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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퍼 (Reoffer) 3(완결)-14. Illusion (2) (16/28)

14. Illusion (2)

저녁 서울 도심의 도로 위는 오고 가는 차로 꽉 막혔다. 신호를 위반하고 차선을 마구 넘나들며 달리자 차에서 굉음 같은 액셀 소리가 이어졌다. 앞 유리와 나언을 번갈아 살피는 기원의 안색이 어두웠다. 눈으로 확인했고 손으로 만지고 있으며 분명 차갑게 젖어 가고 있는데도.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아주 선명한 악몽처럼 말이다.

기원은 카디건을 벗어 나언의 손목을 감싸 묶었다. 귀를 기울이면 조그맣게 와 닿던 나언의 호흡이 점점 작게 흩어졌다. 그릉대며 숨을 멈추었다가 이내 작은 기침과 함께 막힌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터졌다. 기원이 이를 악물고 나언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언의 전신이 차갑게 굳어 갔다.

응급실 앞에 차가 급하게 멈췄다. 기원은 나언을 안은 채로 달렸다. 상황을 묻는 의사에게 제 입으로 나언의 상태를 설명해야 했다. 유리로 손목을 그었고, 삼킨 양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약을 많이 먹었다고.

베드에 나언을 눕히자마자 밀려난 기원은 텅 빈 동공을 한 채로 상황을 지켜봐야만 했다. 과다 출혈, 쇼크, 저체온증과 같은 단어가 들렸다. 다수의 의료진이 순식간에 나언의 주변을 둘러쌌다.

간호사가 손목에 감긴 기원의 카디건을 풀어 헤쳤다. 피로 젖어 무거워진 흰 카디건은 제 색을 잃은 채 바닥에 떨어졌다. 의식을 잃은 나언의 입 안으로 호흡을 위한 관이 삽입되었고, 동시에 마른 손등 위로 수혈을 위한 바늘이 꽂혔다.

잠깐 눕히고 처치를 하는 동안에도 바닥으로 주르륵 피가 흘렀고, 의료진들은 그 피를 다시 짓이겨 밟으며 다급하게 뛰었다. 응급 수혈을 받고 테이핑을 하는 동안 귀를 찢는 기계음이 울렸다.

심정지가 왔다는 의사의 외침에 처음으로 기원의 얼굴에 동요가 일었다.

의사는 나언이 입고 있던 옷을 젖히고 베드 위에 올라가 흉부를 압박했다. 의사가 짓누르는 나언의 가슴께는 이미 검은 멍이 들어 있었다. 그렇게 멍이 든 곳이 움푹 들어가도록 힘껏 누르는데도, 눈이 감긴 하얀 얼굴은 아무런 반응 없이 흔들리기만 했다.

기원은 손을 들어 이마와 볼을 쓸어내렸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속이 메스꺼웠다.

“수술 들어갈게요. 보호자 분, 잠시만 와 주세요.”

겨우 심장의 박동을 되찾은 뒤 나언은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나언이 이동용 침상으로 옮겨졌다. 잠깐 응급 처치를 했던 응급실 베드의 시트는 나언이 누웠던 자리를 따라 빨간 혈흔을 남겼다.

몇 걸음 나언을 따라가 보던 기원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고, 그사이 나언은 빠르게 멀어졌다. 기원은 우뚝 멈춘 채로, 굳게 닫힌 수술실 입구를 응시했다. 이내 초록색 불이 반짝 들어오며 수술 중 명단에 나언의 이름이 떠올랐다.

기원이 가까운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작은 한숨과 함께 등과 머리를 젖혀 기대고 하얀 천장을 응시했다.

나언이 화장실 바닥에 옆으로 쓰러져 있던 모습, 가슴을 짓누를 때 축 늘어졌던 팔, 그리고 그 모든 곳에서 진동하던 피 냄새까지. 모든 장면이 섬광이 터지듯 머릿속을 선명하게 메울 때마다 기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더 질끈 감아야 했다.

“…사장님.”

경호팀에게 연락을 받고 온 조익현 비서실장은 기원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 부탁했다. 이미 나언의 상태가 심각했던지라, 본의 아니게 타인의 시선을 끌었으며 조만간 병원 내부에선 기원의 신상과 그가 데려온 환자의 상태에 대한 쓸데없는 소문이 퍼질 것이다.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소란에 그가 연루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기원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대기석을 지켰다. 수술은 꼬박 네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

수술 직후 나언은 격리실에서 사흘간 집중 치료를 받았다. 손목 봉합 수술은 잘 마무리되었으나 애초에 발견이 늦어 혈액 손실이 워낙 컸다. 수술 이후 의식 회복과 과다 출혈로 인한 후유증, 합병증에 관해서 의사는 소극적 태도를 비쳤다.

나언은 집중 치료가 끝난 뒤 1인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나흘 뒤 한 번 더 고비가 찾아왔다. 저혈압 상태가 지속되며 결국 장기 부전이 생긴 것이다. 게다가 나언이 삼킨 약의 양이 상당했다. 응급실에 도착한 후 위세척을 했지만 원래 몸이 상당히 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장기 부전 치료를 위해 심장 기능을 강화하는 약물을 투여해야 했지만, 이미 삼킨 알약 때문에 위장과 간이 만신창이가 된 나언이 그 독한 치료를 버텨 낼지 미지수였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음의 준비라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저 알겠으니 살려라, 는 대답을 뱉어야 했다. 언제 나언에게 위기가 올지 몰라, 기원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병원에서 일주일을 지냈다.

다행히도 고비를 넘긴 이후 나언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지만, 장기 부전 치료가 효과가 있어 맥박과 호흡을 되찾은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었다. 아주 짧은 면회도 허락되었다. 찾아올 가족 하나 없는 나언에게, 기원은 유일한 면회객이었다.

중환자실에 들어서자 사고 이후 잊히지 않고 풍기던 피 냄새가 아닌 약한 소독약 냄새가 먼저 들이닥쳤다. 평소의 걸음걸이와 달리 발끝을 무겁게 끄는 걸음이 묘하게 비틀댔다. 밀어닥친 현기증에 고개를 털고 잠시 걸음을 멈춘 기원이 천천히 발을 떼며 나언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눈 밑이 까맣게 죽은 기원의 핏발 선 눈이 나언의 얼굴을 아래에서 위로 훑었다.

마른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죄다 퉁퉁 붓고, 낯빛은 기이할 정도로 창백한 색을 띠고 있었다. 이미 떠난 사람을 억지로 끌어당겨 이것저것 버거운 장치를 달아 묶어 놓은 것 같았다. 얼굴을 반 넘게 가린 산소 호흡기 아래로 유난히 긴 속눈썹이 또렷하게 보였다. 제가 알던 나언과 닮은 유일한 구석이었다.

기원이 마른 입술을 열었다. 오랫동안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아 가라앉은 목소리가 마스크 아래로 작게 갈라졌다.

“한 번쯤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둬야 했을까.”

그만 살고 싶어서 용기를 냈을 텐데. 이게 지금 맞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원하는 대로 죽어 가게 두는 것이 피차 편하지 않았을까. 끝까지 백나언의 계획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어서, 이렇게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발을 묶어 둔 것이 유독 신경 쓰였다. 기원이 손바닥을 들어 눈을 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떡하라고.”

씨발, 욕을 뱉은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같은 상황에 놓여도 다시 나언을 안고 병원으로 왔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살린 후에 같은 질문을 던지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눌렀을 것이다. 기원이 볼 안쪽을 혀로 밀었다. 자신도 정확하게 정의 내리기 어려운 이상한 감정이 일었다. 너무나 허탈해서 조금 웃기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미약하게 초조하기도 했다.

주먹을 쥐었다 편 기원이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널 좋아했어, 그뿐이야.”

작게 어깨를 으쓱인 기원이 합리화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약간은 잠에 취한 듯 늘어지는 말투와 몽롱한 목소리가 나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내가 많이 좆같았겠지만.”

나언이 손목을 긋고 열흘이 넘는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쓰러지듯 10분여간 눈을 붙인 것 외에는 수면을 전혀 취하지 못했다. 몸이 버티지 못해 반강제적으로 눈을 감으면, 그 찰나에 백나언이 죽어 버리는 극단적인 악몽을 꿨다. 뒷골이 당기는 느낌과 함께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면 핏발 선 눈으로 중환자실 앞까지 걸어갔다 되돌아와야 했다.

안색이 하얗게 뜬 기원이 다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겠어……. 내가 원래 그래.”

상황도 공기도 답답하고 입이 썼다. 쿵, 저도 모르게 가슴을 세게 두드렸다. 아릿한 심장의 통증이 나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멍이 들 정도로 내려치면 괜찮아지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괜찮았다면 이런 짓을 할 리 없었다.

짧은 면회가 끝났다. 기원은 기사를 호출해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 병원에서 잤다간, 새벽 사이 나언의 병실로 들어가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일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든가, 살아만 주면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든가.

***

기원이 없어도 정원은 여전히 잘 관리되어 있었다. 분홍색 꽃잎이 흐드러진 정원은 스산한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정원을 가로지른 기원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열흘간 비어 있던 집은 평소보다 서늘할 뿐, 똑같았다. 조명을 켜지 않은 채 기원은 2층으로 올라갔다. 잠을 자기 위해서 집을 찾았건만, 기원은 홀린 듯 계단 위의 하얀 방을 향했다.

아무 일 없었던 듯 깨끗하게 정돈된 방을 느리게 둘러봤다. 눈 닿는 곳마다 설치된 카메라도, 유리창을 가린 하얀 창살도 여전했다. 기원이 눈을 굴리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죄다 쓸모없는 짓거리였다.

질질 끄는 발걸음은 방을 가로질러 파우더룸을 지났고, 이내 화장실 앞에서 멈추었다. 문고리 역시 예전의 것과 똑같은 것으로 다시 달려 있었다. 비서실장 하나는 꼼꼼한 사람으로 잘 둔 것 같다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 문고리를 쥔 기원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둠 속에서 기원의 게슴츠레 뜬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참으로 고요하고 평온했다.

꼭 나언을 발견하기 직전같이 조용해서, 기원은 아주 잠깐 거북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천천히 문고리를 돌린 후 열어젖힌 화장실 안을, 번들거리는 눈이 빠르게 훑었다.

새하얀 대리석 바닥에는 피는커녕 작은 얼룩 하나도 없었다. 너무 깨끗하고 하얘서, 마치 나언에게서 쏟아졌던 그 빨간 피가 허상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무언가를 확인하듯 깨끗한 화장실 이곳저곳을 세심하게 살피던 기원은 다시 방으로 걸어 나왔고, 무겁게 비틀대는 걸음걸이는 나언이 자주 들여다보던 상아색의 상자 앞에서 다시 멈추었다.

병원에서 줄곧 되돌려 봤던 그날의 CCTV 기록. 나언이 마지막으로 제일 많은 시간을 죽였던 건 다름 아닌 이 상자 앞이었다. 나언은 그날 멍한 표정으로 백주언의 물건을 뒤적대다 공책을 한 장 찢었고, 잔뜩 열중한 눈썹으로 무언가를 써 내려갔었다.

“…….”

기원은 한 손으로 상자를 들어 바닥으로 뒤집었다. 러그 위로 문제집과 공책, 필통, 컵 등이 와르르 쏟아졌다. 기원은 그 가운데에 무릎을 굽혀 앉곤, 물건들 사이에 툭 떨어진 종이를 들었다. 두 번 접힌 종이를 펼치자 삐뚤삐뚤한 글씨로 쓴 짧은 문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주언이 여패 가치 너어 주세요

미안해요」

무릎을 꿇고 연필을 쥔 채 최선을 다해 글자를 끄적이던 나언의 모습이 겹쳐졌다. 삶에 대한 정리나 회고, 하다못해 한탄이나 저에 대한 원망 한 줄 없는 간결한 내용은, 그저 기원에게 남긴 부탁 하나가 전부였다. 그 가벼운 마지막에서 세상을 등지는 것에 미련 하나 없던 나언의 순간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미안하다는 말을 왜 했는지 모르겠는, 틀린 글자를 몇 번이나 다시 쓰고도 엉망인, 참 형편없는 유서였다.

기원은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어지럽게 흩어진 나머지 물건은 다시 상자에 하나씩 담았다. 나언이 소중하게 만져 보고 냄새도 맡아 보던 물건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두꺼운 문제집을 드는 순간, 돌연 표지 사이에 끼워져 있던 하얀 종이 뭉치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필름을 인화한 오래된 사진 뭉치였다. 열 장 남짓 되는 사진이 노란 고무줄에 묶여 있었다. 제일 위에 꽂힌 것은 나언이 영정 사진으로 건넸던 백주언의 어릴 적 사진이었다. 기원은 상자를 정리하다 말고, 고무줄을 풀어 사진을 한 장씩 살펴봤다. 대부분 찍은 지 십 년 정도 된 주언의 어릴 적 사진이었으나 간간이 초등학생, 혹은 많아야 중학생으로 보이는 나언이 함께 찍힌 것도 있었다. 한 장씩 넘기며 나언을 발견할 때마다 기원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크기만 작을 뿐, 지금의 나언이 담겨 있는 앳된 얼굴이 신기했다.

그리고 한 장을 넘기자, 미세하게 더 낡은 사진이 드러났다. 이번에는 결국 창백하게 질린 낯에 참지 못한 웃음이 새어 흘렀다.

8살은 되었을까, 싶은 아이가 주택의 마당 앞에서 앞니가 하나 빠진 채로 새초롬하게 웃고 있었다. 검은 머리가 눈썹을 살짝 가리고, 지금처럼 너무나 커다란 눈이 반으로 살짝 휘어져 있다.

기원이 기다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고개를 살짝 기울여 사진을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흐린 해상도의 사진 속에서도 분명하게 보이는 긴 속눈썹이 눈꼬리를 따라 동그랗게 말려 올라갔고, 볼과 입술은 석류 같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강아지풀 같은 걸 하나 쥐고 배시시 웃고 있는 맑은 얼굴을 살피면 살필수록, 이상하게도 심장 박동이 엉키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제가 아는 백나언인데, 백나언이 아닌 것 같았다.

기원은 나언이 그랬던 것처럼 러그 위에 앉아 한참이나 사진을 들여다봤다. 점점 입꼬리에 맺혔던 웃음기가 사라져 갔다.

***

불시에 찾아온 나언의 사고가 꽤나 충격적이었지만, 기원은 일상을 되찾아 갔다. 회사에 정기적으로 출근해 급한 업무를 처리했다. 수면에 생긴 문제는 약으로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일을 가지 않는 날에 맞춰 수면제를 털어 먹은 후 이틀을 내리 자고 나면 다음 날은 희뿌옇던 눈앞이 개운하게 갰다.

집을 나선 기원이 낮게 혀를 차며 우산을 펼쳐 들었다. 성가신 비가 그치질 않았다. 팡, 소리와 함께 커다란 우산이 펼쳐지고, 요란하게 쏟아지는 빗방울이 우산을 비스듬하게 두드렸다. 기원은 주황색 꽃이 핀 금목서 나무를 지나 올망졸망한 야생화로 화려하게 꾸며진 정원을 가로질렀다.

이른 오전부터 정원에 떨어진 낙엽을 쓸어 담던 인부가 기원에게 꾸벅 묵례했다. 기원은 흘긋 시선을 돌리다, 소담하게 피어 있는 하얀 구절초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

태연한 얼굴로 두 송이를 꺾은 기원이 차에 올랐고, 검은 세단은 익숙한 길을 질주했다.

기원은 엘리베이터에 오른 후 VIP 병동의 제일 꼭대기 층에서 내렸다. 정해진 의료진 외에는 누구도 쉽게 드나들지 못하는 특실 안은 너무나 조용해서, 가습기와 공기 청정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병실 문을 닫은 기원은 얇은 트렌치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기원은 블라인드를 걷어 아침 햇살이 병상의 발치께로 떨어지도록 조절하고, 문을 살짝 열어 환기했다. 아까는 거슬리기만 했던 축축한 빗소리가 지금은 꽤나 발랄하게 들렸다. 의자를 당겨 침대 가까이에 앉은 기원은 여태껏 손에 살살 쥐고 있던 구절초를 나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미동도 없는 하얀 손가락 사이로 꽃줄기가 힘없이 기울어졌다. 기원은 다시 꽃을 곧게 세운 후 나언의 손가락을 둥글게 말았다. 기원이 손을 떼자마자, 앙상한 손가락이 축 늘어졌다.

사고가 있던 봄이 지나, 기원과 나언이 모르게 여름이 지났고, 이제는 가을이 찾아왔다.

나언이 의식을 찾지 못한 지 6개월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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