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기일 (26/28)

2. 기일

쿨럭이는 소리에 눈을 뜬 기원이 이불을 끌어 올렸다. 마른 어깨 위를 덮어 주고 나서도, 두꺼운 이불 아래에서 몇 번이고 나언의 어깨가 들썩였다.

따뜻한 물을 떠 올까 고민하던 중 겨우 옆에 누운 이의 숨소리가 평온해졌다. 잦아드는 기침 소리에 안도한 기원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 위태로운 선잠도 삼십 분이 채 이어지지 못했다. 심상치 않은 기침 소리와 함께 결국 나언이 뒤척이다 몸을 일으켰다. 기원도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와 따뜻한 물을 컵에 받아 왔다.

나언이 눈가를 찌푸리며 방으로 들어온 기원을 올려다봤다.

“죄송해요. 저 때문…, 콜록, 깼죠.”

“안 잤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셔요.”

기원이 건넨 컵을 들어 물을 넘긴 나언이 죄송하다고 다시 중얼대며 물었다.

“콜록, 방에 가서 주무실래요? 죄송, 콜록, 해서….”

나언의 물컵을 받아 든 기원이 나긋한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죄송하다고 한 번만 더 하면 벗길 거예요.”

“…….”

“섹스하느라 날밤 까면 기침해서 죄송하다는 소리는 안 듣겠죠?”

그냥 옆에서 자라고 하면 될 말을 꼭 저렇게 비꼬아서 했다. 나언은 아무런 말 없이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들어가 기원에게 등을 보인 채 옆으로 몸을 뉘었다. 마찬가지로 옆으로 누운 기원은 손을 들어 올려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나언은 조금 눈을 붙였다.

요즘 오전은 운동 대신 나언의 열을 재는 것으로 시작했다. 나언의 귀에서 체온계를 뺀 기원의 표정이 예민해졌다. 37.8도. 펄펄 끓는 고열은 아니었지만 지독스레 떨어지지 않는 미열이 일주일 째 이어졌다. 끓여 놓았던 죽을 데워 담아 주었더니 몇 입 먹다가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먹는 것만큼은 기원이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는 걸 알기에 나언은 느린 수저질을 멈추지 않았다. 식사를 먼저 끝내고도 끝내 나언이 다 먹는 것을 지켜본 기원이 빈 그릇을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치를 보듯 잠시 따라오는 멀건 시선이 기원의 발치에 머물렀다.

회사에 주차를 마친 기사가 시동을 껐다.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차에서 내리려는 나언을 붙잡은 기원이 나언의 목도리를 더 꽉 동여맸다. 꾸벅 고개를 숙인 나언은 주차장을 빙 돌아 굳이 건물 밖으로 나가는 계단으로 걸어갔고, 기원은 개인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집무실을 향했다. 들키기 싫다면서 회사 주변에서는 손도 못 잡게 하더니, 함께 출근할 때에도 꼭 저 지랄 맞은 첩보 작전을 하며 엘리베이터부터 따로 탔다.

“…….”

요새 기원은 나언을 해고하고 싶은 충동을 누르느라 바빴다. 그러잖아도 워크숍 사건 이후 나언의 출근이 영 거슬렸었는데 연말이 다가오며 호텔 일정이 지나치게 바빠지기까지 했다. 동시에 나언의 컨디션이 급격하게 난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원은 나언의 컨디션이 나빠진 것이 꼭 회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렇기에 이대로 나언을 집에 두고 요양시킨다고 한들, 나언이 괜찮아질 거란 보장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혼자 두는 것이 되레 불안했다.

무거운 시계가 둘러진 손목으로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아픈 나언에게 살갑게 대하지 못할 만큼 기원의 신경 또한 곤두서고 있었다. 기원은 나언이 시름시름 아파 가는 이유는 단 하나라고 생각했다.

‘도움이라곤 좆도 안 되는 새끼.’

최지원의 기일이 일주일 남았다. 나언과 자신이 떨어져 지내는 몇 년 동안 최지원의 기일은 몇 번이고 지나갔다. 제사는 기자를 대동하는 시간에만 얼굴을 비추며 예의상 참여하였고 그 외의 어떠한 추도 행사나 최지원 관련 인터뷰에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

자신은 간단히 무시하며 지나갔던 최지원의 기일마다 나언은 매년 저렇게 앓았던 걸까. 엘리베이터에서 정면만을 응시하는 기원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지원의 기일이 나언에게 어떤 의미인지까지는 굳이 헤아리고 싶지 않았다.

첫 기일. 당시 기억을 잃었던 나언은 크게 아팠다. 근육이 다 빠져 잘 걷지도 못하는 다리를 질질 끌어 이마가 불덩이가 된 채로 혼자 벤치에 앉아 청승을 떨고 있었다. 언질 없이 병실에서 사라진 나언을 쥐 잡듯이 찾아 팽개치듯 매트리스 위로 던졌고, 병원복을 찢을 듯 부여잡고 입술을 섞었다. 제 기억은 모조리 잘라 내 버린 텅 빈 눈 속에, 죽은 이를 그리워하는 빛이 들어찬 것 때문에 분이 풀리지 않았다. 기어코 자신의 기억은 모두 잃어버리고, 찢어 놓아서라도 지우려 했던 최지원의 기억으로 거슬러 돌아간 나언을 보며 허무한 열패감에 젖었다.

지독하게 낫지 않는 12월의 감기가, 어느 순간부터 음식을 넘기는 것을 미약하게 힘들어하는 창백한 얼굴이 마치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다시는 백나언을 아프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열병의 이유가 죽은 최지원 때문이라면, 가슴에 치솟아 오르는 이 감정은 어떻게 짓눌러야 하는 걸까. 차라리 자신 때문이라면 미안하다고 손목이라도 긋고 싶었다. 눈앞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사죄하면, 그러면 착한 백나언은 또 아무런 군말도 없이 괜찮다고 다독여 줄….

띠링, 하는 맑은 도착음에 기원이 추악한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조익현 실장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곧장 오늘 일정에 대해 보고받았다. 연말은 기원에게도 충분히 바쁜 시기였다. 이미 계획된 회의 사이에 접대용 미팅까지 추가되어 있었다. 기원을 둘러싼 분위기가 차갑고 예민해진 만큼, 비서 팀 역시 매끄러운 일 처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미팅을 마친 기원이 모두에게 나가라고 손짓한 뒤 집무실 소파에 기대듯 앉았다. 잠시 숨을 돌릴 틈도 없이 기원은 휴대 전화를 꺼내 번호를 눌렀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신호음이 두 번 가기도 전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혹시나 하고 어제부터 감시를 붙였다. 생각 없이 감시용 경호원을 하나 붙이려다 나언이 어떻게 경호원을 보내냐며 울먹임에 눈을 부풀렸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래서 기원은 부서 내에 믿을 만한 사람에게 작은 부탁을 한 참이었다.

[아, 넵! 사장님. 전화 받았습니다.]

“점심 얼마나 먹었어요?”

기원이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주어가 생략된 질문에 상대 또한 망설이지 않고 차분하게 답을 늘어놓았다.

[아무리 권해도 못 먹겠다고 해서요. 아침을 많이 먹어서 속이 더부룩하다고….]

최지은 주임은 수화기 너머로 한숨처럼 뱉어지는 ‘지랄’이라는 단어를 살짝 들었다. 어깨를 흠칫 떤 그녀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아, 나언 씨가 잘 먹는 빵이 있어서 사서 들어갔습니다. 아까 보니까 반 정도… 먹었습니다.]

나언이 식사를 거르는 것이 제 잘못이 아닌데도 자꾸만 움츠러들게 되는 최지은 주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방금 탕비실에서 초콜릿 두 개 꺼내서 자리에 앉는 것까지 봤습니다.]

“초콜릿.”

[네, 초콜릿이요. 그게 배는 안 차도 견과류가 박혀 있어서 열량은….]

“알겠어요. 퇴근 때까지 뭐라도 더 먹여 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기원은 길게 연기를 뱉으며 담배를 껐다. 재떨이 위에서 제법 길게 남은 장초가 사납게 구겨졌다. 뿌연 담배 연기 속에서 충혈된 눈을 감은 기원은 긴 한숨을 뱉었다.

점심을 못 먹겠다고 말했다는 전언에, 기원은 순간 나언을 이곳으로 호출해 코를 잡아 입을 벌어지게 한 뒤 죽을 목구멍으로 넘겨 주는 상상을 했다. 그것도 통하지 않으면 네가 먹지 않는 만큼 고양이들 사료도 없다는 식의 협박을 한다거나. 그러나 좋아하는 빵을 건넸다던 최지은 주임의 말에 아직도 제가 멀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먹지 않는 걸 억지로 입에 집어넣는 게 아니라, 다른 맛있는 음식으로 회유를 해야 했다.

기원은 마지막 일정 하나를 취소한 뒤 홀로 마트를 갔다. 조수석에서 벌벌 떠는 사람 한 명 없다고 운전이 훨씬 난폭해졌다. 기원은 지난번 나언과 장을 봤던 기억을 찬찬히 떠올리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카트에는 나언이 좋아하는 채소와 버섯이 켜켜이 쌓여 갔다.

집으로 돌아온 기원은 팔을 걷고 능숙하게 채소 손질을 시작했다. 한번 해 본 기억 덕분에 훨씬 수월하게 요리가 진행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언의 퇴근 시간에 가까워질 무렵, 밀푀유나베가 완성됐다. 기원은 끓기 시작한 냄비의 불을 줄이고, 여러 양념장을 섞어 고기 소스를 만들었다.

“음.”

나언이 만들었던 싱거운 소스보다, 방금 제가 만든 것이 훨씬 감칠맛이 돌았다. 그러나 왠지 맛이 진짜 괜찮다며 뿌듯해하는 말간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요리가 꽤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나언과 같이하는 게 즐거웠던 모양이다.

향긋하고 고소한 냄새가 보글보글 끓는 육수에서부터 피어오를 무렵 나언이 공동 현관을 통과했다는 알림이 울렸다. 소파와 바닥에 물렁하게 늘어져 있던 바다, 파, 도가 꼬리를 세우고 복도 쪽으로 종종걸음을 옮겼다. 피식 웃은 기원은 나베를 식탁 위에 놓았다. 번호 키패드를 꾹꾹 누르는 소리와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차례로 들렸다. 슬리퍼를 신은 나언의 자박한 발걸음 소리가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졌다. 나언의 자리에 수저와 밥을 차린 기원은 가슴 한편이 옅게 두근거리는 생소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 냄새.”

식탁에 앉아 있는 기원을 한 번, 그리고 식탁 위를 한 번 본 나언이 멈칫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리하셨어요?”

유순하게 처진 큰 눈이 상황을 파악하느라 바삐 움직였다. 요즘 따라 유독 힘이 없는 얼굴에 미약하게나마 생기가 일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도톰한 입술이 잘게 달싹댔다. 나언은 목도리를 풀던 손을 멈춘 채 잠시 눈을 끔뻑이다 식탁 쪽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진짜 하신 거예요? 혼자?”

칭칭 감았던 목도리를 푼 나언은 식탁 의자에 외투와 목도리를 푹푹 얹으며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차가운 공기를 매달고 와 코끝이 발갛게 언 얼굴을 한 나언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같이, 같이하시지…. 저도 할 줄 아는 건데.”

작게 우물대다 감사하다며 꾸벅 고개를 숙인 나언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역시나. 저 표정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턱을 괴고 나언을 보던 기원은 턱을 가린 손가락을 조금 끌어 올려 입꼬리를 살짝 가렸다.

“많이 먹어요.”

기원은 나언이 숟가락으로 밥을 옴폭 퍼서 입에 넣는 것만 봐도 배부를 지경이었다.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더니, 나언은 앞접시 위에 놓인 음식을 열심히 씹어 넘겼다. 고기보다는 부드러운 채소 위주로 소스에 찍어 먹었다. 밥을 절반 정도 먹은 나언은 배가 부른 듯 천천히 식사를 그쳤다. 기원도 자연스레 먹은 것을 정리했다.

그러나 그날 새벽. 기원은 기침 소리 대신 다른 소리에 선잠에서 깨어났다. 조심스레 이불을 걷어 내고 침대를 빠져나간 나언이 화장실을 향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기원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나언이 화장실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눈치챘다.

“…….”

기원은 예민해진 얼굴로 뺨을 쓸어내렸다. 당연히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기원의 머릿속으로 끔찍한 기억의 잔상이 스멀스멀 차올랐기 때문이다. 몸을 일으켜 화장실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기원이 결국 러그 위에 놓인 슬리퍼를 신고 걸음을 옮겼다.

화장실로 가까이 갈수록 흐르는 물소리가 진해졌다. 기원은 손바닥으로 차게 식은 귀 끝을 쓸어내렸다. 닫힌 화장실 문 사이로 세면대를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앞에 우두커니 선 기원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피로 젖은 바닥에 누워 있던 하얀 인영이 퍼뜩 떠오르는 순간, 기원은 닫힌 문을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눌러야 했다.

주먹 쥔 손이 문을 두드렸다. 저도 모르게 말린 손가락 끝이 살짝 떨렸다.

똑똑.

그와 동시에 흐르는 물소리 사이 섞여 든 희미한 구역질 소리를 들었다. 참담한 상념에서 벗어난 기원의 눈가가 미세하게 좁혀졌다.

“……욱.”

다급하게 문고리를 돌리자 문은 허무하게 열렸다. 애초에 문을 잠그지 않은 나언은 마른 등을 무방비하게 보인 채 변기를 붙잡고 있었다.

“우웩…… 쿨럭.”

문고리를 잡고 선 기원이 곧장 뛰어들지 못하고 잠시 나언을 응시했다. 나언은 저녁에 먹었던 것을 모조리 토하고 있었다.

그런 나언을 바라보던 기원의 눈동자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짧게 스쳤다 사라졌다. 나언은 기원에게 들킬세라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등만 들썩이며 옅게 헐떡이고 있었다. 마른 몸을 바라보던 기원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나언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등에 손이 닿는 순간 나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

초췌한 하얀 얼굴이 당혹에 젖었다.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없는지 휘청대고 말았다. 기원은 나언의 팔뚝을 붙잡은 채 말했다. 무서워하지 않도록 최대한 감정을 삼켰다.

“많이 불편해요?”

“…….”

“더 게울 것 같으면 말해요. 등 두드려 주게.”

“죄, 죄송해요, 기껏 요리해 주셨는데….”

제 몸 상태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이 나언이 대뜸 사과를 했다. 갈라지고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대더니 푹 고개까지 숙인다.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기원은 제가 더 속이 얹히는 기분이었다. 이딴 상황에 왜 중요치도 않은 거로 사과를 해서 사람 속을 더 뒤집어 놓는지 열이 뻗치면서도, 그게 어디서부터 학습된 버릇인지가 뻔해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토하러 가요?

-……아니요. 약 먹으려고….

-토하면 목걸이 다시 할 거예요.

기원은 착잡한 표정으로 나언을 다시 앉히고 등을 쓸어 주었다. 눈치를 보듯 잠깐 머뭇대던 나언은 울렁거림을 참지 못하고 몇 번 구역질을 했지만 더 토해 낼 건 없는지 작게 고개를 젓고 말았다. 기원은 칫솔에 치약을 짜고, 양치 컵에 물을 받아 변기에 앉은 나언에게 건넸다.

“입 헹구고 있어요. 약 갖다 줄 테니까.”

양치를 하고 나온 나언은 침대에 멀거니 앉아 있었다. 소화제와 따뜻한 물을 먹이고 이불을 걷어 주었다. 화장실에서 침대에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모든 에너지를 소비한 사람처럼 가라앉은 나언은 이불을 끌어 올리고 몸을 웅크렸다. 기원은 그런 나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콜록, 콜록….”

확실히 지난달보다 살이 많이 내렸다. 홈웨어 밑으로 드러난 등뼈와 세게 쥐면 부러질 것 같은 마른 손을 찬찬히 훑어 내린 기원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조명을 내리고 우두커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기원은 나언을 다시 한번 눈에 담았다. 여전히 기침을 애써 누르며 눈을 꾹 감고 있는 얼굴이 과거의 상한 낯을 언뜻 떠오르게 했다.

“편하게 자요.”

뺨에 닿을 듯 말 듯 약하게 입을 맞춘 기원은 나언을 위해 자리를 비켜 주었다. 기원의 말을 뒤늦게 이해한 나언이 눈을 떠 기원을 바라보았지만, 기원은 이미 몸을 돌려 문을 닫고 나가고 있었다.

***

소화기 계통이 약한 나언은 마음이 불편하면 그게 곧장 위염으로 티가 났다. 특히 위는 쓰러질 정도로 심하게 앓았던 적이 있던지라, 그저 쓰리고 메스꺼운 정도로 불편한 건 만성이겠거니 하고 무시했었다.

그렇게 점점 아픈 걸 방치한 탓일까.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음식을 먹는 것이 힘들어졌다. 어떻게든 씹어 넘길 순 있었으나 그렇게 억지로 먹으면 소화가 되는 몇 시간 동안은 구역감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러한 증상을 기민하게 눈치챈 기원 덕분에 아침은 소화가 쉬운 음식들을 겨우 먹었지만, 회사에서는 대충 달콤한 간식거리로 허기만 면하고 말았다. 구내식당은 지나치게 간이 셌고, 주변 음식점들은 주로 밀가루 음식이었다. 그런 음식을 피해 속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기원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밀푀유나베는 그동안 먹었던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그리고 예전에 자신이 그걸 잘 먹었던 걸 기억하고 저녁 요리를 준비했을 기원의 마음 때문에 더욱 고마웠고. 그런데 하필 그걸 모조리 토해 버리고 말했다. 애써 무시하고 자려 해도 위가 뒤틀리듯 구역질이 올라와 결국 변기 앞에 무릎을 굽혀야 했다. 정말 티 내고 싶지 않아 소리를 죽였는데도 기원에게 기어코 들키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화장실에서 보였던 기원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오래 맴돌았다.

그날 기원은 편하게 자라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러나 그가 방을 나가는 순간 왜 그를 붙잡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아프지 않았을 때는 그가 어디서 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할 일이 있으면 제 방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따로 잤고, 몸을 섞은 날이면 그의 방이나 제 방에서 함께 잘 때도 있었다. 굳이 정해 놓지 않았던 일에 서운함이 끼어든다는 건, 어리광이라는 증거였다.

낫지 않는 기침 때문에 잠귀가 밝은 그가 깰까 봐 줄곧 신경 쓰였고, 먼저 따로 자자는 말을 건넸던 것도 자신이었다. 그리고 건너편 최기원의 방에는 아주 넓고 깨끗한 그의 침대가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날 밤은 유독 침대의 빈자리가 크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몸이 너무 고되어 얼른 자고 싶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을 만큼 마음이 시큰거려 전신에 시트를 둘둘 말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설쳤다.

그날 이후 기원과는 계속 따로 잤다. 컨디션은 좋아질 기미가 없으니 자연스레 몸을 섞는 횟수도 줄다가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아예 하지 않았다. 다행인 건 열은 떨어지지 않아도 기침은 많이 줄었다. 건조한 사무실 내에서나 가끔 잔기침이 났고, 목이 간지러운 느낌에 새벽잠을 깨는 빈도도 낮아졌다. 그 말은 이제 기원과 함께 자도 된다는 뜻이었다.

여느 때처럼 아침을 먹던 중 나언은 은근슬쩍 기원의 눈치를 살피다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저 이제 기침 별로 안 나요.”

두부 샐러드를 씹던 기원이 고개를 살짝 들며 나언을 바라봤다. 새초롬하게 옆으로 긴 눈이 제법 나언을 오래 바라봤다. 나언은 양송이 스프를 뒤적대며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기원이 정확하게 못 알아들었나 싶어 조금 더 직설적인 화법을 활용하기로 했다.

“기침하느라 깨는 일이 없으니까 좋아요.”

나언이 숟가락으로 스프 위를 빙빙 휘저으며 기원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때 마침 기원의 전화벨이 울렸다. 통화를 연결한 기원은 조익현 비서실장과 내일 오전 일정에 관해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타이밍이 안 맞았나 싶어 나언은 제 몫의 스프를 성의 없이 떠먹었다. 잠시 뒤 전화를 끊은 기원은 커피를 들이켜며 약상자의 잠금을 풀고 나언의 약 봉투를 꺼냈다.

“남기지 말고 다 먹고, 약 먹어요.”

자신의 말에 대한 별다른 대답 없이 위염 약이 건네졌다. 이후로도 비슷했다. 고양이들과 저녁 시간을 보낸 뒤 방으로 가며 은근히 방문을 오래 열어 두거나 일부러 불을 끄지 않고 기다렸다. 하지만 기원은 아무런 반응 없이 문을 닫고 불을 꺼 준 뒤 제 방으로 돌아갔다.

살짝 풀이 죽는 나언을 보며 기원이 심심한 미소를 띠웠지만 나언은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새 그의 곁에서 잠드는 것에 적응해 적적함을 느끼는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할 뿐이었다. 나언은 잠시 뒤척이다 제 머리맡에 놓인 기원의 베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푹신한 것을 몸 가까이 끌어안고 코를 묻었다. 눈꺼풀이 느리게 감기며 깊은 어둠이 고여 갔다.

***

오늘은 지원의 기일이었다. 나언은 평소처럼 기원을 대한다고 생각했는데 어제저녁부터 둘 사이에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어색한 기운이 돌았다. 아니 되짚어 보자면, 기원 역시 평소처럼 자신을 대한 것일 수 있지만 혼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오늘 기원은 자신을 일찍 깨웠다. 뒤척이다 거의 잠을 자지 못한 나언은 멍하게 눈을 끔뻑이다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조금 더 자고 싶은 마음에 눈을 감은 채로 침대 위에서 버티자, 기원은 나언의 어깨와 무릎 뒤에 손을 넣어 번쩍 들고 식탁을 향해 걸어갔다.

홈 바 뒤에서 그릇 정리를 하는 사용인들이 언뜻 보이자, 괜히 허둥대던 나언이 몸에 잔뜩 힘을 주며 내려오려 애쓰는 것이 느껴졌다. 흘긋 나언을 바라본 기원은 일부러 나언을 떨어뜨릴 듯 팔에 힘을 빼 버렸다. 버티던 팔이 꺼지고 몸이 훅 가라앉으려 하자, 나언은 아까보다 더 놀란 얼굴로 목에 팔을 꽉 감아 왔다. 꼭 겁을 줘야만 말을 들어 먹는 천성과, 꼭 괴롭히면서까지 굴복시키고 마는 천성이 사이좋게 부딪혔다.

나언을 식탁 앞에 내려놓자 귀와 목덜미를 발긋하게 물들인 나언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정작 사용인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처럼 태연하게 구는데 혼자 유난을 떨어 대는 게 귀여워, 결국 기원이 나지막하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색한 기류 속에서 처음 보이는 옅은 미소였다.

침묵 속에서 식사를 이어 가던 중 기원이 입을 열었다.

“난 일찍 나가요. 먹고 쉬다가 천천히 출근해요.”

“네. 그….”

기원의 일정은 아마도 지원의 추도식과 관련되었을 것이다. 짧은 대답만 남기려던 나언이 머뭇대며 말을 덧붙였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평소 출장을 가는 기원을 대하는 것처럼 나언이 인사를 남겼다. 자그만 목소리를 들은 기원의 수저질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기원은 짧은 대답과 함께 다시 음식을 씹었다.

어색하다. 나언은 위가 따끔거리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배를 살짝 쓰다듬었다.

지원이 죽은 지도 5년이 지났다. 죽은 지원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이제는 꽤나 흐려졌다고 생각하지만 가끔은 불현듯 떠오른 추억에 심장이 시릴 때도 있었다. 지원과 만났던, 인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소중한 순간을 반추하며 고마웠다는 추모를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기일인 오늘은 조금 더 생각 속에 오래 머물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 많은 감정을 잃어버린 나언의 가슴에 조금이라도 색을 띄우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지금 함께하는 기원이었다. 그게 불안이든 애증이든 뭐든, 나언이 그은 선 안쪽에는 기원이 있고 바깥에 지원이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나언은 기원이 신경 쓰였다. 이 불편한 마음은 죽은 지원이 떠오르기 때문이 아니라, 지원의 기일을 신경 쓸 기원에게 마음이 쓰여 생겨난 것이다. 가득 쌓인 감정을 어떻게 여과해 전달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동안, 다시 예민한 얼굴로 돌아온 기원은 먼저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는 평소처럼 기다리지 않고 약상자에서 나언 몫의 약만 꺼내 둔 뒤 제 방으로 돌아갔다. 물끄러미 기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언은 수저를 들어 국을 떠 입에 넣었다. 기원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담긴 밥을 다 먹고 약도 챙겨 먹었다.

아래위로 짙은 검정색 정장을 입은 기원이 방에서 걸어 나와 나언에게 다가갔다. 밥을 다 먹고 얌전히 앉아 있는 나언에겐 여전히 감춰지지 않은 침울한 기색이 묻어 나왔다. 당연히 지원을 떠올리며 슬퍼하는 것이라 여긴 기원은 나언의 우울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싶었지만, 외면할 수 없는 처연함에 결국 발이 묶였다.

기원은 나언의 머리카락을 살살 건드려 자신을 보게 했다. 나언은 코언저리에서 풍기는 기원의 향수 향을 맡고서야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 먹었으면 들어가서 쉬어요.”

숙제라도 검사받은 애처럼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언의 뺨을 기원이 살짝 쓰다듬는 것처럼 두드렸다.

“잡생각 그만하고.”

큰 눈으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본 나언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 결국 아무 말 하지 않고 꾸벅 고개를 숙이고 만다. 발걸음을 돌려 현관을 나서는 기원의 낯은 다시 무감하게 가라앉았다.

***

나언은 방문을 닫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기원이 출근한 뒤 오전은 고요함 자체였다. 맑은 햇살이 쏟아지는 침대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앉아서 한참 시간을 죽였다. 속이 얹힌 듯 불편해 몇 번 화장실을 다녀왔지만 토할 정도는 아니었다. 납작한 배를 쓰다듬으며 작게 한숨을 뱉었다. 잠을 자지 못한 눈에서 몽롱한 기운이 가시질 않았다. 나언은 손을 들어 부드러운 시트 위를 쓸어 보았다.

기원의 앞에서 먹은 것을 모두 게워 냈던 날 이후, 기원과는 함께 자지 않았다. 아픈 자신을 챙기는 그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가끔 비치는 틈 사이로 싸늘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아픈 게 성가셔서? 내가 아픈 게 형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여서? 여러 이유를 짐작해 보던 나언의 시선이 일렁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기원의 반응은 여태와는 결이 달랐다. 지원이 엮인 일에서 기원은 필연적으로 잔인해졌다. 지원에 대한 선연한 적개심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거친 행동으로 몸까지 상처 입혔고, 평소보다 훨씬 정제되지 않은 잔인한 말을 퍼부으며 사람을 찍어 눌렀었다.

하지만 요즘 기원은 오히려 자신과 거리를 두었다. 몸을 섞지도 않고 매몰찬 말을 하지도 않았다. 기일인 오늘은 평소처럼 출근하고, 자신을 혼자 내버려 두기까지 했다.

“…….”

생각이 거기까지 흐를 무렵, 퍼뜩 고개를 저은 나언의 얼굴에 옅은 조소가 움텄다. 내버려 두다니. 과거에 비해 충분히 온건해진 기원에게 어디까지를 바라고 있는지. 설마 어쭙잖은 위로라도 바란 것인가.

기원에게도 이 시기는 힘들 것이다.

겨우 조금 거리를 두는 것만으로 그에게서 서운함을 느끼려 드는 스스로가 가소로웠다. 나언은 왠지 모르게 치솟으려는 고독함을 애써 누르며 숨을 골랐다. 이건 불필요한 감정 소모였다. 울렁대는 속이 얼른 가라앉길, 약 기운이 빠르게 퍼졌으면 했다.

잠시 뒤. 시계를 확인한 나언이 코트를 휙 걸치며 현관을 뛰어나갔다. 덧없는 생각에 빠져 자기도 모르게 시간을 허비했다. 후다닥 뛰어나와 지하철에 겨우 올라탄 나언은 개찰구를 빠져나오면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출근 시간이 빠듯했다.

너른 보폭으로 회사 로비를 가로지르던 중, 나언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커다란 TV 화면에 기원의 얼굴이 잡힌 탓이었다. 지원의 추도식에 참여하기 위해 걸어가는 기원의 옆모습이 대형 화면에 가득 들어찼다. 사장단이나 임원단 없이, 직계 가족들로만 진행되는 행사였기에 그의 모습이 담긴 것은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나언은 그 찰나에 발이 묶인 듯 다음 뉴스가 흘러나올 때까지 한참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지원의 묘소를 찾은 기원. 5년간 지원을 만났고, 아이러니하게도 기원과 처음 만난 지도 꼬박 5년째였다. 두 형제로 이어진 10년의 세월이 나언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흘러갔다. 많은 일이 있었다. 좋았고, 충격적이었고, 처절했고 또 허무했던 시간들. 지원의 묘역과 그곳을 향해 담담히 걸어가는 기원, 그리고 그걸 지켜보고 서 있는 자신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어? 뭐 해요 나언 씨? 늦었는데.”

앞머리를 휘날리며 빠르게 뛰어오는 김기영 대리가 우두커니 선 나언을 알은체했다. 어깨를 잘게 두드리는 손길에 흐리멍덩한 시선을 겨우 추스르며 나언이 인사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발걸음을 떼어 내며 나언은 자신의 삶으로 겨우 초점을 옮겨 왔다. 이것저것 가벼운 주제로 말을 붙여 주는 기영이 고마웠다.

사무실 창 안으로 주홍색 노을이 흩어졌다. 히터를 틀어 놓은 실내에는 훈기가 가득했지만, 손끝은 늘 온도가 낮았다. 손으로 남색 머그잔을 여러 번 잡았다가 놓으며 손가락을 따뜻하게 녹였다. 나언의 시선이 컵에 머물렀다. 어수룩하게 생긴 곰이 그려진 이 컵은 기원이 사 준 것이었다. 처음에 머그잔을 받았을 때는, 자기는 세련된 패턴이 들어간 어른스러운 컵을 쓰면서 저한테는 왜 이걸 주는지 살짝 신경 쓰였지만, 이건 꽤나 튼튼하고 내용물도 많이 담겨 유용했다. 집에서 시리얼이나 요거트 등 이것저것 담아 먹으며 잘 쓰다가 회사까지 가지고 왔다.

책상 위에는 기원이 챙겨 준 물건이 가득했다. 제 펜을 빌려 쓴 사원들에게 늘 어디서 샀냐는 되물음을 받는 좋은 잉크 펜, 마우스 아래에 놓는 손목 패드와 적당히 딱딱해 허리를 잘 받쳐 주는 방석, 회사용 스케줄러와 색색의 포스트잇까지 모두. 기원은 하나씩 직접 설명하면서 쥐여 주든가, 아니면 말없이 가방에 넣어 두곤 했다. 5년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기원과의 삶에 참으로 빠르게 익숙해졌다.

커피를 들이켠 나언이 초콜릿 하나를 까서 입에 넣고 씹었다. 점심을 제대로 먹지 않아 덩달아 챙겨 먹지 못한 위염 약은 고민하다가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잠시 기원의 잔소리를 상상하며 옅게 웃은 나언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일이 꽤나 쌓였다.

회사 사람들은 오늘 지원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인터넷 기사를 공유하며 지원과 기원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나 소문을 가벼운 투로 툭툭 던져 놓았다. 듣지 않으려 애쓰지도, 악의적인 가십에 굳이 반응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결국 퇴근 시간에 가까워졌는데도 오늘 처리할 일을 반도 해내지 못했다. 사람들은 한둘씩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너른 공간에는 점점 정적이 쌓여 갔다.

‘야근할까.’

괜찮은 생각이었다. 기원에게 별다른 연락이 없으니 함께 저녁을 먹겠지 싶었는데, 아침과 같은 분위기라면 기어코 속이 뒤집힐 수도 있었다. 오늘만큼은 그에게 아픈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고 기원 역시 제가 아픈 모습을 별로 보고 싶지 않아 할 것 같았다.

「[오후 6:12] 일 마무리하고 들어갈게요. 먼저 저녁 드세요.」

혹여 너무 쌀쌀맞아 보일까 신경이 쓰여 은은하게 웃는 이모티콘을 붙였다. 그런데 그건 또 억지로 웃는 것처럼 보여 지우고 다시 밥공기 이모티콘을 넣어 보냈다. 헛기침과 함께 휴대 전화를 내려놓은 나언은 일을 시작했다. 늦게 집중을 시작한 만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아홉 시가 되기 직전 집에 도착한 나언이 현관에서 잠시 걸음을 떼지 못하고 머뭇댔다. 너무나 어둑하고 싸늘한 집 안에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옹 소리를 내며 몰려들곤 종아리에 이마를 꾹꾹 눌러 대는 바다와 도에게 나언이 물었다.

“아무도 없어?”

자다가 뒤늦게 뛰어나와 꼬리를 세운 파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으나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내리니 역시나 기원의 신발은 없고 맞은편에는 그의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오는 길에 확인했던 휴대 전화를 다시 꺼냈다.

“…….”

나언은 기원이 제가 보낸 메시지를 읽지도 않았다는 걸 알곤 미간을 옅게 찌푸렸다. 차가운 바깥 공기를 묻힌 나언은 제 목덜미를 쓸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어둑한 실내에는 음식 냄새가 옅게 퍼져 있었다.

아무런 언질을 듣지 못한 사용인들이 저녁 준비까지 해 놓고 퇴근한 모양이었다. 코트를 벗은 나언은 식탁 앞에 앉았다. 꺼진 불은 켜면 되고 식은 음식은 데우면 될 일인데. 어째 손가락 하나 까딱이고 싶지 않은 기분인지 모르겠다.

‘늦으면 늦는다고 말을 해 주지.’

식은 스프를 무성의하게 몇 입 먹곤, 그마저도 음식 냄새가 역하게 느껴져 나머지는 그냥 그대로 냉장고에 넣어 버렸다. 나언은 저도 모르게 뱉은 나직한 한숨과 함께 소파에 앉았다. 기원과 함께 덮던 담요가 보여 손을 뻗었다.

포근한 담요에 코를 파묻으니 옅게나마 기원의 향이 남아 있었다. 나언은 담요로 무릎을 감싼 뒤 조명 아래에서 책을 읽고 예능 프로그램도 시청했다. 이내 잠에 빠진 줄도 모르고 졸던 나언이 흠칫 몸을 떨며 소파 위에서 눈을 떴다. 곧장 담요를 걷어 내고 몸을 일으킨 나언은 잠이 덜 깬 걸음을 옮겼다.

거실과 식탁 쪽을 두루 훑어보고 온 나언의 기분이 저조해졌다. 너른 집에는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딱, 따닥.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으로 손톱을 뜯던 나언이 다시 휴대 전화를 들었다. 오후 열한 시 사십 분을 알리는 시간을 훑어보고 재차 문자함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기원은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소파 위의 흐트러진 담요와 읽다 만 채로 뒤집힌 책, 켜져 있는 TV의 소음이 어쩐지 불안하게 느껴졌다.

무언가에 홀린 듯 전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전화 연결음이 길게 이어졌는데도 결국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전화를 내려놓은 나언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며 어둑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기원이 이렇게 늦는 것은. 혹시나 지원의 기일인 게 너무나 거부감이 들어 일부러 늦게 오는 걸까. 기일에 맞춰 몸까지 아프고 만 자신이 성가셨을 테지. 마주치면 싫은 소리를 하게 될까 봐 먼저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도 없는 너른 집 안은 습한 곰팡이처럼 스스로를 좀먹는 생각을 펼치기 좋았다. 나언의 얼굴에 스몄던 빛은 생각이 깊어질수록 옅어졌다. 가시지 않는 불안에 재차 전화를 걸어 보려던 찰나, 도어 록 잠금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언은 의자에 파묻혔던 몸을 퍼뜩 일으켰다.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슬리퍼를 타닥대며 잰걸음을 옮기던 나언은 안으로 들어서는 기원과 복도 한가운데에서 마주쳤다. 코트를 팔뚝에 얹고 피로한 표정으로 들어서던 기원이 나언을 발견하고 조금 늦게 눈썹을 끌어 올렸다.

“안 잤어요?”

“네, 그…. 늦으셨네요.”

“급한 일이 생겨서요. 저녁은 먹었죠? 약은?”

기원의 등 뒤로 빛나던 현관 조명이 떨어지며 복도는 다시 어둠에 잠겼다. 기원의 거듭된 질문에는 침묵이 대답을 대신했다. 챙겨 묻는 말끝에 아무런 대답 없이 멍하게 서 있는 나언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기원은 피로감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나언에게 말했다.

“점심 걸렀으면 저녁 약이라도 먹어야지.”

자신이 점심을 먹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아는 듯한 말에 나언의 눈에 동요가 일었다. 하지만 기원은 그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고 몸을 돌려 제 방으로 걸어갔다.

“피차 피곤하니까 오늘은 일찍 자요.”

그렇게 기원이 방으로 걸어가려던 순간, 나언이 기원의 팔뚝을 붙잡았다. 기원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나언의 얼굴이 제대로 들어왔다. 아, 이래서 마주하기 싫었다. 갸름한 얼굴에 들어선 어두운 기색에 기원은 다시 속수무책으로 발이 묶인 기분이 들었다. 기원은 내색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표정을 다듬으며 나언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평소보다 더 낮고 쉰 듯한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렀다.

“왜요?”

“…….”

“아직 기분이 안 좋아요?”

기원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나언에게 물었다. 나언의 커다란 눈망울에 맺히는 설움이 분명하게 읽혔다. 기원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바닥으로 코트를 툭 던졌다. 목 끝을 옥죄는 넥타이가 너무 갑갑하게 느껴져 다소 거친 손으로 풀어 내렸다. 그 기색에 팔뚝에 매달렸던 나언의 손이 툭 떨어졌다.

“내가 달래 줘야 해요?”

“……네?”

“아, 다시 물을게요.”

결국 기원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 뚜껑을 열었다. 나언이 기침감기를 앓은 뒤로 면전에 대고 담뱃불을 붙인 건 처음이었다. 다만 기원의 손은 불을 한 번에 붙이지 못하고 헛바퀴를 돌았고 그때 기원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곧이어 다시 한번 불을 붙이자 타는 소리와 함께 불씨가 옮겨 붙었다. 기원은 한숨과 비슷하게 연기를 흘렸다.

“최지원 생각하느라 슬퍼하는 것도 내가 달래 줘야 해요?”

담배 때문에 짓이겨진 발음이었다. 조금은 힘이 빠진 듯한 기원의 목소리 끝에 그는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를 바라보던 나언의 표정 역시 복잡해졌다. 역시 기원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주먹을 움켜쥔 나언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에요. 저는…….”

잠시 머뭇대는 사이 기원의 위태로운 회색 눈동자가 나언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내리깔린 서늘한 눈과 그림자가 질 정도로 곧게 선 콧날, 웃음기를 천천히 잃어 가며 차갑게 닫힌 입술은 5년 전의 기원과 어렴풋이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두렵다고 이대로 입을 꾹 닫아 버리면 그는 다시 오해한 채 등을 보일 것이다. 늘 지원의 그림자 아래에서 허덕인다 생각하는 그에게, 굳이 오해에서 비롯한 불필요한 상처를 거듭 입힐 필요가 없었다. 나언은 굳으려 하는 혀를 겨우 움직였다.

“저는…. 걱정했어요, 최기원 씨.”

“…….”

“아무 연락 없이 늦으셔서,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다고요.”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허공에 놓인 손을 움찔대다 결국 양손을 맞잡았고 겨우 붙은 굳은살을 만지작대며 나언이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지금 속상한 건…. 최기원 씨 때문이에요.”

“…….”

“늦는다고 미리 말해 주지 않은 게 서운하고…. 형 기일이라고 저랑 구, 굳이 거리를 두려는 것도요. …이제 그러실 필요 없어요.”

떠듬떠듬. 자그맣게 이어지는 볼품없는 목소리였지만 가슴을 꽉 채웠던 서러움을 내심 또렷하게 담아냈다. 유일한 감정의 동요는 죽은 형이 아닌, 살아 있는 최기원 때문에 일어나는 거라고. 그러니 혼자 넘겨짚고 애써 상처받을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런.”

“…아.”

피 나요. 나언의 말을 일갈한 기원이 하얀 손을 붙잡아 올렸다. 손톱 옆이 벌어져 피가 나고 있었다. 어둠이 내린 복도 가운데에서 기원은 붙잡은 나언의 손을 한 번 더 끌어당겼다. 강한 힘에 나언의 몸이 쑥 딸려 갔다. 기원은 피가 솟아나는 상처를 엄지로 꾹 문지르듯 눌렀다. 꽤나 강한 힘에 쓰라림이 느껴져 나언이 눈가를 찌푸렸다.

기원은 나언의 손끝에서 비어져 나오는 피를 응시하다 눈동자만 끌어 올려 나언을 바라봤다. 기원이 물고 있는 담배에서 뿌옇고 매캐한 연기가 흘러나와 나언의 얼굴 옆으로 흩어졌다.

“기일…. 하하.”

기원이 나언이 한 말을 곱씹으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선선한 말투가 귓가에 닿았다.

“그러면 아프지를 말아 줄래요?”

“…….”

“이 표정으로, 이 꼴을 하고 지껄여 봤자 변명으로밖에 안 들리거든.”

가볍고 직설적인 말투. 기원은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나언의 손을 붙든 아귀힘이 조금씩 거세어졌다.

“먹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뭘 씨발 그럴 필요가 없어.”

기원이 잇새로 씹어 뱉듯 빈정대며 나언을 확 잡아끌었다. 성큼성큼, 기원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팔을 붙잡힌 나언은 점점 기원의 방으로 끌려갔다. 나언이 본능적으로 발에 힘을 주었지만, 기원이 그런 나언을 한 번 더 당겨 결국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은 기원은 그대로 나언을 밀어붙여 소파에 던지듯 앉혔다.

소파에 엉덩이를 세게 부딪힌 나언이 작게 앓았다. 하지만 얼른 저를 가두듯 팔걸이에 손을 얹은 기원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픈 건 죄송해요. 하지만 정말…….”

기원의 말마따나, 자신이 하필 지금 아픈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먹지 못하고 열이 떨어지지 않으며 잠에 쉽게 들지 못하는 것이 전부 지원 때문이라는 건 정말 아니었다. 이유를 찾지 못한 우울감이 자꾸만 쌓여 가는 건 맞지만, 그건 누구에게도 원인이 있지 않았다. 굳이 찾자면…. 나언은 워크숍 때 밝게 웃었던 제 모습이 담긴 사진을 떠올리곤 퍼뜩 생각을 멈추었다.

입술을 달싹이며 하고픈 말을 열심히 벙긋대던 나언이 결국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어깨를 끌어 내렸다. 스스로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 감정을 무슨 수로 설득할 수 있겠는가. 흥분한 기원을 가라앉히는 게 먼저였다. 나언은 간절함을 담아 말했다.

“저 좀 믿어 주세요.”

그 세 어절에 한계까지 맞붙었던 둘 사이의 감정이 점차 가라앉았다. 기원은 팔걸이를 붙잡은 손을 천천히 떨어뜨렸다. 애처롭게 저를 올려다보는 인영에서 한 걸음 뒤로 떨어져 바로 옆의 소파 테이블 위의 재떨이에 태우던 담배를 거칠게 비벼 껐다. 그러고는 손으로 뺨을 한 번 쓸고 그대로 두 눈을 손바닥에 묻었다.

가라앉은 긴 한숨과 함께 손바닥을 떼어 낸 기원이 나언을 한참 바라보다 결국 히죽 웃었다. 어딘가 처연하기도 한, 힘없는 웃음이었다. 기원은 천천히 손을 뻗어 나언의 뺨을 쓰다듬었다. 마르고 창백한 작은 얼굴. 겁이 들어서면 유독 커지는 큰 눈과 작은 코, 도톰한 입술을 툭툭 건드려 댔다. 세지 않은 강도지만 어떻게 보면 치는 것 같은 건드림에, 나언은 기원의 손이 닿을 때마다 눈을 깜빡였다.

“예뻐서는. 사람 힘들게….”

낯간지러운 말이었지만 나언은 어쩐지 기원의 그 말이 너무나 무겁게 들렸다. 뺨을 톡톡 두드린 손이 거두어졌다. 기원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말했다.

“후…. 그래도, 별수 없으니까 열심히 속아 볼게요.”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은 기원이 비스듬히 다리를 꼬고 턱을 괬다. 기원은 그렇게 얼어 있는 나언을 보며 낮게 속삭였다.

“키스해 줘요.”

“……네?”

나언이 기원을 바라봤다. 기원이 긴 눈을 사르르 접으며 말끝을 길게 늘였다.

“백나언이 키스해 주면 깜빡 속아 버릴 것 같은데.”

마치 애교를 부리는 듯한 부탁에 나언이 침을 꼴깍 삼켰다. 오늘 최기원의 기분이 매우 위태로운 듯했다. 종잡을 수 없는 모습이 이렇게나 툭툭 튀어나오니 말이다. 물론 진짜 때리거나 힘으로 찍어 누르며 강제로 입술을 취하지 않고 이렇게 부탁을 하니 훨씬 낫긴 하지만. 결국 나언은 몸을 일으켜 기원의 쪽으로 다가갔다.

아픈 이후로 제대로 몸을 섞지 않았기에 이런 사소한 스킨십 역시 생소하게 와닿았다. 기원의 앞에 선 나언은 삐걱대는 로봇처럼 천천히 허리를 숙여 기원의 뺨에 입을 맞췄다.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입술 위로 한 번 더 제 입술을 꾹 눌렀다.

‘어…?’

돌연 나언의 눈이 조금 켜졌다. 이상하다. 처음에야 그저 분위기 탓인가 싶었는데, 한 번 더 입술을 묻으니 확연히 느껴진다. 기원의 입술에서 느껴지는 온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최, 기원 씨. 잠시.”

입술을 떼어 낸 나언이 손을 들어 기원의 이마를 짚으려 했다. 기원은 그런 나언의 손을 붙잡아 뿌리치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다시 입술을 겹쳤다. 아무런 말 없이, 기원은 나언을 그대로 침대까지 끌고 갔다. 침대에 푹 처박히면서도 나언은 기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열이…….”

당혹에 물든 커다란 눈이 기원의 안색을 살피려 했다. 그 와중에도 재차 제 이마를 짚으려는 나언의 손목을 붙들어 내리고, 눈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비틀어 빠져나가려 하는 나언을 다급하게 쫓으며 입을 맞췄다.

‘열나요, 어디 아파요?’ 같은 쓸데없는 말을 물으며 자꾸만 몸을 물리기에 기원이 미간을 왈칵 찌푸리며 나언에게 윽박질렀다. 안 뒤지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가시가 돋친 듯 거친 표현에 숨이 멎을 듯한 표정을 하면서도 끝내 눈에는 걱정을 덜지 못한 나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만히 좀 있어, 응?”

종용에 못 이겨 먼저 키스를 한 건 나언이었으나, 결국 지질하게 엉겨 붙어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건 기원이었다. 기원의 이마 밑과 목 빗근에는 솟아난 식은땀이 맺혔다. 열이 펄펄 끓는 몸이었지만 나언의 반항쯤은 쉽게 누를 수 있었다. 기원이 걱정되어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던 나언도 결국엔 포기하고 사지를 늘어뜨렸다.

바지 버클만 성급하게 내려 단단한 성기를 꺼낸 기원은, 성의 없이 구멍 주위를 귀두로 꾹꾹 누르다 그대로 좁은 구멍을 꿰뚫었다. 몸이 약한 나언을 배려해야 하는 건 알지만, 지금 기원은 그것까지 제대로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압박감에 끙끙대는 나언을 품 안에 아스러지듯 안으며 길고 깊은 한숨을 뱉었다. 갈급증이 인 사람처럼 달려들었던 기원은 막상 성기를 집어넣고 나자 들끓던 기운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하지만 겨우 이성을 붙잡은 대신 행위는 그만큼 지독하고 집요해졌다.

이 주 가까이 섹스를 하지 않은 것을 모두 쏟아 내는 양, 기원은 나언의 모든 곳을 핥고 입술로 짓뭉개듯 빨아 댔다. 성기를 박아 넣던 구멍이 풀릴 기색 없이 조이기만 하자, 결국 기원은 성기를 빼내고 대신 얼굴을 아래에 파묻었다. 열이 올라 뜨거워진 혀로 구멍이 미끄덩댈 때까지 빨고 지분댔으며 개처럼 핥았다. 잠시 혀를 떼어 내면서도 성기 아래의 음낭을 핥아 올렸고 손가락으로는 다급하게 구멍을 쑤셨다.

처음에야 기원의 컨디션을 살피려 애쓰던 나언의 초점도 조금씩 탁해지고, 결국 치미는 현기증에 눈을 감고 신음을 흘리게 됐다. 아래가 녹은 것처럼 풀리고 나자 기원은 다시 성기를 박아 넣었다. 그 짓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고, 침대 주변은 체액이 묻은 지저분한 옷가지가 하나씩 떨어져 갔다.

나언은 중간중간 정신을 잃었다가 차리는 것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일어서서 프리컴을 질질 흘리던 나언의 성기도 몇 번의 절정 끝에 흐물흐물해져 멀건 액만 푹푹 쏟아 버렸다. 붉게 부르튼 젖꼭지 옆으로 세 번째 사정을 마친 기원은 그대로 나언의 위에 몸을 겹쳐 누웠다. 의식이 멀어질 것 같은 아득함 속에서도 기원은 아득바득 하나만을 생각했다.

나언이 제 등을 끌어안고, 엉엉 울듯 애원하고 살갗을 비비던 감촉.

지금, 현재, 살아 있는 나언이 제 곁에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안도한 기원은, 밀려드는 온갖 감정에 관통당한 사람처럼 쓰러지듯 눈을 감았다.

새벽녘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나언이었다. 굴러온 돌덩이에 깔려 토하는 꿈을 꾸다 눈가를 찌푸리며 정신을 차린 것이다. 그 어떤 뒤처리 없이 잠든 둘의 나신엔 정사의 흔적이 가득했다. 나언은 제 가슴 위를 누르는 기원의 팔을 떼어 내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뭉근한 통증이 아니라면 어젯밤이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던 기원의 얼굴과 초조한 시선, 그리고 너무나 뜨거웠던 몸.

“……!”

문득 거기까지 떠올린 나언이 눈을 크게 떴다. 나언이 손을 뻗어 기원의 반듯한 이마를 덮었다. 역시나, 열이 엄청났다. 원래 같으면 이 정도 기척에 금세 눈을 뜨는 기원은 여전히 엎드린 자세 그대로 자고 있었다. 나언은 기척을 죽이고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왔다. 퉁퉁 붓고 쓸려 아픈 아래 때문에 순간 앓는 소리를 낼 뻔했지만, 가까스로 소리를 죽인 채 한 발짝씩 떼어 냈다.

***

갈증이 일었다. 여느 때처럼 몸을 일으키려다 전신이 가라앉는 느낌에 그러지 못했다. 눈을 감은 채로 미간을 옅게 찌푸린 기원의 귓가에 간지러운 소리가 들렸다. 너무나 여리고 순한,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마음까지 아프게 하는 목소리가.

“기원 씨. 일어난 거예요?”

겨우 눈을 떴다. 뿌옇게 초점이 흐린 와중에도 가까이 선 이의 맑은 체취가 먼저 느껴졌다. 순간 가슴이 녹는 기분이었다. 기원은 무의식중에 그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겨우 뻗은 손을 붙잡아 내린 곁의 인영은, 제 이마 위에 놓인 미지근한 무언가를 걷어 갔다.

“어어, 가만히 계세요. 열이 안 내려서…….”

귓가가 물에 잠긴 듯 웅웅대는 통에 듣고 싶은 목소리가 정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두런대는 말소리와 타박대는 발걸음이 이어진 뒤 얼음장처럼 차가운 것이 이마 위에 올라갔다. 뒤늦게 제 이마 위의 미지근한 덩어리가 물 묻힌 수건이었다는 걸 깨달은 기원은 무어라 대꾸할 새도 없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기원은 한참 뒤 점심때가 되어서야 온전히 깼다. 이른 아침에 잠깐 잠을 깼을 때보다 몸이 가벼워진 걸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시트를 짚고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자 이마 위에 올려진 수건이 이불 위로 떨어졌다. 역시나 어쭙잖은 간호를 받았던 것이 꿈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자 침대가 잘 보이는 맞은편 소파에 앉은 나언이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책을 들고 느슨하게 앉은 백나언이.

나언은 기원의 책장에서 골라 꺼낸 책을 든 채로 졸고 있었다. 책을 보던 자세 그대로 앉아 고개만 비스듬히 떨구고 있자, 옅은 아침 햇살이 오뚝한 콧잔등과 입술의 곡선을 동시에 비췄다.

예뻤다. 저렇게 망가뜨렸던 걸 후회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이해할 수밖에 없을 만큼. 조금 더 살이 올랐으면, 저 발간 입꼬리가 확 올라갈 만큼, 마른 뺨이 동그랗게 올라붙을 만큼 활짝 웃어 보인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언을 보면서도 나언을 그리던 기원의 눈이 천천히 탁해졌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원은 본능적으로 나언의 코와 입술 그리고 가슴께를 차례로 확인했다.

분명 위아래로 작게 움직이는 가슴을 보고 있는데도 다가가서 코 아래의 숨결을 더듬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발을 침대 아래로 끄집어 내리려던 순간, 나언이 작은 인기척에 기민하게 눈을 떴다.

닫혀 있던 눈꺼풀이 스르르 올라가자,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이 따라 올라갔다. 멍하게 부유하던 눈동자가 점차 초점을 찾아 가고, 비스듬히 쓰러졌던 고개가 느리게 제자리를 찾았다. 스스로가 잠깐 졸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나언이 퍼뜩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빛을 머금어 밝아진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기원은 가슴이 일렁이는 기분이 들었다.

“어, 일어나셨어요?”

갈라진 목소리로 물으면서 나언이 허둥지둥 가까이 다가왔다. 완전히 몸을 붙여 오진 못하고, 적당히 멈춰 서서는 걱정을 담은 눈으로 자신을 흘끔 살폈다. 아픈 기원은 처음이라 눈치를 보고 있었다.

“새벽에 먼저 깼는데 열이 많이 났어요…. 그리고 몸은 제가 대충 닦았어요. 제가 기원 씨를 도저히 들지를 못 하겠어서…. 아, 그리고.”

무언가 중얼중얼 보고를 하던 나언이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병원에 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우물쭈물대던 나언의 시선이 기원에게 슬그머니 닿았다. 기원은 그런 나언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주제넘은 참견이라 생각할까 봐 말을 최대한 아끼려 했지만, 나언의 눈에는 심란한 기색이 잔뜩 했다. 도화지 같은 얼굴이 그 감정을 숨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의 컨디션만 신경 쓰기에도 모자란 놈이었다. 그래서 기원은 더더욱 제 몸 상태를 나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제 아무리 나언이 예쁜 거짓말로 사람을 홀려도 그렇게 방으로 끌고 오면 안 됐었다. 역시나 분을 풀어내는 듯했던 섹스의 여파로 나언의 드러난 목과 쇄골, 손목은 온통 붉은 울혈이 가득했다. 허벅지 안쪽과 가슴 부근은 보지 않아도 뻔하겠지. 기원의 작은 한숨에 나언은 뒷목을 주물대며 작게 말을 덧붙였다.

“부축은…. 필요 없으시겠죠….”

“네.”

“그럼 먼저 나가 있을게요. 아점 먹어요.”

나언의 입에서 나온 준말에 기원이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점심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그나저나 ‘아점’이라니. 회사에 다닌 뒤로 저런 말을 종종 섞어 쓰는데 그게 은근히 제 나이대 같이 귀여웠다. 거슬리지 않게 문을 조용히 닫고 나가는 나언의 뒷모습을 보며 기원이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

식은땀에 젖은 몸을 씻고 바깥으로 나가자 벌써 고소한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기원이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식탁으로 걸어갔다. 홈 바에는 사용인들 대신에 나언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른 등이 국자들 들고 무언가를 휘휘 젓는 뒷모습에 기원이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며 물었다.

“사람들은?”

“아… 일찍 퇴근하시라고 했습니다. 편찮으신데 괜히 신경 쓰이실까 봐요.”

갑자기 들린 말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나언이 다시 죽 냄비로 시선을 돌렸다. 나언은 죽을 퍼서 기원의 자리에 놓았다. 그 옆에 놓인 국그릇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미역국이 담겨 있었다. 본인도 똑같은 죽과 국을 퍼 담은 나언은 기원의 맞은편에 앉았다. 기원은 수저를 든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나언을 보다가 뒤늦게 자리에 앉았다.

“혹시 나언 씨가 요리한 건가요?”

그러자 숟가락을 쥔 나언이 어깨를 흠칫 떨며 손을 내저었다.

“아뇨, 저는 부탁만 드리고 데우기만 했습니다.”

그제야 기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정말 나언이 부탁한답시고, 나언에게 일을 맡기고 퇴근했다면 오늘부로 전부 해고하려 했다.

“잘했어요.”

“전 담기만 했는데요 뭘.”

“그러니까요. 나언 씨가 했으면 맛을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뿌듯해하며 희미하게 웃는 나언이 귀여워 짓궂은 농담을 건네자 나언이 입술을 작게 삐죽이며 국을 담뿍 떠먹었다. 그나저나 제가 아프니 죽은 그렇다 치고, 미역국을 부탁했다고? 기원이 국을 뜨며 고개를 살짝 갸웃하자 나언이 민망한 낯을 한 채 작게 중얼댔다.

“생일이셔서, 미역국으로 부탁드렸습니다.”

역시나 우연이 아닌 것을 깨달은 기원이 나언을 바라봤다. 나언의 얼굴에 옅은 열감이 번졌다.

“아, 기억 안 나시나 봐요……. 어제 생일이라고 말씀해 줬어요.”

“내가?”

“네, 그, 하던 중에…….”

불현듯 어제를 떠올린 얼굴이 조금 더 발갛게 물들었다.

-그으, 그으마한……. 제발, 흐, 으윽, 거기 이제 그, 만 찔……러요. 으흑.

-하……. 그래요,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더 안 건드릴게요.

-흐윽, 흐으, 므, 뭐요…?

-나 오늘 생일인데. 후, 축하한다고 해 줄래요?

어둑한 밤. 기원은 온갖 체액에 뒤덮여 울먹이는 나언의 뺨에 이마를 부비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돌연 울먹이던 나언이 숨을 멈추었다. 눈물이 들어차 흠뻑 젖은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기원을 보기까지 했다. 5년간 단 한 번도 궁금치 않았던 기원의 생일은, 지원이 세상을 등진 바로 다음 날이었다.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져 잠시 침묵하던 나언은 겨우 입술을 떼 축하한다는 말을 뱉었다. 기원은 나언의 눈물 젖은 뺨과 입술에 한 번씩 입을 맞춘 뒤 사정했다.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이.

나언의 말을 곱씹은 기원은 어젯밤 일이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태어난 게 뭐라고, 가족 모두는 물론 기원 스스로도 챙기지 않는 생일이었기에 힘들어하는 나언에게까지 굳이 알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어제의 자신은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지원 때문에 힘들어하는 나언에게 굳이 사랑을 갈구하고 확인받고 싶었던 마음이 이토록 유치하게 발현될 줄이야.

제 미친 짓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리자 나언이 순진한 눈을 깜빡이며 물어 왔다. 왜요, 혹시 생일 아니시냐고.

“아니요, 맞습니다 생일. 잘 먹을게요.”

그제야 안심한 듯 나언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희미하게 웃었다.

사이좋게 죽을 나누어 먹은 둘은 거실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기원은 러그 위에 소파 방석을 베고 누웠고, 나언은 그 곁에 앉아 오전에 보던 책을 이어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언의 책장은 도통 넘어갈 기미가 없었고 나언은 계속 기원을 흘긋 훔쳐보느라 바빴다.

“할 말 있어요?”

낚싯대로 고양이를 유인하던 기원이 나언에게 묻자, 나언은 허둥지둥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결국 책을 덮고 조심스레 물어 온다.

“저, 병원…… 안 가세요?”

눈치를 보다 겨우 묻는 말에 기원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열 다 떨어졌어요.”

체력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이렇게 아픈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라 꽤 놀랐지만, 나름 이유도 있었고 이젠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밥을 먹자마자 나언이 벌떡 일어나 건넨 해열제를 먹으니 그나마 있던 열도 떨어졌다. 이젠 그저 나언을 끼고 주말 내내 뒹굴고 싶었다. 하지만 나언이 일전보다 다소 단호해진 표정으로 기원에게 다가갔다.

“그, 저기.”

그러더니 손으로 기원의 왼손 소맷단을 조심스레 걷어 올렸다. 무방비하게 노출된 기원의 손목은 푸른 멍과 함께 부어 있었다. 당황한 기원이 손을 빼 버리자 나언의 눈썹이 조금 내려갔다.

“손목도 그렇고, 어깨랑 가슴에도 멍이 들어 있었어요. 열이 문제가 아니라 어디를 다친 것 같은데-,”

“운동이 좀 격했네요.”

어제 몸을 닦아 줬다더니 꼼꼼히도 본 모양이다. 기원이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거짓을 말하자 나언은 미간을 옅게 찌푸렸다. 고개를 내젓고 단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 가 봐서 압니다. 병원 가야 해요.”

금 가 봐서 안다니. 나언은 가끔씩 과거 일을 지나치게 담백하게 입에 올릴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오히려 기원의 기세도 확 꺾여 버리는 걸 알아서 일부러 저러는지. 기원의 소리 없는 당황을 눈치채지 못한 나언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단단한 목소리를 냈다.

“왜 다쳤는지는 말 안 해 주셔도 되니까, …병원은 가요.”

결국 성화에 못 이긴 기원이 차 키를 챙겨 들었다. 혼자 다녀오려고 하니 나언은 외투까지 챙겨 입고 거실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스로를 굉장히 믿음직한… 보호자라 여기는 듯했다. 결국 조수석에 나언을 태우고 함께 정형외과에 갔다. 어제 응급실에서 진단을 받고 왔으나, 병원에 다시 들르니 이것저것 자세하게 검사를 해 댔다. 다행히 손목의 뼈에는 큰 문제없이 인대만 늘어났고, 어깨와 가슴은 타박상 진단을 받았다. 어제 집에 오는 길에 성가셔서 버렸던 보호대가 다시 손목에 감겼다.

데구르르 툭.

진료를 받으러 간 기원을 기다리던 나언이 자판기를 꾹 눌렀다. 과일 음료 두 개를 든 나언이 다시 의자에 푹 등을 기대고 앉았다.

‘왜 다친 거지. 늦게까지 어디서, 뭘 하다가….’

병원에 가지 않겠다며 능청스러운 변명을 하던 기원은 막상 병원에 오니 협조적으로 검사를 받았다. 다만 그는 자신에게 진료실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진료실 안에 기원이 있고, 자신이 대기 공간에 있는 건 생소한 경험이었다. 기원은 늘 이런 마음으로 자신을 기다린 걸까. 나언은 매끄러운 음료병을 만지작대며 문이 열리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기원이 휘적휘적 걸어 나왔다. 나언 역시 벌떡 일어나 기원의 쪽으로 걸어갔다. 제가 더 긴장한 얼굴을 한 나언의 머리통을 작게 쓰다듬고 먼저 걸어가자 나언이 바짝 붙어 오며 뽑았던 음료를 꺼내 건넸다. 그러다 기원의 손목에 둘러진 검은색 보호대를 보고 자신이 캔을 달칵 땄다.

“고마워요.”

대답 대신 귓바퀴를 붉히는 나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기원은 가끔 아픈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

기원이 깨지 않도록 이불을 걷고 일어난 나언이 거실로 걸어갔다. 물을 한 잔 내려 마시고 고양이들과 아침 인사를 했다. 여전히 꿈나라인 파를 깨우지 않기 위해 슬리퍼 끄는 소리를 죽이며 거실의 창문으로 다가갔다.

블라인드를 조정하는 순간 나언의 얼굴로 흰 빛깔이 잔뜩 번졌다. 도심 위는 밤새 내린 하얀 눈 때문에 온통 새하얗게 물들었다. 예전에는 눈 오는 게 그렇게 좋지 않았다. 유독 추웠던 집의 얼음장 같은 공기와 응달 아래 언 땅 위로 위태로운 걸음을 걷던 주언이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따뜻하고 넓은 집 안에서 유리 너머로 내려다보는 눈은 아름다웠다. 이대로 높이, 높이 더 높이 쌓여 하얀 벽처럼 자신을 둘러싸면 좋을 만큼.

해가 바뀌었다. 한 해의 초입에 많은 사람은 마음을 다잡는다. 매일 뜨는 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소원을 빌고 1년의 행복을 기원했다. 나언은 굳이 제야의 종소리를 찾아 듣거나 해돋이 명소를 향하지 않았지만, 12월의 마지막 날 눈을 감고 하나를 바랐다. 얼른 건강해졌으면 했다.

건강이란 많은 걸 의미했다. 결국 낫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을 괴롭히는 위염이나, 소리 없이 몸집을 불려 가는 불안정한 생각들이 모두 사라진 평온한 상태. 나언은 왠지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그냥 넋두리를 늘어놓듯 소원했다.

“일찍 일어났네요?”

익숙한 저음에 고개를 돌리자 기원이 방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어제는 저녁을 나누어 먹고 기원과 따로 잤다. 요즘 기원은 내년도 미술관 전시 일정 때문에 일이 바빠졌다고 했다. 저녁을 함께 먹고 느지막이 외출한 기원은 밤늦게 들어왔고, 아팠던 예전처럼 자연스레 따로 자게 됐다. 나언은 피로감에 젖어 목뒤를 꾹꾹 누르는 기원에게 물었다.

“좀 주무셨어요?”

“조금?”

둘의 불면증이 심한 건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커피를 내리는 기원이 나언에게 뭐라도 마실 거냐 물었고 나언은 차를 한 잔 타 달라고 부탁했다. 숙면을 취하지 못한 건 나언 쪽도 마찬가지였다.

기원의 퇴근이 늦어지거나, 저녁에 다시 나갈 때면 나언은 기원의 인기척이 느껴질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기원이 없는 한 시간, 두 시간을 손꼽아 세어 보며 외로움에 젖는 것도 저에게서 피어난 불안정한 생각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나언은 기원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매를 끌어 올렸다. 이유 없이 짙어만 가는 음울한 기색을 기원에게까지 티 내고 싶지 않았다.

“눈이 많이 왔어요.”

나언의 말에 창으로 시선을 옮긴 기원이 거실까지 걸어왔다. 너른 보폭으로 그가 다가올 때마다 커피 향이 섞인 그의 체취가 진하게 다가왔다. 진피차가 담긴 머그잔을 꼭 쥐고 한 입 마시자 뜨끈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부드럽게 넘어가며 속을 데워 줬다.

눈 쌓인 풍경을 내려다보는 기원의 곁에서 나언 역시 창 너머를 응시했다. 어느새 기원은 하얀 풍경 대신 눈을 바라보는 초췌한 뺨에 시선을 옮긴 채였다. 기원은 나언의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그가 상념에서 얼른 빠져나오도록 했다.

“같이 운동하러 가요.”

“…….”

“얼른.”

따뜻한 거실 러그 위에서 여유를 부리고 싶은 나언이 대답을 아끼자, 기원이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며 재촉했다. 결국 나언은 무거운 발을 질질 끌어 드레스 룸으로 가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기원은 2주간 찼던 손목 보호대를 풀자마자 나언을 다시 헬스장으로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기원이 여러 운동 기구를 섭렵하며 다양한 종류의 운동을 하는 동안, 나언은 러닝머신 위에서 아주 느리고 천천히 발을 뗐다. 이미 기원이 강제로 시킨 스쿼트 때문에 허벅지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러닝머신마저도 기원이 지나다니며 한 번씩 속도를 올렸고, 나언은 기원이 뒤를 돈 틈을 타서 속도를 최저로 내려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가온 기원이 기진맥진한 나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샤워를 마친 둘은 식탁 앞에 앉았다. 여전히 나언의 아침은 죽이었다. 나언이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씹는 탓에 늘 기원은 식탁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나언은 오랜 시간을 들여 먹던 죽도 결국 반 넘게 남겼다. 억지로라도 더 먹으려 애쓰던 12월과는 달리, 이젠 더 먹어 보라는 채근에 말없이 윗배만 꾹꾹 쓰다듬는다. 결국 약을 건넨 기원은 나언에게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정말 어디가 안 좋은 거면 말해 줘요.”

“……진짜, 괜찮은데.”

“나 같은 실수 두 번 하는 거 싫어해요.”

“…네.”

죄송해요. 나언이 자그맣게 사과를 덧붙이자 기원이 ‘사과하라는 말이 아니잖아.’라며 나언의 뺨을 툭 두드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기원처럼 크게 아프더라도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회복해 간다. 하지만 나언의 컨디션은 지지부진 좋아질 기미 없이 점점 나빠져만 갔다. 기원의 손목이 모두 낫고 나서도 나언은 여전히 위통과 미열을 달고 살았다.

기원이 건넨 약을 먹은 나언은 씻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 혀끝에 남은 쓴 약의 맛과 기원의 안타까움이 섞인 표정이 끊임없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양치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간 나언이 문득 고개를 들어 제 얼굴을 들여다봤다. 기침은 떨어졌지만, 여전히 며칠에 한 번씩은 미열이 오른다. 제일 문제인 위는 음식만 들어갔다 하면 신경 쓰일 정도로 쓰리거나 메슥거렸다.

“…….”

몸이 아픈 이유. 나언은 해가 바뀌고서야 어렴풋이 눈치챘다. 요즘 나언은 스스로가 낯설 정도로 싫었다.

씻고 회사로 출근한다. 여느 때처럼 사람들과 섞여 지내고 돌아오면 기원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 바다와 파, 도랑 거실을 뒹굴거리고, 달큼한 제철 과일을 먹으며 여유롭게 책도 봤다. 가끔은 기원과 진한 키스를 나누었고, 어떤 날은 어이없는 장난을 걸기도 했다. 그런데 몇 달 간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익숙해진 이 삶이 요즘 따라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 지금 나는 뭘 하는 거지 하는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의 행동을 하나씩 재고 따지게 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느새 뭘 하든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런 자신을 비웃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니었다. 처절하게 바닥을 기며 혐오를 먹고 살았던 과거의 백나언. 자꾸만 나언은 5년 전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평가하려 들었다.

시작은 단순했다. 난생처음 회사 워크숍이라는 것을 가며 느꼈던 들뜸이 어색하게 느껴졌었던 날이었다. 물론 처음엔 그 낯선 감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그 마음의 균열은 워크숍 사진을 받아 든 날 꽤 깊게 팼다.

놀랍게도 사진 속 자신은 활짝 웃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 선 스스로가 이토록 멀쩡한 얼굴인 줄 몰랐다. 뺨에는 생기가 가득하고, 사람들의 말을 듣는 눈은 반짝였다. 사진으로 보기에는 제 삶의 시계는 정상적으로 돌아갔고, 흠 하나 없이 맑아 보였다.

나언은 사진 속 자신의 미소를 보며 자신과 비슷하게 웃던 동생 주언이의 영정 사진을 떠올리고 말았다. 주언이가 건강했던 시절, 가장 활짝 웃었던 사진으로 아이의 마지막을 기렸었다. 외탁을 많이 한 얼굴이라 동생과 저는 웃는 게 꽤나 비슷했다. 그래서 나언은 제 웃는 얼굴에서 불가항력적으로 주언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언이의 웃음은 생의 끝에 지은 영정 사진 속 미소였고, 자신은 흘러가는 현재 속에서 웃고 있었다.

단순히 주언이에게 미안한 감정 때문에 속이 얹힌 듯한 건 아니었다. 그런 감정이라면 주언이가 죽고 난 뒤 충분히 겪었었고 조금씩 극복해 나가고 있었으니까. 다만, 나언은 주언이를 살리기 위해 아이의 곁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고 기원의 집에 들어갔던 자신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최기원을 원망했고, 주언이가 죽기만 하면 다시는 그를 보지 않을 거라며 뼈에 사무친 원망을 씹어 뱉던 자신을. 그랬던 자신이 이렇게 밝게 웃고 있을 줄 몰랐다.

나언은 그런 자기 혐오적 생각이 우울증인지 몰랐다. 그냥 아파서 외로움을 타게 됐고 그래서 이런 썩은 생각에 젖어 가는 것이라 여겼다.

나언의 우울증은 지원의 기일이 지나 주언의 기일이 다가오면서 소리 없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