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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change of equivalents (13/28)

12. Exchange of equivalents

기원은 차를 한 입 마신 후 포크로 고기를 찍었다. 최고급 갈비 살이 결을 따라 부드럽게 찢어졌다. 오늘 저녁 메뉴는 아직도 소화가 더딘 나언을 위해 부드럽게 찐 고기와 묽게 끓인 리소토를 준비했다. 파리한 안색의 나언은 고기에 눈독 한 번 들이지 않고 줄곧 숟가락의 1/3만 호박 리소토에 담갔다가 입에 넣고 빠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릇에 잘게 뜯은 고기를 덜어 나언의 쪽으로 건네자 그제야 흐리멍덩한 시선이 살짝 올라온다. 고기를 바라보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다시 포크를 들어 고기를 찍어 입으로 가져가는 모든 행동이 느리고 힘이 없었다.

기원이 먼저 식사를 끝내고, 나언은 묵묵히 앉아 리소토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물론 많이 먹지 않는 그를 위해 새 모이만큼 담아 놓은 양이었지만, 나언은 대단한 책임감을 느끼며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기원이 가져다 놓은 고기는 몇 점만 예의상 집어 먹어, 반 넘게 남아 있었다.

먼저 식사를 끝내 방으로 갔던 기원이 씻고 나오자, 나언은 기원의 방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사실은 앉아 있다고 하기도 뭣한 자세로, 거의 두툼한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누워 있었다. 나언은 눈을 감고 미간을 옅게 찌푸리고 있었다.

기원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소파에 가까이 갔다. 색색대는 숨소리가 자신에게 들려올 정도로 나언의 호흡이 거칠었다. 역시나,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붙어 있고, 입술은 하얗게 떴다. 화상의 고통을 참느라 윗옷의 아랫단을 꾹 쥔 손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목덜미와 무릎 뒤에 손을 넣어 들어 올리자, 가벼운 몸이 반항 한 번 없이 너무나 쉽게 안겨 왔다. 목을 가누지 못해 달랑이던 고개가 금세 힘을 잃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기원은 나언을 침대에 눕히고 조명을 꺼 방을 어둡게 만들었다. 작게 앓는 소리를 낸 나언이 곧 잠에 빠져들며 규칙적인 호흡을 뱉었다. 나언의 숨소리 때문에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책을 뒤적대던 기원도 결국 나언의 곁에 누웠다.

기원이 잠을 깬 건, 무언가 두런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굳게 닫혔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나언이 잔뜩 쉰 목소리로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대고 있었다.

“미, 미안해. 형이 …잘못했어. 미안.”

“벼, 병원 가자……. 너 아파.”

기원이 충혈된 눈을 감았다 뜨고, 고개를 느리게 돌렸다. 퀭한 시선이 하얀 낯에 닿았다. 젖은 눈을 감은 나언이 잠시 색색 달아오른 숨을 뱉어 내다 다시 입을 연다.

“버, 벌레. 징그러워, …가지 마요.”

“무, 무서워. 흐으……. 무서, 워…….”

점점 목소리가 사그라지더니 다시 색색 거친 숨소리를 뱉는다. 그렇게 나언은 밤새 뭉개진 발음으로 무언가를 잔뜩 토로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이불을 꾹 그러쥐었다가, 잠시 깊은 잠에 들면, 찌푸려졌던 미간이 펴지며 입가가 늘어지길 반복했다.

다음 날 아침, 겨우 선잠에 들었던 기원이 눈을 떴을 때 나언은 이미 일어나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커다란 눈이 허공을 끔뻑이며 바라보다, 기원에게로 도로록 굴러왔다. 엎드린 채 눈을 찌푸린 기원은 나언을 빤히 바라봤다. 씨발, 잔 것 같지도 않다.

“…….”

“…….”

지난밤의 소란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순진한 얼굴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저렇게 밤새 악몽에 시달린 것일까. 기원은 답을 찾지 못했다.

창백한 낯 위엔 얼룩덜룩한 멍과 언제 남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상처가 가득했다. 기원은 나언을 볼 때마다 불쑥불쑥 떠오르는 낯선 감정을 이제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을 만나기 전, 밝았던 나언의 모습이라면 짓이겨 버리고 싶을 만큼 속이 뒤틀리다가도, 이젠 그 멀건 낯에 지울 수 없는 음울이 배겨 버린 모습을 보고 있자면 형용할 수 없는 싸한 감정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기원의 빤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겠는 듯 나언의 커다란 눈에 어려움이 점점 번져 갔다. 흉터로 어둑하게 착색된 목덜미를 잠시 더듬던 나언이 조용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떨어뜨렸다. 기원은 시트를 짚고 일어서 곧장 화장실로 걸어갔다. 기원이 움직일 때마다 까맣고 깊은 눈동자가 한발 늦게 따라붙었다.

***

전시 일정과 작가들의 이력이 담긴 카탈로그를 내려놓은 기원이 안경을 벗었다. 무료한 시선이 태블릿 PC의 화면에 닿는 순간, 흥미를 머금고 밝아졌다. 기원은 일하는 내내 나언을 담은 화면에서 10분 이상 눈을 떼지 않았다.

1층으로 생활 환경이 바뀌었으나 나언의 하루는 전과 진배없었다. 멍하게 앉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루 종일 부연 얼굴로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나언의 화상 사고 이후 전면 교체된 사용인에게 전화를 걸어, 제 방에 나언의 물건을 가져다 놓으라고 전했다. 어두운 대리석으로 시공된 바닥에는 나언이 끝내 맞추지 못한 퍼즐 조각이, 몇천만 원을 호가하는 오브제가 놓인 유리 테이블 위에는 만년필과 공책이 널렸다.

숙제가 놓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언이 퍼즐 앞에 절뚝이며 앉았다. 기원은 얌전하게 말을 듣는 나언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나언이 퍼즐을 몇 조각 맞춰 보더니 갑자기 손등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치던 나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앞에 앉았다. 만년필을 쥐곤 몇 글자를 힘겹게 따라 썼다.

나언이 애써 울컥함을 삼키는 모습을 바라보던 중, 정적을 깨우는 문자 알림음에 기원의 시선이 돌아갔다.

「발열에 이어 점심 식사 이후 구토 증세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는 항암 부작용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항암 이후 일주일 정도, 지난 차수와 마찬가지로 웬만한 결과를 보이던 백주언의 몸 상태가 나빠진 건 그제부터였다. 몇 번이고 백주언의 상태가 문자로 날아왔으나 전혀 차도가 없었다. 기원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시선을 태블릿 화면으로 돌렸다.

어느새 만년필을 내려놓은 나언이 손등으로 눈 주변을 비비고 있었다. 무언가 분한 듯 잘게 헐떡이더니 입술을 꾹 깨물고 다시 만년필을 쥐었다. 보고 쓰는 것임에도 뭐가 잘 안 되는지 몇 번이나 펜을 내려놓고 울음을 참는다. 그 간절하면서도 생기 없는 낯에 기원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

허벅지와 종아리를 감싼 붕대를 풀어 내리자 거즈 위로 진물이 번져 있다. 가만히 있어도 쓰라린 화상 상처 위로 소독약과 연고가 닿았다. 거즈를 갈고 새 붕대를 감았다. 이틀에 한 번 병원에 들러 붕대를 갈았고, 오늘이 두 번째 진료였다.

“다음 주면 통증은 조금 덜하실 겁니다.”

“……네.”

인사를 한 나언이 절뚝대며 진료실을 빠져나오자 아주머니가 곧장 일어서 따라붙었다. 나언을 병원까지 데려다주는 기사는 외과 병동 앞에서 대기하고, 일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늘 진료실까지 동행했다. 아주머니는 지령을 받은 사람처럼 진료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기회는 얼마 없다. 나언은 시계가 든 앞주머니의 묵직함을 느끼며 눈으로 길을 익혔다.

하루는 지루할 정도로 똑같이 반복되었으나, 나언은 제가 정한 날짜가 다가올수록 입이 바짝 말랐다. 평소보다 가슴이 빨리 뛰고, 먹은 것도 없으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뭘 그렇게 봐요?”

퇴근한 기원이 코트를 벗으며 한쪽 눈썹을 끌어 올렸다. 나언이 휴대 전화를 내려놓으며 작게 웅얼댔다.

“그냥, 시계요….”

나언이 잠금 버튼을 눌러 휴대 전화 배경 화면에 떠 있던 캘린더를 닫았다. 다음 주 화요일 오전 11시, 세 번째 병원 예약 날짜는 나언이 정한 ‘아주머니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최적의 날짜’였다. 한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나언의 표정에서 문득 고양이를 떠올린 기원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고는 씻으러 들어갔다.

“…….”

기원은 옷을 벗으며 휴대 전화와 지갑, 시계를 던져 놓는다. 나언은 기원이 화장실 문을 닫은 것을 목을 빼어 확인한 후, 드레스룸 입구 가까이에 있는 선반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두툼한 가죽 지갑을 한 번 눈에 담고, 다시 한번 기원의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도 기척이 없다.

지갑을 쥐고 조심스레 펼치자, 역시나 지갑 안은 지폐가 한가득하였다. 하얀 것은 죄다 수표일 테니 얼른 반대편을 살폈다. 그 외 현금은 전부 노란색이었다. 오만 원권 2장이면 티도 나지 않을 정도로 도톰하다. 10만 원을 꺼낸 나언은 얼른 지갑을 원래 있던 모양대로 놓고, 드레스룸에 걸려 있는 제 패딩 안주머니에 돈을 구겨 넣었다. 다친 이후 절뚝대는 다리가 이토록 빠르게 움직인 건 처음이었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이불을 끌어당겼다. 심장이 터져 버릴 것같이 뛰어, 제 귀에까지 두근대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도 최기원은 아직 씻고 있었고, 기원이 나올 때쯤에는 나언의 심장 박동은 다시 평온을 찾은 상태였다. 이제 정말 모든 준비가 끝났다.

최근에 기원은 자신에게 손을 올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언은 기원의 감시가 느슨해지도록 최선을 다해 예쁘게 굴었다. 몇 주 동안 씨름하던 아동용 퍼즐도 기원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고, 잘 모르겠는 서양 미술사도 열심히 공책에 베껴 썼다. 잊을 만하면 썩은 내를 풍기는 몸도 열심히 씻었으며 틈틈이 걷기 운동도 했다.

물론 나언이 꺼져 가던 의지를 찾은 이유는 오로지 주언이었다. 글도 쓸 줄 알고, 체력도 회복해야 어떻게든 일을 구해 주언이를 챙길 수 있었다. 제대로 도망칠 수 있을까, 덜컥 두려움이 앞설 때면 나언은 작은 방이지만 주언이와 단둘이서 밤을 나는 모습을 그렸다. 차게 식었던 가슴을 울렁 부풀게 하는, 내 삶의 원동력.

물론 객관적으로 생각한다면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이 아이에게 낫겠지만, 주언이가 엉엉 울며 서러움을 토로하던 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고 나언이 기다리던 화요일이 찾아왔다. 나언은 평소처럼 일어나 기원과 아침을 먹었다. 어제 긴장 때문에 배가 아파 잠을 조금 설쳤더니, 오늘 오전은 다시 죽이 차려졌다. 문득 이 집에서 먹었던 첫 식사가 떠올랐다. 마주 앉아 있던 최기원이 무섭고 불편해서 얼마 먹지도 못했던, 그날.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 식사를 하는 지금도 식탁 위에는 비슷한 감정이 고여 있었다. 씁쓸한 기분을 티 나지 않게 지우며 나언은 숟가락을 들어 흰죽을 떴다.

“오늘 병원 진료죠?”

“…네.”

“통증은?”

“괘, 괜찮아요, 이제 거, 걸을 만하, 고요.”

나언의 대답을 들은 기원이 물 흐르는 소리처럼 말을 붙였다.

“오늘 저녁에 그때 못 봤던 영화 보러 가요.”

나언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기원을 바라보았다. 감정을 읽기 힘든 회색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입에서 울컥 신물이 올라오려 했다. 하지만 나언은 평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숟가락을 쥔 손에 애먼 힘이 들어갔다. 억지로 맺었던 인연의 끝은 스스로 잘라 내는 게 맞다. 어느새 나언의 입가엔 어설픈 미소가 맺혔다.

***

대학 병원은 평일 오전임에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최기원이 병원 측에 따로 부탁을 한 것인지, 화상 진료를 맡은 의사는 지나칠 만큼 친절하고 꼼꼼했다. 평소라면 부담스러울 수 있겠으나 진료 시간이 길다는 것은 나언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나언은 의사가 붕대를 풀기 직전, 그를 저지했다.

“저, 선생님. 처방전 머, 먼저 바, 받을 수 있을, 까요?”

멈칫한 의사가 눈썹을 치켜뜨며 이유를 묻는 탓에, 나언은 꼼꼼하게 준비해 둔 변명을 말했다.

“약국 주, 줄이 기, 길어서요. 약, 미리 바, 받아, 오시라고 하려고….”

이내 의사의 낯에 납득의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며 나언은 작게 안도의 숨을 뱉었다. 의사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빠른 속도로 타자를 쳤다.

“그럼요. 지난 일주일 치 약 잘 들었으니 똑같이 한 주 더 드세요. 연고는 두 개 드릴 테니까 더 자주 바르시고요.”

“네.”

오늘로 정한 이유는 바로, 떨어진 약을 타는 날이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아주머니를 떼 놓을 방법이 이것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도망치기 위한 마지막 열쇠인 처방전을 받아 든 나언이 진료실 문을 열어 아주머니를 불렀다. 나언을 기다리며 바로 앞 의자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올려다봤다. 나언은 마른침을 삼킨 후 그녀에게 처방전을 건넸다.

“지, 진료, 오래 걸리니까……. 약 조, 좀 미리 받아, 서 와, 주세요.”

“아….”

처방전을 눈으로 훑은 아주머니가 잠시 난색을 보였다. 이런 경우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벌써 세 번째 진료였다. 반복된 루틴은 경계를 누그러뜨렸고 그녀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금방 다녀올게요.”

“네.”

아주머니가 약을 타러 떠나고, 나언은 곧장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휴대 전화를 껐다.

“저, 서, 선생님. 죄송, 한데요. 저 화장실 좀 다, 다녀, 올게요.”

“그러세요.”

의사는 화장실에 갔다 온다면서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가는 나언에게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정말 급한 모양인지, 빠른 걸음으로 절뚝대며 나가는 나언의 등에 대고 천천히 다녀오라는 친절의 말도 남겼다.

나언은 진료실을 빠져나오자마자 그동안 눈으로 열심히 익혔던 길을 따라 그대로 빠르게 뛰었다. 외과 병동의 뒷문을 통해 빠져나온 뒤 몸을 틀어 주언이가 입원한 암 병동을 향해 뛰었다. 허벅지와 종아리의 상처가 바닥을 디딜 때마다 욱신댔지만 개의치 않았다.

소아암 병동에 도착하자 목에서 피 맛이 올라왔다. 헐떡이며 숨을 고르던 나언은 병동 입구에서 몸을 구긴 채 때를 기다렸다. 몇 번 텅 빈 엘리베이터를 보내고 나자, 외출했다 병실로 돌아오는 가족 단위의 면회객들이 엘리베이터 앞에 줄을 길게 섰다. 그제야 발을 뗀 나언은 그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VIP 입원실 층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언은 사람들 틈에 마구잡이로 섞여 데스크 창구를 통과했다. 어차피 데스크 직원과 간호사들은 제 얼굴을 알겠지만, 지금은 의례적인 출입 검사를 할 만한 신분증이나 명분이 없었다. 그리고 괜히 최기원에게 연락이나 알림이 갔다간 낭패였다.

나언은 복잡한 틈을 헤쳐 빠른 걸음으로 대기 공간을 지났고, 이내 주언의 병실이 있는 복도를 헐떡이며 뛰었다.

‘이제 진짜 마지막…….’

병실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나언은 준비한 계획을 되뇌었다. 간병인에게 심부름을 부탁해 내보내고, 그사이 주언을 휠체어에 앉혀 바로 나간다. 챙길 짐은 주언이 약, 옷, 외투. 나언은 속이 바짝 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젖혔다.

“…….”

그런데 병실이 묘하게 낯설다. 이상하리만큼 조용하고 텅 빈 느낌을 지우지 못한 나언은 어둑하게 불이 꺼진 병실 안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 곧장 침대를 바라봤다.

“하아, 하아……. 주언아.”

침대가 비어 있다. 아니, 비어 있다고 말할 것도 없이, 아무런 짐도 흔적도 없다. 마치 아무도 입원한 적이 없던 것처럼 텅 비어 있는 병실을 정신없이 살피며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가쁘게 뱉었다. 나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퍼졌다. 이런 건, 이런 상황은 계획에 없었다.

나언은 순간 공황에라도 빠진 사람처럼 굳어 버렸다.

“뭐, 뭐야…….”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대던 나언은 벽을 짚은 채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동공이 마구잡이로 흔들리고, 긴장에 얹힌 것 같던 속은 얼어붙은 주걱으로 휘젓는 것처럼 거북하게 울렁댔다. 짧게 헐떡인 나언이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아직 누군가 따라붙은 기척은 없지만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쯤이면 화장실에 간다고 해 놓고 사라진 자신을 의사가 찾기 시작했을 것이다. 곧 약을 타서 진료실 앞으로 돌아올 아주머니께 상황을 이야기할 것이고, 아주머니는 자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주언이의 병실부터 찾는 건 시간문제였다.

나언은 얼빠진 표정으로 병실을 빠져나와, 입구 왼쪽에 붙어 있는 이름표를 확인했다. 백주언, 이라고 적혀 있어야 할 공간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마치 꿈을 꾼 듯 이름표를 허무하게 바라보다, 지나치게 떨리는 손으로 유리판을 매만진 나언이 비틀대며 걸음을 옮겼다.

넋이 나간 상태로 병동을 빠져나왔다. 귀에서 삐- 하는 기이한 이명이 울렸다. 그저 몸이 가는 대로 움직여 계획했던 대로 곧장 택시까지 탔는데, 정작 계획에서 제일 중요한 주언이가 없다.

“…….”

아무 일 없었던 듯 진료실로 돌아가기엔 이미 늦었고, 그렇다고 주언이의 행방을 물을 사람도 없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머리가 백지장처럼 하얘져 나언은 고개를 숙이고 가쁜 숨을 헐떡이기만 했다. 주언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이며 왜 최기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인가. 나언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며 눈을 깜빡였다.

일방통행이기에 일단 병원에서 출발은 한 택시 기사는 입을 꾹 닫고 있는 승객을 향해 행선지를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

“손님! 어디로 가냐고요.”

“아, 그……. 회영역…이요.”

기사의 탁 쏘는 목소리에 뒤늦게 고개를 든 나언이 차로 꽤 거리가 먼 지하철역을 부르자 택시는 빠른 속도로 출발했다. 나언은 지친 머리를 억지로 굴렸다. 녹슨 머릿속으로 몇 안 되는 가정들이 피어올랐다. 자신이 손 쓸 수도 없이 멍청해져서, 글도 숫자도 잊을 만큼 머리가 망가지는 바람에 주언이의 병실을 기억하지 못한 걸까. 하지만 주언이의 병실은 과장을 덧붙여 정말 눈을 감고라도 찾아갈 수 있는, 밥 먹듯 들르던 곳이다.

얼마 전에도 주언이를 보고 왔는데, 내가 정말 진짜 잊을 리가 없는데.

아랫입술에 피가 맺히고 눈알이 달아오를 정도로 생각을 거듭하던 나언의 머릿속에, 결국 가장 외면하고 있던 가정이 불쑥 끼어든다.

‘이름표가 비어 있었어….’

장기 입원을 한 환아의 이름표를 뗀다는 것은, 정말 기적처럼 아이가 건강을 되찾아 퇴원하는 경우거나, 혹은… 죽는 경우다. 주언이의 상태를 고려했을 때 무게가 실리는 것은 당연히 후자였다.

겨우 버티고 있던 나언의 얼굴에 왈칵 울음이 번졌다. 지반이 무너지듯 절망이 와르르 덮쳤다.

***

기원은 싸늘한 표정으로 휴대 전화 화면을 응시했다.

「설사, 구토는 잦아들었으나 제일 중요한 발열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간 수치가 이상 수치까지 높아졌습니다.」

「항암 실패 소견입니다.」

백주언의 상태에 관련한 문자 보고의 간격이 점점 짧아졌다. 결국 백주언은 중환자실로 옮겨져 집중 치료를 받기로 했다. 백주언의 상태에 대해 나언에게 말을 해야 하는데, 기원은 끝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기이한 망설임의 원인은 백나언의 상태였다.

어딜 보는 건지, 혹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희뿌연 눈으로 하루를 보내는 나언은 겉으로 보기엔 매우 고분고분했다. 오랜 시간이 걸려도 밥을 다 먹고, 어리석은 머리로 퍼즐과 하루 종일 씨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묘한 만족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매일 마주하는 말간 낯에 은은하게 감겨 있는 감정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 고분고분함은 순종이 아니라, 삭제였다. 나언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지워 내며 하루를 보냈다. 분명 옛날 백나언의 모습은 흐릿해졌는데, 이제 자신이 없으면 혼자 살아가는 법을 잊을 정도로 흩트려 놓았는데. 백나언이 그만두겠다고 말하면 홀연히 관계가 끝나 버릴 것 같은, 그런 허무함이 느껴졌다.

백나언을 보며 느꼈던 애욕, 분노, 희열, 불안을 넘어서 새로이 피부를 긁는 허무함이라는 감정은 기묘했다.

아침을 먹은 후 멍하게 한곳을 응시하던 말간 얼굴이 팔뚝을 끌어 올려 냄새를 맡고는 벌떡 일어나 손을 씻으러 뛰어간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삭제의 대상이 백주언인지, 아니면 최기원인지, 백나언 자신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나언의 공허한 낯은 최지원의 비서를 마주한 날 완전히 일그러졌고, 끝내 기원의 평정을 잃게 했다. 그런데 나언이 벌벌 떨면서도 꼭꼭 씹어뱉은 말은 의외였다. 전부 잊고 정리하고 있다고, 최지원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최기원, 당신이라고. 답지 않은 반항 끝에 가느다란 울음을 뱉으며 매달린 나언의 무게가 기원은 은근히 기뻤다.

최지원을 잊고 있다니. 당장 혀를 내어 빨고 싶을 만큼 달콤한 말이었지만, 기원은 섣불리 믿지 않았다. 듣기 좋은 말을 뱉는 와중에도 속을 알 길이 없는 텅 빈 검은 눈동자가 괜스레 사람을 더 조급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손목을 수놓았던 자해의 흔적을 본 순간, 외면했던 불신이 낯 뜨겁게 와닿으며 속이 차갑게 식었다. 제가 그어 놓고 본인이 더 놀라 허겁지겁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냥 괜찮다며, 갑갑해서 그런 거라는 소리를 지껄였다. 기원도 이성적으로는 충분히 알고 있다. 제 성격처럼 가엾고 볼품없이 긁어 놓은 얕은 상처로는 절대 죽을 리 없다는 걸. 그리고 백주언이 살아 있는 한 나언이 그런 선택을 할 리 없다는 것도.

「사장님, 통화 가능한 시각에 연락 부탁드립니다. 주치의가 백주언 환자의 상태에 대해 직접 설명하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백주언이 죽으면.

나언이 절대 동생을 혼자 놓고 죽을 리 없다는 확신은 되레 발목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항암 이후 백주언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졌고 이제는 ‘나쁘다’라는 말로도 설명하기 부족할 정도로 의사는 좋지 않은 소견만을 늘어놓았다.

항암 부작용이 어린 백주언의 장기 곳곳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기 시작했다. 주의 관찰하던 반나절 사이 신장 기능이 망가졌다. 이뇨제를 투입하고 투석 치료까지 동시에 진행하여야 하는데 백주언의 체력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건 다 알겠고. 그래서 백주언이 죽는다면. 그러면 백나언은?

지나치게 순진하고 유약했다. 겨우 작업실에 며칠 가둬 놨다고 정신을 놓고, 작은 소란에도 겁을 집어먹고 몸을 움츠렸다. 백나언이 1층 방을 쓴 이후, 단 하룻밤도 악몽을 꾸지 않은 날이 없다. 매분 매초 불특정한 환영을 보며 괴로워했고, 무서워했으며 백주언에게 끊임없이 미안해했다.

가슴팍을 들썩이며 밤새 울부짖은 나언이, 아침이 되면 특유의 좆같은 텅 빈 눈으로 괜찮은 척 굴었다. 제가 어제 밤새 괴성을 지르고 발작한 것도 모른 채 마주 앉아 아침을 먹으며 눈을 깜빡이는 꼴을 볼 때면, 백주언 상태에 대해 말하려다가도 목이 틀어 막힌 것처럼 말이 뱉어지지 않는다.

백주언은 수단일 뿐, 죽어도 좆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백나언을 온전히 소유하기 위해선 그를 모든 관계에서 고립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언이 망가져 자신에게만 온전히 의지하고 기대하길 바랐다. 하지만, 기원은 처음으로 제 비틀린 방식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숨통을 틀어쥐었고, 백나언은 원하는 대로 기껍게 스러지고 있는데도 불안이 가시질 않았다. 원망이든 분노든 증오든, 뭐든 나언에게 가한 감정만큼 답이 돌아오길 기대했으나 나언은 허무하리만큼 모든 것을 지워 버렸다.

백나언에게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애욕에 눈이 멀어 그저 껍데기라도 취하기 위해 지나치게 굴렸고. 쓸데없는 자존심과 반항심을 찍어 누르니 손아귀 안의 두부처럼 금세 바스러져 버렸다. 백나언의 잘못은 그저 최기원의 눈에 띈 것뿐이다.

“씨발, 좆같아서….”

욕지기가 치밀려 했다. 이건 그저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에 대한 낯선 거부감, 이라고 칭하는 것이 알맞겠다. 제 가정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밀려오는 오한과 열패감은 불쾌하고 역겨웠다.

항암 치료 부작용과 면역 치료로 유명한 교수진을 소개받았다. 고민 끝에 백주언을 근처의 대학 병원 중환자실로 옮겼다. 우선 백주언을 살리고, 지나치게 망가진 백나언을 조금만 되돌려 놓은 뒤 천천히 이야기해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오만은, 백나언이 병원에서 사라졌다는 급한 연락을 받는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

택시비를 내고 회영역 앞에 내렸다. 택시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불어닥쳤다. 낡고 오래된 역은 오가는 사람들이 적고, 문을 닫은 가게도 많아 다소 한산했다.

패딩을 굳게 여민 뒤 지하철과 연결된 상가로 절뚝이며 걸어갔다. 커다란 역사 안에는 옷 가게가 많았다. 나언은 남성복 매장에 들어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외투를 살폈다. 얇은 솜 패딩과 모자를 꺼내 주인에게 내밀었다.

“얼, 마예요?”

“현금이에요?”

“…네.”

“현금 영수증 안 하면 이건 내가 삼만 삼천 원으로 깎아 줄게요. 모자도 팔천 원만 줘요.”

어딘가 불편한 얼굴을 한 나언이 주머니에서 현금을 꺼냈다. 머리로 두 물건의 값을 더하는 불안한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고 손안의 지폐가 구겨졌다. 귓가가 조금 붉어진 채로 나언이 웅얼댔다.

“그, 그래서……. 얼마…….”

“이거랑 이렇게 주시면 되죠.”

주인은 나언을 흘긋 살핀 후 우르르 꺼낸 현금 뭉치에서 사만 천 원을 가져갔다. 나언은 계산이 맞는지 아닌지도 모른 채 종이봉투를 들고 매장을 나왔다.

역 화장실 대변기 칸에 들어가 기원이 사 준 회색 패딩을 벗고 새로 산 검정색 패딩을 입었다. 남은 현금과 시계, 전원을 끈 휴대 전화는 새 옷 주머니 깊숙이 넣고, 구매한 검은색 모자까지 눌러썼다. 그가 사 준 패딩은 봉투에 담아 쓰레기통에 구겨 넣었다. 나언은 거울에 언뜻 비친 비루한 모습을 애써 외면한 채 절뚝이며 걸었다.

지금쯤이면 자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동선을 꼬기 위해, 나언은 처음에 들어왔던 지하철 입구와 멀찍이 떨어진 출구를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몸을 가리기 좋은 버스 정류장 외벽에 기대어 서 있다, 몸통에 ‘시외버스 터미널’이라는 행선지가 적혀 있는 마을버스가 정차하자마자 훌쩍 올라탔다.

달리 염두에 둔 정처는 없었다. 그저 현금을 이용해서 서울에서 최대한 멀리 있는 지역까지 이동한 후, 전당포 혹은 중고 사이트에서 시계를 팔아 치우고 그 돈으로 쪽방, 운이 좋으면 달방이라도 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나언의 머리가 툭, 차창에 닿았다. 까만 눈동자는 버스 구석에 쌓인 먼지에 고정됐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마치 꿈속에서 아무리 빨리 달리고 싶어도 다리가 더디게 움직여지는 것처럼, 귀는 먹먹하고 피부에 맞닿는 공기가 이질적이었다. 머리로 수없이 세웠던 탈출 계획이기에, 또 이대로 최기원에게 붙잡히면 분명 죽을 만큼 망가질 것이기에 그저 발이 움직이는 대로 도망가고는 있지만. 나언은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작은 방이라도 형이랑 같이 있는 게 나아.

-형은 내가 귀찮은 거잖아!

-낮에도 형 계속 기다리는데, 이젠 밤까지 형 계속 기다리게 생겼어.

주언이가 저렇게 울며 애원하는 동안, 뭐라 대답했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래서 형이 데리러 갔는데, 집에 가고 싶다고 그래서, 얼른 간다고 갔는데.

‘너무 늦었나.’

그냥, 잠시 상태가 나빠져서 중환자실로 이동한 걸까. 하지만 그동안 가끔 중환자실로 이동했을 때에도 아이가 지내던 입원실을 그렇게 깔끔하게 비우진 않았다. 주언이는 다른 머물 곳이 없었고, 다시 병실로 돌아와야 했으니까.

‘우리 주언이. 정말 죽은 걸까.’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던 가정은 돌고 돌아 아이의 죽음을 결과로 띄웠다.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굵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한 번 물꼬가 터진 눈물은 잠잠해질 길이 없었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턱에 매달린 눈물이 발아래로 떨어졌다. 나언이 버스를 내릴 때, 여린 살이 파헤쳐진 손톱 옆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나언은 고개를 젖혀 모자챙 아래로 전광판을 바라봤다. 떠 있는 수많은 버스 시간표 중, 십 분 내외로 출발하는 버스를 추렸다. 남해에 가까운 지명에 마음이 끌려 무작정 표를 구매했고, 조그만 창구 사이로 지폐와 동전, 버스표가 튀어나왔다.

곧 출발하니 바로 승차장으로 이동하라는 안내원의 안내에 꾸벅 고개를 숙인 나언이 계단을 내려갔다. 싸구려 외투 사이로 겨울의 칼바람이 매섭게 파고들었으나 어쩐지 추위가 와닿지 않았다.

정원의 삼분의 일 정도만 찬 버스는 정시에 출발했다. 다섯 시간이 조금 안 되는 긴 여정. 나언의 속을 뒤엉키게 한 생각과 미련을 정리할 시간이라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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