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오퍼 (Reoffer) 2-7. Edge of the cliff (2) (8/28)

7. Edge of the cliff (2)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그저 춥고 또 추운 것만 느껴질 뿐이었다. 번지는 온기를 좇아 본능적으로 조금이라도 따뜻한 곳으로 몸을 웅크리고 파고들었다. 맞닿은 살갗이 따뜻해서 입가가 헤실거렸다. 방이 좁긴 해도 이렇게 주언이를 껴안고 잘 때면 모든 피로가 녹진하게 가라앉곤 했다. 이마를 비비적대며 몸을 더 깊게 붙였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했으며 코끝에 희미하게 와 닿는 향이 맑고 서늘했다.

차가운 손가락이 턱을 가볍게 간지럽혔다. 그제야 섬뜩한 느낌이 들어 눈을 퍼뜩 떴다. 동공이 어둠에 적응하기 전, 어두운 장막처럼 가라앉은 방에서 잠시 멍하게 상황을 더듬었다. 욕조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쓰러졌던 아득함, 물이 가득 찬 세면대에 처박히던 두려움, 최기원과 몸을 섞으며 울고 빌었던 서러움이 물밀 듯이 덮쳐 오며 기억이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주언이를 안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최기원에게 안겨 침대에 눕혀진 것 같기도 했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를 읽지 못하고 불안하게 뱉는 숨이 버겁게 흩어졌다.

“일어났어요?”

그런 나를 현실로 이끌어 주려는 듯,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자 침대 헤드에 기댄 채로 나를 내려다보는 최기원과 눈이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 더 깊게 가라앉은 회색 눈동자가 사르르 접혔다. 그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내리며 설핏 웃고 있었다. 나는 그의 품에 이마를 기댄 채 그의 허리를 팔로 껴안고 있었다.

“……아.”

놀라 팔을 떼어 내며 몸을 일으키자 최기원은 ‘왜 계속 그러고 있지.’ 하며 코를 찡긋했다. 어깨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얇은 가운을 끌어 올리며 몸을 물리는데, 별안간 시선 끝에 까만 인영이 걸렸다. 열이 올라 헛것이 보이나 싶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희뿌연 초점이 점점 명확해지는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저, 사람이 왜…?”

다 쉬어 빠진 목소리가 힘없이 갈라졌다. 방문 앞에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는 사람은 경호원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최기원을 쳐다보자 그는 여전히 샐쭉 웃으며 내 코를 톡톡 건드려 댔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뻐근한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얼른 풀어 헤쳐진 가운을 여몄다. 몸을 숨겨 봤자 도망갈 곳 없는 침대 위였기에,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최기원의 어깨 뒤로 슬금슬금 몸을 물렸다. 최기원은 내가 그의 뒤에 숨은 것도 모르는지, 두툼한 이불을 걷어 내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하다 하다, 최기원을 붙잡고 싶은 것은 처음이었다.

“왜 여기 불려 왔는지는 쟤가 알아야지.”

그의 나른한 목소리가 조용한 방에 스며들 듯 울렸다. 그는 슬리퍼를 찌익, 찌익 끌며 경호원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티셔츠에 꽉 맞는 어깨와 길게 뻗은 탄탄한 다리가, 언뜻 비쳐 드는 달빛에 희미하게 반사되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불을 꾹 쥐었다. 긴장한 탓에 등에서 식은땀이 솟고 가슴이 콩닥댔다. 경호원이 한 짓을 최기원이 알게 된 것일까? 그렇다고 치기엔 최기원이 지나치게 여유로워 보인다. 그는 경호원에게 느릿하게 걸어가는 대신 나부터 흠씬 두들겨 팼을 것이다.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굴렸다. 분위기를 읽으려 애썼으나 혼란만 가중됐다. 머리나 눈알이 굴러가는 소리가 난다면 공허한 방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을 것이다.

최기원의 발걸음 소리가 우뚝 멈추고, 그는 경호원을 마주 본 채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섰다. 그간 경호원의 키도 까마득하게 크다고 생각했었다. 아마 180대 후반은 되지 않을까 했는데 그 앞에 서 있는 최기원은 그보다 오 센티는 더 커 보였다. 덩치 큰 두 사람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문 앞이 꽉 차 보였다.

검은색 반팔 티셔츠에 회색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은 편안한 차림의 최기원 앞에 단정하게 주름이 선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이 서 있었다. 경호원은 내가 멍하게 앉아 있는 침대 쪽으론 지독할 정도로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창문을 향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서 있었다.

최기원이 손을 들어 눈썹 뼈를 살짝 긁으며 입을 열었다.

“나언이가 다쳤던데.”

‘나언이’라는 명칭에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동시에 경호원의 한쪽 눈꼬리도 미세하게 떨렸다.

“팔뚝에 빨갛게 멍이 들었어. 네가 그랬다는데, 진짜야?”

“죄송합니다.”

나를 고자질쟁이처럼 만드는 최기원의 화법에 울컥했으나, 경호원은 줄곧 단단한 표정을 유지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깔끔한 인정이었다.

뻐억.

그리고…, 정말 수박이 박살 나는 것 같은 엄청난 타격음과 함께 경호원의 몸이 휘청 고꾸라졌다. 나는 힉 소리를 내며 입을 틀어막았다. 사정없이 경호원의 뺨을 후려친 최기원이 다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가까스로 바닥으로 엎어지지 않은 경호원은 잘게 고개를 흔들고 겨우 제자리에 다시 섰다. 고개를 기울인 최기원은 경호원의 얼굴을 비딱하게 바라봤다.

“밥 먹이라고 했지 흔적 남기라고 한 적은 없는데.”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뻑, 소리와 함께 경호원이 휘청댔다. 이번에는 정말 바닥으로 넘어질 뻔했으나 그는 겨우 벽을 붙잡고 섰다. 경호원의 입가가 터져 붉은 피가 흘렀다. 최기원도 때린 손이 아픈지 옅게 인상을 쓰며 손목을 한 번 털었다. 쯧, 하고 내뱉는 소리가 섬뜩할 만큼 가벼웠다.

“쟤가 얼마나 겁이 많은데.”

“죄소-,”

뻑.

다시 한번 경호원의 고개가 돌아간 순간,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물론 경호원이 나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피가 터지고 몸이 고꾸라지는 모든 순간을 냉정하게 무시하고 싶었으나, 지금 최기원이 휘두르는 폭력은 나에게 또 다른 압박으로 다가왔다.

경호원이 맞을 때마다 경호원에게 내 모습을 투영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표정을 짓고 저런 모습으로 나를 보며 손을 올렸겠구나. 타인을 향한 타격음과 핏자국이 내가 맞았던 순간의 기억을 잔인하게 상기시켰다.

이쯤이면 됐으니 그만했으면 좋겠다. 나는 최기원에게로 절뚝대며 더딘 걸음을 옮겼다. 애써 후들대는 다리에 힘을 주고, 지독한 현기증에 휘청대며 겨우 그의 곁에 다다르자, 경호원에게 고정되어 있던 그의 시선이 나에게로 흘긋 돌아왔다. 코와 입가에서 터진 피를 닦던 경호원도 나를 발견하자마자 꾸벅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피에 절여져 뭉개진 발음이 발치에 흩어졌다. 어쩐지 그 모습을 마주하지 못하겠어서 눈을 피해 버렸다. 땅으로 고개를 떨군 순간, 돌연 최기원은 내 뒷덜미를 낚아채 끌어 올렸다. 경호원의 앞에 디밀듯 나를 끌어다 놓은 그는,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이럴 땐 사과받는 거예요.”

“아, 으….”

최기원이 경호원을 향해 턱을 까닥이고, 그는 다시 나에게 허리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다. 뒷목으로 내려온 최기원의 서늘한 손이 드러난 맨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는 경호원을 겨우 바라보며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네.”

“나가 봐.”

씩 미소를 지으며 뱉어 낸 최기원의 축객령에 경호원이 방을 떠났다. 다시 문이 닫히고, 최기원은 나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귀를 가볍게 깨물었다.

그냥 경고만 주고 끝낼 줄 알았다. 겨우 팔뚝에 쓸린 멍이 하나 남은 것 가지고 이렇게까지 날뛰기엔, 그는 나를 너무나 자비 없이 때렸었다. 게다가 여태껏 경호원은 내가 최기원에게 맞아 상처 입었던 모습을 전부 봐 왔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있었던 모두가 잘 알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최기원이 경호원을 죽어라 패는 건 자신만이 나를 마음껏 때릴 수 있다고 돌려 말하는 것이었다. 경호원이 겨우 팔뚝에 손아귀 자국 낸 것 하나로 피 터지게 맞으면 맞을수록, 자존감이 깎여 나가고 점점 초라해지는 것은 정작 나였다.

어둑한 생각이 이어질수록 차츰 기분이 죽기 시작한 나를, 최기원이 가볍게 끌어당겼다. 최기원은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나를 다리 사이에 앉혔다. 내 등이 최기원의 가슴팍에 기대어지고, 그는 내 어깨에 턱을 올리고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았다. 연인처럼 뒤엉킨 자세가 꽤나 흡족한 모양인지, 맞닿은 등 뒤에서 최기원의 가슴이 옅게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혼냈는데 왜 풀이 죽었어요. 그새 쟤랑 정이라도 들었나?”

“아니에요….”

목소리에 장난기가 다분히 묻어 있었지만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떠듬떠듬 용기를 내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그 경호원… 싫어요.”

“둘이 있어서 하는 말이지만, 네가 얌전하게 밥 먹었으면 될 일 같은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기원은 그 경호원의 속내를 모른다. 물론 최기원이 알기를 바라는 건 추호도 아니지만, 내가 밥을 안 먹은 탓만 하기엔 내심 억울하고 서러운 면이 있었다.

최기원은 눈썹이 처진 내 표정을 확인하더니, 내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으며 귓바퀴에 잘게 뽀뽀했다. 간지러워서 어깨를 미약하게 옹송그리자 그가 슬며시 웃으며 손가락으로 가슴께도 살짝씩 건드렸다. 하도 빨려 빨갛게 부르튼 젖꼭지가 비틀릴 때마다 따끔거렸다.

“그리고 이 몸이 유독 자국이 잘 남아요.”

하얗고 말랑하고 따뜻해. 그는 내 살을 찰흙처럼 꾹꾹 누르며 장난스레 속삭였다. 손자국 하나로 사람을 그렇게 패 놓고, 이제 와 그를 은근히 두둔하는 것이 잘 이해 가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모호하고 변덕스럽게 굴 때마다 조금씩 지치는 기분이 들었다.

“다음 주부턴 다시 수업 들으러 가요.”

“…네.”

“어디로 새는지 다 아니까 애쓰지 말고.”

고개를 끄덕이자 최기원이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숨을 들이켰다. 꾸욱, 꾹. 느리고 집요하게 입술로 도장을 찍는 입맞춤을 내릴 때마다 쪽, 쪽 하는 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적막하고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눈치를 살피던 내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혹시…. 그 경호원이 학교 데려다줘요?”

“이상하다. 걔를 왜 그렇게 신경 쓸까.”

한숨이 섞인 목소리에 몸이 바짝 굳었다. 옅은 의문이라도 깃들까 싶어 겁을 먹은 난 입을 꾹 다물고 숨을 죽였다. 다행히 별 뜻 없는 말인 듯, 최기원은 목뒤에 따뜻한 입술을 대고 웅얼대듯 말했다. 그의 입술이 목소리를 따라 아물댔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물건이다, 생각해요.”

“예…?”

“여기저기 널리고 널린 물건에 대고 좋다, 싫다는 생각 안 하잖아요.”

“……그게 무슨 말….”

“나 하나만 싫어하라고, 질투 나니까.”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이상할 만큼 다정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분노가 그득한 눈으로 내 머리를 수면 깊이 떠밀었던 사람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가 말하는 ‘연애’라는 걸 흉내 내는 시간인가 보다. 등 뒤에서 파고든 팔에 힘이 들어갔다. 갈비뼈가 짓눌리며 다소 버거운 무게가 실려 왔다. 귀뺨에는 따뜻한 입술과 고른 숨소리가 내렸다.

나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최기원은 까득 이를 세워 목덜미에 기어코 잇자국을 냈다. 아픔은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참았다. 어느새 잔뜩 솟아난 식은땀에 습해진 몸이 최기원에게 더욱 끈끈하게 달라붙는 것 같았다. 행여 냄새가 나진 않으려나…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을 모르는 최기원은 나를 끌어안은 채로 침대로 풀썩 몸을 쓰러뜨렸다. 최기원은 가운 사이로 드러난 살을 빨아들이고 만지작대는 것에 눈을 반짝이며 집중했다.

그렇게 몸을 겹쳐 누운 지도 한참 시간이 흘렀다. 나를 정신없이 만져 대던 기다란 손가락도 움직임을 멈추고, 꽉 조이던 팔에도 견딜 만한 무게만 남았다. 깊은 밤이 저물어 가며 은근한 새벽빛이 커튼 아래로 번져 오기 시작했다. 발갛게 충혈된 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는, 귓가를 간지럽히는 고른 숨소리에 대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나보다 그가 먼저 잠이 든 건 처음이었다. 그의 포근한 잠이 나에게도 전염되길 간절히 바랐으나 결국 동이 터 올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잠에 빠지지 못하자 많은 생각이 산발적으로 머리를 어지럽혔다. 특별한 원인이 없는 우울과 절망, 슬픔과 분노가 매분 매초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왜 가슴이 답답한지 곱씹었으나 결국 이유를 찾지 못했다. 자연스레 여과된 감정의 찌꺼기는 지독한 외로움과 허무함이 되어 켜켜이 쌓여 갔다.

이 집에서 제일 이해하기 힘든 것. 2층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2층에 자리 잡은 객식구를 데면데면하게 대하지 않으며, 밤사이 사장에게 불려 가 얻어터진 경호원은 다음 날 오전, 밴드만 붙인 채 정원 앞에 서서 제 업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어제 최기원이 2층에서 잠이 들었기에 아침 식사까지 자연스레 함께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죽을 퍼 먹는 나를 극한의 인내심으로 기다린 최기원은 약을 먹으러 올라가는 나를 불렀다. 복도의 초입에 엉거주춤 멈춰 선 내 등 뒤에 대고 그가 살짝 웃으며 말을 붙였다.

“토하러 가요?”

“……아니요. 약 먹으려고….”

울렁거리는 속을 무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최기원은 짝다리를 짚고 서서 나를 멀거니 바라보다 손가락으로 제 목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토하면 목걸이 다시 할 거예요.”

“아….”

그럴 리가 없는데, 최기원의 말에 불현듯 목이 따끔했다. 미약하게 숨이 흐트러지며 손바닥에 땀이 솟았다. 아직 빨간 화상 자국이 남은 목을 한 번 쓰다듬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셔터 소리와 함께 사진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최기원이 목걸이를 채우는 모습과 그걸 매단 채로 화장실에서 몸을 섞던 순간이 눈앞을 흐리게 했다.

“하아… 흐욱.”

가슴이 조여들고 숨이 뒤엉켜 손으로 가슴께를 툭툭 두드리며 걸음을 옮겼다. 최기원은 하얗게 질린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거실 소파를 향해 걸었다. 비틀대며 방에 도착한 나는 여느 때처럼 약을 뜯어 파우치에 숨겼고, 변기를 보자마자 입술을 꾹 깨물었다.

‘토도 내 마음대로 못 해…?’

먹지 않으면 계속 몸이 축나니, 최기원은 나를 생각해서 한 말이겠지만 변기의 구멍을 바라보고만 있자니 울컥하며 코끝이 찡해졌다. 음식을 제대로 소화할 분위기라도 만들어 주든가, 그게 아니면 못 먹어 내는 것으로 사람을 괴롭히질 말든가. 겨우 붙은 손톱 끝 딱지에서 다시 피가 터졌다. 그 알싸한 통증에 그제야 소모적인 생각을 그쳤다.

축축해진 눈을 손등으로 비비적댄 나는 얼른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또 꾸물거렸다간 토하고 온 게 아니냐는 트집을 잡을 것이 뻔했다. 벌써 그가 나를 앉혀 두고 나직하게 시비를 거는 모습이 떠올랐다. 최기원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다가도, 회색의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무언가를 읊조려 댈 때면, 그게 무엇인진 정확히 몰라도 어찌 되었든 전부 내 잘못이라고 대답하고 싶어졌다. 그런 무언의 힘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정원은 겨울의 햇빛을 고스란히 끌어당겼고, 여유로운 주말 오전에는 아침 식사 식기를 정리하는 소리만 미미하게 들려왔다. 커피를 한 잔 타서 소파에 앉은 최기원은 카탈로그를 살펴봤고 나는 그 곁에 앉아 토끼 모양으로 잘린 사과가 꽂힌 포크를 들고 있었다.

‘귀엽네.’

주언이 보여 주면 좋아하겠다. 형이 깎았냐고 눈을 크게 뜨는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입가가 느른하게 풀어졌다. 손을 들어 토끼 엉덩이 부분을 조금 베어 물었다. 입 안에서 서걱대며 사과가 부서질 때마다 달큼한 과즙이 퍼졌다.

겨울임에도 얼굴까지 노랗게 침범한 햇살이 뜨거웠다. 뺨이 발갛게 익은 것이,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지속되는 미열 때문인지, 햇살에 달구어진 공기 탓인지 모르겠다. 그늘 쪽으로 엉덩이를 옮길 힘이 없어 사과를 씹으며 멍하게 앉아 있었다.

“……언.”

“…….”

“뭐야, 조는 건가?”

밤을 지새운 탓일까. 꾸벅, 꾸벅 고개를 떨어뜨리던 나는 최기원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분명 사과를 먹고 있었는데, 언제 졸았는지 모르겠다. 행여 무시처럼 느껴질세라 충혈된 눈으로 흘긋 최기원의 눈치를 살핀 난, 얼른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중얼거렸다.

“따분해요? 놀러 갈까?”

아니요, 아니요. 죽어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최기원이 쓰고 있던 안경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휴대 전화를 들었다. 잠깐의 통화를 끝낸 최기원은 나에게 얼른 씻고 내려오라고 말했다. 그의 무감한 낯에 미미한 들뜸이 묻어 있었다.

두툼한 니트와 바지를 입고, 코트를 걸치고 계단을 내려왔다. 조금 뒤 최기원이 제 방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그는 현관 앞에 서 있는 나를 훑어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검은색 목도리를 둘러 주었다. 지나치게 길고 두꺼운 목도리가 눈 아래를 모두 가리며 둘둘 감겼다. 목도리에서 그가 평소에 뿌리던 향수 냄새가 묵직하게 퍼졌다.

최기원의 차가 도착한 곳은 작은 갤러리였다. 최기원을 따라 입장하자, 어떻게 보면 단출하다고 볼 수 있는 회색 건물 안에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주말임에도 오가는 사람이 많이 없는 한산한 공간 곳곳에는 이번 전시와 관련이 있어 보이는 무채색으로 칠해진 크고 작은 조형물이 모빌처럼 매달려 있었다.

반투명한 모빌에 햇볕이 파고들어 전시장 벽에 회색 그림자가 산란하였다. 이곳저곳을 수놓은 그림자 무늬에 시선을 빼앗겨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고 최기원이 건조한 웃음을 터뜨렸다.

“애 같긴.”

집에만 너무 오래 있다 보니, 이런 풍경이 낯설고 신기해서 그런 것뿐인데, 절대 예쁘게 말하는 법이 없었다. 최기원은 전시관 입구에 놓인 팸플릿을 두 장 뽑아 나에게 하나를 건넸다. 먹색의 종이 끝, 김을정 작가의 Depth전이라는 글귀가 하얀색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막상 들어선 전시실 내부는 꽤나 넓고 웅장했다.

손바닥만 한 캔버스도 있고, 내 키를 훌쩍 뛰어넘고 벽을 가득 채운 캔버스도 있었다. 색은 모두 비슷했다. 언뜻 보면 검정 같은,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갈색과 먹색 같기도 한 오묘한 색이 캔버스를 켜켜이 채우고 있었다.

차라리 세밀한 묘사를 하거나, 환상적인 풍경을 담은 그림이라면 집중해서 보겠으나, 그저 비슷한 색이 덕지덕지 발려 있는 것에 도통 무슨 의미가 숨어 있는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

흘긋 최기원을 바라보자, 그는 캔버스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내리고 나도 그를 따라 작품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먹색 캔버스 위로 방금 보았던 최기원의 옆모습이 어른어른 떠올랐다.

오늘은 머리를 올리지 않아, 적당히 긴 앞머리 아래로 뻗어진 날렵한 콧대가 돋보였다. 그 밑으로는 옅은 분홍색의 도톰한 입술이 다물려 있었다. 조용한 갤러리에서 유유하게 작품을 감상하는 그는 또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저 담담하고 맑은 얼굴 아래 비틀린 집착과 음욕, 끔찍한 폭력성이 있다곤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먹색 하나에 푹 빠져 순수한 눈으로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는 그는 아무 때도 묻지 않은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옆에서 그의 구두 굽 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졌다. 그때에 맞춰 무의미하게 걸음을 따라 옮겼다. 영 집중이 되질 않았다.

어느덧 작은 갤러리의 마지막에 달했다. 이것저것 물어 대며 꼽을 주거나, 도슨트처럼 무언가를 설명해 줄 줄 알았는데 낯설게도 그는 아무런 말을 건네지 않았다. 먼저 전시장 바깥으로 걸어 나가는 최기원의 등을 바라보며 조용히 걸음을 옮기려는데, 누군가 최기원에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것이 보였다.

“어, 최기원 사장님. 이곳에서 뵙네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최기원에게 인사하자 최기원이 그의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무엇이 그리 반가운지 눈을 크게 뜨고 웃고 있는 노인에게 최기원도 나직하게 웃으며 대답을 늘어놓았다. 최기원의 곁을 향해 걸어가던 보폭이 점차 느려졌다. 최기원의 긴 그림자가 비친 바닥을 디디던 발이 결국 우뚝 멈추어 섰다.

누가 그러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왠지 최기원의 일행인 것이 알려지면 그가 곤란해질 것 같았다. 저 노인이 최기원의 뒤에 서 있는 나를 알아보기 전에 나는 얼른 뒤돌았다. 이미 걸어가며 살펴본 작품 앞에 당황한 채로 멈춰 섰다. 긴장에 가슴이 바짝 조여 오고 귀 끝이 달아올랐다.

“언제 한번 자리를 만들어야 할 텐데요. 최기원 사장님이 워낙 바쁘시니….”

“아닙니다. 날을 한번 조율해 보죠.”

예의 바른 미소로 노인을 대하는 최기원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여전히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캔버스 앞에 우두커니 섰다. 점차 눈에 빛이 사라지고 입꼬리가 미세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동안 최기원을 참 많이 욕했었다. 죽은 형의 애인에게 애욕을 느끼는 야만인이라고. 그런 그의 제안에 다리를 벌린 나나, 그런 제안을 건넨 최기원이나 모두 똑같이 정신 나간 인간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몰랐나 보다. 철옹성 같은 단독 주택 안에서 밤낮없이 침대에 뒤엉킨 최기원과 나는 모두 냄새나는 쓰레기일지 몰라도, 바깥으로 한 발만 내디디면 최기원과 나에게 갑자기 영겁의 격차가 벌어졌다. 바로 지금처럼.

그와 나는 겨우 세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으나 마치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것처럼 나는 절대 그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나의 일상은 이미 파도가 쓸고 지나간 모래성이 되어 잔흔만 남은 채로 녹아 버렸는데, 억울하게도 최기원의 세계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굴러갔다. 윤활유를 바른 기계처럼 규칙적으로 살뜰하게. 최기원은 여전히 건재했고 그 주변에는 돈도 사람도 많았다.

난 오늘 목을 뒤덮은 손톱자국과 화상 자국을 가리기 위해 니트 안에 목 티를 입어야 했다. 밥도 제대로 못 먹었고 씻는 것조차 한 번에 하지 못할 만큼 체력이 바닥났다. 내가 쓰레기라고 욕하는 최기원의 손길이 아니면 동생은 물론, 나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똑같이 더러운 짓을 하며 밤을 지새웠는데…. 작품을 보며 고고하게 머리를 세운 것은 최기원이고 사람들 앞에서 모습을 구겨야 하는 건 나였다.

현실을 직시함과 동시에 몸 어딘가에서 썩은 내가 나는 것 같아, 최기원의 목도리를 코끝까지 다시 끌어 올렸다. 사람만 없으면 목이라도 세게 조르고 싶었다.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이 전시의 마지막 작품이 걸려 있었다.

하얀색의 커다란 캔버스를 먹색의 선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선은 손가락 하나 두께였다. 캔버스의 크기에 비하면 아주 얇은 편인 선은 마치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일정한 두께로 캔버스를 양분했다. 홀린 듯 작품 설명으로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선>

/ 김을정 작가는 어린 아들의 발인 이후 작업실에 틀어박혀 이 작품을 완성했다. 그의 깊은 슬픔과 절망, 괴로움이 단 하나의 절제된 선에 고립되어 있다. 얇고 섬세한 선 안에서 응축된 감정은 두텁고 진하다. /」

다시 한번 선을 바라보았다. 아들을 먼저 보낸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선을 그렸을까. 지나치게 어둡지도, 그렇다고 밝지도 않은 먹색의 선은 균일한 두께와 일정한 색감으로 차분하게 캔버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속이 뜨겁게 아파질수록 까만 눈동자가 담담하게 굳었다. 터뜨리지 못하는 슬픔은 깊고 첨예한 선이 되어 가슴에 죽죽 그어졌다. 저 작품에서 길게 이어져 나온 선과 내 가슴에 그어진 선, 그리고 최기원과 나 사이에 그어진 선이 어지럽게 맞닿았다. 너무나 깊은 감정이 응축되어 절대 넘을 수 없는 여러 갈래의 선이 최기원과 나 사이에 그어졌다.

소리 없이 차오른 눈물에 작품이 뿌옇게 흐려졌다. 울고 싶지 않아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젖혀 가빠진 숨을 참았다. 그러던 중 설상가상으로 최기원과 노인의 대화가 언뜻언뜻 들려왔다. 노인은 최기원을 향해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질문을 던졌다.

“최 사장님은 혼자 오셨습니까?”

쥐고 있던 팸플릿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난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구겨 넣고 주먹을 꼭 쥐었다. 그걸로도 성에 차지 않아 피딱지가 앉은 엄지를 검지로 마구 긁었다. 최기원이 나를 당연히 부정하길 바라면서도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존재 자체를 지울 수 있다면, 귀도 눈처럼 열고 닫을 수 있다면 모두 까만 물속으로 가라앉히고 싶었다. 스스로 당당하지 못해 제 발목을 옭아매고 있으면서도, 부정당하기 무서워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내가 부끄럽고 우스웠다.

“아니요. 일행이,”

그런데 최기원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들렸다. 그 순간 나는 그에게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내가 속이 타들어 가도록 고민한 문제에 가볍게 웃음까지 섞으며 대답한 최기원은 당연하다는 듯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나와, 최기원의 회색 눈이 마주쳤다.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버리고, 그대로 등을 보이고 조용한 전시실을 거슬러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다소 난처한 목소리로 노인과 급하게 인사하는 것이 들렸다.

“인사는 다음에 해야겠어요. 먼저 들어가세요, 박 전무님.”

“그래요, 다음에 자리 한번 만듭시다, 꼭.”

구두 굽 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최기원이 나에게로 걸어온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삐, 하는 이명 소리가 귀를 가득 채운 것 같은 순간, 최기원이 내 팔을 붙잡아 나를 돌려세웠다.

“왜 그래요?”

“…….”

“왜 또 우냐고.”

“아….”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잠시 망설이던 나는 손끝으로 멀리 떨어진 마지막 캔버스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거…. 아들이 죽고 나서 그린 그림이래요.”

목소리 끝에 서러움이 잔뜩 묻어 제멋대로 떨렸다. 동시에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울음이 터졌다. 그의 목도리에 눈물과 콧물이 잔뜩 엉겨 붙었다. 주룩주룩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는 나를 그가 무감하게 내려다봤다.

멀리 떨어진 작품을 한 번, 서럽게 우는 나를 번갈아 보던 최기원이 한쪽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씨발. 이해를 못 하겠네, 도통.”

그 대답에 이상하게도 웃음이 터졌다. 손등으로 눈물을 걷어 내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참으로 멍청이 같았다.

최기원은 내가 서럽게 울었던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의 차가 갤러리를 빠져나와 교외로 드라이브를 하는 동안 눈물은 모두 그쳤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한적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수프를 떠먹는 것이 전부였으나 최기원은 별말 하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와선 조금 자라난 머리도 다듬었다. 여느 연인들과 같은 데이트 코스를 준비한 최기원은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졸고 있던 나를 깨웠다.

“도착했어요.”

“…….”

어깨를 두드리는 느낌에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따라 최기원의 곁에서 졸음을 참지 못한 나는 부은 눈을 비볐다. 어느덧 제법 익숙한 차고 주차장이었다. 잠이 덜 깬 채로 몸을 일으키던 중 무언가에 걸려 휘청이자 최기원이 무감한 낯으로 안전벨트를 풀어 주었다.

“방에 가 있어요, 올라갈 테니까.”

신발을 벗는 나에게 최기원이 선고와 같은 말을 던지고 먼저 복도를 걸어갔다. 등에 대고 작게 대답을 남긴 난 2층을 향해 힘없는 걸음을 옮겼다.

어둑한 방의 불을 켜며 코트를 허물처럼 벗었다. 그대로 침대에 누우려던 난, 소파 뒤쪽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액자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

너무나 크기가 커서, 마치 벽 한쪽을 반으로 가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먹색의 선. 이 캔버스는 분명 반나절 전에 보았던 김을정 작가의 <선> 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금빛 우드 프레임 액자 앞에 섰다.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 작품이 방에 걸려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아 손을 뻗어 액자 유리를 더듬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최기원이 들어왔다. 퍼뜩 유리에서 손을 떼어 냈다.

“이거….”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서.”

급하게 씻고 온 걸까. 채 말리지 못한 물기가 검은 머리카락 끝에 맺혀 있었다. 난 다시 작품으로 고개를 돌려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캔버스를 올려다보았다.

많은 작품 중에 유독 이것에 이끌렸던 것은 맞았다. 그렇다고 한들 이걸 그대로 방에 가져다 놓을 줄은 몰랐다. 쥐를 물어다 준 길고양이 같은 오만한 표정을 한 최기원을 향해 가볍게 감사 인사를 남겼다.

“감사합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울지 말고 말을 해요. 웬만하면 다 쥐여 줄 수 있으니까.”

농담 아닌 농담에 씩 웃고 말았다. 가로로 길게 그어진 선 앞에 나란히 서 있는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이렇게 최악으로 엮여 버린 우리가 부끄럽지 않냐고. 그러나 최기원은 대답 대신 내 니트를 끌어당기며 입을 맞추었다.

절대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바라보았던 선 앞에서 그는 내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난 갤러리에서의 기억을 지우려는 듯 그가 휘두르는 대로 얌전히 휘둘렸다. 그의 이기적인 다정함 앞에서 내 선이 점점 흐려지는 것 같다.

***

보통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요 며칠 집에서 조용하게 시간을 죽이던 난, 저녁으로 죽을 먹고 위가 따끔거려 한참을 끙끙 앓았다. 그게 복선이었던 것처럼 다음 날 오전 수업 일정을 알리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수업에 가기 싫어 뭉그적대며 준비하던 나는 결국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집에서 나오게 되었다. 덜 마른 앞머리를 급하게 털었고, 외투는 팔에 끼운 채로 정원을 빠르게 뛰었다. 겨우 열 걸음을 뛰었나, 그것만으로도 폐가 찢어질 것처럼 아파 숨을 가쁘게 쉬며 대문을 건넜다.

“안녕하십니까.”

“…….”

광대에는 연하게 멍 자국이 남고, 입술에 피딱지가 앉은 경호원이 나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은색 세단의 문을 열어 주는 경호원의 눈을 피하며 차에 올라탔다. 문을 닫아 주고 다시 운전석으로 걸어가는 경호원의 낯은 평소와 같았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상처에 시선이 머물렀다. 보통 상사에게 저렇게 맞으면 그만두지 않나, 싶었으나 경호원은 아무런 말 없이 시동을 걸었다. 차는 저택을 매끄럽게 빠져나왔다.

차가 서울의 도로를 내질렀다. 최기원만큼 난폭한 운전은 아니지만, 속도가 느리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수업 시간에 빠듯하게 나온 탓인 듯했다. 뒤로 쌩쌩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멍하게 앉아 있는데, 앞 좌석에서 불현듯 말을 걸어왔다.

“사장님께 맞았던 거, 이제 괜찮습니다.”

미간을 옅게 찌푸리며 룸 미러를 바라보자, 경호원도 룸 미러를 통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통으로 눈이 마주쳐 멋쩍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꿋꿋하게 할 말을 이어 갔다.

“며칠은 입술 때문에 밥을 잘 못 먹었어요. 이젠 꽤 아물었습니다.”

“…다행이네요.”

어쩌라고 하고 싶었지만, 비슷한 상처에 몇 배는 더 고생했던 때가 떠올라 얼버무리며 대답을 해 주었다. 성의 없는 대꾸에 묘한 미소를 보인 그가 핸들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저렇게 빨리 괜찮아질 줄 알았다면 그날 최기원을 말리지 말 걸 그랬다.

“그때 말려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그냥 보고만 계셨으면 전부 말하려고 했거든요.”

동시에, 속을 읽은 듯한 차가운 대꾸가 떨어졌다. ‘전부 말하려고 했다’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몸에 힘이 콱 들어갔다. 좌석을 꾹 쥐는 순간 손바닥 아래에서 시트 가죽이 밀려 빠득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를 향해 이를 갈았다.

“…뭘 말한다는 거예요.”

“그냥, 약 먹고 후배 손에 싼 거랑. 지난 오후에 손으로 제 거 만져 주신 거랑. 뭐 나름 여러 가지 비밀이 있지 않았습니까, 저희 둘 사이에.”

“제가 언제…, 개소리 하지 마요.”

순식간에 얼굴이 일그러지고, 언성이 높아졌다. 완전히 미친놈이었다.

끼이익--.

내가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차가 급하게 멈춰 섰다. 뒤에서 달려오던 차들이 클랙슨을 울리며 우리가 탄 차를 위태롭게 비켜 갔다. 차창 옆으로 빠앙, 하는 굉음이 번져 가고, 깜짝 놀라 몸이 얼어붙은 나는 맥없이 휘청대며 앞 좌석을 붙잡았다.

“뭐 하는 짓이에요, 이게…!”

“저 이번 달까지 일하는 거로 정리 해고 됐습니다.”

여전히 브레이크를 밟은 차는 왕복 4차선의 자동차 전용 도로 한복판에 멈춰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여전히 그는 룸 미러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핸들을 꽉 붙잡고 있는 그의 손에는 푸른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사장님께 불려 갈 정도로 지적을 받았으니, 가벼운 징계 정도는 각오했습니다.”

“…….”

“그런데 권고사직이라뇨. 저는 사장님께서 백나언 씨를 괴롭힌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딴에는 도움도 드리고 싶었고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

제법 덤덤한 어조였으나 핸들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은 눈에 띌 만큼 떨리고 있었다. 경호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VIP 경호 업계가 좁아서요. 일자리가 구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최기원이 그를 해고했다니, 전혀 몰랐던 일이다. 분명 최기원은 그날 새벽 경호원이 싫다고 내뱉은 나의 미약한 어필을 가볍게 무시하며, 그를 은근하게 두둔하기까지 했었다.

-이상하다. 걔를 왜 그렇게 신경 쓸까.

-나 하나만 싫어하라고, 질투 나니까.

문득 그가 투정 부리듯 뱉어 냈던 말들이 떠올랐다. 저 빌어먹을 경호원이 망해 버리기를 간절히 원한 것은 맞았으나, 그가 이런 식으로 정리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설마 정말 저 단순한 이유로 경호원을 자른 것인가…. 생각이 꼬리를 물며 나 또한 초조해졌다. 룸 미러 너머로 당황한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경호원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물어 왔다.

“서로 불리한 일 전부 함구하기로 해 놓고. 유치하게 뒤에서 이렇게 굴면 어떡합니까.”

“그게 지금…, 그런, 아니, 제 탓이 아, 아니잖아요.”

말이 마구잡이로 꼬였다. 고개를 돌려 뒤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오는 차를 바라보다 다시 룸 미러로 그를 응시했다. 경호원은 얼을 탄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비웃음이 섞인 묘한 한숨을 뱉었다.

“백나언 씨에게는 하룻밤의 복수일지 몰라도, 조금 억울해서요.”

제 손톱을 내려다보며 그가 조롱하듯 말을 씹어뱉는다.

“이왕 좆 된 거. 그냥 터뜨릴까, 말까.”

“…!!!”

이성을 잃은 내가 주먹을 쥐고 앞 좌석을 내려쳤다. 퍽 하는 소리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그가 룸 미러에서 시선을 떼어 내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가 엑셀을 밟는 순간 등받이에 몸이 쏠리듯 부딪히고 차의 속도가 허공을 향해 돌진하듯 치올랐다. 엔진 소리가 엉덩이 아래에서부터 짐승처럼 울렸다.

포악한 운전으로 목적지에 도달한 세단은 인문 대학동 코앞에서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정차했다. 그가 차를 세우자마자 뒷자리에서 뛰어내렸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 귓속까지 웅웅 울렸다. 경호원과 단둘이 있던 차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땅을 밟았다는 안도감에 순식간에 헛구역질이 치솟았다.

“우욱….”

숨통이 짓이겨질 것 같은 날 선 분위기 속에서 나는 수만 가지의 걱정에 시달렸다. 이대로 차를 처박아 버리진 않겠지. 만약 내가 수업을 듣는 동안 경호원이 최기원에게 제 유리한 대로 상황을 왜곡해 전달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가 또 나에게 어떤 벌을 내릴 것인가. 더군다나 주언이의 항암이 얼마 안 남았기에 더 이상 최기원에게 밉보였다간 정말 끝이었다.

제대로 먹은 것이 없어 하수구로 멀건 침만 뚝뚝 흘렀다.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굽혔던 허리를 들자, 이미 세단은 대학동 도로 끝으로 사라진 뒤였다.

“아….”

위가 뒤틀리듯 아팠다. 누군가 빨갛게 달군 쇠꼬챙이로 배 속을 마구 휘저어 놓은 것 같았다. 격통이 이는 배를 감싸 안고 절뚝이며 강의동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이라며 인사하는 교수님의 인사를 멍한 표정으로 받았다. 교수님은 눈치를 보다 헛기침을 하며 수업을 시작했고, 나는 텅 빈 눈으로 전공 책을 펼쳤다. 빠르게 넘어가는 PPT와 교수님의 목소리, 그 어떤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강의 중간 교수님께서 몇 번이나 의견을 물었지만, 제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대고 말았다. 결국 교수님께서는 잠시 수업을 중단했다.

“백나언 군, 너무 어려운 내용일까요.”

“아니요…. 죄송합니다……. 질문이 뭐였어요…?”

“관계 예술로서 이 광고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겠냐고 물었어요.”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두루뭉술한 대답만 늘어놓는 나를 삐뚜름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교수님이 10분의 쉬는 시간을 주셨다. 아프면 휴게실에 가서 잠시 누워 있으라는 말도 함께였다. 나는 대답 대신 책상 위에 팔을 겹치고 이마를 묻었다.

경호원 새끼가 말하기 전에 먼저 최기원에게 말한다.

그 새끼가 말해도 최기원 앞에서 전혀 모르쇠로 일관한다.

최악의 가능성과 그에 따른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뒤덮었다. 경호원을 떠올리면 분노에 차 귀 끝이 발갛게 상기되었다가, 최기원이 알게 된 순간을 상상할 때에는 다시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식은땀이 났다.

그렇게 기억에서 휘발될 수업을 끝내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강의동을 나왔다. 나를 내려 줬던 바로 그 자리에 은색 세단이 정차해 있는 것을 보자마자 입술을 짓씹었다. 눈을 내리깐 채로 문손잡이를 당겨 뒷좌석에 올라탔다. 적당한 훈기로 가득 찬 차는, 아까와 달리 서서히 속도를 올리며 부드럽게 출발했다.

그렇게 집으로 가던 중, 멍하게 창밖을 내다보던 내 눈가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뭐야, 왜 여기로 가.’

세 번 정도였으나, 학교와 집을 오가는 길은 대충 눈에 익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차가 가는 경로는 평소와 미묘하게 달랐다. 내가 두리번대며 창밖을 부산스럽게 바라보자, 차의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그러고 싶지 않았으나 자꾸만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결국 차는 어딘지도 알 수 없는 한적한 공사장 부지에 멈췄다. 이미 피가 흐르기 시작한 손톱을 마구 문지르며 초조한 얼굴로 경호원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차에서 내려 내 쪽을 향하자마자 나는 좌석 위를 기어가 문고리를 잡아채려 했다. 하지만 한발 늦어, 문고리는 손끝에서 허무하게 빠져나갔다. 경호원은 문을 열고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경호원을 향해 따지듯 물었으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려 왔다. 그는 말없이 허리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조금이나마 멀리 떨어지기 위해 몸을 뒤로 물렸다. 등에 반대쪽 문이 닿고, 나는 그를 향해 빌었다.

“최기원이 저 어디 있는지 다 알아요, 제발…. 이러면 들켜요.”

경호원은 아무 대답 없이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성기를 꺼냈다. 그는 팽팽하게 발기한 것을 위아래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입 좀 빌려주십시오.”

“…….”

“제 부탁 들어주시면, 저 진짜 아무 말 안 하겠습니다. 조용히 그만둘게요.”

목 안쪽이 시큰거려 이로 입술을 짓이기며 고개를 푹 숙였다. 따뜻하다고 생각했던 히터의 훈기는 이제 갑갑하게만 느껴졌고 자꾸만 숨이 막혀 와 결국 나는 손을 들어 다시 목을 긁었다. 잇새로 불안정한 호흡이 제멋대로 뱉어졌다. 경호원은 서늘한 얼굴로 나를 자꾸만 재촉했다.

“얼른요, 더 늦어지면 사장님이 의심합니다.”

그가 손을 뻗어 내 뒷머리를 억세게 움켜쥐었다. 싫다는 말은 채 뱉어지지도 못한 채 얼굴이 그의 사타구니로 처박혔다. 버클에 코와 뺨이 찍혀 눈물이 핑 돌았다.

“오 분 안에 싸고 가야 하니까. 빨리….”

그는 다른 손을 아래로 뻗어 내 얼굴을 더듬더니, 닫힌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손가락이 입술 사이의 미세한 틈을 벌리고, 그 사이로 두툼한 성기가 비집고 들어왔다. 남성의 비릿한 향이 아래에서 훅 번져 오는 바람에 난 결국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하며 등을 들썩였다. 머리를 뒤로 빼려 애썼지만 두터운 손이 나를 가볍게 짓눌렀다.

성기가 자비 없이 곧장 목구멍 깊숙이 처박혔다. 그는 내 뒷머리를 꾹꾹 누르며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씨발 맨날 아닌 척, 싫은 척하면서도 결국은 다 하고 싶은 대로 하잖아요.”

“으욱, 욱, 쿠윽….”

“백나언 씨가 그렇게 구니까 후배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사장님도 그렇고…, 이렇게 휘둘리는 겁니다.”

제멋대로 경련하는 손을 뻗어 경호원의 허벅지를 밀고, 뒷머리를 짓누르는 손을 긁어 댔으나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그는 내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아 위아래로 흔들며 짙게 신음했다. 목 안까지 턱턱 찌르고 들어오는 성기 때문에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하, 으윽, 쿨럭, 우욱!”

“아, 진짜… 진짜 좋습니다.”

잠시 손을 멈춘 그가 고개를 젖히며 탄식과 같은 말을 뱉었다. 난 그사이에 입을 벌리고 미친 듯이 모자란 숨을 헐떡였다. 볼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리고, 그의 앞섶은 역류한 침이 범벅 되어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는 나를 기다린 그가 손으로 내 머리를 단단히 고정했다. 이제는 내 머리를 흔드는 대신 제 허리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천장을 죽 긁고 들어선 귀두 끝이 혀뿌리를 짓눌렀다. 귓가에 이명이 울릴 정도로 폭력적인 삽입을 그의 바지 자락을 붙들고 움켜쥐며 버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폐부가 찢어질 것같이 아려 오고, 깜빡깜빡 눈앞이 흐려지기 직전, 입 안에서 비릿하고 뜨끈한 액이 터졌다.

사정과 함께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지자마자 허둥지둥 고개를 들었다. 입 안에서 뜨거운 성기가 스륵 빠져나오며, 정액과 침이 범벅 된 액이 턱을 따라 흘렀다. 헐떡이는 동안 반은 삼켜 버린 정액 때문에 자꾸만 구역질이 일었다.

“우욱, 흐으, 으욱…….”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젖은 얼굴로 흐느꼈다. 경호원은 뒷좌석의 도어 포켓을 뒤적거려 물티슈를 꺼내 내 얼굴을 닦아 주려는 듯 손을 뻗었다.

나는 사나운 손길로 티슈를 낚아채 얼굴을 벅벅 닦아 냈다. 아무리 애써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고, 아무리 닦아 내도 비릿한 향은 더러운 낙인처럼 살갗에 스며들어 버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으로 미친 듯이 뛰어가 곧장 옷을 벗었다. 샤워 부스로 들어가 차가운 물을 그대로 쏟아부었다. 목구멍까지 칫솔을 집어넣는 양치를 몇 번이나 하고, 뺨이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세수했다. 샤워 코롱을 절이듯 뿌린 난, 팔에 코를 박고 행여 냄새나 흔적이 남지 않았나 확인했다.

최기원이 오기까지 세 시간이 남았다.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얼굴을 묻은 채로 손톱의 거스러미를 뜯었다. 조용한 방 안에서 따닥, 따닥 손톱이 뜯어지는 소리만 요란했다.

그나마 며칠 동안 다정했던 최기원이 갑자기 머리채를 잡아끌며 오늘 무슨 짓을 저질렀냐고 따져 묻는, 그런 끔찍한 상상이 자꾸만 시야를 어지럽게 했다. 바짝 긴장한 채로 세 시간을 바깥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눈에는 핏발이 서고 몸에 이유 없는 소름이 돋았다.

오후 7시, 최기원의 차가 차고로 들어오는 알람 소리에 맞춰, 개새끼처럼 1층으로 걸어 내려갔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평소대로….

몇 번이고 마음으로 되뇌며 현관 앞에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어 록을 누르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세련된 코트 차림의 최기원이 가죽 장갑을 벗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오셨어요?”

쿵, 쿵. 심장이 요동쳤다. 애썼으나 평소보다 더디게 그의 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앞머리를 깔끔하게 올린 최기원의 서늘한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나는 입에 고인 침을 삼키며 그의 회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최기원이 무감한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얼굴로 다가오는 손을 보며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는 순간, 손이 가볍게 턱 아래를 쥐었다.

“…….”

“…….”

최기원이 느리게 고개를 비틀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목 좀 그만 긁어요.”

이내 쪽, 소리와 함께 목덜미에 옅은 입맞춤이 내리고, 나는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입매에 희미한 미소를 매단 그가 휘적휘적 복도를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꾹 쥐었던 주먹을 풀어냈다. 손바닥엔 반달 모양의 손톱자국이 짙게 패여 있었다. 물밀듯 밀려든 안도감에 모래를 디딘 것처럼 발밑이 울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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