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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Reoffer (19/28)

17. Reoffer

“나언아, 와서 먹고 해.”

테이블 위를 오가던 물기 묻은 행주가 움직임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뽀얀 수육과 김치가 하얀 그릇에 가득 담겨 있었다.

“이게 뭐예요?”

새 김치를 했다며 웃는 아주머니는 손짓으로 나언에게 앉으라 한 후 전화를 걸었다. 아주머니의 부탁으로 잠깐 가게를 지키고 계신 할아버지의 낮잠을 깨우려는 듯했다.

나언은 앞치마를 풀어 의자에 걸고 앉았다. 기름기 낀 음식을 좋아하진 않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가게에 일거리가 많아 속이 약간 허했다. 김치를 집어 고기 위에 쌓아 먹는 젓가락질에 거침이 없었다. 일한 뒤 먹는 음식은 평소보다 달았고, 소화가 더딜 걸 알면서도 끝내 배불리 그릇을 비우고야 말았다.

여기 정착하기 전까지 이 일 저 일 참 많이 해 봤다. 편의점도 야간까지 뛰어 봤고 PC방 아르바이트도 했다. 하지만 오래 일하진 못했다. 많이 나았다곤 하지만 정상인의 체력에는 미치지 못한 탓이다. PC방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특히 사장님께 많이 혼났다. 남들보다 손이 느리고 이해력도 딸린다는 말에 충격도 먹었다. 하지만 버텨야 했다. 다른 할 일이 없으니까.

눈총을 받으면서도 항상 10분 전에 도착해 일할 준비를 마쳤다. 그러면 ‘착하긴 한데.’ 하는 고용주의 미련이 잘리는 것을 유예시키긴 했다.

하지만 성실한 나언은 일을 먼저 그만둔 적 없었고 언제나 잘리는 것으로 끝났다. 사정은 딱하지만 어쩔 수 없다며 넌지시 말하는 건 착한 경우고, 어떤 날은 일하는 중간에 허망한 낯으로 고시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실수가 잦았기에 누구 탓도 할 수 없었다. 손목이 결려 끓이던 라면을 쏟기도 했고, 수면제를 털어 먹은 다음 날에는 늘 자잘한 계산 실수가 줄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PC방에서 잘린 날. 나언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뱉었다. 속이 쓰리고 갑갑했다. 입술 새로 흩어지는 뿌연 입김을 보며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참았다. 바쁜 사람들은 우뚝 멈춰 선 나언을 피해 갈 길을 갔다.

너무나 무력해서, 저 평범한 사람들처럼 다시 걷기엔 꽤나 지쳐서 나언은 일을 구하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혔다. 유달리 추운 겨울, 난방이 잘 들지 않는 고시원에서 이불을 끌어안고 버티다 가방을 쌌다. 저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린 탓에, 1년 반 동안 지냈던 고시원을 떠나는 뺨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충동적으로 찾은 곳은 많이 아팠던 때 흘러 들어갔던 남해의 돼지 국밥 가게였다. 사실 지친 나언이 그곳을 찾는 데만 만 하루가 걸렸다.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아무 버스에 무작정 올라타고, 길이 보이면 걷는 것을 반복해 찾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근 3년 만에 찾은 곳은 신기하게도 참으로 여전했다. 그 익숙한 정적이 새삼스럽게 감사했다. 나언은 잠시 뜸을 들이다 인적이 드문 구멍가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할아버지는 갑작스레 인사를 하는 나언을 빤히 바라보다, 3년 전의 어렴풋한 흔적을 떠올렸고 무심하지만 당연하게 손님을 반겼다.

그 겨울날. 아주머니가 끓인 국밥으로 속도 데우고, 조용조용하게 대화도 나누었다. 그동안 뭘 하고 지냈냐는 질문에는 그래도 아르바이트라도 했던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하며 겪었던 일을 조곤조곤 말하자, 많이 밝아졌다며 아주머니께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정신없이 말을 더듬고, 몸을 흠뻑 적시고 와 엉엉 울던 때와 비교하면 많이 사람 같아 보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잠시 여행처럼 들른 곳에 자연스럽게 눌러앉은 지도 어언 2년 차였다. 많이 노쇠해진 할아버지의 잡화점 일을 아주머니가 대신 보며, 국밥 가게는 어느 순간부터 나언이 돌보게 됐다. 크게 바쁘진 않았지만 손님이 그리 없는 편도 아니었다. 최근 가까운 부두에서 영화를 한 편 찍었는데, 그게 입소문을 타며 관광객이 늘었다. 변변찮게 먹을 것이 없는 동네라 사람들이 꽤 찾아왔다.

다행히 여행으로 찾은 손님들은 기분이 좋은 편이었고, 나언의 실수나 다소 느린 응대에도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여기서 지내며 이제 나언의 나이 앞자리도 3으로 바뀌고, 나잇값 좀 해 보려 적은 돈도 알차게 모았다.

그렇게 삐걱대며 굴러가기 시작한 일상 속에서, 나언은 겉으로 보기엔 제법 성숙해진 몸이었지만 여전하게도 삶은 녹록지 않았다.

***

생활비 대부분은 병원비로 소진됐다. 진통제와 해열제는 약국에서 구비했지만, 수면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꼬박꼬박 타 오는 수면제에도 이젠 내성이 생겨, 술과 함께 홀짝일 때가 생겨났다. 유달리 겨울이면 더 그랬고, 지원이 형의 기일이나 주언이의 기일이 돌아오는 날에는 약도 술도 모두 무의미했다.

-기억이 돌아오게 되면 아마 날 잊긴 힘들 겁니다,

기원이 그날 했던 말 중에 유독 오래 남았던 목소리였다. 잊기 힘들 거란 말. 응축된 말에 지난 4년의 아픔이 고스란히 숨겨져 있었고 그래서 더 밉고 화가 났다. 그 대답에 의문스러운 낯을 하던 자신을 보며 기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첫 1년은 오롯이 그를 원망했다.

기억을 찾자마자 기원이 알려 준 아파트로 가 신분증과 제 명의의 통장만 챙겼다. 카드 키는 현관에 던져둔 채 문을 닫고 그곳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선연한 집착이 문득문득 목을 조여 왔다.

말하지 않았던 주소를 알아내고, 몰래 형의 묘를 찾았던 것을 이미 알고 있고, 경호원의 차를 뒤에서 들이받았던 순간의 공포가 되살아나 발목을 잡는다. 최기원이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아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조차 버거웠다.

낡은 고시원 방에서 근 1년 동안 스스로를 갉아먹는 짓으로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기억하려 해도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모를 만큼 처절하고 혼미한 순간들이었다. 일 분 일 초의 후회와 분노가 전신을 얼어붙게 했고, 목 아래로는 늘 가쁜 울음이 들끓었다.

최기원이 미웠고, 다시 살아난 자신을 원망했다. 주언이에게 미안해 화장실 벽에 머리를 찧었고, 기원을 다정하다 여겼던 순간마다 형이 생각나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죽진 못했다. 이상하게도 그럴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렇게 1년을 지내자 모아 뒀던 돈이 바닥났다. 결국 떨어진 수면제를 다시 타기 위해 일을 구해야 했다. 그 이후 2년 차엔 번번이 잘리고 일을 다시 구하고의 반복. 돈이 없어 약을 먹지 못하면 밤새 기원의 꿈을 꿨다. 그와 자신의 관계처럼 종잡을 수 없는 꿈속에서, 나언은 몇 번이고 길을 잃었다.

그를 견디기 싫어 도망친 삶에서도 그 때문에 아픈 건 여전했다. 악몽을 견디기 위해 붙잡을 건, 낡은 솜이불 하나뿐이었다. 거뭇하게 눈 밑이 죽고, 깨어나도 몽롱한 눈으로는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고시원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나언은 불가항력적으로 기원을 생각했다. 달라진 것이 없어 조급해지는 날이면 마음은 금세 약해졌다.

병실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꾹 쥐었던 그의 손이 생각났다. 잠이 든 제 곁으로 와 가슴 위에 귀를 가져다 대는 그의 텅 빈 눈동자가, 가여울 정도로 말라 가는 몸이, 가끔은 쓰러질 것처럼 간절한 얼굴로 자신을 깨웠던 순간이 어둑한 방 안에서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무심코 그의 위태로운 1년을 동정하려 들 때면, 나언은 작업실에 자신을 가두고 밤새 아픈 몸을 억지로 갈랐던 과거의 최기원으로 잊었다. 나언의 케케묵은 기억에는 수많은 최기원이 있었다. 그 괴리에 혼란해하며 심장을 쥐어뜯어야 하는 건 오롯이 나언 혼자였다.

마치 관성처럼 그를 이해하려 드는 스스로가 너무나 두려웠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베개에 이마를 파묻고 크게 악을 질렀다.

***

그와 처음 만난 것이 5년 전이다. 그 추운 겨울을 떠올리면 발밑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때가 종종 있었지만, 이젠 많이 무뎌졌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절대 잊진 못했다.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은 나언에게 깊은 흉터를 남겼다. 손목의 흉터도, 목의 흉터도, 허벅지와 종아리의 화상도 많이 옅어졌지만 끝내 없어지진 않은 것처럼.

오늘은 시간을 내 주언이를 찾기로 했다. 밤새 시달렸던 주언이의 악몽이 꽤나 선명한 탓이다. 주언이 울지 않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꿈을 꾼 뒤로 나언은 한숨을 자지 못했다.

에어컨을 틀어도 여전히 더운 기색이 가득한 국밥집은, 여름에는 손님이 좀 줄었다. 아주머니께서 늘 쉬라고 해도 딱히 할 일이 없어 어떻게든 일을 하려던 나언도, 오늘만큼은 순순히 휴가를 내기로 했다. 서울까지는 꽤 멀었고 이렇게 울고 싶은 날은 몇 없었다.

흉터 때문에 늘 긴 옷을 입다, 반팔을 입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이젠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목의 손톱자국이나 손목의 자해 흉터는 잘 보이지 않았다. 잘 다녀오라는 배웅을 하는 아주머니께 꾸벅 인사를 남긴 나언은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향했다.

마을버스 차창에 이마를 기대고 멍하게 풍경을 살폈다. 창문의 반은 커튼이 가리고 있었지만, 커튼의 틈새로 흩어지는 희미한 빛이 예뻐 그냥 뒀다. 이렇게 바깥을 오래 구경할 여유를 언제 가져 봤더라. 처음엔 생각 속에 최기원이 끼어드는 것이 싫어 굳이 더 몸을 바쁘게 움직였으나, 이젠 그냥 내버려 두게 됐다. 어찌 됐건 제 삶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 최기원이라는 사실을 애매하게 인정한 일종의 체념이었다.

서울로 가는 표를 끊고 고속버스에 올라탔다. 꽤 오래 가야 했기에 나언은 편하게 자세를 잡고 자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깊이 잠들지 못했다. 몇 번 뒤척이다 눈을 뜬 나언은, 마침 버스 기사가 틀어 놓은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긴 안식년을 끝내고 비공개 개인전 개최, 경영 복귀를 앞두고 승계에 초점」

소리 없이 흘러나오는 뉴스에 나언이 눈을 떼지 못했다. 자막을 몇 번이나 읽어 내리는 동안 자료 화면 속에는 외면하고 지냈던 최기원의 모습이 가감 없이 담겼다.

반듯하게 머리를 올리고 몸에 알맞은 정장을 입고 걸어가는 모습에 나언의 낯이 평정을 잃었다. 늘 무표정한 얼굴은 유독 눈이 빛났고, 깊은 눈두덩이와 우뚝 솟은 코는 깎아 놓은 것처럼 수려했다. 지원이 형과 언뜻 닮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전혀 닮지 않게 느껴지는 남자.

나언은 매스컴을 타는 그의 완벽한 모습을 보며, 병실 안에서 수척해 가던 최기원의 얼굴도 동시에 떠올렸다. 이제 전혀 다른 두 모습에 혼란을 느낄 필요가 없다. 모두 아득한 과거일 뿐이니까.

잘게 고개를 저은 나언이 고개를 돌려 차창에 이마를 댔다. 그러지 않고 싶었지만, 끝내 작은 의문이 두둥실 떠오른다.

지금 최기원은 어떠한 모습으로 지내고 있을까.

한순간의 장난처럼 여기고 이젠 나를 전부 잊었을까.

다 잊어서 저렇게 요란하게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일까.

아닌 척하려 했지만, 괜히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 왔다. 나는 아직 버거운데, 이것 역시 혼자만의 짐인가 보다. 기원이 자신을 잊었으면 좋겠지만, 반대로 저를 잊지 못해 더 바닥까지 아팠으면 좋겠다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때마침 저려 오는 손목을 꾹꾹 눌렀다. 경련이 올 때면 요령 있게 손목을 주무르던 손길이 불현듯 떠올랐지만, 나언은 상념에 젖는 대신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대교를 눈에 담았다. 서울이 점점 가까워졌다. 정신없이 손목을 주무르던 손아귀에서 결국 힘이 죽 빠졌다.

아침 일찍 출발했건만, 해가 지면을 달구는 한낮에서야 주언이의 납골당에 도착했다. 주언이가 좋아하는 새 젤리를 넣고, 예전 것은 잘 챙겼다. 무엇 하나 쉬이 버리지 못하는 성격 탓에 챙겨 온 젤리 또한 내용물이 진득하게 짓무를 때까지 방에 두고 묵혔다.

“형 왔어. 그러니까……. 자꾸 그렇게 쳐다보지 마. 형이 미안해, 자주 올게.”

허황된 약속으로 아이를 달래고, 손등으로 눈물을 찍어 닦았다. 그리고, 오늘 역시 납골당 한편에 들어 있는 싱싱한 생화를 바라봤다.

기일에는 물론, 가끔 시간을 내어 불시에 찾아올 때에도 주언이의 납골당 안에는 꽃이 들어 있었다. 조금도 시들지 않고 늘 만개한 꽃. 계절마다, 달마다 다른 꽃은 언제나 다채롭게 꾸며져 있던 감옥의 작은 정원을 떠올리게 했다.

기원에게서 도망친 첫해에는 그 꽃을 꺼내 바닥에 대고 보란 듯이 짓밟아 버렸다. 소름이 끼쳐 몇 번은 욕을 뱉기도 했고, 짓이긴 꽃잎을 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걷어차 버리기까지 했다. 다음 해에는 그걸 치워야 하는 분들을 고려해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렸고. 그다음 해에는 텅 비어 있는 주언이의 납골당이 애틋하다는 이유로 그냥 뒀다.

오늘은 그 꽃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보라색과 하얀색의 꽃이 섞여 있는 작은 아네모네 다발을 꺼내 향을 맡았다. 너무나 싱그럽지만 왠지 모르게 처연하게 느껴지는 물 내음을 맡은 나언은 꽃을 다시 비스듬히 넣었다. 때맞춰 피어난 꽃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마땅히 할 것이 없는 나언이 택시에 올랐다. 목적지를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나언은 멍하게 차창에 이마를 기댔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 그랬잖아.’

누가 묻지도 않았지만 나언은 괜히 터 오는 싹을 혼자 잘라 내느라 바빴다.

택시는 나언의 신분증에 적혀 있는 고층 아파트 입구에 멈춰 섰다.

단지 안까지는 잘 찾아 들어왔지만, 아파트 입구는 암호가 걸린 유리문으로 닫혀 있었다. 지독하게 뜨거운 태양열을 고스란히 받고 걸어오느라 나언의 귀와 뺨이 빨갛게 익었다. 잠시 주춤댄 나언이 포기하고 돌아가기 직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패드를 슬쩍 건드렸다.

「0506」

“하….”

그리고 단 한 번의 추측에 허무하게 열린 문을 보며 나언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사이에 껴, 마치 퉁 치는 것처럼 단 한 번도 제대로 축하받아 본 적 없이 어물쩍 지나갔던 제 생일을, 기원은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기원의 발을 따라 열심히 걸었던 기억을 더듬어 아파트 입구까지 갔다. 굳게 닫힌 도어 록 역시, 같은 비밀번호로 쉽게 열 수 있었다.

“…….”

아파트의 내부는 3년 전 기원이 데리고 왔던 때와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다. 정갈하게 관리가 잘되어 전혀 때 묻지 않은 장소.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여긴 낡지 않았다. 여전히 제 것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공간을 휘 둘러본 나언은 지친 몸을 이끌고 소파에 푹 파묻혔다.

어느새 뉘엿하게 넘어가는 해 때문에 햇살이 노르스름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유리창과 대리석 바닥에 번지는 색을 바라보며 나언은 작게 한숨을 뱉었다. 여기까지 왔지만, 특별히 뭘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언제쯤 돌아가야 할지를 가늠하는 힘이 빠진 시선 끝에 테이블 위의 작은 종이가 걸렸다.

-「최기원 개인전」

홀린 듯 몸을 일으킨 나언이 손을 뻗어 티켓을 들었고, 자연스레 시선은 전시의 시간과 장소를 읽고 있었다. 개인전은 내일까지 이틀간만 열렸다.

아주 탁한 우연들이 모여, 나언의 다음 행선지를 정해 줬다. 볕에 익은 귓불이 제 색을 찾기 전에 다시 나언은 택시에 올랐다. 더듬대며 장소를 말하고 나서도, 이게 맞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늘 잘못된 선택을 했었다. 지금 그의 전시장에 가는 것 역시, 뜨거운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한낱 벌레의 자살 행위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언은 묻고 싶었다.

희미해져도 절대 지워지진 않는 그런 끈질긴 인연이 당신에게도 똑같냐고. 그래서 늘 주언이의 납골당에는 5년째 꽃이 시들지 않고, 불청객일 것이 뻔한 개인전의 표를 보란 듯이 텅 빈 아파트에 두고 온 것이냐고.

이렇게 오랫동안 서로를 난도질할 관계였다면, 도대체 왜 그렇게 시작했었어야 했을까, 라고.

택시에서 내려섰을 때, 하늘에는 어둑한 노을이 짙게 내렸다. 호기롭게 내려섰지만 나언은 쉽게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골목을 서성이며 나언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마른세수를 했다.

이상하다. 갤러리 주변이 너무나 고요했다. 뉴스에서 비공개 개인전이라고 하는 것을 봤지만, 아예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 건 기이한 일이었다.

결국 갤러리를 둘러싼 담장 아래의 짧은 그늘에 쭈그리고 앉은 나언은 가빠 오는 숨을 참았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용기를 내어 몸을 일으켰고, 몇 걸음 만에 건물 입구를 지났다. 역시나 작은 갤러리 안은 전시의 흔적이 일말도 없었다. 아무런 작품이 걸리지 않은 텅 빈 벽에는, 기원이 등을 기댄 채 멍하게 서 있었다.

단 한 장만 준비된 표. 제목도 작품도 없이 단 한 명을 기다리기 위해 열린 갤러리 안으로 기원이 유일하게 갖지 못한 작품이 걸어 들어왔다.

허공을 응시하던 얼굴이 천천히 돌아갔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기원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 갔다.

“…….”

“…….”

3년 만에 마주한 최기원. 하지만 늘 꿈에서 조우했던 그였기에 그렇게 낯설지도, 지나치게 두렵지도 않았다. 차라리 속절없이 쓸려 가는 꿈이 아닌, 단단한 현실 위에서 그를 마주한 것이 후련했다.

더뎠던 걸음이 조금씩 제 속도를 찾았다. 이젠 상처에 절뚝이지도, 아파서 질질 끌리는 걸음도 아닌 제법 단단해진 발끝이 땅을 짚고 곧게 섰다.

잠시 떨리는 숨을 뱉은 나언이 조심스레 닫힌 입술을 떼어 냈다.

“…잘 지냈어요?”

그러면 안 되잖아, 라는 나언의 뒷말은 차마 전해지지 못했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기원의 까만 시선에, 감추지도 못한 채 옅게 떨리고 있는 그의 회색 동공에 모든 대답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덕분에.”

덕분에 살았다. 나언이 살아 있다는 흔적은 백주언의 납골당에 남긴 꽃이 짓뭉개진 것 하나뿐이었다. 찢어 버리든 걷어차든, 쓰레기통에 처박든 뭔들 좋았다. 같은 세상에서 살아 여전히 자신을 원망하며 버티고 있다는 것만 알면 충분했으니까.

겨우 마주하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말갛고 하얀 얼굴은 여전했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조금은 살이 오른 것처럼 느껴져 무심결에 안도했다. 추레한 몰골 속에서도 커다란 까만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났다.

창백한 얼굴도, 검은 먹물 같은 머리카락도, 조용한 숨소리와 가느다란 목덜미까지. 살아 숨 쉬는 나언은 그동안 헤매듯 그렸던 어떤 허상보다 아름다워서, 끝내 웃음이 터졌다. 지척에서 퍼지는 유순하고 부드러운 체취에 기원은 나언이 눈앞에 있다는 걸 거듭해서 느꼈다.

미련한 백나언이 다시 왔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다. 나도, 너도.

그러니 다시 건네야 했다.

“잠깐만…. 시간 내 줄래요?”

거절할 수 없는 어려운 제안을.

-리오퍼(Reoffer)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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