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숙면
저녁을 먹은 후, 소파 테이블에 앉아 굳이 노트북으로 회사 업무를 들여다보고 있는 나언에게 다가간 기원이 손바닥으로 노트북 커버를 쾅 닫았다. 이미 여러 번 있었던 일이라 나언은 반응조차 하지 않고 다시 자연스럽게 노트북을 열었다.
“하…….”
결국 진득한 한숨과 함께 소파에 늘어지게 앉은 기원의 허벅지 위로 파가 엉금엉금 올라왔다. 푹 늘어진 파의 등을 무성의하게 긁어 주며 기원이 말했다.
“놀자.”
“잠시만요, 이것만 확인하고요….”
“누가 자꾸 백나언한테 일 시키지?”
서늘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읊조린 기원의 눈이 모니터 화면을 훑는다. 최지은 주임이 나언에게 보내 놓은 메일의 내용을 보더니 혀를 짧게 찼다.
“농땡이 치라고 거기 부서 보냈더니 일거리를 주고 있네.”
“제가 한다고 했어요. 이번에 인스펙션 누락 건 때문에 바쁘셔서요.”
“그러니까. 걔 실수 뒤치다꺼리를 왜 네가 하냐고.”
“그동안 많이 도와주셨으니까요.”
말대꾸를 하는 건 아닌데, 업무 메일을 훑어 내리느라 기원에게 다소 딱딱한 말투로 꼬박꼬박 대답하게 됐다. 물론 나언은 기원의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한 걸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기원은 고개를 삐딱하게 젖힌 채로 나언을 빤히 응시했다. 그제야 뺨에 꽂힌 따가운 시선을 느낀 나언이 고개를 돌리자, 기원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키스해 주면 봐줄게요.”
“……뭘 봐줘요?”
“방금 해고하고 싶어졌거든.”
“……저요?”
나언이 손가락으로 제 가슴팍을 가리키며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일하다가 사장님이 놀자고 하면 놀아야 하는 건가? 저녁으로 스테이크를 먹으며 조금 마셨던 와인 탓인가, 순간적으로 인지 부조화가 온 나언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기원은 ‘너겠냐.’ 하며 나언의 뒤통수에 딱밤을 놨다. 그제야 이해한 나언이 눈썹을 끌어 내리며 작게 항변했다.
“그러지 마요……. 좋은 분인데.”
그러잖아도 나언이 몇 번 옆자리의 주임 이야기를 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얼마 전 행사 일정을 잡으며 실수했던 일 때문에 많이 힘들어한다는 말을 꺼내며 나언이 그 주임을 두둔하고 나섰다.
이제 하다 하다 결혼 날짜 잡은 여자에게까지 질투를 느껴야 하나 싶었지만, 정작 그녀를 옹호한 나언은 친절한 주임님이 안타까워서 별 뜻 없이 한 말이라고 했다.
“인사팀에 전화 넣기 전에 얼른.”
나언은 미친 소리 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끝내 기원의 성격을 알고는 러그 위를 무릎걸음으로 걸어 가까이 다가왔다. 부러 가만히 있으니, 양 뺨을 부드럽게 쥐고 곧장 입술을 겹쳤다. 나언은 벌어진 입술 새로 먼저 혀까지 넣었다. 맞닿은 입술 너머로 기원이 입꼬리를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뾰족한 혀끝으로 나언의 입천장을 긁으며 기원이 나언의 팔 아래에 손을 넣어 끌어 올렸다.
소파 위에서 쓰러지듯 몸이 얽혔다. 키스가 짙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언이 생각하기에 기원은 늘 중간이 없었다. 짧은 뽀뽀에서 끝나는 법이 없는 스킨십은, 입술이 모두 빨갛게 부르트고 나서야 그쳤다.
기원은 키스하는 내내 입술을 애무하듯 핥아 댔고, 숨이 빠듯해 가슴이 저려 올 때까지 섞은 혀를 빼 주지 않았다. 오늘 역시 나언이 숨차하면서 기원의 어깨를 파르르 쥐며 다리로 기원을 밀어내고 나서야 몸을 물려 주었다.
“하아, 하아…….”
“최 주임은 봐주도록 할게요.”
끝까지 질 낮은 말을 덧붙이는 기원 탓에 나언은 미간을 찌푸리며 올라간 홈웨어 상의를 끌어 내렸다. 맨살을 얼마나 꾹 쥐고 있었는지 나언의 가슴과 허리 아래는 붉은 손자국까지 남아 있었다.
입술이 부은 채로 일거리를 마무리 지은 나언이 노트북 전원을 껐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후, 물기를 닦던 나언이 거울 너머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뱉었다. 허리께를 쥔 손자국이 아직도 빨갛게 남았다.
“음.”
이 정도면 기원을 이해하기 어려운 건 나언의 쪽이었다. 기원이 가까스로 참고 있는 건 알겠는데, 최기원과 인내심은 도통 매치가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선을 자르듯 행동하는 건 기원의 쪽이었다. 키스를 하다 성감이 오르면, 나언도 가끔 아래가 빠듯하게 아파 올 때가 있었다. 몸이 맞닿아 있을 땐 서로의 흥분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돈데도, 기원은 입술을 떼어 낸 뒤론 그저 헐떡이는 나언을 끌어안고 시간을 죽였다.
싫다던 사람을 호텔까지 끌고 가서 강제로 했던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는다. 문득 미간을 찌푸린 나언이 팔뚝을 들어 올려 냄새를 맡았다.
‘그래, 그럴 리 없지.’
퍼뜩 팔을 끌어 내렸다. 잊었던 버릇을 무심결에 하곤 흠칫 놀란 나언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한숨을 뱉었다.
그렇다면, 기원이 나언에게 욕구를 전혀 느끼지 않느냐. 또 그건 아니다. 어느 날 나언은 무언가 불편한 기색에 잠을 깼다. 그리고 마주한 것은, 방 소파에 앉은 기원이 제 성기를 쥐고 흔드는 모습이었다.
이질적인 광경을 마주한 처음에는 정말 꿈인 줄 알았다. 고개를 젖힌 기원은 트레이닝팬츠를 살짝 내린 채, 고개를 뒤로 젖혀 소파에 기대고 앉아 자위를 하고 있었다.
-하….
기원이 뱉은 뜨거운 숨이 허공에 흩어졌다.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 방 안의 공기가 조금 후덥지근했다. 기원은 느슨하게 앉아 나른한 숨을 뱉어 냈지만, 혈관이 잔뜩 솟아난 성기와 그걸 꽉 쥔 손과 팔뚝은 난폭하게 움직였다.
비몽사몽간에 눈을 끔뻑이던 나언은 기원이 자위하는 광경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흠칫 놀랐다. 작은 바르작거림에 고개를 천천히 끌어 내린 기원은 고개를 살짝 삐딱하게 젖힌 채로 나언을 응시했다.
-…….
-…….
그리고 기원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순간, 기원의 성기 끝에서 투둑, 정액이 터져 흘렀다. 기원의 손을 타고 울컥울컥 액이 흘러넘치는 동안, 나언은 눈을 다시 감지도 그렇다고 기원을 계속 보지도 못한 채 애매하게 시선을 흩뜨려야 했다. 기원은 나언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아무렇지 않은 듯 휴지로 액을 닦았다.
곧장 화장실에서 씻고 나온 기원은 젖은 몸으로 나언의 곁에 다시 누웠다. 포근하고 달콤한 바디 클렌저의 냄새에 나언의 눈꺼풀이 금세 나른해졌다. 익숙한 향과 온도를 느끼며 몇 번 뒤척이던 나언은 다시 잠에 빠졌고, 기원은 특유의 차가운 얼굴로 잠든 나언을 기다렸다.
점차 악몽이 스며들어 일그러지고, 괴로움에 쫓기듯 가쁜 숨을 쉬는 나언이 기원의 가슴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기원은 손을 끌어 올려 나언의 등을 쓰다듬었다. 평생의 과오이자 숙제, 그리고 가엾은 나언이 나누어 짊어지고 있는 형벌이었다.
***
한적한 호숫가. 주차장 구석에 세단 하나가 정차해 있었다. 고개가 한쪽으로 쏟아진 채 졸고 있던 나언의 눈가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으음.”
잠깐 뒤척이던 나언이 눈을 떴다. 화들짝 놀라 차창 바깥으로 펼쳐진 호수를 확인하고서야 나언이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시트는 뒤로 확 젖혀져 있었고, 가슴 위론 기원의 재킷이 덮여 있었다.
“도, 도착했으면 말씀하시지….”
휴대 전화를 보던 기원이 화면을 끄며 피식 웃고 말았다. 잠깐 드라이브를 하러 가는 중에, 나언은 창밖을 보며 자꾸만 혼잣말을 했다. ‘방금 속도면 카메라 찍힌 거 아닌가요.’, ‘여기 분식집이 새로 생겼어요.’, ‘낙엽이 많이 떨어졌어요.’ 같은 말들을 중얼대더니 점점 말수가 적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창문에 쿵, 머리를 부딪쳤다. 제가 졸고 있던 것도 모르고 있던 나언은 아닌 척 자세를 바로잡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차창에 머리를 처박고 쿨쿨 잤다.
호수 공원에 도착하고서도 기원은 나언을 깨우지 않았다. 일부러 의자를 뒤로 젖혀 주고, 재킷을 덮어 주자 나언은 입맛을 다시며 자세를 편하게 잡고 잤다. 좀처럼 보기 힘든 숙면의 모습에 기원도 기분이 편안해졌다.
한 침대를 나눠 쓰는 둘. 그러나 나언과 기원의 실제 수면 시간을 합치면 고작 다섯 시간이 조금 넘었다. 줄곧 악몽에 시달리며 밤새 자다 깨다 하는 나언과, 그런 나언을 다독이며 새벽을 지새우는 기원은 누구 하나 제대로 자지 못했다.
나언은 자신이 악몽에 시달린다는 것을 모른다. 그저 잠귀가 밝아서 깨는 것으로만 생각했고, 그래서 안대나 귀마개 등을 사서 끼고 잤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기원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나언이 알아서 좋을 게 아니었다.
“졸리면 더 자지.”
“아니요. 괜찮아요.”
하품을 몰래 하느라 코가 빨개진 나언이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먼저 내렸다. 기원도 군말 없이 따라 내렸다. 늘 그렇듯 사유지인 호숫가를 한 바퀴 걷고, 따뜻한 음료를 사서 벤치에 앉아 시간을 죽였다. 요즘은 나언이 일거리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볼 때가 많았다. 기원 역시 나긋한 목소리로 나언이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설명했다. 귀찮지만 굳이 친절히 말해 주는 이유는 하나였다. 설명을 잘해 줄수록, 나언의 커다란 눈이 예쁘게 반짝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날씨가 조금 더 쌀쌀해질 무렵. 드디어 나언의 팀에도 첫 회식이 잡혔다. 바빴던 행사 주최가 끝나고, 연말 행사 계획도 마쳐 2주의 여유가 생겨났다. 짧은 휴식을 기념하며 부서원들끼리 소규모로 소고기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오후 5:40] 오늘 회식이에요, 먼저 저녁 드세요.」
아침에 말을 한다는 것을 깜빡 잊었던 나언은, 컴퓨터를 끄며 급하게 기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기원이 읽을 때까지 화면을 보며 기다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최 주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언 씨, 얼른 나와요.”
“네에…!”
의자에 걸쳐 뒀던 도톰한 블루종에 얼른 팔을 끼우고 보폭을 넓혀 팀원들과 발을 맞춰 걸었다. 팀원들은 저마다 수다를 떨며 가까운 한우집을 향했다. 틈틈이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기원은 바쁜 모양인지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한우집에 도착하고 나서는 정신이 없었다. 수저를 깔고, 물도 따라 주고. 틈틈이 추가 반찬도 담아 와야 했고, 고기도 타지 않게 뒤집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입에 들어가는 고기는 몇 점 없었다. 굽기만 하면 순식간에 사라져 가는 고기 대신, 나언은 밑반찬들로 대충 배를 채웠다. 그래도 행복했다.
처음 회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주책스럽게도 나언은 남들 몰래 입꼬리를 씰룩댔다. 회식이라는 건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봤지 실제로 참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했다는 벅찬 감정이 고조되며 마음이 잔뜩 부풀었다.
물론 실제로는 조금 정신없고, 생각보다 긴장되는 자리였지만 나언은 기분이 좋았다.
“나언 씨, 이제 내가 구울게. 난 배불러.”
“아. 괜찮습니다.”
“됐어, 좀 먹어.”
다른 테이블에서 나언을 살피던 최 주임이 테이블로 건너와 나언이 들고 있던 집게와 가위를 뺏어 들었다. 아까부터 도통 먹지를 못하는 나언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막내를 불러다 테이블에 앉혔으면 챙겨라도 줄 것이지, 같이 앉은 대리나 과장은 자기네들 마시고 먹느라 나언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역시나 배가 꽤나 고팠던 모양인지 나언은 제 앞으로 쌓이는 고기를 열심히 씹었다.
이번엔 정신없이 먹느라, 나언은 외투에 들어 있는 휴대 전화를 꺼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열기에 뺨이 발갛게 익은 채로 나언은 쌈도 싸 먹고, 특제 소스에 고기도 푹 찍어 먹었다. 그때 나언이 열심히 고기를 씹어 삼키는 모습을 유심히 보던 유지훈 대리가 소주잔을 들어 나언에게 까닥였다.
나언이 젓가락을 물고 ‘네?’라고 반문하자 ‘한잔해야죠.’ 하며 이죽댔다. 나언이 열심히 고기를 굽는 동안 이미 귀가 빨갛게 익을 정도로 술을 마신 유지훈 대리는 멀쩡한 낯으로 안주를 잔뜩 축내는 나언이 못마땅하기만 했다. 이제 겨우 다섯 점을 먹은 나언이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젓가락을 내려놓고 소주잔을 들었다.
“어허어!”
그러자 유 대리가 나언의 잔을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곤, 아기 혼내는 엄마처럼 눈을 크게 떴다. 결국 나언은 눈치를 살피다 빈 맥주잔을 들었다. 나언이 든 잔 안으로 투명한 소주가 콸콸 쏟아졌다. 반 가까이 소주를 담고 그 위에 맥주를 쏟아붓자 맑은 노란색의 소맥이 됐다. 나언이 진땀을 흘리며 자그맣게 말했다.
“저, 대리님. 죄송하지만 제가 간이 안 좋아서…….”
“뭐? 간? 푸하하하!”
나언의 말을 으레 형식적인 빼기 수법이라 생각한 유 대리가 고개를 젖히며 호탕하게 웃었다.
“나언 씨. 한국 직장인 중에 간 멀쩡한 사람이 어딨어요, 자 짠~.”
간이 망가졌던 과거를 말할 수 없는 나언의 잔으로 유지훈 대리의 소주잔이 맑게 부딪쳐 왔다. 눈치를 살피던 나언은 눈을 질끈 감고 잔을 꺾어 술을 머금었다. 잔을 내려놓으려 하면 ‘첫 잔은 원샷!’ 하는 외침이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결국 목젖을 꿀떡이며 잔을 모두 비우고 나서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나언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몸을 떨었다. 누구 건지도 모를 젓가락이 나언의 입에 고기 한 점을 밀어 넣었다.
“어머. 나언 씨 술 자주 안 마시나 봐.”
“아, 네….”
옆에 있던 김 대리가 씩 웃으며 나언을 귀엽다는 듯 살폈다. 나언이 고기를 한 점 먹으려 하면 유 대리가 소주를 잔뜩 부어 주고, 나언은 두 잔에 한 번꼴로 허겁지겁 안주용 고기를 삼키는 게 전부였다. 중간중간 밑반찬 심부름도 하고, 고기 추가 주문도 하고, 일찍 가는 상사들에게 꾸벅꾸벅 인사도 하다 보니 나언의 눈이 점점 풀려 갔다. 너무 긴장하고 정신이 없는 통에 취기가 올라오는 걸 자각하기도 전에 몸이 술에 잔뜩 절여진 것이다.
결국 잔소리와 비슷한 회사 이야기를 들으며 꾸벅꾸벅 졸던 나언의 자세가 점점 느슨해졌고, 얼마 안 가 이마를 테이블에 붙인 채 잠에 빠져 버렸다.
“아고. 나언 씨 죽었다.”
유 대리가 낄낄대며 웃었다. 취한 과장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던 최지은 주임이 유 대리의 말을 듣고 테이블을 돌아보며 미간을 왈칵 찌푸렸다. 나언이 테이블에 이마를 댄 채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헉, 사장님한테 혼나지 않으려나…….’
어떤 연인이 저렇게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는 걸 좋아할까. 상사라서 말도 하지 못하고, 괜스레 불안해진 최 주임이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나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언 씨, 나언 씨!”
“으응, 네.”
살짝 몸을 흔드니 뺨이 새하얗게 질린 나언이 색색대며 대답을 했다. 최 주임은 이마를 짚으며 작게 한숨을 뱉었다. 이미 화로 안의 숯은 까맣게 탔다. 회식이 마무리되며 다들 삼삼오오 무리 지어 떠나고, 나언을 이 지경으로 만든 유 대리는 이미 거나하게 취한 채로 대리를 부르니 하며 웃고 있었다.
“어, 나언 씨는 최 주임이 챙겨 주는 거야?”
이미 부장님에게 끌려 2차를 가게 된 차장님이 묻는다. 챙기라고 돌려 말하는 행태에 최 주임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택시 태워 보내겠습니다. 차장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래, 막내 챙기는 건 최 주임밖에 없네!”
껄껄 웃는 부장님이 법인 카드로 계산을 마쳤다. 급격하게 조용해진 한우집에서 최지은 주임은 나언을 불렀다.
“나언 씨, 나언 씨! 정신 좀 차려 봐요.”
“아으, 네에.”
최 주임의 간절한 목소리에 나언이 억지로 눈을 떴다. 그제야 가물가물한 눈이 식당을 두리번댔다. 전부 간 것을 보고도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나언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비비며 술 냄새가 잔뜩 섞인 한숨을 뱉었다.
원체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인지, 지금 나언은 너무 졸려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다시 얼굴을 앞으로 수그리니, 최 주임이 ‘어!’ 하며 나언의 뺨을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나언 씨! 집에 가야죠, 집!”
“아아, 집….”
“네, 집이요. 좀 일어나 봐요.”
몽롱한 눈을 끔뻑인 나언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제 손안에 든 나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최 주임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깨워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얼굴을 건드리고, 가까이서 본 건데. 순간적으로 사장님이 부럽다고 느낄 정도로 너무, 너무너무 예쁘게 생긴 탓에 본능적으로 얼굴에 열이 몰린 것이다. 술에 취해 평소보다 표정도 풀어졌고 말투도 귀여움이 묻어 괜히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남의 떡. 그것도 엄청 무서운 남의 떡이니, 최 주임은 고개를 잘게 저으며 제 뺨을 살짝 내려쳤다.
“나언 씨, 이제 좀 걸을 수 있겠어요?”
나언은 마르고, 키가 큰 축에 속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여성 평균 체격인 최 주임이 혼자 끌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가까운 편의점으로 가 숙취 해소제와 시원한 이온 음료를 사 와 먹이고 나서야 나언이 겨우 절뚝이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나언은 제정신은 아니었다. 갈지자로 걸음을 걷다, 갑자기 멈춰 서서 딸꾹질을 했다. 주소를 몇 번이나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택시! 택시!”
일단 금요일 밤, 지금 시간대는 빈 차와의 전쟁이기에 무조건 보이는 택시를 세웠다. 나언부터 구겨 넣고, 뒤이어 최 주임까지 올라탔다.
“어디로 가요?”
“죄송합니다 기사님, 잠시만요. 나언 씨, 주소 말해 줘요.”
“으응, 주소…….”
“하… 유지훈 미친 새끼. 뭔 술을 이렇게…….”
욕을 씹으며 나언의 외투를 뒤지는데, 아까부터 묘하게 거슬리는 진동음이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웅웅대는 소리에 블루종 주머니를 뒤집으니 나언의 휴대 전화가 툭 떨어졌다.
「·」
발신인이 그냥 점이었다. 사람 이름을 왜 점으로 저장해 놓지 하는 순간 전화는 끊어졌다. 그리고 화면에 기이한 숫자가 떴다.
「부재중 전화 · (46)」
“미친, 마흔여섯 통?”
그리고 다시 전화가 울렸다. 얼마나 전화를 해 댔는지, 나언의 휴대 전화가 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최 주임이 얼른 통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네, 네. 백나언 씨 휴대 전화입니다.”
[…….]
“여보세요?”
[누구지?]
그리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과 함께 목소리의 주인이 뇌 속에 바로 떠오른다. 최 주임은 택시에 앉은 그 자세 그대로, 고개까지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 백나언 씨와 같은 부서인 최지은 주임입니다. 저희 부서 회식이 끝났는데, 나언 씨가 많이 취해서 데려다주는 중입니다.”
[…….]
“전화가 계속 울려서… 받았고요, 지금 나언 씨가 술이 많이 올라서 제대로 걷지를 못해서요. 택시에 같이 탔습니다. 죄송하지만 혹시 나언 씨 주소-,”
[최 주임은 나에 대해 관심이 많나 봐요.]
장난기가 묻었다기보단, 권태로운 듯하고 느릿느릿한 목소리. 하지만 어쩐지 속까지 차가워지는 일갈에 최 주임이 얼어붙었다. 잠시 머뭇대다 ‘죄송합니다?’ 하며 대답을 하자, 기원이 살짝 웃음기가 도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만 듣고도 내가 누군지 아네. 나언이 전화에는 그냥 점으로 저장되어 있을 텐데요.]
“아……. 네. 사장님, 목소리가 워낙 좋으셔서….”
[그나저나. 나언이가 몸이 안 좋은데 술을 그렇게 마셨을 리가 없고.]
탁, 탁, 탁. 수화기 너머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내 전화도 이렇게 무시할 리가 없는데. 누가 그렇게 술을 줬을까요.]
침을 꼴깍 삼킨 최 주임이 눈치껏 대답을 뭉그러트렸다.
“저희 부서 첫 회식이라, 다들 들떠서….”
[부서 전체 날리기 전에 말해요. 대답 없으면 최지은 주임이 먹인 거로 알겠습니다.]
“유지훈 대리입니다!”
즉답이 나왔다. 원하는 정보를 얻은 기원이 그제야 멀지 않은 곳의 고층 아파트 이름을 댔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비싼 아파트였다.
[정문까지 잘 데리고 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얼른 기사님에게 아파트 이름을 말했다. 빨리 가 달라는 부탁을 남기자마자 전신에 힘이 쫙 빠졌다. 그사이 푹신한 시트에 뺨을 대고 노곤하게 잠든 나언을 보며 최 주임이 긴 한숨을 뱉었다. 짧은 통화만으로도 살벌한 기운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많이 혼나지만 마요, 나언 씨.’
최 주임은 차가운 차창에 이마를 대고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속이 편한 이는 유순한 얼굴로 곯아떨어진 나언뿐이었다.
***
아파트 입구에 택시가 정차했다. 한참 뒤 문이 열리고, 최 주임의 어깨에 팔을 두른 나언이 비틀대며 택시에서 내렸다. 입구에 서서 담배를 피우던 기원은 꽁초를 짓이기고 그대로 걸어 나갔다.
“어, 사장님….”
뚜벅뚜벅 걸어오는 장신을 최 주임이 먼저 발견했다. 헐렁한 트레이닝 바지에 얇은 긴팔 티셔츠를 입은 기원은, 머리를 내리고 안경을 끼고 있었다. 회사에서 보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지만, 최 주임은 회사에서 하던 것처럼 예의를 차려 얼른 꾸벅 인사를 했다. 그 통에 순식간에 나언의 무게가 쏠렸고, 최 주임이 속절없이 한쪽으로 비틀댔다.
다행히 성큼 다가온 기원이 손을 뻗어 나언을 잡아챘고, 그 덕에 넘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어깨 위에 나언의 팔을 얹고 한 팔로 나언의 허리를 두른 기원은 남은 한 손으로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열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차비 하시고.”
오만 원권 네 장을 건네는 큰 손에 대고 손사래를 치자 기원은 특유의 서늘한 표정으로 최 주임을 빤히 응시했다.
“너무 짭니까?”
“아, 아뇨.”
“그래요. 보니까 최 주임은 이미 알고 있던 것 같은데.”
“…….”
“떠벌리려면 하세요.”
최 주임이 눈을 크게 뜨고 기원을 올려다봤다. 기원이 짝다리를 짚은 채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나는 전국에 알리고 싶은데 얘가 싫어하는 거라.”
“아…….”
“내가 입막음하려면 이십만 원이 아니라 이십억을 줬겠죠. 그러니까 그 돈은 입막음이 아니라 진짜 차비로 쓰라고 준 겁니다.”
“그쵸… 네…….”
“그런데 난 백나언을 곤란하게 만드는 건 두고 보지 않아서요. 뭐, 최 주임이 알아서 처신 잘하리라 믿어요.”
‘시발 어쩌라는 거야 진짜…. 존나 무섭네.’
아무 말 못 하고 쩔쩔매는 최 주임을 두고 기원이 뒤돌았다. 발이 질질 끌리는 나언을 배려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기원을 향해 최 주임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기원을 마주한 이후 줄곧 후들대는 다리를 추슬러 겨우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언이’라고 부르고, 너무나 당연하게 집으로 나언을 데리고 들어가는 모습에 이상하게도 심장이 차분해졌다. 온갖 상상이 덧붙어 더욱 마음을 괴롭게 했던 문제여서일까, 다정한 기원의 모습이 너무나 평범한 연인 같아서, 막상 눈으로 마주하니 별것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편 집 안까지 나언을 매달고 들어온 기원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어깨에 둘렀던 나언의 팔을 풀었다. 그대로 팔뚝만 쥐고 있다, 러그 위로 손을 툭 놓았다.
콰당!
나언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옆으로 넘어졌다.
“아…….”
술에 취해 아픔도 그다지 느끼지 않는지, 나언은 짧게 신음 소리만 낸 후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나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은 기원이 손가락을 들어 나언의 갸름한 턱을 들어 올렸다.
“야.”
“…….”
눈을 내리깔고 술 냄새 풀풀 풍기며 한숨을 뱉던 나언이 커다란 눈을 도록 들어 올렸다. 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언은 잠시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술에 취해 가물대는 시선 속에서 오롯하게 들어차는 얼굴. 그 차가운 낯에 어지러운 초점을 맞추던 나언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갑갑한 듯 셔츠의 목 단추를 만졌다. 기원은 기가 찬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언의 뺨을 쥐었다. 손가락에 하얀 볼이 꾹 눌리며, 나언의 입술이 부리처럼 튀어나왔다.
“너는 씨발 몸 상태가 그따위면서 술을 이렇게 마셨어?”
“우웅.”
무어라 대답을 하려 했지만 볼이 아프게 눌려 발음이 제대로 뱉어지지 않았다. 나언의 눈썹이 미세하게 팔자가 되었다. 그러나 기원은 손아귀에 들어간 힘을 빼지 않았다.
“나언아. 네가 약을 팔십 알 넘게 처먹어서, 간이 개작살이 났잖아. 응?”
참고 참던 기원의 손에 힘이 점점 들어갔다. 이제 슬슬 턱뼈에 묵직한 통증이 차오르며 나언이 발을 버둥거리게 됐다. 기원은 통보식으로 연락한 뒤 회식에 간 것, 이후에 한 번도 연락이 닿지 않은 것, 외간 여자에게 안겨 집으로 온 것 등, 그 어떤 행태보다, 나언이 이 지경이 되도록 술을 마신 것이 제일 화가 났다.
“곁에서 6개월을 기다린 나를 생각했다면 이런 개짓거리는 안 해야지.”
“우, 읏….”
“설마 진짜 처맞아야 말을 잘 듣는 거야?”
생각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적당량의 술 그 이상은 나언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술 하나 제대로 거절하지 못해 이 지랄을 떠는 게 용서가 안 됐다. 하지만 성질대로 뺨을 올려붙이고 배를 걷어찼다간, 나언은 밤마다 아무도 모르게 찾아가는 과거로 순식간에 되돌아갈 것이다. 그것만큼은 피하고픈 기원은 극한의 인내심으로 나언을 견디고 있었다.
“우, 훅…….”
잠시 생각에 빠진 순간, 돌연 손 위로 축축한 것이 닿았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순간 기원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
나언이 울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갔던 것일까. 양손으로 기원의 손목을 붙잡은 나언이 울상이 되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눈가를 움찔 떤 기원이 느리게 손을 떼어 내자 나언이 그대로 손등으로 뺨을 가렸다.
“아파……. 아파요.”
벌써 턱과 뺨 사이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원체 피부가 약한 편이니 내일이면 빨갛게 멍이 들 수도 있었다. 술이 올라 서러운 기색이 쉽게 짙어지는 나언이 아프다는 말을 중얼대며 서러운 듯 코를 훌쩍였다. 반쯤 풀다 만 셔츠에, 눈물까지 뚝뚝 흘려 대는 모습에 기원은 화가 나는 대신 아래가 묵직하게 당겨 왔다.
“그럼 씨발 말을 잘 듣던가.”
술에 취한 놈한테 뭘 더 말하겠냐 싶다마는, 괜스레 툴툴대는 말투로 대응하게 됐다. 나언도 무언가 잘못한 건 아는지 더 말을 보태지 않고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 공기가 갑갑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눈꼬리엔 눈물을 매달고, 한숨을 폭폭 내쉬면서 헛손질을 열심히 하는 모습에 기원도 조금씩 짜증이 가라앉았다.
“백나언.”
“…….”
“안 때릴 테니까 여기 봐.”
셔츠 단추만 들여다보던 눈이 반 박자 늦게 올라왔다. 기원이 손을 들어 아까 세게 눌렀던 뺨 인근을 엄지로 살살 쓸었다.
“전화 한 번에 받아.”
잠시 기원의 말을 곱씹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이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언을 한 번 더 부드럽게 타일렀다.
“나 없는 데서 술 먹지 마.”
다시 또 끄덕. 기원은 착잡한 표정으로 나언의 뺨을 줄곧 문질렀다. 회사에 보내 놓은 걸 알지만, 나언이 전화를 받지 않았던 그 4시간. 기원은 잠시 지옥에 다녀온 기분이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머릿속에서는 나언이 화상을 입고 사라졌던 날의 텅 빈 방과, 흐트러진 병원복만 남은 침대가 떠올랐다.
회사에 전화를 하지 않았던 것도, 나언이 갈 만한 곳을 샅샅이 뒤지지 않은 것도. 만에 하나 정말 나언이 마음먹고 제 곁을 떠나려 한 것이라면 그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놓아주기 위해서 지독한 본능을 누른 것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순간 머리채라도 잡고 끌고 오고 싶으니까. 분노에 눈이 멀어 말을 못 하게 목걸이를 채우고, 손발을 묶은 채로 옷장에 가둬 놓아 버릴까 봐. 하지만 그러는 동안 속은 새빨갛게 끓었고, 뺨은 핏기가 가셔 창백하게 질렸다. 너무 불안하니 속이 뒤집히고 현기증까지 미세하게 일었다.
뺨을 쓸어내리던 기원의 엄지가 나언의 도톰한 입술 위로 내려왔다. 침이 묻어 매끈한 입술을 꾹꾹 문질렀고, 이내 열기가 잔뜩 고인 뜨거운 혀 위를 손가락이 지분댔다.
“사람 초조하게 만들지 마. 응?”
백나언의 앞에선, 하나부터 열까지를 모두 뜯어고치게 된다. 선명한 욕구, 눈빛, 말투, 시선. 하나하나 생각하고 의도하지 않으면 언제건 쉽게 망가져 버릴 것처럼 약하고 순진한 놈. 손가락이 입술 안으로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자 나언의 헐떡이는 숨이 손가락에 예민하게 감겼다.
“우, 윽.”
마치 혀를 섞듯 손가락으로 나언의 입속을 휘저었다. 겨우 검지와 중지뿐인데도 입을 가득 채운 압박감에 나언의 숨이 점점 차올랐다. 긴 손가락이 목젖 가까이를 건드릴 때마다 나언은 눈가를 붉히며 작게 구역질을 참았다.
나언이 잘게 머리를 흔들자 기원은 손가락을 빼내며 바로 입을 맞췄다. 침이 흥건한 손으로는 나언이 풀다 만 셔츠 단추를 마저 끄르고 마른 가슴 안으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헐떡이며 금세 입을 벌린 나언은 마치 운명에 순응하듯 순하게 입을 벌리고 혀를 섞었다.
“흐, 읏.”
평소처럼 옆구리를 쓸어내리는 기원의 손길에, 오늘은 나언이 성마른 신음을 터뜨렸다. 취기 탓에 신음을 쉬이 참지 못했다. 그 작은 소리에 기원 역시 눈이 조금 더 흐려졌다. 잡아먹을 듯 몰아쳐 오는 키스 탓에 나언이 러그 위로 풀썩 쓰러졌다.
“하, 아…….”
“…….”
기원이 입술을 떼어 냈다. 마치 팔 안으로 나언을 가두듯, 위로 몸을 겹친 기원은 반쯤 내리깐 눈으로 나언을 응시했다.
“왜요……?”
그런데 고분고분하게 눈을 맞추던 나언이 불쑥 묻는다. 갑자기 이유를 묻는 통에 기원이 고개만 살짝 기울이자 나언은 더듬대며 말을 이었다.
“왜, 더 안 해요……?”
“…….”
“내, 냄새 안 나는데…….”
말을 하면서도 확신이 들지 않는지, 조금 불안한 기색이 스며든 큰 눈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기원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잠시 말을 멎었다. 그러니까 지금, 냄새가 나서 자신을 더 건드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란 말인가. 그동안 가까스로 키스까지만 하고 입술을 떼어 낼 때마다, 무언가 상처받은 얼굴로 자신을 흘긋대던 나언의 얼굴이 떠올랐다.
예전의 기억이 떠올라, 그게 괴로워서 그런 표정을 짓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순 엉뚱하고 멍청한 자책을 하느라 그런 머저리 같은 표정을 지은 것이었다. 기원은 다른 의미로 열이 올랐다. 저에게 말도 하지 않고 혼자 자학과 같은 결론을 내리려던 나언보다, 그런 결론을 종용한 과거의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기원은 어금니에서 소리가 나도록 턱을 한 번 악다문 후, 나언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랑 하는 거 좆같아 했잖아.”
“……지금은 그 정도 아닌데….”
술을 먹은 나언은 생각보다 많이 솔직했고, 귀여웠다. 누운 나언을 살피자, 꼴에 남자라고 슬랙스 중심 부근에 묵직한 윤곽이 확연했다.
“내일 술 깨고 사람 개새끼 보듯 하지 말고. 씻고 자요.”
하지만 기원은 먼저 몸을 일으켰다. 나언은 그런 기원을 멀뚱히 바라보다 짙은 한숨을 뱉으며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 기원도 뒤를 돈 채 허리춤에 손을 얹고 치밀었던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널브러진 나언을 챙겨 재우려고 고개를 돌린 순간, 기원은 움직임을 멈췄다.
“…….”
지퍼를 슬쩍 내린 나언이 속옷 위로 제 성기를 꾹꾹 누르며 자위 아닌 자위를 하고 있었다. 한 번 섰으니 어떻게든 성감은 해소하고 싶을 것이고, 술에 절여져 손은 제대로 움직이질 않으니 답답해 문지르기라도 하는 것이었다.
혀로 볼 안쪽을 민 기원이 그런 나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걸어왔다. 셔츠와 바지를 대충 걸친 나언을 안아 든 후, 소파에 내려놨다. 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기원이 그대로 나언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흐, 읏…!”
속옷이 순식간에 내려가고, 배꼽까지 바짝 붙은 성기 위로 뜨거운 기운이 덮쳤다. 손으로 대충 짓누르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성감이 확 치달았다. 미끈하고 축축한 입술이 귀두를 핥고, 순식간에 목구멍 안쪽까지 성기가 처박혔다. 나언은 눈앞이 핑 도는 느낌을 받으며 그대로 고개를 젖혔다. 한 번 빨아 준 것만으로도 발가락을 잔뜩 구부리며 나언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하, 으, 읏…….”
뜨거운 혀가 나언의 예민한 기둥을 스쳐 핥았다. 기둥 끝부터 귀두까지를 입술이 쭉 빨아 올린 뒤, 빨갛게 피가 몰린 요도구와 심줄을 뾰족한 혀가 꼼꼼하게 훑었다. 허리를 파딱, 파딱 경련하던 나언이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기원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다.
“……흐, 으.”
그러나 기원은 나언의 양손에 손깍지를 끼우며 그대로 나언의 허벅지 옆에 결박시켰다. 펠라를 받으면서도 묶인 듯한 감각을 느끼며 나언이 허리를 뒤쳤다. 하지만 이미 기원의 입속 깊이 들어간 성기는 기원의 목구멍만 쿡쿡 찌를 뿐이었다. 기원도 나언이 했던 것처럼 미약한 구역을 참으며 성기를 더욱 깊이 머금었다.
나언의 손끝에 점차 힘이 들어가고, 부들대는 허벅지 근육이 조였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숨을 뱉어 내는 것에 그치던 나언의 신음이 점점 짧게 끊어지며 이내 히끅거리는 소리로 변했다.
“흐, 읏, 하윽, 으흑…!”
“…….”
“하아…….”
그리고 몇 번 허리를 얕게 들썩인 끝에, 기원의 입 안에 뜨끈하고 비릿한 액이 확 번졌다. 전신을 늘어뜨린 채 간헐적으로 몸을 떨어 대는 나언은, 사정의 여운에서 쉽게 헤어 나오질 못했다.
“퉤.”
기원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대리석 위로 정액과 침이 섞인 백탁액이 흩어졌다. 손등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문지른 기원이 곧장 바지를 끌어 내렸다. 이미 핏줄까지 잔뜩 선 채로 성이 나 있던 성기가 단단하게 올라붙었다.
“넣을 건데. 싫으면 지금 말해요.”
흥분이 고여 빨갛게 달아오른 나언의 눈이 기원을 게슴츠레 올려다봤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기원이 곧추선 성기를 손으로 훑으며 말을 씹어뱉었다.
“겨우 참고 말하는 거니까. 얼른, 대답.”
“괘, 괜찮…읏!”
그리고 나언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원이 곧장 나언의 슬랙스 허리춤을 잡고, 속옷과 함께 벗겨 냈다. 마르고 하얀 다리를 벌린 뒤 한쪽 다리를 어깨에 걸자, 나언의 몸이 조금 더 눕혀지듯 소파 등받이 위로 구겨졌다.
구멍에 성급하게 귀두 끝이 닿았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들이밀어 기어코 구멍을 찢어 놓고 싶었지만 기원은 귀두 끝만 가져다 댄 후 접합부를 빤히 들여다보며 끓어오르는 충동을 최대한 찍어 눌렀다.
그리고 기원이 귀두와 구멍 사이에 침을 뱉었다. 아직 미끈한 기색이 남은 침이 접합부에 옮겨 붙고, 기원은 손가락으로 그걸 펴 바르며 허리를 조금 더 밀어 넣었다. 옅은 분홍색의 입구가 천천히 벌어지며, 두툼한 귀두를 아프게 물어 왔다.
“하아…….”
허벅지에 소름이 일고, 머리끝까지 난도질당하는 자극적인 성감에 기원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긴 숨을 뱉었다. 땀에 젖어 매끈해진 허벅지 위, 피부가 하얀 탓에 유독 눈에 띄는 붉은 화상 흉터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 준 기원은 허리를 진득하게 밀어붙였다. 내벽 안쪽의 두꺼운 요철까지 느껴질 정도로 기둥이 꽤 깊게 들어갔다.
“씨, 발…….”
근 4년 만에 성기를 받아 내야 하는 구멍은 너무나 버겁게 기원의 것을 물었다. 호기롭게 괜찮다고 말을 뱉은 것을 잊고 나언이 허벅지에 바짝 힘을 주며 고개를 저었다.
“아프, 아파요……! 빼, 빼 줘요!”
시끄럽다는 듯, 입꼬리를 미세하게 끌어 올린 기원이 허리를 숙이며 나언에게 키스했다. 아프다고 울먹이면서도 입을 맞춰 온다고 곧장 입술을 열고 혀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붉은 입속을 보자 기원은 아래가 더욱 빠듯하게 아렸다. 키스를 위해 몸을 굽히자, 결국 남아 있던 성기 기둥이 꾸역대며 완전히 처박혔다. 나언은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술을 맞붙인 채로 몸만 바르르 떨었다.
“우, 윽! 하, 읏, 으응, 읏!”
“하아…….”
조심스레 앞뒤로 움직이며 간을 보던 것도 잠시, 나언의 내벽 안에서 밀려 나온 액과 기원의 침이 범벅이 되며 움직임이 원활해졌다. 결국 기원은 조금이라도 붙잡고 있던 이성을 잃은 채 세게 허릿짓 했다. 나언의 마른 몸이 반으로 접혀 소파에 푹푹, 처박혔다. 아픔에 이를 악물던 신음에 점점 비음이 섞여 들고, 나언은 얼굴이 달아오른 채로 기원의 너른 어깨만 애꿎게 끌어당기려 애썼다. 무엇이라도 붙잡고 매달려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나 오랜만이지만, 기원은 절대 잊지 않았던 관계였다. 나언이 느끼는 따뜻하고 예민한 부근을 귀두가 짓누르는 순간, 아래에 깔린 나언이 눈을 질끈 감으며 탄식 어린 숨을 뱉어 냈다. 기원은 열이 차 땀이 난 허리를 단단히 쥐어 접합부에 고정한 후, 제 아래를 빠르고 옅게 쳐올리며 그 부위를 집요하게 쑤셨다. 나언의 숨이 점차 가빠지며, 아랫배는 물론 척추까지 꽝꽝 울리는 지독한 성감에 전신이 제멋대로 떨렸다. 잇새로는 말이 되지 못해 어그러진 신음이 마구 흘렀다.
“천, 츠, 천천, 흐, 읏, 흐으응……!”
“…….”
“자, 읏, 잠깐……!”
나언이 감싸 안은 기원의 어깨를 손톱으로 아프게 찍어 누르며 애원했다. 너무나 과한 성감이 순식간에 몰아치니 안이 모두 빨갛게 들쑤셔진 기분이었다. 그러잖아도 술기운 때문에 더 참기 힘든데, 곧장 무언가 앞에서 쏟아질 것 같은 두려움에 나언이 기원의 어깨에 걸린 한쪽 다리도 애처롭게 비틀었다.
결국 기원이 마구잡이로 흔들던 아래를 천천히 멈추고 성기를 느리게 빼냈다. 넣는 걸 그만하라더니, 뺄 때도 몸에 잔뜩 힘을 주며 턱을 바르르 떨어 댔다. 술이 아니라 최음제를 먹은 것 같은 반응에 기원 또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약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이렇게 순수하게 흥분한 나언은 처음 봤다.
“하, 으……. 으, 잠깐만요……. 흐.”
숨을 갈무리하며 나언이 깊게 헐떡였다. 성기가 빠져나오자, 아직 다물리지 못한 구멍 사이로 희뿌연 마찰 액이 고였다. 제 아래가 얼마나 음란한 모습인지 상상도 못 한 채, 그저 나언은 숨을 겨우 몰아쉬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훔쳐 댔다.
“…….”
나언의 숨이 조금 안정된 순간 기원은 그대로 팔을 넣어 나언의 몸을 가볍게 뒤집었다. 소파 등받이에 이마가 쿡 부딪힌 나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파를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본능적으로 예전의 기억을 더듬은 나언이 기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 자세는 유독 성기가 깊게 들어왔다. 이미 예민하게 부어오른 아래가 완전히 망가질 것 같았었다.
“으, 흑 잠시만……!”
하지만 아주 잠시 성기를 물러 줬던 게 엄청난 인내의 결과였던 기원은, 뻐끔대는 구멍에 곧장 귀두 끝을 맞췄다. 허리를 맞붙인 순간, 이미 질척해진 성기는 뿌리 끝까지 쉽게 처박혔고, 나언의 손톱이 가죽 소파에 반달 자국을 남겼다.
“하, 윽!”
“아……. 힘, 씨발. 힘 좀, 빼.”
잇새로 겨우 말을 씹어뱉은 기원은 아래를 세게 처박았다. 이미 전신이 땀에 젖어 허벅지 끼리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더욱 외설적인 소리에 나언이 몸서리치며 우는 듯한 신음을 쏟아 냈다.
“너무, 찔러, 안에 깊, 흐윽, 깊어, 아흣, 흐…….”
“이렇게, 하……. 좋아할 줄 몰랐네, 내가.”
아래로 손을 넣어 다시 바짝 올라선 나언의 성기를 꾹 쥐자, 나언의 내벽이 확 움츠러들며 기원의 성기를 꽉 조였다. 축축한 손으로 귀두와 기둥까지를 빠르게 흔들자 나언은 다리를 바르작대며 울먹였다. 뒤에서 보이는 동그란 뒤통수, 빨갛게 달아오른 귓가까지 모조리 야했다.
동시에 기원이 허리를 깊게 쑤셔 박자 나언의 얇은 등허리가 파르르 경련했고 등골이 더욱 깊게 팼다. 군살 없이 마른 허리를 손바닥으로 쓸어 주자, 모든 접촉이 지나친 자극인 듯 나언은 주먹으로 소파를 내려치며 뜨거운 숨을 뱉었다.
“하, 읏, 으, 흐윽, 흑, 흣!”
단단하고 예쁘게 선 나언의 성기 끝에서 다시 액이 튀었다. 손아귀 아래 붙잡힌 허리와, 맞닿은 끈적한 다리, 접합부를 따라 짓눌린 하얀 엉덩이까지 사정감과 함께 모조리 덜덜 경련했다. 기원도 치미는 사정 욕구를 참고 다시 성기를 뺀 후, 탈력감에 쓰러지려는 나언을 소파에 바로 눕혔다.
이미 지나치게 자주 오른 오르가즘에 나언의 검은 눈동자는 뒤로 넘어가려 했다. 기원은 입고 있던 티를 벗어 던지고, 나언의 힘 빠진 다리를 팔뚝에 걸었다. 짐승과 같은 표정으로 성기를 삽입하자, 이젠 신음을 뱉을 힘도 없는 나언이 입만 뻐끔, 벌리며 한쪽 눈을 찌푸렸다.
붉은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소리가 되지 못하고 흩어졌다. 이젠 기원이 거센 허릿짓을 할 때마다 정액과는 거리가 먼 묽은 액체가 배 아래로 푹푹 번져 흘렀다. 이미 나언의 배 안에 정액을 잔뜩 싸지른 것도 모른 채, 기원은 끊임없이 허리를 움직이고 벌어진 입술이 불어 터지도록 집요하게 씹었다.
열이 오른 붉은 뺨과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 빨갛게 익은 입술과 귓불, 눈물이 엉겨 붙은 긴 속눈썹까지 모조리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뒤로 넘어가려 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마주 보려 애써 길을 잃지 않는 까만 눈동자가, 자꾸만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게 했다.
“…….”
벚꽃이 흩날리던 풍경을 공허하게 보던 흐린 눈동자가 지금의 눈과 겹쳐 온다. 그 시체 같은 몸에 발정해 나언을 강간하고 또 강간했던 지난날이 떠오르며 기원의 뺨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멍이 들 정도로 뺨을 내려쳐 강제로 눈을 맞추고, 흐린 기억 속에서 겨우 행복했던 순간에 젖어 있던 나언을 현실의 지옥으로 끌고 온 날. 그날 나언은 손목을 긋고 차가운 피가 맺힌 바닥에서 죽어 갔었다.
히끅대며 흔들리던 나언이 기원을 바라봤다. 찌푸려진 미간과, 얼룩진 회색 눈을 응시하다 소파 아래로 늘어진 팔을 가까스로 들어 올렸다. 가는 손가락이 기원의 눈 아래를 살짝 스치고 지났다. 나언의 손끝이 투명하게 젖었다.
“내가… 미안.”
기원이 몸을 내려 나언을 끌어안았다. 땀에 젖은 하얀 목덜미에 이마를 기댄 채 기원은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나언은 손을 뻗어 기원의 손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흐리지만 분명한 흔적이 남은 마른 손목과, 핏줄이 돋은 팔뚝 아래 흉측한 칼자국이 남은 손목이 맞닿았다.
***
다음 날 아침. 나언은 불쾌한 갈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거실 커튼 사이로 토요일 오전의 나른한 햇살이 깊숙하게 쏟아졌다.
‘거실…….’
미약한 두통을 느끼며 눈을 굴려 낯선 풍경을 담았다. 그리고 천천히 어제의 기억을 떠올렸다. 마치 얇은 포장을 벗겨 내듯 한 장, 한 장 흘러가는 기억 속에서 나언은 기원과 입을 맞추고 몸을 섞었던 순간을 느리게 곱씹었다.
최기원에게 치밀었던 원망은 선연했다. 기억을 잃었던 짧은 사이 느꼈던 불안한 애정은, 기억을 되찾은 이후의 혼란과 섞이자 그야말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어느덧 시간이 흘렀다.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만 진득하게 고였던 썩은 가슴이 이제 조금은 나아지고 있었다. 그를 미워하지 않겠다, 용서하겠다, 사랑하겠다, 이런 거창한 다짐 따위 기어코 하지 않았다. 그저 불행하지 않을 정도로 하루를 보내다 보니, 조금은 단단해진 마음으로 기원을 마주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하루가 일주일이 되고, 또 한 달이 흐르다 보면 행복한 하루쯤은 제 삶에 끼어들지 않을까.
어떻게 손댈 수 없이 엉켜 버린 삶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 운명을 온전히 끌어안을 수 있게 될 시간을 잠자코 기다리는 것.
소파에 얽힌 채 잠들었던 어젯밤을 더듬었다. 기원과 저 모두, 재회 이후 처음으로 불면을 겪지 않은 바다같이 적요한 밤이었다.
너무나 개운하고 맑은 새벽의 감각에 젖은 채, 마찬가지로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잠든 기원의 얼굴을 훑었다. 역시나 그 편안한 얼굴은 낯설 만큼 생소한 낯이었다.
이렇게 오늘 하루 조금 더 편해졌다.
아주 까맣고 깊은 바다에 편안하게 잠겨 들었던 수면의 감각을 더듬으며, 나언도 다시 눈을 감았다. 그간 느끼지 못했던 숙면의 포근함은 아주 달고 부드러웠다. 단단한 가슴팍에 이마를 기대며 익숙한 체취를 들이켰다.
“다시 잘 시작해 봐요.”
작게 중얼댄 나언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 견디다 보면, 서로가 거슬리지 않는 습관처럼 익숙해질 날이 올 테니까.
-리오퍼(Reoffer)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