긴 소주를 그대로 입 안으로 털어 넣어 버렸다. 말릴 새도 없이 술을 들이켠 나언이 작게 우는 소리를 냈다. 역시나 떨군 고개 아래로 작은 눈물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몰래 엿들은 제 탓도 있지만, 으, 흑, 그게 너무 신, 경이 쓰여요. 속이는 거잖아요….”
“아이고……. 울지 마요, 나언 씨. 아니다 울어, 그냥 편하게 울어요.”
이미 울고 있으면서도 고개를 가로젓던 나언은 거듭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기영을 위로해 주러 나온 자리에 제가 더 서럽게 울어 대는 게 부끄럽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감정이 마음대로 컨트롤되지 않았다. 술기운 때문에 무슨 말을 뱉고 있는지도 제대로 인지가 되지 않는 나언이 허겁지겁 속상했던 일을 말했다. 두서없는 말 속에서도 꽤나 자극적인 단어가 들려와, 기영의 눈가가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제가 케이크를 주려 했는데,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한다고 그랬어요.”
“다른 사람이랑 결혼이요? 확실한 거예요? 뭐 나언 씨랑 결혼한다는 뜻일 수도 있잖아요.”
“아, 그럴 리는 없어요……. 절대.”
절대 결혼할 리가 없다는 말이 잘 이해 가지 않았지만, 기영은 나언의 속상함에 적극적으로 공감해 줬다.
“만약 그렇다 해도 사귀는 사람을 두고 다른 사람이랑 결혼을 하겠다니, 무슨 그런 쓰레기 같은….”
“뭐 제가 잘난 게 없으니까 그게 쓰레기까지는 아닌데, 생각할수록 속상해서…….”
이 와중에도 제 연인을 두둔하려고 하는 나언 때문에 기영의 입에서 진득한 한숨이 흘렀다. 코가 꿰도 단단히 뀄다. 돌연 다시 소주병으로 손을 뻗는 나언의 손을 붙잡아 내리며 기영이 다급하게 말했다.
“나언 씨 술은 그만.”
“제가 간이 개작살 나서 그러시는 건, 흑, 가요……?”
“개작살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순둥한 나언의 입에서 나온 자극적인 단어에 화들짝 놀란 사이 나언은 병을 확 잡아당겨 제 잔에 술을 붓고 다시 벌컥 들이켰다. 뒤늦게 나언을 저지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안주도 먹지 않는 나언의 속이 상할세라, 입술 사이로 억지로 계란찜을 밀어 넣은 기영은 나언의 잔을 테이블 구석으로 치워 버렸다.
주정을 부리는 게 귀찮을 법한데도 기영은 그저 나언이 짠하기만 했다. 늘 고분고분 착하게 맡은 바 최선을 다하던 나언이 저렇게 힘들어하고 있다니. 제 동생 같아서 걱정되면서도, 나언을 괴롭히는 신원 미상의 여자 친구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리 착하고 바보 같은 남자에게 못살게 굴다니. 어지간히 잘나신 분인가 싶다.
“나언 씨 이렇게 참으면서 마음고생을 하지 말고 말을 해 봐요.”
“말이요……?”
“네, 대화요. 툭 까놓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혹시 다른 사람이 생겼냐고.”
“……대화.”
“오해일 수도 있잖아요.”
그 말에 작은 희망을 엿본 듯 눈썹을 살짝 끌어 올린 나언이 잠시 말을 멎었다. 그것도 잠시 순식간에 눈동자에 침울함이 들어찼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낯으로 돌아온 나언은 조그만 목소리로 기영에게 물었다. 아니, 물음을 가장한 솔직한 하소연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진짜 그런 거면 어떡해요?”
“…….”
“이제 겨우 그 사람이 좋아져 버렸는데.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한데요.”
“그런 썩을 년이면 당장 헤어져야죠, 시간 낭비 그만하고!”
“…….”
“나언 씨는 절대 보잘것없지 않아요. 사람 착하고 일 잘하고 이렇게 잘생겼는데……. 당장 길거리만 나가 봐요, 나언 씨 좋다는 여자들 엄청 많을 거예요.”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나언의 입매가 살짝 솟았다. 무슨 마음으로 어떤 생각을 담고 있는 것인지, 나언의 눈은 펑펑 울던 아까보다 살짝 웃고 있는 지금이 훨씬 슬프게 가라앉았다. 그러더니 푹, 테이블 위에 팔을 포개고 그 위에 이마를 얹어 버렸다. 벙찐 기영이 나언을 불렀다.
“나, 나언 씨?”
엉겁결에 엉덩이를 떼고 일어난 기영이 나언의 어깨를 살살 흔들었다. 하지만 나언은 몰려드는 취기를 주체하지 못했다. 울적한 마음으로 들이켰던 몇 잔이 결국 주량을 가득 넘기고 말았다.
“나언 씨 집에 가야죠.”
당황한 기영이 몇 번이고 나언을 불렀지만, 나언은 잠깐 눈을 뜨기만 할 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결국 기영은 나언을 옆구리에 업어 들듯이 끼고, 나언의 외투와 짐까지 챙겨 들어야 했다. 그마저도 나중에는 손이 부족해서, 결국 기영은 나언을 업고 가까운 자신의 오피스텔로 들어왔다.
“아이고 집이 가까워서 망정이지.”
기영이 곡소리를 하며 나언을 소파에 눕혔다. 걸어오는 내내 고롱고롱 코 고는 소리까지 냈던 나언은 소파가 푹신해서 좋은지 입맛을 다시며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나언을 눕히며 끌려 올라가 버린 셔츠를 내려 주고, 넥타이와 첫 단추까지 끌러 준 기영은 나언의 목 아래에 베개를 받쳐 주고 침실에서 두툼한 이불을 끌어왔다.
울다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며 기영이 한숨 어린 혼잣말을 뱉었다.
“같이 먹자고 안 했으면 이걸 혼자 다 참고 있었겠네.”
그때 나언의 외투 아래에 놓여 있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점?”
점으로 표시된 이름에서 전화가 끊임없이 울렸다. 잠깐 전화가 끊긴 사이, 잠금 화면 위로 팝업 메시지가 우수수 떠올랐다.
「나언아 [오후 11:12]」
「외출은 좋은데 [오후 11:12]」
「연락은 되어야지. [오후 11:12]」
“허.”
순간 눈물을 매달고 슬프게 웃던 얼굴이 떠오르며 기영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이제 보니 메시지의 뉘앙스 또한 묘하게 고압적이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가 울렸다. 기영은 빨간 버튼을 눌러 전화를 거절해 버렸다.
“에이 몰라, 나언 씨도 복수해요!”
그런데 다시 전화가 울린다. 홧김에 휴대 전화를 꺼 버린 기영은 나언의 전화기를 소파 옆 테이블에 올려 뒀다. 하루쯤은 저런 애인 욕 실컷 하고 애 한번 태웠으면 싶었다.
“그래도 저 정도로 전화해 대는 걸 보면 영 마음이 뜬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요즘 세상, 두 다리 세 다리씩 걸치는 이상한 사람들도 많기에 확답하긴 힘들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느껴지는 촉 또한 무시 못 할 일이고. 특히 나언처럼 착하고 순진한 경우엔 그런 못된 인간들이 꼬일 확률이 훨씬 높았다. 연인이 다른 마음을 먹어도 모질게 헤어지지도 못해, 그렇다고 따지지도 못한 채 혼자 끙끙대는 성격이라면 손안의 떡처럼 마음대로 주물대며 나언을 놓아주지 않을 가능성도 컸다.
“쯧…….”
일도 잘하고 싹싹하고, 마음까지 여린 나언이 주는 것 없이 짠하고 안타까운 기영은, 맘고생 시키는 연인 따위 얼른 정리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으면 싶었다.
“하아암.”
기영 역시 술을 적게 먹은 것이 아니라 피곤이 몰려왔다. 대충 씻고 나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제 침대에 털썩 앉았다. 그런데 손 닿는 곳에 둔 제 전화가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기영이 손을 뻗어 들자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찍혀 있었다. 모르는 전화는 받지 않는다는 지론에 따라 전화를 무음 처리하고 스트리밍 애플리케이션을 눌렀다. 괜찮은 영화 하나를 골라 틀고 자려는데, 성가시게도 다시 전화가 울렸다.
“아 뭐야…….”
아까와 같은 번호였다. 모르는 번호더라도 두 번 이상 전화가 오면 받는다는 두 번째 지론에 따라 기영은 통화 버튼을 누르며 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김기영 씨. 혹시 백나언이랑 같이 있나요?]
“뭐야……. 누구세요? 누구신데 이 시간에.”
[그러니까, 이 시간에. 같이 있냐고 물었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정중했다. 하지만 묘하게 끝을 끊어 먹는 반말에 은은하게 느껴지는 오만한 어투는 왠지 모르게 불쾌할 정도로 서늘한 기색을 묻히고 있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목소리가 낯이 익을까. 마치 배우처럼 톤이 부드럽고 낮아서 그렇게 느끼는 건가 싶은 기영이 다소 불퉁하게 대답을 남겼다.
“그쪽이 누군데 그런 걸 묻냐고요.”
수화기 너머로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제 와 들으니 한숨이 아니라 담배 연기를 뱉는 소리와 더 닮아 있었다. 나른한 숨소리 끝, 감정을 눌러 담은 싸한 목소리가 뒤이었다.
[최기원입니다.]
“최 뭐요? 이름만 말하면 누가 알아요.”
띵동-.
지가 연예인인 줄 아나, 혼잣말처럼 대답을 읊조리던 중 갑작스레 인터폰에 호출음이 울렸다. 기영은 다시 슬리퍼에 발을 끼우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1층 방문객을 비추는 화면에는 반쯤 가린 인영이 보였지만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쉬려던 찰나 전화에 인터폰까지 울려 대니 짜증이 왈칵 인다. 기영은 끊기지 않은 전화에 대고 양해를 구한 뒤 인터폰을 다시 들었다. 행여 거실에서 곤히 숙면 중인 나언을 깨울세라 기영이 목소리를 낮췄다.
“잠시만요. 누구세요?”
그런데 묻자마자 1층을 비추는 화면 속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남자는 전화 중인 듯 휴대 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고, 그 남자가 입술을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기영의 휴대 전화로 목소리가 들렸다.
[최기원입니다.]
그리고 상체를 살짝 숙인 남자가, 인터폰 화면으로 얼굴을 비스듬히 비췄다. 조도가 낮고 어둑한 화면 안에 들어찬 얼굴을 보자마자 기영은 얼빠진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어, 어……?”
기영이 비명이 나올 뻔한 입을 가까스로 막았다. 심장이 지나치게 빠르게 뛰어 가슴까지 벌렁댔다. 기영이 당황해서 얼을 타는 사이 화면 속 남자는 표정 변화 없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문 열라고.]
왜 갑자기 무서운 얼굴로 반말을 하는지, 아니 그걸 떠나서 사장님이 왜 나언 씨를 찾고, 어떻게 제집 앞에 서 있는지 온통 당혹스러운 감정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손은 착실히 문 열림 버튼을 눌렀다. 얼마 뒤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에 기영은 아무 티셔츠나 집어 끼우며 문고리를 돌렸다. 다만 문을 다 열지 않고 고개를 살짝 뺀 상태로 상황을 살피려 했다.
“…….”
그러나 정말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최기원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문을 놓고 얼른 꾸벅 고개를 숙여야 했다. 정말 이름만 말해도 아는 사람이라니, 기영은 행여 연예인이냐고 빈정댔던 제 혼잣말이 들렸을까 봐 가슴이 거세게 조여들었다.
“헉, 사, 사장님. 안녕하세요.”
기원은 대답 대신 열린 문틈 사이로 손을 넣어 문을 마저 열어젖혔다. 기영을 지나친 기원은 보폭을 넓혀 현관으로 들어섰다. 두 장정이 서자 좁은 오피스텔의 현관이 꽉 찼다. 기원은 현관에 들어오자마자 바닥을 내려다봤다. 타일 위에는 널브러진 나언의 신발이 놓여 있었다.
기원은 기영을 쳐다보지도 않고 운동화를 신은 그대로 집 안까지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쿨쿨 잠든 나언을 발견한 순간 기원의 눈이 순식간에 불온해졌다. 나른하게 올라간 눈매가 어느 순간 칼날처럼 예민해졌다.
“사, 사장님….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저희 집은 어떻게 아시고….”
기원이 빙글 몸을 돌렸다.
“사장은 씨발.”
기원의 눈이 테이블 위의 휴대 전화를 향했다. 이윽고 저벅저벅 걸어가 그걸 들어 올렸다. 역시나 꺼져 있었다. 휴대 전화를 켜자 제가 건 부재중 전화의 알림과 아직 한참 남은 배터리가 보였다.
“…일부러 끈 것 같네, 꼭.”
다 들리는 혼잣말에 기영은 뜨끔해서 아무런 답을 남기지 않았다. 기영은 흘끔흘끔 기원을 살폈다. 그러니까, 지금 저 사람이 정말 사장님 맞는 거지 싶은 마음이었다. 술김에 헛것을 보고 있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높을 정도였다. 기원은 후드 티셔츠 위에 패딩을 입고 추리닝 바지를 입은 모습이었다. 머리도 전혀 만지지 않아 이마를 덮고 있으니 회사에서의 모습과 전혀 매치가 안 된다.
이런 곳에서 사장님을 조우한다는 게 믿기지 않긴 했지만, 기영은 기원이 불쾌한 감정을 전혀 숨기지 않고 표출하는 것이 더 신경 쓰였다. 마치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탓에 기영은 긴장에 달달 떨리는 손을 숨겨야 했다. 기영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애써 웃으며 기원에게 말을 건넸다.
“나, 나언 씨랑 친분이 있으셨나요? 오늘 저랑 술 약속이 생겨서 마셨는데 혹시 선약이 있으셨던 걸까요.”
“친분?”
“……예?”
“선약?”
그러고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고개를 젖혔다. 무언가를 그득히 인내하는 듯한 모습에 기영은 얼굴색을 하얗게 물들이며 저절로 어깨를 움츠렸다. 저도 제법 키가 크고 운동을 소홀히 하지 않은 몸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섣불리 나설 상황이 아니었다. 사장과 사원이라는 사회적 위치를 차치하고서라도 그저 피지컬이나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사장님은 먼발치서 보기에도 키나 체격이 커 보였는데, 자신을 살짝 아래로 내려다보는 지금은 무서움을 느낄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기원은 아무런 말 없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남의 집에 신발을 신고 들어와 담배까지 피우는 모습에 기영은 기함했다. 제 상사가 성격이 유한 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기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으로 담뱃대의 필터 쪽을 짓씹으며 말했다.
“애는 술이 개떡이 됐는데 기영 씨는 멀쩡하네요.”
그야 나언이 술을 더 먹기도 했고 솔직히 주량도 약해 보였다. 뭐라 대답할 말이 없이 뒷덜미를 긁적이기만 하자 기원의 시선이 스르륵 미끄러져 다가왔다. 내려다보는 시선 끝에 살이 에일 정도의 한기가 묻어 있었다.
“억지로 먹였어요 술?”
“아, 아닙니다!”
즉답이 튀어나왔다. 행여 괜한 오해를 살까, 기영은 손을 내저어 격하게 부정한 뒤 나언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나언 씨가 힘든 일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살기까지 스쳤던 기원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한쪽 눈썹을 살짝 움찔한 기원이 ‘힘든 일….’이라고 혼자 되뇌더니 가장 합리적인 추론을 던졌다.
“회사에서 누가 괴롭히나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흘끔 잠들어 있는 나언을 살핀 기영이 자그맣게 말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나언의 개인사를 함부로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말하지 않으면 정말 기원에게 얻어맞거나 회사에서 잘리거나 두 개 중 하나의 불행은 필연적으로 겪을 것만 같았다.
“나언 씨 여자 친구가 바람을 피우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기원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기만 하자 어쩐지 귀 끝까지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나언의 불행을 팔아넘겨 살아 보려는 구차함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기영은 해명을 멈출 수 없었다.
“많이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리 말려도 술을 연거푸 먹더라고요. 그러다 결국 몸을 가누지를 못하기에 여기로 데리고 온 겁니다. 사람이 많이 울면 취기가 더 올라오고 하니까요……. 아무튼 저는 정말! 사장님이랑 선약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제가 왜 변명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영은 기원의 취조 같은 물음에 하나하나 답변하며 나언이 이렇게 인사불성이 된 것에 제 책임이 없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나섰다. 기원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옮기고 입술 새로 연기를 흩트렸다. 거실에 매캐한 연기 냄새가 퍼졌다.
“전화는 그쪽이 넘겼고?”
“무슨…, 무슨 전화 말씀하시는지.”
“내가 계속 전화했는데.”
그리고 기원의 대답에 기영은 등허리에 우수수 소름이 돋아났다. 곧이어 설마 하며 든 생각에 눈가를 살짝 찌푸린 순간, 퍼즐이 맞춰지듯 불안한 예감이 짙어졌다.
-아, 아뇨. 김기영 대리님이 저녁 먹자고 하셔서요.
-아, 안되나요?
-「나언아 [오후 11:12]」
-「외출은 좋은데 [오후 11:12]」
-「연락은 되어야지. [오후 11:12]」
절절매며 자신과의 술 약속을 허락 맡던 나언의 모습, 메시지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묘한 고압감. 그럴 리 없다 부정하기엔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맞아떨어지는 상황에 숨 쉬는 것도 잊은 순간, 기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애가 뒤졌으면 곱게 싸서 집에 보낼 생각을 해야지. 왜 여기까지 쳐 끌고 와.”
“…….”
“보는 애인 빡치게.”
숨을 내쉬는 것을 잊은 기영이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이미 몸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지금 최기원 사장님이 나언의 애인이라는 거지…. 귀로 들으면서도 온전히 이해가 되지 않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며 곱씹어야 했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대는 사이 조용한 거실에 작은 신음이 울렸다. 두런대는 말소리와 인기척에 나언이 잠에서 깬 것이다.
“으, 음…….”
소파에 드러누운 채로 눈을 비비적대던 나언이 찌푸렸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치미는 갈증 탓에 눈을 떴는데 눈앞의 풍경이 지나치게 생소했다. 잠시 멍하게 천장을 응시하던 나언이 사색이 되어 퍼뜩 몸을 일으켜 앉았다. 소파 쿠션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쳤다…….”
주변이 지나치게 낯설다. 이건 불길한 징조였다. 나언의 머릿속이 빨간 경고음으로 가득 찼다. 분명 기원에게서 연락이 잔뜩 쌓여 있을 것이다. 얼른 짐을 챙겨서 출발해야 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제 짐을 찾던 나언은 허둥지둥 휴대 전화를 찾기 위해 손으로 소파 위를 뒤적거렸다. 두터운 이불 사이를 마구 헤집던 중,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건넸다.
“이거 찾아요?”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를 인지한 나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언의 시선 끝에 제 휴대 전화가 걸렸다. 휴대 전화에서 소맷자락, 소맷자락에서 천천히 얼굴로 시선이 옮겨 가고 결국 기원과 나언의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나언의 마른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그러잖아도 커다란 눈은 더 크게 벌어졌다. 나언이 물에 빠진 사람처럼 몸을 허우적대며 소파에서 내려섰다.
“최, 최기원 씨. 여기…….”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마찬가지로 난처함을 잔뜩 묻힌 기영이 애매한 위치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서 있었다. 치밀던 술기운이 모조리 달아났다. 나언은 입술을 콱 짓씹으며 기원을 향해 설명했다.
“술을 마시다가 조절을 못 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애매하게 잠이 깨 버리니 숙취가 몰려와 머리가 지끈댔다. 사과 끝물에 목소리가 잠겨 들어 얼른 헛기침을 했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나언을 응시하던 기원이 살짝 웃으며 말을 건넸다.
“혹시 복수하는 거예요?”
“…….”
“내가 좆같으면 말을 해요. 무릎이라도 꿇고 있을 테니까.”
“…….”
“이렇게 주기적으로 사람 엿 먹이지 말고.”
오피스텔이 싸한 정적으로 가라앉았다.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몇 번 입술을 달싹대던 나언도 결국 푹 고개를 수그리고 말았다. 그걸 지켜보고 선 기영 역시 미칠 노릇이었다. 기원과 나언이 이 정도로 친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이었는데, 그 친분이 애인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다리에 힘이 풀리려 했다.
하지만 기원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오로지 나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먹이를 앞에 둔 짐승 같은 눈빛이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러면 일부러 전화를 끈 쪽에게 다시 물어볼까요?”
머리털이 쭈뼛 선 기영이 곁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자, 자는데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요, 정말 사장님인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것 봐요, 이 새끼는 여기서 재우려고 작정했는데 뭘.”
“대리님은 정말 모르셨습니다.”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언이 고개를 들어 기원을 쳐다봤다. 손을 들어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꾹 누른 나언이 기원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요. 대리님이랑은 상관없잖아요.”
“김기영이랑 마셨고 김기영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김기영이 왜 상관이 없지.”
나언은 잠시 대답을 멈췄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나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기원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에는 기원이 오롯이 들어찼다. 분노하는 감정의 파편을 날것처럼 드러내고 있는 사나운 상대를 보며 나언은 도리어 감정의 파고가 가라앉는 듯했다.
“…보면 알지 않습니까, 아무 일 없는 거.”
난처함에 눈 둘 곳이 없던 기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사색이 되었던 나언의 얼굴빛이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까와 달리 나언의 말투 역시 쏘아붙이듯 단단해졌다.
“대리님은 제가 술 조절 못 해서 챙겨 준 것뿐입니다. 그러면 저를 그냥 그렇게 버려두고 가는 게 맞는 겁니까?”
“백나언-,”
“……주기적으로 사람 엿 먹이지 말라고요?”
점점 화가 깃드는 모양인지, 나언이 큰 눈을 깜빡이며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기원을 올려다본 나언은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기원 씨나 그러지 마세요.”
“…….”
“대리님,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기영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현관을 향해 뛰어갔다. 마지막 인사에는 감추지 못한 울음기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나언은 휴대 전화, 외투, 넥타이를 모두 내버려 둔 채 무작정 신발을 구겨 신고 현관을 벗어났다. 기원이 나언을 불렀지만 이미 문은 굳게 닫힌 뒤였다. 욕을 짓씹은 기원은 나언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나갔고, 텅 빈 집에는 기영만 우두커니 서 있었다.
“허, 허어…….”
비틀대던 기영이 겨우 소파 팔걸이를 붙잡고 어기적대며 앉았다. 도대체가 무슨 상황인지, 얼빠진 낯의 기영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엇을 부정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현실을 외면하고만 싶은 가련한 몸짓이었다.
술도 취했고 잘 뛰지도 못할 거라는 생각에 얼마 안 가서 잡히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나오자 아무런 인기척 없이 휑한 공간이 펼쳐진 것을 보며 기원은 엘리베이터를 살폈다. 이미 1층 언저리에 도착한 걸 보고, 기원은 미련 없이 계단을 택했다.
제법 숨이 가쁘게 뛰어 내려왔는데도 1층에도 나언의 흔적이 없었다. 날은 춥고 나언은 술까지 마신 상태였다. 기원의 신경이 곤두섰다. 급하게 챙겨 나온 나언의 외투를 움켜쥔 기원은 여러 갈래의 길 중 어디로 갈지 망설이다 제일 큰길을 따라 보폭을 넓혀 뛰었다. 다행히 얼마 안 가 더디게 뛰고 있는 나언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얼마나 필사적으로 뛰었는지, 나언이 멈춘 곳은 오피스텔에서 꽤나 떨어진 공원 언저리였다.
나언은 몇 발짝 더 뛰어 보려다 조금씩 보폭을 줄였다. 곧장 불러 세우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기원은 나언이 걸어가는 대로 내버려 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가쁘게 등을 들썩이던 나언은 터벅터벅 힘없이 걷다 공원 벤치에 털썩 앉았다.
새벽이 다가와 어둠이 내리는 공간, 유일하게 은은한 빛을 내는 가로등 아래에서 나언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천천히 걸음을 멈춘 기원은 나언의 얼굴 아래로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방울에 시선을 고정했다. 가쁘게 등을 들썩이던 것이 숨이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벤치에 앉은 나언은 등을 들썩일 정도로 서럽게 울고 있었다. 겨우 눈가를 쓸어 눈물을 닦아 내는 손끝은 빨갛게 얼어 있었고 나언이 헐떡일 때마다 입술 아래에선 하얀 입김이 뿌옇게 번졌다.
더는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나언에게 다가갈수록 히끅대는 울음소리가 커졌다. 엉엉 울다가도 입술을 꾹 깨물고 잠시 소리를 죽였고, 그러다 비어져 나오는 눈물을 못 참아 다시 소리를 내며 울었다.
기원은 나언의 어깨 위로 외투를 둘러 덮었다. 그러고 자신의 패딩을 벗어 한 번 더 그 위를 둘렀다. 나언의 울음이 그쳤다. 소리를 죽여 참는 듯한 소리를 내는 나언의 앞에 기원이 한쪽 무릎을 보도블록에 대고 꿇어앉았다.
“…….”
김기영 대리가 말했던 나언의 힘든 일과 자신을 보며 마찬가지라고 읊던 참담한 목소리를 떠올린 기원은, 나언이 무언가 풀기 힘든 오해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원은 고개를 푹 숙인 나언의 발간 손을 제 손으로 덮었다. 나언이 얼음장 같은 손을 빼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언을 달래려던 순간, 예상외로 나언에게서 먼저 물음이 터졌다.
“결혼해요?”
“뭐?”
“최기원 씨 결혼하냐고요.”
터무니없는 질문에 놀라 되묻자 나언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재차 물어 왔다.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한계까지 고여 있었다. 눈물 때문에 가닥가닥 뭉친 속눈썹과 빨갛게 언 입술, 젖어 버린 하얀 뺨은 애처롭게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아니라고 대답해야 할 기원은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 ……네. 이렇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긴 기원은 한쪽 눈썹을 비뚜름하게 찡그렸다 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니,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기원은 나언의 반응을 보고 말을 멎고 말았다. 나언이 턱을 잘게 떨더니 다시 눈물을 왈칵 쏟아 내는 것이다. 그 절망스러운 표정에 기원의 낯도 점점 굳어 갔다. 결혼이라는 말을 이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다. 결국 기원의 목소리가 숨길 수 없이 가라앉았다.
“싫어요?”
“…….”
“그렇게 싫냐고.”
기원의 거듭된 물음에 나언은 기원이 붙잡고 있는 손을 빼냈다. 나언은 어딘지 모르게 기운이 빠져 버린 눈으로 기원에게 물었다.
“그럼 좋아해야 해요?”
기뻐 날뛰리라 생각지 않았지만 이렇게 상처받을 줄도 몰랐기에 말문이 막혔다. 나언은 굳은 기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느리게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몸도 자주 아프고 기원 씨에게 기대서 사는 건 맞지만. ……바보 천치는 아니에요.”
“알아듣게 말해.”
기원도 이젠 머리가 지끈대는 기분이었다. 제가 계획했던 대로 청혼했다면, 험한 꼴을 봤겠다 싶으니 속까지 메스꺼워지는 느낌이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싶어 시작했던 일이었는데, 정작 상대는 세상을 전부 잃은 것 같은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러려고, 이런 얼굴을 보려고 그렇게 바쁜 시간을 쪼개며 애쓴 게 아니었다.
“올해 안에 그 변호사분이랑 결혼한다는 거 알고 있어요.”
“변호사?”
“그때 집 앞까지 왔던 여성분이요.”
굳은 기원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는 표정까지 깃들기 시작하자, 나언이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제 앞에서는 높임말로 통화했으면서 실은 그분이랑 친하잖아요. 저 다 알아요.”
말을 해 놓고도 기원이 잡아뗄까 봐 나언이 뒷말을 붙였다. 다 들었다고, 전화하는 거.
‘전화라….’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기원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조금씩 맞붙기 시작했다. 힘든 일이 있다며 울었다던 나언, 그러지 말라며 원망하듯 쏘아붙이던 목소리, 그리고 결혼이라는 단어에 상처받은 눈을 하던 낯빛까지.
기원은 나언이 잡아 뺐던 손을 재차 붙잡고 물었다. 일전보다 훨씬 침착해지고 누그러진 목소리가 부드럽게 나언을 얼렀다.
“그러니까 내가 그 변호사랑 결혼을 한다고?”
“네.”
“내가 걔랑 결혼을 왜 하는데?”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하지만 다들 그렇다니까.”
“정확하게 누가 그런 말을 했지?”
허튼 찌라시가 결국 나언에게 까지 들어갔나 싶은 기원의 물음에 섬뜩한 살기가 깃들었지만, 나언은 제 감정에 푹 빠져 있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저도 처음엔 아니겠거니 했는데, 최기원 씨가 점점 그렇게 구니까…….”
“하…. 내가 어떻게 굴었는데.”
제 손안의 차가운 손이 꿈틀댔다. 그새를 못 참고 또 손톱 주변을 꾹꾹 눌러 대려 하는 걸 억지로 떨어뜨려 놨다. 그저 버릇이라 생각했던 행동이었는데, 요즘 들어 심해진 상처가 썩어 가는 속마음을 비추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속이 타는 기분이었다. 나언이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나언은 꽤 옛날 일부터 반추하기 시작했는데 기원에게는 그게 꽤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원이 형 기일에 연락 없이 늦었었죠?”
“…….”
“그렇게 크게 다쳤으면서 여태 이유도 말 안 해 주셨어요.”
잘 넘어갔다고 생각했던 일부터 또렷하게 말하는 나언을 보며 기원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언은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을 고른 후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너무 자주 늦어요.”
“……일 때문에,”
“통보식으로 늦는다고 말해 놓고 늦으면 그건 괜찮은 거예요?”
나언은 머릿속으로 기원과 나눈 메시지를 거꾸로 훑었다. 최근에 기원과 나눈 연락은 모두 늦는다는 내용이었다. 늦는다, 늦으니 먼저 집으로 가라, 곧 도착할 예정이다, 늦어서 미안하다…. 나언은 알겠다는 대답을 남긴 것이 전부였다.
제가 병원을 다녀온 날도, 주언이의 사진을 붙들고 눈물을 한 움큼 쏟은 날에도 기원은 늦었기에 나언은 홀로 마음을 달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애써 담담하게 굴었지만, 그것조차 식어 가는 과정의 단초처럼 느껴졌다.
점점 나언의 눈에 생각이 들어차는 걸 보던 기원이 말했다.
“그 여자랑 결혼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왜 거짓말을…….”
“너야.”
나언의 헛된 상상을 잘라 내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언은 그런 기원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기만 했다. 다짜고짜 ‘너’라니. 순간 기원마저도 술에 취한 것일까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나언의 생각이라도 읽은 듯, 기원은 다시 한번 나직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너랑 결혼할 거라고 백나언.”
“저랑 어떻게, 결혼을….”
드디어 나언이 동요했다. 기원의 손안에서 나언의 손이 퍼뜩 굳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여전히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저를 불안하게만 바라보는 나언이 안심할 수 있도록, 기원은 옅은 미소와 함께 나언의 젖은 뺨을 쓸어 주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조용한 공원에 울렸다.
“그러게. 백나언이 싫다 하면 어쩌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놓은 기원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나언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얽었다. 얼이 나간 듯, 눈물이 얼룩진 표정으로 자신을 멍하게 내려다보는 나언과 눈을 맞추며 기원이 손을 살살 흔들었다.
“결혼하자.”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운동복 차림의 기원이 엉망으로 울고 있는 나언을 달래며 청혼했다. 아무도 오가지 않는 어둑한 새벽의 작은 공원의 가로등 아래. 기원은 두 달여간 준비했던 프러포즈를 예상보다 훨씬 초라하게 건네야 했다.
***
나언은 기원에게 외투를 건넸지만 기원은 그걸 다시 나언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아까만큼 춥지 않았지만 나언은 그냥 잠자코 있었다.
김기영 대리의 집에서 무작정 뛰어나온 길을, 기원은 차근차근 되짚어 돌아갔다. 얼마 가지 않아 오피스텔 앞 도로 한가운데에 삐딱하게 주차되어 있는 기원의 차를 발견한 나언이 퍼뜩 굳었다. 아까 울며불며 뛰어나갈 때는 몰랐는데, 차가 주차된 꼴만 봐도 기원이 여기까지 눈이 뒤집혀 왔을 모습이 선하게 그려졌다.
“잠깐 있어요.”
기원은 나언을 차에 태우고 히터를 켰다. 조금 뒤 다시 온 그는 나언에게 따뜻한 유자차 병을 건넸다. 아주 옛날, 기원이 무심한 표정으로 이걸 건넸던 때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때처럼 매끄러운 병을 감싸 쥐자 붉은 손끝에 따스함이 전해진다. 따뜻한 공기를 쐬며 차를 마시니 이제야 조금 진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눈을 뜨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퉁퉁 부은 얼굴이 느껴져 너무 민망했지만, 기원은 아무런 말 없이 시동을 걸었다. 나언도 잠시 허리를 펴고 버텨 보다 결국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너무 많은 것을 겪으며 혼란스러워진 머리가 백기를 든 탓이었다.
시트에 멍하게 늘어져 있던 나언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건, 차가 고속도로에 진입했을 때였다. 어둑한 새벽, 기원의 차는 집을 향하는 대신 고속도로를 빠르게 질주했다. 서울 톨게이트를 빠져나가는 순간 꾸물꾸물 몸을 일으킨 나언이 기원을 불렀다.
“어디로 가요?”
“거의 다 왔어요.”
나언은 기원의 말에 다시 입을 닫았지만, 차창 밖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에 심장이 콩닥대기 시작했다. 분명 본 적 있는 길이었다. 나언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굳은 얼굴로 한적한 도로 주변을 살폈다. 오랜 시간을 달린 차는 익숙한 모습의 골목에 들어서며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그때쯤 나언의 얼굴은 남아 있던 핏기가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기원은 시동을 끈 뒤, 차에서 먼저 내려섰다. 뒤로 빙 돌아와 조수석 문을 연 그가 나언을 보며 말했다.
“내려요.”
차체가 높아 두 사람의 눈높이가 알맞았다. 나언은 어두운 와중에도 다급하게 그의 표정을 살폈다. 기원은 화가 난 것 같지도,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나언은 벨트를 붙잡은 채로 겨우 입을 열었다. 숨이 옅게 차오른 목소리에서 불안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여기… 싫어요.”
역시나, 나언은 기억하고 있었다. 기원은 겁을 집어먹고 굳은 나언을 향해 눈썹을 살짝 끌어 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보여 줄 게 있어서 그래.”
차분한 목소리의 기원은 살짝 떨리는 나언의 무릎 위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덮었다. 안심하라는 듯이 두어 번 쓸어내리자 나언이 작게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숙였다. 심란한 낯을 한 나언이 입술을 가만두지 못하고 몇 번이나 짓씹었다. 그런 나언을 바라보는 기원의 가슴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이곳은 나언을 감금했던 기원의 작업실 건물 앞이었다.
“뭘, 뭘 보여 주는데요…….”
“백나언이 산통 깨 버린 수많은 것들 중 하나?”
기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기원은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나언의 불안이 가시기를 기다리며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겨울바람을 따라 부연 연기가 흩날렸다. 나언은 기원의 태를 흘긋 살펴보다 입매를 단단하게 굳힌 뒤 조심스레 안전벨트를 풀었다. 기원은 담배를 들지 않은 손을 내밀어 나언의 손을 잡아 줬다. 겨우 유자차로 데워 줬던 손끝이 다시 식어 버렸다.
벽돌로 마감된 외관은 다소 낡았지만, 내부 인테리어는 세련된 건물은 나언의 흐린 기억 속의 모습과 정확히 닮아 있었다. 나언은 계단을 한 칸씩 오르면서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 감금됐었다. 사람이 죽어 가는 광경을 목도 했었고. 아직도 진실인지 아닌지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할 수많은 환영과 환청에 시달렸다. 자신이 손쓸 수 없이 망가졌던 곳이며 그 결과는 오랜 시간 동안 악몽과 가위로 나타났었다. 나언이 떨리는 주먹을 꾹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등 뒤의 기원을 바라보았다. 똑같은 장소지만, 분명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다. 등 뒤의 남자를 믿고 싶었고 믿어야 했다.
계단참을 돌자 밝은 빛이 쏟아졌다. 유일하게 불이 켜진 5층의 공간은 모든 조명이 켜져 있어 아주 밝았다. 눈을 살짝 찌푸렸다가 뜬 나언이 안을 천천히 돌아봤다. 작업실에는 여전히 수많은 물건이 너저분히 늘어져 있었는데, 기억보다 조금 더 무질서한 모습에 나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선 자주 늦었던 이유.”
등 뒤에서 기원의 목소리가 울렸다. 작업실에 들어선 나언이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않자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언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고개를 살짝 내려 뒤에서 나언의 얼굴을 살폈다. 나언의 눈은 설명하기 어려운 색의 감정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
넓은 공간 곳곳에 다양한 크기의 캔버스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벽에 세워져 있기도, 쌓인 도록에 기대어져 있기도 했고 테이블 위에 얹어져 있기도 했다. 크고 작은 캔버스는 완성된 것이 많이 없었다. 하지만 수많은 습작은 모두 한 사람을 그리고 있었다.
백나언, 자신이었다.
“쪽팔려서 습작까지 보여 주진 않을 생각이었는데.”
멋쩍게 웃으며 연기를 뱉어 낸 기원이 나언을 두고 저벅저벅 걸어가 커다란 캔버스 하나를 들어 올렸다. 뒤로 돌린 채 벽에 기대어져 있던 작품이었다. 기원은 담배를 잇새에 물고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짠.”
찬란한 노을이 부서지는 바닷가, 모래사장 위의 한 남자가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작품들 보다 훨씬 공들여 그려진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 멈춰 세운 듯 돌아보고 있는 자신은 믿기 힘들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렇게 좀 웃어 봐요.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기가 힘들잖아.”
“…….”
“울지 말고.”
기원의 말에 나언이 퍼뜩 손을 들어 올려 뺨을 훔쳤다. 눈물을 닦아 내면서도 자신이 울고 있는 줄 몰랐다. 옅은 숨이 뒤늦게 터졌다. 나언이 한 걸음을 뒤로 내딛자 기원이 작품을 내려놓고 그에게 다가왔다.
“뭐, 우니까 좋기도 하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달래 주는 기원을 보며 나언 역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원은 나언의 젖은 뺨 위에 입술을 묻었다.
작업실 소파에 앉은 나언은 기원의 설명을 들으며 따뜻한 차를 들이켰다. 그는 퇴근 후 그림 작업에 몰두하느라 자주 늦었던 것이며, 낯부끄럽게도 자신을 주제로 한 그림을 가득 채워 놓고 프러포즈를 할 계획이었다고 설명했다. 그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열이 올랐는데, 히터를 세게 틀어 놓은 탓인지 그를 오해해서 모든 계획을 망쳐 놓은 게 부끄러워서인지 모르겠다. 따뜻한 캐모마일차가 든 잔을 꾹 쥐고 입매를 단단하게 굳힌 나언이 다시 한번 작업실을 둘러봤다. 이곳이 이토록 따뜻하고 편안한 공간이 될 수 있다니. 나언이 울렁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사이, 기원은 그동안 그려 왔던 그림 몇 가지를 가져와 보여 줬다.
나언과 기원이 함께 맞추었던 아몬드 나무 퍼즐의 모작, 바다, 파, 도가 함께 뒹굴뒹굴하는 거실의 전경 등. 작은 캔버스들은 기원과 나언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따스한 추억을 담고 있었다. 그 속에 깃든 기원의 시선이 새삼스럽게 다정하게 느껴졌다.
“마음에 드는 것 하나만 골라요.”
소파 팔걸이에 기대어 있던 기원이 나언의 정수리를 살살 긁으며 말했다. 잠시 말간 표정으로 작품을 응시하던 나언은 손가락으로 고양이 그림을 가리켰다. 보자마자 눈이 휘도록 웃음이 번진 작품이었다. 캔버스 자체는 크기가 작았지만 세 마리의 고양이가 캔버스 가득 뒹굴고 있어 마음 한편이 간지럽게 느껴졌다.
“이제 가 볼까요?”
나언의 끄덕임에 기원이 먼저 일어섰다. 기원을 따르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오해를 덜어 내고 애틋한 감정을 확인받은 나언의 입꼬리가 조금씩 말려 올라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차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차량 시계를 흘긋 살핀 나언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기원을 살폈다. 자신은 술에 취해 잠이라도 조금 잤지, 기원은 여태껏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임이 분명했다. 몇 시간만 있으면 해가 뜰 것 같았다. 하지만 기원은 담배를 피우는 간격만 조금 짧아졌을 뿐, 피곤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나언은 기원을 걱정했던 것이 민망할 정도로 정신없이 졸았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차창에 이마를 박은 채 색색 코를 골았고, 결국 잠깐 정차한 사이 기원이 나언의 목덜미를 받치고 시트를 뒤로 젖혀 줬다. 기원의 패딩을 끌어안은 채 깊이 잠든 나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원은 신호를 하나 보낸 줄도 몰랐다.
나언은 차량이 다시 서울 시내로 들어서며 잠에서 깼다. 해가 들 땐 사람들로 북적였던 번화가 한복판은, 마치 죽은 도시를 그려 낸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황량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깊은 새벽에만 볼 수 있는 묘한 광경이 신기했다. 어느새 시트를 세워 앉고 차창 너머를 구경하느라 바쁜 나언의 뒤통수를 바라본 기원이 소리 없이 웃었다.
목적지가 궁금할 무렵, 마치 방공호를 방불케 하는 주차장으로 기원의 차량이 진입했다. 널찍한 차고에 주차를 끝낸 기원이 나언에게 도착했다고 말하자 나언이 주위를 둘러보며 벨트를 풀었다.
기원이 주차를 마치자 차고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독립적인 구조의 차고 뒤편으로 개인 엘리베이터가 연결되어 있어, 나언은 차에서 내린 뒤로 사람 한 명, 차 한 대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기원과 나란하게 걸을 때면 늘 주위를 의식하던 나언도 차분하게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내린 기원은 한 층에 단 한 개뿐인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 긴 복도와 함께 전실이 펼쳐졌다. 마치 갤러리처럼 하얗고 넓은 공간에는 작품을 걸 못과 조명이 일정하게 박혀 있었다. 기원을 따라 열심히 걸음을 옮기고는 있지만, 나언은 이 넓은 공간이 정확히 어떤 용도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저 기원이 새로 준비하는 작업실인가 보다, 하는 가벼운 추측과 함께 전실을 지났고, 다시 등장한 중문을 한 번 더 열자 드디어 실내 공간이 펼쳐졌다.
“아직 인테리어가 마무리 안 됐지만. 봄이 되기 전에는 입주할 수 있어요.”
아, 신발 신고 들어와요. 기원의 안내에 나언은 그제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빠진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던 나언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질문을 던졌다.
“입주요…?”
“네. 같이 살 집입니다.”
아직 가구가 온전히 들어오지 않은 텅 빈 공간에 흡수되지 않은 기원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벽면을 향해 걸음을 옮긴 기원이 조명을 올렸다.
“…….”
눈앞이 밝아지는 것과 동시에 나언이 움직임을 멈췄다. 어둑해서 잘 보이지 않던 공간까지 보이자, 마음의 준비 없이 마주한 위압감에 놀라고 만 것이다.
지금 기원과 함께 지내는 아파트도 매우 넓은 평수였다. 그러나 여긴 고개를 젖혀야만 천장이 보일 만큼 높이가 높았고, 복층으로 이루어진 거실은 한눈에 모든 구조가 담기지도 않을 정도로 넓었다. 오묘한 미색을 띠는 바닥의 대리석과 실크처럼 매끄러운 벽지가 집 안의 조명을 반사하며 온 실내가 은은하게 빛났다. 두 사람이 사는 집이 이보다 더 호화로울 수 있을까. 나언이 더듬대며 난색을 보였다.
“멋져요, 머, 멋진데…. 저희 이사해요? 지금 집도 충분히 좋은데요.”
“거긴 나언 씨가 지나치게 사람들 의식을 해서요. 이 집에선 외출할 때마다 쫄지 않아도 됩니다.”
그건 기원이 자꾸 주차장에서 진한 스킨십을 시도해서 주위를 신경 쓴 것뿐이었다. 귓가가 달아오른 나언을 보던 기원이 작게 한숨을 뱉었다.
“몰래 준비한다고 했는데 개떼 같은 새끼들이 기삿거리를 흘렸나 봐요. 나언 씨는 엉뚱한 찌라시만 믿고 사람을 쓰레기 취급한 거고.”
“……그러진 않았는데요.”
본능적으로 반발을 했지만, 주기적으로 엿 먹이지 말란 기원의 말에 너나 그러지 말라는 말로 받아쳤던 몇 시간 전의 제가 떠올라, 나언의 눈동자가 당황을 머금고 옅게 흔들렸다. 소문에 들렸던 기원이 매매했다던 펜트하우스, 그게 바로 이곳인 모양이다. 기원은 생각에 잠긴 나언을 두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집 안 곳곳의 조명을 모조리 올렸다.
“오해는 확실히 풀고 갈까요?”
뼈 있는 농담을 던진 기원이 나언을 끌어당겼다. 황량한 거실에 우두커니 선 두 남자는 작은 휴대 전화를 동시에 들여다봤다. 그리고 기원이 앨범에 들어가 사진 하나를 띄운 순간 나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기원을 쳐다봤다.
“차, 차가….”
“최지원 추도식날. 사고가 나서 늦었어요.”
기원의 담담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나언은 손을 잘게 떨었다. 가드레일에 처박혀 있는 기원의 세단 앞머리가 흉하게 구겨져 있었다. 처참한 광경에 숨이 절로 가빠왔다. 그날 새벽 잠든 기원의 손목은 파랗게 부어 있었고 가슴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가슴이 쿵 떨어지는 느낌에 속이 메스꺼워졌다. 겨우 뱉는 목소리가 난도질당한 것처럼 너덜거렸다.
“왜, 말을, 말을 안 했어요…….”
“같은 날, 비슷한 사고가 났는데. 그걸 나언 씨한테 말할 수 있었겠어요?”
어쩐지 섬뜩하면서도 슬프게 들리는 질문에 나언은 혀가 굳는 것처럼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젖은 뺨에 기원의 손이 부드럽게 닿았다.
“그날 날 서게 굴었던 것 사과할게요.”
온종일 저기압 상태였던 그날의 기원은 졸음운전을 한 상대 차량을 피하느라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차가 도는 찰나가 느리게 재생되는 화면처럼 느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격통이 몰아쳤다. 치받힌 채 돌아 버린 차는 가드레일을 들이받고서야 멈췄고, 천만다행으로 차가 망가진 것에 비해 큰 후유증이 없었다.
응급실에 들러 간단한 치료를 마친 후 집으로 오자마자, 지원 때문에 파리한 낯을 한 나언을 마주해야 했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애써 나언을 외면했지만, 제 팔을 붙잡아 온 나언을 끝내 뿌리치지 못했다. 결국 그날 새벽. 정제하지 못한 감정의 파편으로 아픈 나언을 난폭하게 휘둘렀다.
사고의 영향은 컸다. 기원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니, 오히려 반쯤 미친 사람처럼 머리가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혼자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는데, 솔직히 놀랐어요. 무력하기도 했고.”
“…….”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혹시 내가 사라져도, 백나언이랑 함께했었다는 흔적은 반드시 남겨야겠다고.”
흔적…. 나언이 조그만 목소리로 기원의 말을 되짚었다. 그리고 나언은 기원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했다.
오랜 연인이었던 지원이 죽고 난 이후. 나언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이 그와 함께했던 흔적이었다. 지원과 자신이 함께했던 5년은 분명 존재했었지만, 한 명이 세상을 떠난 뒤론 오롯이 제 기억 속에서만 존재했다. 증거 없는 머릿속 추억, 그건 망상과도 다를 바 없었다. 그마저도 흐려지는 기억 속에서 점차 마모되어 갔고.
기원 역시 죽은 최지원이 나언에게서 천천히 잊혀 가는 과정을 봐 왔었다. 자신은 나언에게 그런 존재로 남고 싶지 않았다.
“결혼을 하는 이유예요.”
나언이 마른침을 삼켰다. 기원은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나언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직 사고가 났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언은 추위를 타는 사람처럼 몸을 잘게 떨고 있었다. 기원은 제 외투를 어깨 위로 둘러 주며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백나언이 내가 없는 세상에서 제대로 살지 못하길 바라요. 괴로움에 허덕여서 아무것도 못 했으면 싶고.”
어리석으면서도 잔인한 말이지만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 말에 나언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미래를 그렸다. 정확하게도 기원이 말한 모습으로 썩어 가는 자신이 그려졌다.
“그렇게 망가져서, 평생 나를 잊지 않고 살았으면 해요.”
최지원의 죽음 이후, 나언이 동아줄 하나 쥐지 못한 채로 허망하게 세상에 버려졌기에 기원은 그 빈껍데기를 취할 수 있었다. 그 말은, 나언이 다시 그렇게 세상에 던져진다면 누군가 이 여린 이에게 같은 방식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둘 순 없었다. 아무런 일을 못 해도 망가진 몸을 뉠 집이 있고, 세상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더라도 무탈할 정도의 재산을 가져야 했다. 그렇게 명이 다할 때까지, 제가 쥐여 준 것에 파묻혀 처절하게 살아가기를 원했다.
그리고 영원 같은 속박으로 나언에게 남는 길은 하나였다.
법적으로 혼인 관계가 된 이후, 자신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면 소유가 얽혀 있지 않은 재산은 모두 나언에게 증여되게끔 서류를 준비했다. 물론 소유가 얽혀 있는 것도 해결 중이지만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 시작으로 이 펜트하우스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얼마 전 온전히 나언의 소유가 되었다. 미국에 있는 기원의 부동산과 해외 주식, 어머니가 기원을 위해 숨겨 둔 자산 역시 차례로 나언의 것이 될 예정이었다. 집도, 그림도 미완성된 상태로 진행된 어설픈 청혼이었지만 버러지 같은 오해에 나언이 쓸데없는 상처를 입기 전에, 그 과정이라도 먼저 전해 주어야 했다.
기원은 나언의 마른 어깨를 감싸고 눈을 맞췄다.
“결혼 전에 재산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어요.”
“…….”
“변호사 친구는 그걸 도와줬어요. 특히 해외 자산은 내가 건드리기엔 법률적으로 애매한 부분이 많아서 도움이 필요했고요. 어린 시절부터 내 사정을 잘 아는 믿음직한 친구니까 그런 쪽으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그래서 변호사와 찌라시가 돌게 된 게, 프러포즈가 순조롭게 망하게 된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지만.
“물론 나언 씨 앞에서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긴 그랬어요. 나언 씨가 누군지 물어보거나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애매하니까요. 그래서 일적으로만 엮인 사이인 척했습니다. 속여서 미안해요.”
“괜, 찮습니다…….”
겨우 답했지만 결혼이라는 말 자체가 아직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가 오해하기 딱 좋았던 단어였던 결혼. 아까부터 기원은 대수롭지 않게 그 말을 하고 있지만, 자신과 기원은 결혼 자체가 불가능했다. 나언은 기원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한 단어, 한 단어. 그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부드럽게 묻는 목소리 끝이 힘없이 떨렸다.
“그런데 저희가…… 결혼을, 어떻게 해요?”
나언의 물음에 옅게 찌푸려져 있던 기원의 미간이 펴졌다. 이 정도면 맹한 나언이 오해할 만도 했다. 생각보다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깊은 회색의 눈동자에 연한 웃음기가 맺혔다.
“난 미국에서 태어났어요.”
외도로 인해 생겨난 생명이었고 국내에선 전혀 환영받지 못했던 출산이라 그렇게 됐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켜켜이 얽힌 오해의 매듭을 거의 풀어내 후련해진 기원은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결혼 절차는 미국에서 밟을 겁니다. 비록 한국에서 우리의 혼인은 아무런 효력이 없겠지만 미국에서는 우린 서로의 배우자가 될 겁니다. 아주 합법적으로요.”
“……아.”
드디어 모든 상황을 납득하기 시작한 나언이 느리지만 분명하게 고갯짓을 했다. 나언의 눈빛에서 혼란스러움이 가시기 시작하자, 기원의 얼굴 위로도 미소가 비쳤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상관없어요.”
“…….”
“이 세상 한 곳에는 반드시 우리의 흔적이 남을 거고.”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살짝 내린 기원이 나언을 끌어안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함께했다는 증거가 되어 주는 겁니다.”
맞닿은 가슴 아래,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거센 박동이 서로에게 들렸다. 기원은 나언의 작은 귀에 입술을 겹치고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다시금 속삭였다.
“결혼해요.”
고요한 거실에 기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흩어졌다. 품속의 따뜻하고 작은 몸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기원은 끌어안았던 팔을 풀고 마른 어깨를 감싼 뒤 천천히 몸을 떨어뜨렸다.
긴장이 풀려 힘없이 팔을 늘어뜨린 나언은 고개를 살짝 떨어뜨린 채로 불규칙하고 옅은 숨을 터뜨렸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걷어 내면서도 웃었다. 마치 웃어 달라던 기원의 부탁을 들어주려는 듯, 최선을 다해 입매를 끌어 올리려다 비어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해 붉은 입술을 꾹 깨물고 말았다. 기원은 그런 나언의 위태로운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저 일그러진 표정이, 한마디 말도 못 한 채 억지로 울음을 삼키며 웃으려 애쓰는 모습이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보여 줬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오해를 풀고도 오히려 속이 차갑게 저려 왔다.
“…….”
기원은 나언의 마른 등을 천천히 쓸었다. 괜찮다며 달래는 말을 나직하게 속삭이고 귀뺨에 입을 여러 번 맞추었다. 꽉 막힌 듯했던 나언의 울음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그리고 나언은 얼마 전 병원에서의 상담을 떠올렸다.
-선생님, 제가 크게 아팠던 적이 있어요.
손목을 긋고 약을 먹었던 날. 그날 나언은 한 번 죽었다. 억지로 살을 기우고 피를 쏟아 넣고 망가진 장기를 살려 숨을 붙들었던 것이지, 나언은 삶의 의지를 모두 놓아 버렸었다. 그러니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날을 입에 올리는 순간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고, 의사는 처음으로 속 이야기를 털어놓는 나언을 차분하게 응시했다.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저를 의심하다 보면 자꾸 결론이 이상하게 나 버려요. 놓으면 편해진다는 걸 알거든요.
손목을 가르는 흉을 더듬으며 나언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젠 놓지를 못해요. 제가 떠나는 순간 미련 없이 함께 모든 것을 놓아 버릴 사람 하나가 너무 마음에 걸리거든요. 아……. 키워야 하는 고양이들도 있고요.
작게 웃은 나언의 입가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 사람을 떠올리면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힘들어요. 생각을 그만하고 싶은데 잠이 들지 않아요….
행복하게 살고 싶을 때면 외롭게 떠났던 주언이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그렇게 죽음을 떠올릴 때면 필연적으로 기원이 떠올랐다. 나언의 목소리가 혼란에 젖어 갔다.
-살고 싶지만 죽고 싶지 않은 건 아니고, 죽고 싶지만 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에요.
의사는 나언의 말을 받아 적었다. 그리고 은은한 미소와 함께 그 문장 속에 숨겨진 뜻을 찾았다. ‘살고 싶지만’으로 시작한 문장의 끝맺음은 ‘살고 싶지 않은 건 아니다.’였다. 눈앞의 환자는 간절히 살고 싶어 했다. 이윽고 나언은 조용히 울음을 삼킨 채 말을 이어 갔다.
-편하게 죽지도 못하게 하는 그 사람이 원망스럽다가도, 그게 어떤 날은 고맙기도 해요. 어떻게든… 살아 보게 해 줘서요. 하하. 선생님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죠?
나언이 안겨 있던 몸을 물렸다. 기원의 젖은 눈을 마주한 나언은 고개를 비스듬히 들며 발꿈치를 들어 올렸다. 어둑한 겨울 아침, 동이 트기 시작하며 어스름한 빛이 테라스의 정원으로 새어 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입술이 포근하게 겹쳐지며 평범한 아침이 밝아 왔다.
천천히 입술을 떼어 낸 나언이 고개를 돌려 테라스 너머를 바라봤다. 키 작은 나무와 이름 모를 꽃에 노란 아침 햇살이 걸렸다. 정원에 흩날리던 벚꽃 잎을 보며 모든 것을 놓고 싶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던 과거가 떠오르는 순간 나언은 발작적으로 기원을 끌어안았다.
바깥을 응시하다 갑작스레 가슴팍으로 파고드는 나언을 꽉 붙든 기원이 품속의 하얀 목덜미 위를 부드럽게 쓰다듬었고 나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더 깊이, 깊이 안겼다.
이 세상에 단 한 명은 자신을 붙잡은 채, 놓지 않으려 무던히 애쓰고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은 이유를 찾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