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Off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종착지에서 내렸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바람에서 바다 냄새가 조금 풍기는 것 같았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고, 주황빛 햇살이 작고 낙후된 터미널 안으로 쏟아졌다.
걸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보이는 길을 따라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볼이 빨갛게 부르틀 정도로 찬 바람을 맞았으나 춥지도 않았다. 이렇게 걷다 낭떠러지가 펼쳐진다고 한들 그대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걷다가 지치면 정류장에 앉았고, 운 좋게 배차 간격이 넓은 마을버스가 정차하면 무작정 올라탔다. 준비한 현금이 차츰 사라져 갔다. 아득바득 아껴 주언이를 위해 쓰기로 생각했던 돈이었다. 점점 가벼워지고 있는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꾹 쥐며 이제 정말 끝이 다가오고 있다 생각했다.
흔들리는 차창에 옆머리를 기대고, 모자챙 아래로 멍하게 바깥을 보던 중 버스 차창 너머로 작은 가게를 발견했다. 하차 버튼을 누른 후 버스에서 내렸다. 편의점이 아닌 잡화를 파는 작은 구멍가게는 어릴 적 이후 오랜만이었다. 가게로 들어간 난 소주 두 병, 젤리 하나, 빨간 나일론 끈, 커터 칼을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포스기 하나 없는 작은 카운터 선반이 비좁을 정도로 가득 찼다.
카운터 안쪽의 자그만 공간에서 티브이를 보던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왔다. 할아버지는 기둥에 박혀 있는 못에 다발로 묶여 있는 검정 비닐을 뜯고, 바셀린을 묻혀 비닐 입구를 벌렸다.
“여행 왔나?”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이런 작은 마을에 여행을 오는 사람은 없겠지만.
“언제 돌아가는데?”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나는 할아버지를 도와 비닐에 물건을 담으며 대충 둘러댔다. 거짓말에 점점 살이 붙기 시작했다.
“모, 모레쯤이요.”
“으응. 아가.”
물건을 담은 묵직한 봉투를 손에 쥐여 주더니 할아버지가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가, 라니. 들은 기억조차 까마득한 낯간지러운 호칭에 괜히 손가락이 움질댔다.
“저기로 오 분 정도만 걸으면 바다 나오거든. 사람도 없고, 물도 맑데이.”
“아……. 네.”
“저녁은 먹었나?”
“아, 아니요.”
사람도 없고 물도 맑은 바다라면 마지막으로 발이라도 한 번 담그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할아버지와의 대화가 끊어질 듯 끊이질 않았다. 느릿하게 질문한 할아버지는 효자손을 들어 흐트러진 매대를 정리하며 말했다.
“쩨리 그게 저녁이가?”
아마 아까 샀던 젤리를 발음하는 것이리라. 딱히 저녁이라 생각하고 산 건 아니고, 그냥 주언이 생각이 나서 무작정 집은 것이었다. 생각은 많은데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다. 내가 다시 입을 닫자, 할아버지가 마루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며 말했다.
“딸내미가 저 바닷가 앞에서 국밥집 하는데. 한 그릇 먹고 가라.”
“…….”
“돈 안 받는다.”
“아, 아니…….”
“많이 사서 서비스 주는 기다.”
할아버지는 거절을 하기도 전에 앉은 자리에서 전화기를 들더니,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보다 훨씬 억센 사투리로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 봐라. 육수 올맀단다.”
전화를 끊은 할아버지는 저 말 하나만 남기곤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카운터 안으로 쑥 들어갔다. 나는 다소 멍한 얼굴로 서 있다, 어정쩡한 자세로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비닐 입구를 벌려 소담하게 담긴 물건을 봤다. 겨우 이거 샀다고 국밥을 서비스로 주다니. 시골 인심이라고 칭하기에도 다소 과했다.
뭐 어찌 됐든, 끼니 이야기를 하니 이제야 허기가 조금 들었다. 마지막 식사라고 생각하고 따뜻한 국물로 배를 채우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할아버지의 말대로, 오 분을 채 못 가서 자그만 국밥집을 발견했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파도 소리가 들릴 만큼 바다와 가까운 곳이었다.
어머니뻘 정도 되는 아주머니가 미리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얇은 점퍼에 앞치마 하나만 챙겨 입은 모습에 괜히 걸음이 빨라졌다. 진통제를 챙겨 먹지 못해 걷는 내내 허벅지와 종아리가 욱신댔다.
“금방 갖다 줄게요. 앉아 있으세요.”
아주머니가 의자를 빼 줬다. 감사하다는 말을 입 안에서 웅얼댔으나 들렸는지 모르겠다. 어색하게 자리에 앉은 난, 스테인리스 컵에 물을 따라 한 입 들이켠 후 주위를 둘러봤다. 앞서 들렀던 구멍가게만큼 작고 협소한 음식점은 히터의 훈기 때문에 아주 따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글바글 끓는 소리와 함께 뚝배기 하나가 상 위에 놓였다. 부추 무침과 깍두기도 차례로 상에 올라왔다. 많이 먹으라는 아주머니의 말에 고개를 꾸벅 숙이고 숟가락을 들었다. 뿌옇고 뜨끈한 국물을 한 입 머금으니, 입에서 감칠맛이 돌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뚝배기가 바닥이 났다. 내가 이 정도나 먹을 수 있을지 몰랐다. 얼떨떨한 마음으로 부른 배를 쓰다듬자 신문을 보던 아주머니께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거리가 꽤 가까워, 나는 팔을 들어 버릇처럼 냄새를 맡았다. 바닷바람이 묻어 악취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여행 왔어요?”
“네? 아, 네….”
“여기 뭐 볼 거 있다고. 더 좋은 데 가지.”
“하, 할아버지께서 아, 까. 바, 바다가 예쁘다고, 하, 셨어요.”
사람도 없고, 물도 맑다고 말끝을 흐리자 사람도 없고 물도 맑은데 예쁘진 않다며 아주머니께서 호탕하게 웃으셨다. 아주머니가 웃으니 언뜻 할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숙소는 잡았어요?”
“예? 아, 아뇨……. 주, 주변에 그냥 모, 모텔이나…….”
“비는 방 있는데 하루 묵고 갈래요?”
“예……?”
“부담스러워 안 해도 돼요. 그냥 오며 가며 가끔가다 여행객 오면 묵고 그러거든요.”
아주머니가 가게 위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1층은 가게, 2층은 가정집으로 이루어져 있는 듯했다.
“괘, 괜찮, 습, 니다.”
물론 모텔에서 죽는다고 해도 사장님께 죄송한 일이지만, 나에게 호의를 베푼 이의 집에서 끔찍한 민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손사래를 치는 나를 보며 아주머니께서 싱긋 미소를 지으며 한 번 더 말을 걸어온다. 할아버지보다는 사투리 억양이 조금은 약한, 그렇지만 타지 사람 특유의 낯선 말투가 유독 정겹게 들렸다.
“편하게 하루 자고 가요. 딱 학생만 한 아들이 있는데, 그냥 그놈이 혼자 여행하는 것 같아서 그래.”
“시, 식사도 주시고. 괘, 괜찮아요.”
“요 앞에 바다도 가 보고, 조금 더 걸어 내려가면 예전에 드라마 찍었던 곳도 있으니까 한번 보고 와요. 구경 맘껏 하고 와서 푹 자고 가.”
쟁반 하나를 들고 온 아주머니가 먹은 그릇을 하나씩 담았다. 나도 일어서서 뭐라도 담으려 하자, 더 추워지기 전에 바다 마음껏 구경하고 얼른 돌아오라고 하셨다. ‘기다릴 거야.’ 정말 아들에게 잔소리를 하듯 채근하는 그 목소리에, 나는 얼결에 고개를 주억대고 말았다.
그렇게 절뚝이며 바다로 걸음을 옮겼다.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거셌으나 배가 든든하게 차니 아까처럼 춥진 않았다. 살랑대는 바람 속에 스며든 바다 냄새가 더욱 진해졌다. 아스팔트 길을 따라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었고, 이내 모래가 운동화 밑창에 닿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래가 바스락대며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손목에 끼워져 있는 봉투 안에서 소주와 자질구레한 물건들도 걸음을 따라 부딪치며 작은 소음을 만들었다. 어느덧 운동화 코앞에 부서진 파도가 닿을 만큼 바다에 가까워졌다. 모자챙을 잡고 살짝 올린 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바라봤다.
저녁을 먹는 사이, 해가 떨어져 바다의 제 색깔이 보이진 않았다. 검은 물처럼 보이는 바다가 뒤로 갔다 앞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하늘도 까맣고, 바다도 까맣다 보니 자연스레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모래가 쓸려 가는 소리, 철썩대며 방파제에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모두 생소하고 어딘가 모르게 간지러웠다.
조금 뒤로 걸어와, 까슬한 모래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손바닥으로 모래사장을 짚고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봤다. 시골이라 그런지 소금을 흩뿌린 것처럼 반짝이는 별이 떠 있었다.
얼마 만에 느껴 보는 편안함인지 모르겠다. 마음을 먹고 나니 오히려 후련하고 편하다. 그저 멍하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도 조급하지 않았다. 고개를 내려 시선 끝에 닿는 바다를 천천히 담았다. 파도조차 잠잠한 저 깊은 바다 한가운데까지 고작 몇십 미터. 그 정도만 열심히 뛰어간다면 아무도 모르게 머리끝까지 깊게 잠겨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허무했다.
멍하게 파도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죽이던 중, 늦지 않게 오라던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너무 늦어서 드라마 촬영지엔 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대충 털고 다시 국밥 가게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왔나?”
구멍가게의 할아버지가 가게에서 티브이를 보고 계셨다. 따님이라던 아주머니는 나무 그릇에 볶은 땅콩을 담아 할아버지와 함께 나눠 먹고 계셨다. 시선을 눈치챈 아주머니가 눈썹을 끌어 올리며 밝게 물었다.
“와서 먹을래요?”
“아, 아뇨.”
아까 먹은 국밥도 아직 소화가 덜 되어 속이 더부룩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티브이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바다 좋드나.”
“……네.”
“낮에 보면 더 좋다.”
“…….”
“위에 방에 요 깔아 놨다. 씻고 자라.”
바다를 보며 문득 들었던 생각이 어느새 확신으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이 부녀는 내가 오늘 죽으려 했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들의 호의를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뜨끈하게 보일러가 올라간 방바닥에 앉아 언 손을 녹이고 있는 나는, 도대체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리 미적지근하게 구는 걸까.
“…….”
세수와 양치만 하려 했는데, 언제 몸 곳곳에 묻었는지 모를 까끌한 모래 때문에 대충 머리도 감고 몸도 씻었다. 삶은 냄새가 나는 초록색 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방에 들어오자, 입구에는 내가 가게에서 샀던 물건들이 담긴 검은색 봉지가 놓여 있었다.
어금니로 볼 안쪽을 아프게 깨물며 불을 껐다. 가게를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크게 틀어져 있던 트로트 가락이 줄어들었다. 그 조그만 배려에 아픈 것을 잊었던 심장이 다시 저려 오기 시작했고, 나는 빛이 창문 틈 사이를 밝히기 시작한 새벽까지 잠에 들지 못했다.
무릎을 안고 밤을 지새우며 몇 번씩, 검은 봉지 앞으로 기어가 죽음을 결심하며 담은 물건들을 살폈다.
다시 이 가게로 돌아왔을 때. 괜찮다면 하루쯤 여기서 자고, 죽는 건 내일 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부담 없는 호의를 충분히 만끽하고, 그들의 걱정을 던 뒤 그렇게 마음의 짐 하나 없이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
역시 난 생각보다 유약하고 졸렬했다. 금방이라도 삶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던 의지가 금세 물러졌다. 온기에 눌어붙은 사탕처럼 저 부녀의 호의에 기대어 하루, 이틀 휩쓸리듯 시간을 죽이고 싶었다.
벗었던 패딩을 입고, 검은 봉지와 모자를 챙겨 들었다. 소리를 죽여 1층으로 내려왔고 운동화를 구겨 신은 뒤 미닫이문을 열고 나왔다. 마치 짧고 따뜻한 꿈에서 깬 듯, 방금 보고 왔던 바다만큼 까맣고 차가운 새벽이 펼쳐졌다.
“흐, 으, 윽……. 흑.”
어느새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어깨가 들썩였다. 절뚝이는 다리에 힘이 없어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다.
치사하게 나만 살아남기 전에, 이 용기가 쉽게 삭아 버리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야 했다. 이대로 어영부영 지내다 보면 나는 또 못난 합리화를 하며 하루를, 이틀을 더 살아야 하는 별것 아닌 이유들을 늘어놓고 있을 것이다.
목을 맬 노끈을 묶기 위해 방을 잡을 이유도 없다. 방금 봤던 바다. 모든 것을 삼키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나를 깊이 묻어 줄 수 있는 까만 곳이면 충분했다. 절뚝이는 걸음은 망설임 없이 바닷가를 향했다.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내리막길을 지나니 금세 발끝에 모래가 채였다. 어느새 흐느끼는 소리를 넘어 엉엉 우는 소리를 뱉으며 모래사장 위를 뛰었다. 푹푹 파이는 깊은 모래에 금세 몸이 휘청였다. 모래사장 한가운데에서 중심을 잃고 엎어지고 말았다.
그대로 무릎을 세우고 이마를 박았다. 눈물 콧물 침을 뚝뚝 흘리며 울부짖었다. 죽는 건 무섭다. 너무 무섭고, 아프고 춥고 두렵다. 나만 이렇게 사는 게 힘든 건지, 다들 겪는 아픔에 내가 너무 엄살을 피우는 건지. 이 와중에도 죽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고 싶은 내가 밉고, 주언이에게 면목이 없었다.
모래 범벅이 된 봉투를 파헤쳤다. 소주 한 병을 꺼내 돌려 깐 후 그대로 마셨다. 갈증이 인 사람처럼 정신없이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마신 술이 반병이 넘어가자 코가 맵고 목이 따가워 기침이 터져 흘렀다.
“쿨럭, 쿨럭…….”
주언이는 늘 어른스러운 척 굴지만 여리고 겁이 많았다. 지난번, 많이 아팠을 때 혼자 내버려 뒀다고 많이 서운해했는데. 끝내 마지막까지 아이를 혼자 둔 걸까. 행여 그렇다면 나는 나를 용서할 수가 없다.
내가 더 망가지기 전에, 주언이랑 둘이서 살고 싶어서. 그 평범한 옛날이 그리워서 도망친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가 곁에 없다면 더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문득 주언이가 살아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최기원은 약속을 어기고 도망간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허튼 생각을 못 하도록, 내가 미쳐 버릴 때까지 작업실에 가둬 놓을 것이다. 아마 목걸이도 다시 하겠지.
살을 갉아 먹는 벌레와 추위라면 이제 끔찍하다. 주언이가 살아 있더라도 여기서 더 망가진 모습으로 아이의 앞에 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겨 내야 한다는 생각조차 진절머리 났다. 애를 쓰고 싶지 않다.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했다.
아이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작은 가능성에 기대어 최기원의 곁으로 돌아가기엔 앞으로 겪을 일이 너무나 두렵고, 벌써 지치는 것 같았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하다면, 시체가 너무 볼품없어지기 전에 나를 건져 주언이의 곁에 묻어 주는 것쯤은 해 주지 않을까.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 전화를 꺼냈다. 전원 버튼을 길게 눌러 켜자,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화면이 켜졌다. 유일하게 발신이 허락된 번호를 눌렀다. 이걸 켠 순간, 그는 내 위치를 추적해 당장 이곳으로 달려올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한들 이미 그는 늦었다.
짧은 발신음이 쉽게 끊어지고, 최기원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다.
[백나언.]
“…….”
[여보세요.]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재차 나를 불렀다. 지금 그의 육성에는 감추지 못한 불안과 다급함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 초조함을 자각한 순간, 코끝이 찡하고 동시에 눈앞이 흐려졌다. 이내 눈물이 볼 아래로 무겁게 떨어졌다.
[어디야.]
잠시의 침묵도 기다리지 못한 최기원이 물었다. 손안에서 잠시 휴대 전화를 꾹 쥔 난 떨리는 숨을 뱉었다. 젖은 머리 사이로 바닷바람이 파고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바다에 흐린 시선을 두고 눅눅하게 감겨 오는 공기를 맞았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언이……. 어딨어요?”
살아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 혹시 죽었다면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건지. 그동안 주언이를 위해 죄책감을 견디며 그의 곁에서 지냈다. 이미 지원이 형은 죽었기에 이 죄스러움을 갚을 방법도 없었다. 그런데 이 끔찍한 죄책감을 주언이에게까지 느껴야 하는 건 너무나 가혹하다. 더는 버티기 힘들 만큼.
[어디냐고.]
그가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사람을 저택에 감금하고, 그것도 모자라 일주일에 한 번 겨우 바깥을 나가던 순간까지 추적해 사람을 궁지로 몰았으면서. 그는 답을 맡겨 놓은 것처럼 어딘지를 되묻는다. 마치 손 속에 쥐고 있는 정답을 고분고분 답하기를 인내하는 듯한 그의 고압적인 태도가 벌써 원망스러웠다. 그렇기에 우리의 대화는 꼬인 끈처럼 널을 뛸 수밖에 없었다.
“…저한테 왜 그랬, 어요?”
목소리 끝이 떨렸다. 하도 꾹 쥐고 있어 주먹 쥔 손바닥 아래에 반달 모양의 자국이 패였다. 심장이 팔딱이고, 그간 최기원과 겪었던 일들이 뭉개지는 듯한 잔상을 남기며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칼날을 삼킨 것처럼 가슴이 아파 왔다.
아까 빠르게 들이켰던 소주 때문일까. 그의 말을 무시하고 멋대로 구는 지금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나는 취기에 지쳐 고개를 살짝 늘어뜨린 채 울분에 찬 말을 뱉어 내기 시작했다.
“더는 못 겨, 견디겠어요. 그냥……. 다, 너, 무 싫고 역겨워서.”
눈을 질끈 감으며, 미처 욕이 되지 못한 탄식을 뱉었다. 헐떡임 사이로 시근덕대는 숨이 가파르게 차올랐다.
“주언이 죽은 거 왜 말, 안 했어요? 걔 혼자 외, 롭게, 갔으면, 미안해서 어떡하라고…. 씨발 진짜…, 나 어떡하냐고요…!!”
참았던 울분이 한번 비어져 나오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어졌다. 어둡고 초라한 바다 위를 흉한 고함이 가득 메웠다. 엉망진창으로 떨리는 입술과 더듬대며 씹히는 단어들 그리고 뒤죽박죽이 된 문장들이 마지막까지 볼품없었다. 결국 성마른 울음이 터져 흘러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그의 말에 이토록 반항하고, 욕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에게선 여느 때와 같은 비아냥거림과 협박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내가 꺼져 가는 휴대 전화를 붙잡고 엉엉 우는 동안 침묵을 지키며 울음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뒤, 그는 전혀 생각지 못한 대답을 건넸다.
[백주언 안 죽었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의외의 대답에 눈이 커지고 말문이 막혔다. 겨우 헐떡이던 작은 숨소리조차 틀어 막히듯 멎어 버렸다.
[살아 있어. 항암 부작용 때문에 신장 치료가 필요해서 다른 병원으로 옮겼고.]
그의 말이 한 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를 몇 번이고 복기하고 나서야 겨우 내용을 이해한 내가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살아 있다고요…?”
[…….]
“살아 있다고요, 주언이가….”
혼잣말처럼 재차 읊조린 문장 끝에 헛웃음이 스며들었다. 하마터면 굳어 버린 멍청한 머리 때문에 그의 말을 덥석 믿을 뻔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주언이의 병원비를 대신 내어 주며 의뭉스럽게 굴어 놓고 뒤에선 아버지의 빚을 이용해 제집으로 들어오게 만들었다. 주언이의 면회를 이용해 사람의 발을 묶었고, 수가 틀리는 날이면 아이의 치료 예후조차 자세히 일러 주지 않았다. 이제 와 아이가 살아 있다고 말하는 그가 어떤 생각과 꿍꿍이를 가지고 덫을 놓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얗게 비어 있던 침대와 그의 싸늘한 눈동자를 번갈아 떠올렸다. 잘게 고개를 저은 난, 건조하게 갈라진 입술을 열었다. 턱에 힘이 들어가 발음이 짓씹듯이 뭉개졌다.
“거짓말….”
[뭐?]
“내가, 그쪽 말을 무슨 수로 믿냐고.”
[하…….]
그의 일그러진 표정이 그려지는 길고 깊은 한숨이었다. 잠시 수화기에 서로의 침묵이 내려앉고, 그는 아까보다 훨씬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백나언, 잘 들어.]
“…….”
[백주언이 많이 위독해.]
아이의 이름을 듣자마자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순식간에 머리가 멍해지며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어제 오후에 고비는 넘겼지만 장담할 수 없어. 어딘지 물었던 건, 그래. 지금 거기로 갈 테니까 허튼 생각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야.]
“…….”
[돌아와서, 동생 임종 지켜.]
혼란스러웠다. 아이가 살아 있다고 하는데, 그런데 위독하다니. 임종을 지키라는 단어조차 제대로 이해가 되질 않는다. 순식간에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자 매달려 있던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주언이의 빈 침대를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충격이 재차 몰아쳤다.
가빠진 숨을 고르며 손등으로 눈 주변을 비볐다. 까슬한 모래가 눈물 주변에 지저분하게 엉겨 붙었다.
주언이가 이미 죽었건, 살아 있건 개의치 않고 죽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주언이가 위독한 경우는 썩어 버린 머리로 생각하지 못했다. 충격과 혼란이 연달아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내가 아무 말 없이 헐떡이는 것을 듣고 있던 최기원이 물었다.
[아직도 이게 거짓말 같아?]
“…….”
[동생이랑 영상 통화라도 시켜 줘야 믿겠어?]
무어라 반박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지고, 다시 영상 통화가 걸려 왔다. 애써 부정하던 진실이 점점 뚜렷해질수록 심장이 벌떡댔다. 어느새 손은 덜덜 경련하고, 먹은 것을 금방이라도 게워 낼 것처럼 속이 뒤집혔다. 내 말을 반박하듯 곧장 걸려 온 통화 연결 버튼을 누르는 것이 두려웠다.
젖은 손이 매끄러운 화면 위를 헛돌았다. 겨우 전화가 연결되고 화면이 전환된 순간 배 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져 버리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흐느낌이 터져 나온 건 순식간이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누워 산소 호흡기를 차고, 드러난 목과 배의 맨살에는 의료용 관을 잔뜩 꽂은 아이의 모습이 작은 화면 안에 들어찼다. 그 어느 때보다 초라하고 만신창이 같은 모습이었다.
“아…….”
찰나의 사이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스쳐 지났다. 아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안도감, 하지만 가만두면 금방이라도 아이가 사라져 버릴 듯한 불안함이 뒤따랐다. 곧이어 상황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나에 대한 혐오와 최기원에 대한 원망까지.
떨리는 손을 뻗어 주언이가 누워 있는 침대 위를 더듬으려던 순간 영상 통화는 끊어졌다. 검은 화면 위로 움츠러든 하얀 손끝이 닿았다. 이내 최기원이 보낸 메시지 팝업이 떴다.
[얌전히 기다려. 금방 갈 테니까.]
헐떡이던 나는 그대로 팔을 떨어뜨렸다. 모래 위에 전화기가 처박혔다. 이명이 울려 머리가 반으로 쪼개질 것같이 어지러웠다. 양손으로 귀를 막고 이마를 무릎에 처박았다. 벌어진 입에서 호흡이 되지 못해 쪼그라든 숨이 가쁘게 터졌다.
까맣고 어두운 밤바다 아래, 쓰디쓴 소식을 전한 휴대 전화만 밝게 빛났다.
***
검은 바다에 뿌옇게 해가 들기 시작하자 부서지는 파도와 모래알이 사이좋게 반짝였다. 그렇게 줄곧 바닷가에 앉아 멍하게 있었다. 그야말로 굳어 버렸다고 해도 믿을 만큼, 나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 곁에서 말을 붙여 왔다. 잊고 있던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에 흐려진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아가. 밤새 여기 있었나.”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른 새벽 바닷가에서 마주한 할아버지의 담담한 질문에 차마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춥다. 들어가자.”
눈을 끔뻑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는 대답 없이 내 곁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기다렸다. 나는 전혀 춥지 않았지만, 할아버지께는 제법 맵고 시린 새벽일 것이다. 이제 누군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건 질렸다.
“저 신, 경 쓰지 마세요.”
잠시 입술을 깨물고 생각했다. 잊고 있던 웃는 방법을 되뇌었다. 의식적으로 입꼬리에 힘을 주고, 눈에는 힘을 풀어 접었다. 어설프게 웃는 낯으로 할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말을 건넸다.
“치, 친구가……. 데리러 오, 온대요. 여기로.”
“맞나.”
할아버지는 별스럽지 않은 듯 대답하고 내 주변에 널브러진 소주병과 뚜껑을 주워 다시 비닐에 넣었다. 모래에 떨어진 휴대 전화도 탈탈 털어 내 곁에 놓아 주었다. 나의 무엇이 그를 안심시키지 못했을까, 끝내 할아버지는 자리를 뜨지 않고 찬 바람을 함께 맞았다.
더는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낮에 보면 더 좋다는 바다를 멍하게 바라보며,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아픈 가슴의 통증을 겨우 참았다. 허무하게 흐르는 일 분 일 초가 모두 버거웠다.
“백나언.”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강한 악력으로 내 팔뚝을 붙잡았다. 동시에 잊고 지내던 차가운 향이 코밑으로 스몄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인영을 바라보았고, 시선 끝에 그의 얼굴이 닿았다.
이마를 덮은 앞머리에 언뜻 가려진 그 회색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그를 떠나 여기까지 왔던 하루 남짓의 시간이 꿈결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잠시나마 외면했던 현실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선연하게 와닿았다. 차가운 손에 붙들린 팔이 끌려 올라가며 내가 잠시 비틀대자, 최기원은 반대쪽 어깨까지 붙잡아 나를 가볍게 일으켜 세웠다.
겨우 해가 들기 시작한 이른 바다. 타는 듯한 주황빛의 아침 햇살이 우리 둘 사이의 발치에 마구잡이로 흩어졌다.
“……저, 가, 갈게요.”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나와 최기원을 번갈아 바라보는 할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어쩌면 어영부영 하루를 더 살아, 늦게나마 주언이와 엇갈리지 않게 된 것은 할아버지의 사소한 위로 때문이었을 수도.
“그래.”
할아버지는 모래 위에 놓인 휴대 전화를 들어 나에게 건넸다. 그걸 받아 든 내가 꾸벅 고개를 숙였고 최기원은 내 팔을 놓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따라 절뚝이며 모래사장을 가로질렀다.
바닷가 가까이에 정차된 그의 차가 보였다. 최기원은 뒷문을 열어젖힌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바닷가를 눈에 담았지만, 할아버지의 모습은 방파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그가 나를 찾아오는 데까지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여섯 시간 가까이 가슴 졸이며 내려왔던 길을, 그의 차는 빠르게 거슬러 올라갔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손톱 옆의 살을 뜯었다. 피가 비치는 부위를 짓누르고 다시 뜯고 파헤쳤다. 몸을 가만두지 못할 만큼 불안했다. 최기원은 다리를 꼬고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눈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쥐 죽은 듯 눈물만 떨구고 있는 나에게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최기원이 이토록 빨리 나를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삼십 분간 한산한 도로를 질주한 차는 국내 공항 입구로 들어서며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작은 전세기 곁에 차가 멈춰 섰고,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차 뒷문을 열어 주었다. 최기원은 비행기와 연결된 계단을 향해 턱짓했다. 나는 승무원의 부축을 받아 절뚝이며 비행기에 올라탔다.
최기원이 뒤이어 올라오자, 객실과 조종석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의 문까지 닫혔다. 그와 단둘이 좁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퍼뜩, 퍼뜩 떠오르는 작업실의 잔상과 주언이의 모습에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잘게 호흡했다.
‘쓰러질 것 같아…….’
결국 자리까지 채 가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의자를 부여잡고 주저앉아 고개를 숙인 채 헐떡였다. 최기원은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긴 코트를 벗어 던졌다. 나에게 성큼성큼 걸어온 그가 손을 올렸고 나는 머리를 감싸며 그대로 몸을 웅크렸다.
“으, 윽…….”
그는 나를 내려치려던 것이 아닌 듯, 내 어깨 밑으로 손을 넣어 바닥에 쭈그린 나를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최기원은 한쪽 팔로 팔걸이를 짚어 나를 가두듯 마주 선 뒤 허리를 숙여 내 눈을 들여다보려 했다. 내가 숨을 가쁘게 쉬며 고개를 들지 못하자, 그는 뒷머리를 붙잡아 당겨 고개를 강제로 젖혔다.
“흐, 으…….”
“…….”
누구 하나 죽인 것처럼 번들거리는 시선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그는 울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이는 나를 빤히 응시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술을 깨물더니 낮게 욕을 뇌까리며 머리를 잡은 손을 확 놓았다. 힘에 밀려 그대로 몸이 휘청댔고 그는 한숨을 쉬며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쏟아져 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린 최기원이 짓씹듯 말했다.
“바지 벗어요.”
그의 명령을 완연하게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옅게 찌푸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그가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빈정댔다.
“다리. 그대로 썩어서 못 걷게 되면 좋은 쪽은 나니까.”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리며 비틀린 웃음을 지었지만 그의 눈은 무서울 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나 역시 핏발 선 눈으로 최기원을 응시했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그가 너무나 밉고 원망스러웠다.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며 그의 형상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뚝뚝 굵은 눈물을 흘려 대는 나를 삐딱하게 내려다보던 그가 웃음을 거두더니, 허리춤에 손을 얹고 비행기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혀로 볼 안쪽을 밀며 작은 한숨을 뱉어 냈고 이내 성큼 다가와 바지의 버클을 거칠게 풀었다.
“건, 들지 마….”
그의 손을 밀고 다리를 비틀었지만 의미 없는 짓이었다. 그는 대꾸 하나 없이 미간을 옅게 찌푸린 채 손쉽게 바지를 벗겨 냈다. 날 선 손길에서 그가 억지로 눌러 삼킨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치미는 통증과 서러움을 겨우 참으며 히끅대는 사이, 그는 테이블 위로 붕대와 소독약을 툭툭 던졌다. 최기원은 맞은편 소파에 앉았고, 다친 다리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피가 섞여 노랗고, 붉게 변한 진물이 붕대 위에 번져 있었다. 붕대를 감지 않은 곳까지 발갛게 부어올라 허벅지가 온통 엉망이었다. 붕대를 갈지 않은 채로 뛰어다니고, 물과 모래에 무방비하게 닿았으며 항생제도 먹지 않았으니 상처가 덧날 법도 했다.
최기원은 소독약을 돌려 깐 후 상처 위에 액체를 들이부었다. 생살이 벗겨지는 통증을 참느라 소파를 그러쥐자 가죽이 구겨지는 소리가 침묵을 깨웠다. 그는 능숙한 손길로 덧난 화상 상처 위에 연고를 덧바른 뒤 깨끗한 면포를 대고 붕대를 감았다.
치료가 끝나자마자 그의 눈길을 피해 창문 가까이에 몸을 구겨 앉았고. 최기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는 창밖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폭풍 같은 시간 속에서 우리는 모두 지쳤고, 기내는 기이할 만큼 고요해졌다.
한 시간의 비행, 그리고 다시 사십여 분 정도 차를 탄 후에야 낯선 병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날 밤, 주언이는 마치 나를 기다렸던 듯 짧은 생을 마쳤다.
***
또래에 비해 너무나 작은 손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손가락 끝을 쥐어 보았다. 야윈 손가락 끝이 힘없이 말려 있었다.
고통에 오그라든 손끝은 서글프게도 아직 따뜻했다. 거스러미가 일어나 있는 작은 손톱과 불거진 뼈마디를 쓰다듬고 있는데, 아이의 손이 예상보다 빠르게 온기를 잃어 간다. 순식간에 심장이 쥐어짜는 듯이 아파 왔다. 혹시 내 차가운 손 때문에 흔적이 더 빨리 사라질까 싶어 얼른 손을 떼어 냈다.
“오후 10시 23분 사망 선고하겠습니다.”
주언이를 간호하며 병원을 자주 드나들었기에 간혹 타인의 사망 선고를 듣게 되는 일이 있었다. 사망 선고 이후,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귓전을 가득 메웠었다. 환자의 나이가 어릴수록, 그리고 예상치 못한 죽음일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통곡의 소리. 그걸 들었을 때만 해도 심장이 벌렁대고 소름이 돋아 걸음을 빠르게 해 자리를 벗어났었다. 마치 나와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
하지만 지금 주언이의 병실은 너무나 고요하다. 보통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터져야 하는 순간, 나는 적막 속에서 눈을 감고 있는 아이의 뺨을 문질렀다. 코가 맵고 우는 사람처럼 숨이 차오르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으로 누군가 진흙을 처넣은 것처럼 가슴이 꽉 막혀 잘게 헐떡이는 것 말곤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때는 그렇게 거부감이 들었던 이별의 통곡이, 지금은 왜 이렇게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목 놓아 울어 줄 사람 하나 없는 마지막이 쓸쓸하고 서늘했다.
주언이의 죽음 이후, 경황이 없었기에 그저 멍하게 자리를 지키는 것이 다였다. 그런 나를 대신해 최기원이 일을 차례대로 진행했다. 아이의 영정 사진에 넣을 마땅한 사진이 없어 비서님이 나를 찾았던 일을 제외하곤 장례, 발인 그리고 화장까지 모두 요란하지 않게 진행되었다.
아이의 장례가 끝나고 화장한 뒤 유골함을 멀지 않은 납골당에 안치했다. 최기원은 유골함 앞을 떠나지 않는 나를 기다리다,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
입원 이후, 너른 공원 한 번 맘껏 뛰어다니지 못했던 주언이의 자리가 많이 좁아 보였다. 꽃 몇 송이가 놓인 작은 공간 안에 주언이가 좋아하던 젤리를 넣어 주었다. 끝내 아이가 손대지 않아 굳어 가고 있던 것을 정리된 짐 사이에서 발견해 여기까지 들고 왔다.
젤리 봉지 끝을 만지다, 손을 뻗어 동그랗고 매끈한 유골함도 쓰다듬어 봤다. 음각으로 패인 아이의 이름과 겨우 12년 조금 넘게 머물다 간 흔적을 눈으로 거듭 읽었다. 주위를 둘러싼 모든 감각이 아득하고 멍했다.
“……형 가, 갈게.”
갈라지고 쉬어 버린 볼품없는 목소리가 연약하게 흩어졌다. 참은 것은 아니지만 끝내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직 주언이가 곁을 떠난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또 혼자 두고 오기가 너무나 미안해 홀로 남은 아이를 한참 바라보다 천천히 등을 졌다.
최기원은 느린 걸음으로 걸어 나오는 나와 속도를 맞춰 걸었다. 납골당 입구 앞, 시동이 걸린 세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님이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그와 나란히 앉았다. 행선지를 떠올린 순간 문득 목이 가려워졌다.
차창에 이마를 기댄 채로 지난 일주일을 곱씹었다. 모두 흐리고 눅눅한 기억들이었다. 어디까지가 진짜 기억이고 어디부터 왜곡된 기억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혼재된 망상들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아이의 마지막을 기억했다. 그래, 주언이를 마지막으로 봤던 날. 나는 오늘 놓고 온 그 젤리를 사 들고 주언이를 보러 갔었다.
이렇게 버려둘 거면 입원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조그만 방이라도 좋으니 나랑 함께 있고 싶었다고 했었다. 얌전하게 있겠다고, 집에 가고 싶다 말했다. 자기 병실엔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악을 썼고, 자신이 귀찮은 짐이라고 했다.
이제 밤까지 나를 기다리게 생겼다던 주언이는 정말 죽는 날 밤까지 나를 기다렸을까.
숨이 멎기 직전, 희뿌연 동공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해 줬던가. 청력은 마지막까지 살아 있다고 하던데. 주언이가 내 목소리를 제대로 들었으려나.
찢어지고 짓밟혀 너덜해진 기억에 매달려 하염없이 주언이를 되뇌었다. 그러다 내 손을 확 낚아채는 악력에 고개를 들어 옆을 살폈다. 최기원은 내 손을 붙잡은 채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
“…….”
그가 손을 끌어 내려 시트 위에 놓았다. 그제야 손톱 끝을 벌겋게 물들인 피가 보였다. 핏물이 밴 손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에 이마를 기댔다. 최기원은 붙잡은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손목에 뱀이 똬리를 틀고 앉은 기분이었다.
차가 대문 앞에 정차한 사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가 내리라고 하기 전에 차에서 내려섰고, 그가 대문을 열자마자 자해를 하면서까지 뛰쳐나오고 싶었던 저택을 향해 스스럼없이 걸음을 옮겼다. 집까지 오는 내내, 행여 차가 머리를 틀어 그의 작업실로 향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주언이가 죽어서 내가 불쌍해 보인 것인지 그는 나를 작업실이 아닌 집으로 데리고 갔다.
하지만 언제 그의 마음이 변할지 모르는 일이다. 도망친 대가를 아직 치르지 않았기에 나는 그의 말에 복종해야 했다. 그래서 고분고분하게 움직였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나를, 최기원이 불렀다.
“백나언 씨, 내 방에서 지내요.”
차마 싫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계단 난간을 꾹 쥔 채 그를 바라봤다. 내 행동에서 조금의 머뭇거림을 눈치챈 그가 다시 물었다.
“2층에서 지내고 싶은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알겠어요.’라고 대답하더니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설핏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처럼 보였는데, 진짜인지 나를 비웃는 환영을 본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는 제 목덜미를 한 번 문지르더니 조금은 권태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답답하면 언제든 내려와요.”
‘답답하면’이라는 표현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 2층으로 올라갔다. 분명 그의 눈을 피해 도망쳤으니 욕을 하든 때리든 뭐라도 할 것 같은데, 지나치게 순순하고 친절하다. 말을 듣지 않는다며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도 이상하지 않을 최기원이 의견을 굽힌 것이 이상했다.
“…….”
그러나 2층 방문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남자를 본 순간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며 최기원이 여유로웠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커다란 남자 둘이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어, 방문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에게 경호원은 너무나 무섭고 혐오스러운 존재였다. 물론 그때 그 남자는 아니었지만, 그저 비슷하게 생긴 모습만으로도 나는 순식간에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기억 속으로 다시 처박혔다. 파르르 몸을 떨며 고개를 떨구었다. 공포에 움츠러든 발끝을 바라보며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최기원과 같이 지내야 하는 1층, 경호원이 지키고 있는 2층 그 어느 곳도 편히 지낼 공간이 없었다. 최악의 선택지에서 갈팡질팡 헤매던 나는 겨우 숨을 고르고 정신을 붙든 채로 걸음을 옮겼다.
슬리퍼가 바닥에 밀리며 직직 소리가 났다. 주춤대며 문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 중 한 명이 몸을 물리고 손을 문고리 위에 가져다 댔다. 맑은 신호음과 함께 잠금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를 악물고 그들 사이를 지나쳤다. 내가 도망치듯 방으로 뛰어 들어가자마자 등 뒤로 문이 닫혔다. 힘 빠진 시선으로 문고리를 확인하니, 도어 록이 반대로 달려 있었다. 밖을 나가기 위해선 도어 록의 암호를 알아야 하지만 반대로 바깥에서는 언제든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기이한 구조였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고개를 든 나는, 창틀을 바라본 순간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침이면 햇살이 길게 스며들었던 커다란 창문에 좁은 살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름 인테리어를 한답시고 하얀색으로 칠해 놓은 것 같긴 한데, 곧고 단단한 쇠창살이 색 하나 칠한다고 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런 감금이 싫으면 1층에서 함께 지내자는 의미였다.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하고 침대로 걸어가 걸터앉았다. 호텔처럼 각이 잡힌 침구와 깨끗한 방 안을 눈에 담고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긴 한숨과 함께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밀려왔다.
***
늦겨울에 주언이를 떠나보냈다. 나는 여전히 그곳에 고여 머물러 있는데, 시간은 야속하게도 빠르게 흘러갔다. 나도 모르게 봄이 찾아온 것이다.
난방을 틀지 않아도 따뜻해진 방 안의 공기와 창살 너머로 보이는 정원에서 봄꽃이 피어오른 모습이 이미 완연한 봄을 알렸지만 나는 계절이 바뀐 지 한참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초점을 쉽게 잃는 눈동자를 굴리며 침대 위에서 시간을 죽이던 나는 하얗고 도톰한 이불 위로 번진 창살 모양의 그림자를 손가락으로 의미 없이 더듬었다.
“…….”
시트 위를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손톱 끝이 피로 물들어 새빨갰다. 머리를 숙여 쇄골 부근을 살피니 목덜미가 온통 피로 젖어 있었다. 잠결에 또 목을 긁어내린 모양이다. 최기원이 목걸이를 걸지도 않았는데 목 주변은 매번 난리가 났다. 그가 긁지 말라고 말해서 정신이 있을 때엔 분명 목에 손을 대지 않는데, 잠깐씩 졸고 깨어날 때면 목에는 핏물이 잔뜩 번져 있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처는 섬뜩할 정도로 늘어 갔는데, 어느 날은 자고 일어났더니 이마가 길게 찢어져 있었다. 잠을 꽤 깊게 잤는지 다친 줄도 몰랐고 아침에 샤워를 하며 손으로 건드리고 나서야 다친 것을 알아차렸다.
게다가 더욱 기묘한 것은 치료한 기억도 없는데 이마는 이미 세 바늘이 꿰매져 있었다. 아침을 먹으며 줄곧 거즈를 만지작댔었다. 혼란스러워하는 나에게, 최기원은 내가 새벽녘 침대에서 떨어져서 이마가 찢어졌다고 설명해 줬다. 나는 떨떠름한 낯으로 죽을 떠먹으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마지막 기억이 분명 책상에 앉아 창밖을 구경했던 것이었는데, 언제 잠자리에 들었고 언제 머리를 깨 먹을 정도로 굴러떨어졌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밥을 먹다 보니 의문은 물밀듯 떠밀려 갔고 나는 다시 방에 앉아 이불을 끌어안고 시간을 죽였었다.
“……또.”
밤새 또 목을 헤집어 놓은 것이 찜찜해 피로 물든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주언이에게 미안할 정도로 악몽을 꾸지도 않고 잠도 푹 자는 것 같은데 상처가 늘어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불을 인형처럼 끌어안고 몸을 빙글 돌려 누웠다. 분명 방금까지는 멀쩡했던 낯이 일그러지며 몇 초 사이로 누운 얼굴을 따라 굵은 눈물이 후드득 흘렀다.
주언이의 앞에서 한 방울도 흐르지 않던 눈물은 어느 날부턴가 시기를 따지지 않고 터져 흘렀다. 별다른 이유가 있지도 않았다. 주언이 생각이 난다기보단, 그저 가슴 한구석에 한기가 든 바람이 오가는 것처럼 숭숭 쓰라리기만 했다. 눈물은 기척 없이 몇 방울 떨어질 때도 있었으나 어느 날은 닦아 내지 않으면 몇 초 만에 얼굴을 흠뻑 적실 만큼 쏟아지기도 했다.
오늘 아침부터 터진 눈물은 다행히도 금세 그쳤다. 이제는 눈가가 빨갛게 짓물러서 휴지로 닦기만 해도 쓰라려서 골치가 아팠다. 코를 훌쩍이며 일어난 나는 느린 걸음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허물처럼 벗어 내린 옷가지를 밟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씻었다. 목 주변의 핏자국도 말끔하게 씻어 냈다. 보송한 수건을 풀어 젖은 머리와 얼굴, 몸을 차례로 닦았다. 흘긋 거울에 비친 몸이 시선 끝에 닿을세라 나는 힘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울음이 터질 때면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아 가슴께를 주먹으로 내려치게 됐고, 그러다 보니 가슴 아래는 시퍼렇게 죽은 멍이 지워지질 않았다. 화상 흉터와 목덜미의 손톱자국, 손목의 자해 흔적까지 남은 전신은 지저분하고 얼룩덜룩했다.
최대한 눈으로 보지 않으려 해도, 불가항력적으로 더러운 몸뚱이를 마주한 순간에는 기필코 썩은 냄새가 따라 번졌다. 그럴 때면 곧장 머리를 타일에 찧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휘말렸다. 그래서 애써 거울을 외면하는 것이다.
새 홈웨어를 꺼내 입고 닫힌 문 앞으로 걸어갔다.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자, 바깥에서 경호원이 문을 열어 주었다. 출근 준비를 마친 최기원이 때맞춰 방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항상 내가 나오는 시간에 맞춰 방에서 나왔고 우리는 함께 식탁으로 갔다.
“잘 잤어요?”
“네.”
봄을 닮은 산뜻한 질문에 나도 가벼이 대답했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내 목덜미를 흘긋 살핀 것 같았으나 나는 개의치 않고 죽을 퍼 입에 머금었다.
고소하면서도 심심한 맛이었다. 열심히 죽을 비워 내던 중, 문득 몸속 깊은 곳에서 썩은 내가 훅 풍겨 올랐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떨며 숟가락을 놓쳤다. 욕지기가 일 정도로 치미는 냄새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씻어야 할까. 먹던 중에 씻으면 최기원이 이상하게 생각하려나. 잠시 일단 아침부터 먹고. 약 먹어야 하니까. 하지만 냄새 때문에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는데. 아, 얼른 떨어뜨린 숟가락부터 잡아야지.
그런데 아까부터 누가 찢어지는 듯한 괴성을 지르는 걸까.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내가 착각하는 것일까. 이상하다, 새가 사람처럼 우는 건 말이 안 되는데. 그러고 보니 봄이 왔다고, 최기원에게 말해서 잠시 산책을 나가자고 말하고 싶은데. 아니, 일단 냄새부터 어떻게 좀.
“응 괜찮아. 괜찮아요.”
눈을 뜨자 바닥은 깨진 잔과 그릇, 나뒹구는 반찬으로 난장이 되어 있었다. 최기원은 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로 귓가에 대고 괜찮다는 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쏟아진 그릇들을 멍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하아……. 왜, 이거……. 왜…….”
“나언 씨 잠이 덜 깼나 봐요?”
부드럽게 타이르는 목소리가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쪽 눈을 찌푸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식탁 앞에서 조니까 그릇이 떨어지지.”
“아…….”
최기원은 아프게 옥죄었던 팔을 풀고 티슈를 뽑아 입가로 흘러내린 흥건한 침을 닦아 주었다. 분명 씻고 아침을 먹으러 내려왔었다. 식탁에서 깜빡 졸았다 일어났다고 하는 찰나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단어가 되지 못한 질문을 웅얼대는 나를 식탁 의자에 앉힌 그가 내 뺨을 아프지 않게 툭 쳤다.
“괜찮으니까 마저 먹고 조금 더 자요.”
입꼬리를 스르륵 끌어 올린 최기원이 새 그릇을 꺼내 와 죽을 마저 담아 내 앞에 놓아 주었다. 나는 끊어진 기억을 더듬다 수저를 다시 쥐고 담뿍 뜬 죽을 밀어 넣었다. 먹어 본 것 같은 고소하고 심심한 맛에 금세 군침이 돌았다.
***
팔랑, 팔랑.
바람이 불 때마다 벚꽃 잎이 흩날렸다. 나무와 꽃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최기원의 정원에는 늘 제철에 피는 꽃이 가득했다. 이번 주에 들어서며 벚나무가 만개했다. 응달에 숨어 꽃봉오리를 늦게 피웠던 가지까지 꽃잎을 틔워 내, 창밖으로 펼쳐진 세상이 온통 분홍빛이었다.
정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바닥에 쌓인 잎들을 오후마다 쓸어 담았다. 작은 끌차에 싣고 가는 벚꽃 잎이 한 무더기인데도, 다음 날 아침이면 분홍색 잎이 눈처럼 소복하게 쌓였다. 초점이 조금 흐릿해지는 순간에도 꽃잎은 팔랑이며 지상으로 낙하했다. 꽃잎이 하늘대며 움직일 때마다 유리 창문 사이로 희미하고 반투명한 그림자가 자국을 남겼다.
고요한 정적 사이로 최기원의 나른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저기에 꽂아 봐요.”
창밖을 향하고 있던 고개를 돌려 최기원을 바라봤다. 내 눈을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손으로 미끄러졌다. 나는 제법 큼지막한 퍼즐 조각을 쥐고 있었다.
아. 퍼즐을 하고 있었던 것을 깜빡 잊었다. 최기원은 내가 퍼즐을 맞추지 못하면 정답 언저리를 늘 가르쳐 줬다. 퍼즐은 오전에 시간이 날 때면 늘 하는 것이지만, 내가 자의로 맞춘다기보단, 최기원이 말해 주는 정답에 맞게 조각을 가져다 놓는 것에 가까웠다.
꽃잎에 시선이 팔려 있느라 최기원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위치를 놓치고 말았다. 차가운 손바닥 안으로 금세 식은땀이 차올랐다. 천천히 퍼즐을 보고 위치를 가늠하면 될 일인데도 눈과 손이 마음을 따라가 주지 않았다.
“어, 어디…….”
최기원이 고개를 갸웃대더니 손바닥으로 러그 위를 짚으며 몸을 살짝 물렸다. 이내 눈을 사르르 휘며 웃는다. 베이지색의 안경테 아래로 그의 긴 속눈썹이 언뜻 보였다.
“어딜까.”
기다란 손가락이 장난을 치듯 퍼즐 이곳저곳을 향했다. 그의 손가락이 러그 털 위를 가볍게 오가는 것을 반 박자씩 늦게 쳐다보다 고개를 숙였다.
“모, 르……. 몰라요.”
왈칵 차오른 불안감에 퍼즐 조각을 줄곧 만지작대기만 했다. 억센 손톱이 닿은 절단면이 금세 닳아 미묘하게 부풀어 올랐다.
“울지 말고.”
어느새 굽히고 있던 무릎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얼른 하고 치워 버리고 싶은데 이리저리 헷갈리게 장난이나 치는 최기원에게 짜증이 났다. 하지만 이렇게 서럽게 눈물이 터져 버릴 줄은 몰랐다. 유치원생도 시시하다고 할 것 같은 퍼즐을 앞에 두고도 이렇게 쩔쩔매야 하는 내가 더 싫어서 울음이 쉬이 그치지 않는 것 같다.
제자리를 찾지 못한 퍼즐을 쥐고 울고 있으니, 최기원이 손안의 퍼즐을 빼서 뭉쳐 있는 조각 옆에 끼워 맞췄다. 내가 쥐고 있던 그림 부분이 들어가자 중간이 끊어졌던 기차 모양이 완벽하게 연결됐다. 정답을 보고 나니 이렇게 쉬운 것을 왜 하지 못했을까 하는 마음에 더 기분이 진창이 됐다. 눈동자가 일렁이며 왈칵 진한 서러움이 다시금 밀려왔다.
“울지 말라니까.”
손을 뻗은 그가 볼 위를 엄지로 문질렀다. 본능적으로 몸을 물렸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젖은 뺨을 다정하게 쓸었다. 최기원은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면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느릿하게 입을 맞춰 왔다. 건조하게 갈라진 입술 위로 말캉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닿으니 감촉은 더욱 이질적이었다.
조금 더 뒤로 도망가려는 뒷덜미를 부드럽게 끌어당기며 그의 뜨거운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간지럽게 들어선 혀가 스윽 입천장을 긁었다. 차가운 손이 어깨를 감쌌고, 최기원은 무릎을 일으켜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향과 무게에 떠밀려 러그 위로 풀썩 쓰러졌다.
“…….”
옷을 끌어 올리는 차가운 손가락도, 유두를 머금는 입술도. 속옷을 끌어 내리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 성기를 끈질기게 애무하는 노력도 모두 한 꺼풀 너머의 아득함으로 다가왔다. 생리적인 신음을 내는 것도 잊은 채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그저 흩날리는 벚꽃 잎에 눈길을 뒀다.
역한 이물감과 함께 그의 것이 안으로 들어왔다. 늘 고통에 겨웠던 관계가 다행히도 별스럽지 않았다. 오후의 볕이 따스해 보인다. 온기를 머금고 물렁해진 땅을 밟으면 어떤 느낌일까. 바깥을 멍하게 바라보는 동안 울음이 점차 그쳐 갔다.
돌연 커다란 손이 눈앞을 가렸다. 화사한 봄 풍경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앞이 까맣게 보이질 않는다. 그가 내 눈을 가린 채 내 귓바퀴를 약하게 깨물었다.
“무슨 생각 해?”
서늘한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눈을 가린 손을 내려 턱 끝을 붙잡아 돌렸다. 빛을 잃은 눈동자가 그에게로 돌아갔다.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최기원과 눈이 마주치자 순식간에 목구멍이 막히는 듯 숨을 뱉어 내기 어려워졌다.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린 그가 바닥에 떨어진 내 팔을 주워 제 목을 끌어안도록 잡아끌었다. 그의 어깨와 목덜미에 힘없이 걸쳐졌던 팔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으로 푹 떨어졌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깔았다가, 이내 눈을 감아 버렸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던가. 궁금해하는 최기원의 목소리를 떠올리니 이내 배시시 웃음이 새어 흐르려 했다.
죽을 것이다. 더는 용기가 필요 없었고 그저 적기만 찾으면 될 일이다.
그의 이런 정신 나간 호의가 조금은 느슨해졌을 때. 이번에는 아무것도 나를 발목 잡을 일 없을 테니까. 내가 바라는 것은 그때에 제발 내가 제정신을 붙들고, 이 추락 같은 고통을 똑똑히 직면하고 있는 것이었다. 뚝뚝 끊어지는 의식과 바닥이 나 버린 체력 때문에 차일피일 미뤄지는 시간이 원망스러울 만큼 나는 휴식이 고팠다.
팔랑. 까맣게 물들어 가는 의식 속에서 분홍색 꽃잎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
눈을 떴고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또 기억을 잃었다. 뭉텅 잘려 나간 시간을 더듬다가, 거실에서 그와 몸을 섞었던 것을 떠올렸다.
“…….”
무언가 이질적인 기분에 빙글 몸을 돌려 옆으로 누운 뒤,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엉덩이 골 사이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묘하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뽀송하고 만질만질한 느낌이 생소했다. 몸을 섞다 기억을 잃으면 최기원은 보란 듯이 나를 그대로 내버려 뒀었다. 말라붙은 정액이나 체액으로 끈적대는 몸은 불쾌하고 눅눅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몸이 말끔히 씻겨 있었다. 팔뚝에 코를 묻으니 희미하게 로션의 향도 났다.
행여 몸을 섞었던 것이 망상일까. 아찔한 기분에 몸을 일으켜 바닥을 디디니, 구멍이 홧홧하고 뻐근하게 아프긴 했다. 옅게 고개를 끄덕이며 파우더룸으로 걸어가 거울을 봤다. 깨끗하게 씻긴 얼굴을 더듬다, 따끔하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
뺨과 입술에 새로운 생채기가 나 있었다. 딱 뺨을 세게 얻어맞은 꼴이었다. 뺨 위로 푸르게 터진 핏줄을 살피며 눈을 끔뻑였다.
‘왜 때렸지.’
이 정도면 꽤 맵게 맞은 모습인데도 전혀 맞은 기억이 없었다. 몸을 조금 더 거울에 붙여 얼굴에 핀 상처를 들여다봤다. 어둑한 기억은 내가 절대 맞추지 못하는 퍼즐처럼 어지럽게 섞여 있을 뿐이었다.
혼란스러운 기분에 발을 끌며 방으로 걸어 나왔다. 방을 둥둥 떠다니던 뿌연 시선이 선반에 닿은 순간 걸음을 우뚝 멈췄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반 위의 상아색 상자였다.
방을 거닐다 이 상자와 마주치는 날이면 어김없이 발이 얽혀 한참을 벗어나질 못했다. 나는 홀린 듯 선반으로 다가가 상자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어젖힌 순간 쓴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 상자 안에는, 주언이가 지난 병원에서부터 쓰던 물건들이 전부 담겨 있었다. 얼마 살지 못한 아이의 삶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 상자 안에 든 물건도 가짓수가 많지 않았다. 가져다 놓고는 한 번도 입지 못한 외출복, 자그만 양말과 칫솔, 양치 컵을 하나씩 만지작거렸다.
병원 냄새로밖에 기억나지 않는 아이의 체취를 찾기 위해 이것저것 코에 가져다 대 보았지만, 오늘 역시 헛수고였다. 하나씩 만져 보고 맡아 보는 동안 주언이의 물건이 주변에 어지럽게 놓였다. 아이의 유품에 둘러싸인 채 무릎을 당겨 이마를 묻고 기억을 더듬었다. 작은 손을 잡았던 느낌과 마른 몸을 껴안을 때 물씬 풍기던 냄새가 점점 옅어져 갔다. 초조함에 입술을 짓이기며 고개를 들었다.
정신없이 상자를 뒤적이다 주언이의 공책과 작은 천 필통을 꺼냈다. 끝이 뭉툭해진 연필을 쥐고 공책을 한 장 찢었다. 몇 번이고 고심해 단어를 골라 적었다. 손에 차오른 식은땀 때문에 연필이 미끄러질 만큼 애써 쓴 문장은 종이와 함께 곱게 접혀 다시 상자에 처박혔다.
손을 뻗어 흩어진 물건들을 마저 그러모았다. 모든 것을 상자에 다시 담은 후 뚜껑을 덮어 원래 있던 곳에 올려 두었다.
그렇게 난 상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몇 시간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둑해진 방 안에서 고개를 든 순간, 벽을 가득 채운 작품이 시선 끝에 걸렸다. 갤러리에 갔을 때 최기원이 나에게 선물했던 커다란 액자였다. 작가의 어린 아들이 죽고 나서 그렸던 그림이라고 했었다. 하염없이 길게 이어진 먹색의 선에 시선을 놓고 있으니 점차 가슴이 조여 오며 숨이 막혀 오기 시작했다.
비틀대다 선반을 짚고 겨우 중심을 잡았다. 불규칙하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뱉었고 점차 끅끅대며 목을 긁는 신음이 흩어졌다. 주먹을 쥐고 가슴을 콱 내려치자 통증과 함께 숨통이 조금 트였다. 이미 까맣게 멍이 든 가슴을 재차 내려쳤다. 하얗게 번지던 초점이 겨우 제자리를 찾았다.
“하아, 하아…….”
사소한 행동 사이에 주언이에게 미안할 이유들이 끼어들었다. 잘 먹고 잘 자서. 창살 사이로 스며든 봄을 보며 조금은 힘을 내서. 무섭다는 핑계에 숨어 미적대며 살아 있는 일 분 일 초가 미안해서. 정의 내리지 못한 격한 감정이 죄책감으로 변해 켜켜이 쌓여 갔다.
초조했고 불안했다. 이유 없이 분노가 치밀었고 화를 내기도 전에 깊은 우울의 구렁텅이로 처박혔다. 들쭉날쭉 불쾌하게 오가는 감정에 호흡이 딸렸고 작은 이명 소리와 함께 까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깨물었다.
손 닿는 곳에 놓여 있는 철제 스툴을 들어 작품 위로 내던졌다. 귓전을 때리는 파열음과 함께 작품을 덮은 유리에 금이 갔다. 떨어진 스툴을 들고 다시 한번 힘껏 작품을 내려쳤다. 걸려 있던 액자가 바닥으로 추락하며 유리가 완전히 깨져 나뒹굴었다.
소란을 들은 경호원들이 곧장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한 명은 스툴을 들고 비틀대며 서 있는 나를 확인하고, 다른 하나는 이마를 짚으며 깨진 작품으로 고개를 돌렸다. 별다른 외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경호원은 나를 멀찍이 떨어뜨려 놓은 뒤, 다른 경호원을 도와 깨진 유리 조각을 치우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정신없이 오가는 구둣발에 채여 먼발치로 나가 떨어진 조각 가까이로 걸어갔다. 조심스레 몸을 웅크려 날카로운 조각을 손 속에 숨겼다. 경호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엉거주춤 일어섰고, 숨긴 조각을 주머니 깊은 곳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열린 방문 사이로 최기원이 걸어 들어왔다. 쿵쿵, 심장이 세차게 뛴다. 유리 조각이 든 주머니가 마치 납덩이가 든 것처럼 버겁게 느껴졌다. 온 신경이 헐렁한 홈웨어 주머니에 쏠렸다.
삐딱하게 선 최기원이 산산조각 난 액자를 슥 훑었다. 조금은 지루하고 또 피곤해 보이는 낯을 한 최기원은 방을 천천히 둘러본 뒤 헐떡이는 나에게로 마지막 시선을 던졌다.
“기분은 좀 풀렸어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어깨를 으쓱이며 묻는다. 크지도 않은 목소리가 스산한 기운을 품었다. 움찔, 쥐었던 주먹이 펴졌다. 맞은 기억도 없이 생긴 뺨의 상처가 떠오르며 자연스레 그의 눈치를 살피게 됐다.
하지만 나는 애써 고른 숨을 뱉었다. 지금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간 모든 결정이 다시 스러질 것이다. 난 속절없이 일그러지는 얼굴을 펴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엉망으로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죄송, 해요…….”
사죄에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최기원이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며 말했다.
“어차피 지금 지랄하는 거 전부 기억 못 하겠지만. 뭐, 나언 씨가 후련하면 됐어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 최기원이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선물한 것을 깨뜨렸는데도 때리지 않는다. 오히려 머리를 쓰다듬고, 차가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런 부질없는 다정함이 가슴을 더욱 시리게 만들었다. 내가 고통에 못 이겨 기억을 잃어 가는 동안, 그는 이토록 태연했을까. 그러나 모두 소모적인 생각이다. 나는 그의 이기적인 사랑에 졌고, 굳이 그 무거운 이기심을 뚫고 그를 미워할 힘이 남아 있지 않으니까.
내가 아둔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나를 안아 줬다.
“저……. 씻을래요.”
단단한 품을 빠져나오며 그를 올려다봤다. 담긴 감정을 읽기 힘든 싸늘하고 차가운 눈이 더는 두렵지 않았다. 지원이 형과는 전혀 다른 그 차가운 눈동자는 얼마 전 보았던 남해의 깊은 바다를 떠올리게 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머리끝까지 잠겨 내 흔적을 모두 지워 버릴 것 같은 아득하고 고요한 깊은 바다. 그 무감한 낯은 내 서툰 결정에 확신을 깃들게 할 뿐이었다.
남들과 비교하긴 싫지만, 결국 진 것으로 보아 힘겨운 삶이었나 보다. 길지는 않았기에 궁금한 것도 아쉬운 것도 조금씩은 있지만, 모두 가슴에 숨기고 등을 돌렸다. 화장실로 옮기는 걸음마다 엉겨 붙는 미련을 조금씩 떼어 냈다.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파우치 안에 모아 뒀던 약을 쏟아부었다. 세면대 물을 틀어 놓고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약 봉투를 하나씩 뜯었다. 아침에 봤던 꽃잎처럼 색색의 알약이 바닥에 소담하게 쌓여 갔다.
의식을 놓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한 고통이 가슴을 깊게 파내고 있는 지금. 용기는 없었으나 어렴풋이 직감했던 소중한 적기였다.
바닥에 놓인 약을 한 움큼 집어 입에 머금었다. 수도에 입술을 대고 흐르는 물을 삼켰다. 열심히 모아 온 알약은 몇 번을 가득 삼키고 나서야 동이 났다.
바닥이 일렁이며 중심을 잡기 힘들었다. 차가운 타일에 등을 대고 죽 미끄러졌다. 몽롱함이 밀려오자 조각을 쥔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이쯤이면 고통을 느끼지는 않을 것 같았다.
빨간 딱지가 앉은 손목 위로 날카로운 조각이 새로운 상처를 남겼다. 아니, 상처라고 하기엔 너무나 깊고 너덜너덜했다. 미련이 남지 않은 결심이 몇 번이고 여린 살을 갈라 붉은 피를 쏟게 했다. 손목을 오가던 손이 점차 느려지더니 이내 타일 위로 뚝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